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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직한 역사를 위한, 나의 외침 원문보기 글쓴이: 이드
제국의 멸망과 기독교의 몰락
2012년 7월, ‘세계 기독교 대백과사전’을 편찬한 고든컨웰신학교 타드 존슨 교수는 제 7차 한인세계선교대회에서 “전세계 기독교 동향”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는 “1910년에는 전세계 기독교 인구의 66%가 유럽에 있었고 북미주를 포함했을 때 전체 기독교 인구의 80%가 미국과 유럽에 분포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유럽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66%에서 25%로 줄어들었고, 북미주도 12%로 다소 줄어 이제는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 기독교 인구의 40%밖에 구성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타드 존슨 교수가 제시한 지난 100년 간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 순위 조사 도표
타드 존슨 교수가 제기한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과 방향성 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하고, 그가 제출한 통계자료는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존슨의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는 북쪽(유럽과 북미주)에서 남쪽(아시아와 아프리카 중심)으로 남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00년간 보았을 때 기독교의 인구는 그렇게 증가하지 않았다. 전세계 인구증가율에 비추어 보았을 때 큰 변동이 없다. 보통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기독교인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믿는 인종의 변화다. 1910년 상황을 보면 66%의 기독교인이 유럽 사람이었으며 15%가 북미주 사람이었다. 즉 80%이상이 백인들이었다. 100년이 지난 후 66%를 차지했던 유럽의 기독교인은 25%만 남아있다. 15%였던 북미주 기독인들도 12%로 줄어들었다. 이제는 유럽과 북미주를 다 합해도 40%가 되지 않는다. 80%에서 40%로 감소한 것이다.
반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10년도에 아프리카에는 전체 크리스천들의 단지 2% 만이 살고 있었으나 2010년경에 이르러서는 22%가 되었다. 1980년 무렵에 상황이 역전됐다. 남반구 기독인의 수가 북반구 보다 많아진 것이다.
2010년 통계를 보면 기독인 수 10위권 국가 중 북쪽에 속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독일 밖에 없다. 2050년이 되면 북반구에 속한 나라는 미국 한나라만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그래도 10위권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아시아, 히스패닉 그리고 남미 등 제3세계에서 유입된 이민자 덕분이다. 백인들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점차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되고 있다.
2010년 현재 40%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서구권 기독교인의 수보다 더 주목받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서구 기독교인의 경우 대부분 명목상의 기독교인구이고 실제 교회를 나가는 인구는 극소수라는 점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구권 기독교인들이 전 지구촌에 차지하는 점유율은 40%에 훨씬 못 미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유럽 대부분 나라와 북미주의 교회 출석률은 1.0퍼센트에서 겨우 10퍼센트를 넘기는 수준이다.
제3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했던 백인들은 점점 기독교를 포기하고 있는데, 피선교국의 흑인, 황인종, 히스패닉 등 유색 인종들은 기독교를 주종교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기묘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있어서, 종교(기독교)의 영향으로부터 사회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점이나, 교회 제적 인원과 활동 인구도 종합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반면에 합리화와 세속화의 과정은 급속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는 20세기 초엽에는 획을 그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나아가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인간 이성에 기반을 둔 세속 종교와 신흥 종교 그리고 타종교는 성장한 반면 거의 2000년 가까이 향유하였던 기독교의 영향과 제도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로 치부될 정도가 되었다. 세속화 논쟁의 종교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논거를 제공해 준 최초의 인물은 더카임(뚜르갱, Émile Durkheim, 1858-1917)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적 현상으로 영향을 주는 종교 특히 기독교는 이제 쇠퇴할 것이라고 예단한 바 있다. 현대 사회가 각 부분마다 고도의 기술 집약적 사회로 통합되어 갈 때, 이 사회를 통합하는 축으로서의 종교의 중요성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베버(Weber)도 합리화(Rationalization)가 점진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통치 이념으로서 제도와 정치 그리고 문화의 가치와 이념의 논거를 주었던 기독교 이념과 신앙 체계는 20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이제 더 이상 설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기독교의 몰락과 제국주의와의 연관성이다. 수백 년 동안, 제국(Empire)이라는 말은, 서방에서는 오로지 그들 스스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나라에게만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독일 지역의 신성 로마 제국이나 후대의 러시아 제국이다. 물론 대영제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도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제국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더 넓은 정치적 연합으로 그것을 통합하는 군사적 강력한 상태의 결과로서 나타났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많은 유럽 국가에 식민지화라는 다른 모형으로 제국주의를 확대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태생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등 서구 기독교인들은 전도니 선교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적 통치 즉,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가담하였다.
그 실례로 가톨릭 선교사들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중남미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인디오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제하는 민족말살정책 실시로 가담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가난은 하늘의 뜻이며,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탈 정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설교를 늘어놓음으로써 민중의 아편 역할을 하였으며, 영국의 회중교회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처럼 국익을 위한 탐사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이『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진 제국의 규모와 함께 무기력한 기독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한 점을 든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해 준다.
제국주의시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의 폭력과 착취에 대해 후진국을 식민지화 시켜 발전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하였다. 식민지내에서는 자국보다 강한 국가, 세력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대주의로 제국주의가 정당화되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종식이후 제국이 된 즉,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가 된 미국에서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인종청소, 이라크 전쟁처럼 다른 민족을 폭력으로 말살하거나 지배하는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이용한다.
실례로 미국의 기독교 우파들은 청교도들의 이주 시기에서부터 미국을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민족같은 성서적 백성이라고 이해함으로써,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행하는 폭력을 가나안 정복전쟁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전쟁은 민중들이 지배계급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벌인 민중운동을 뜻하는 것이지, 미국의 제국주의와 그로 인한 폭력으로 인해 약소국 민중들이 겪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런 것은 아니어서 실제 이라크 전쟁 당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성서의 평화주의와 살인금지에 근거하여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거나, 장로교 목사가 이라크 전쟁을 비평하는 설교를 한 사례들이 있다.
제국주의는 약한 세력들을 힘으로 정복하고 지배한다. 제국주의의 이념은 승리다. 제국주의의 삶의 양식은 소유다. 소유양식에 의해 지배되는 제국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인데 제국주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제국주의는 낯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낯선 것이 없으면 변화될 수 없다. 타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배타적 교리의 위험이 결국 스스로 멸망하는 족쇄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기복신앙과 승리주의에 빠져있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선진화된 미국과 유럽, 그리고 로마제국을 가리켜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아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럽이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한 인문주의가 기독교의 자리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였고,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점령으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중세시대는 반이성적인 무지에 기초한 암흑의 시대였음을 서구인들은 잘 알고 있다.
로마제국은 어떠한가? 기독인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서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뒤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실,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기 훨씬 이전부터 강력한 대제국이었다.
그런 강력한 로마가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서시 392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포한 뒤 브리튼 섬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고, 갈리아 지방에는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침입하였으며, 에스파냐는 수에비족·반달족 등에게 점령되었다. 410년에는 로마시가 알라리크 1세(재위 395-410)가 인솔한 서고트족에게 점령되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지 18년 만에 로마가 점령당한 셈이다.
로마가 몰락한 이유로 F.페트라르카는 로마의 전성기를 공화정기의 스키피오 시대로 보고, 카이사르의 독재와 자유의 상실을 몰락의 전조로 보았다. E.비온도는 '로마제국의 몰락에 대해서'라는 저서에서 몰락의 시기를 고트인(人)의 로마시(市) 침입에서 구하였으며, 그것은 412년 9월이라고 연대적 규정을 내려 몰락의 내적 ·외적 원인을 구명하였다.
N.마키아벨리는 폴리비우스의 ‘정체순환설(政體循環說)’을 계승하여 로마몰락의 원인을 자유의 찬탈자 카이사르에게서 찾는 한편, 카이사르 이전의 옛 질서에의 복귀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쇠망으로부터의 구출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결합하였다. 종교 개혁기에 C.켈러는 고대사의 끝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망 시점으로 보았고, 중세사의 끝을 1453년까지로 보는 시대구분을 정함으로써 로마몰락의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공화정시기에 번영하였고, 독재적인 황제가 등장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유일신사상과 독재정치의 폐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재정치를 하기 위해서 로마황제는 사회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상이 필요했고, 로마황제는 기독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종교 국가치고 살만한 나라가 없다!"라고 단정할 수 있다. 기독교는 물론이려니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어떠한 종교도 국교가 되거나, 한 가지 종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는 낙후되기 마련이다. 종교국가치고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국가는 전무하다. 군사정권하에서 반대자를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붙였듯이, 반대자는 '이단자'로 몰아붙일 것이다.
이 점은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소련이 망한 것도 북한이 어려운 것도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다원주의를 거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요인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맹종하는 미국과 한국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간의 만남으로 인해 사회는 발전한다. 그러나 단한가지의 사상이 '진리'로 규정된 사회는 그 폐쇄성으로 인해 몰락을 걷는다. 정반합의 원칙에 의해 과학이라는 것은 반대의견이 나오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래도 살만한 나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념면에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허용되었고, 배타적 종교인 기독교의 독선을 포기한 대가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복지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토양 아래선 제국주의는 자연히 소멸되기 마련이다.
제국속의 반전운동
미국이 문제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변했다. 하지만 유달리 미국만은 그대로다. 마치 전쟁중독에 걸린 것처럼 미국은 군사패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호전성을 시위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이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에게 한 해의 수확과 신의 은총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미국의 국경일이다. 1621년 가을 플리머스의 총독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수확의 풍요함을 감사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축제를 3일 동안 열고 근처에 사는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초기의 개척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의 역사는 또한 백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와도 함께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는 댄 브룩(Dan Brook) 교수는 인터넷 잡지 ‘카운터 펀치’에 기고한 ‘학살을 경축하며’(Celebrating Genocide!)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마다 많은 사람들은 속을 꽉 채운 칠면조 요리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한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경축일이다.…신성한 이 날, 미국인들은 가족이 함께 모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학살을 경축하기 위해 칠면조를 학살한다. 그런데 우리는 진심으로 이 날을 경축해야 하는가?…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손을 도끼로 자르고, 여성들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임신한 배를 갈라내고, 아기를 공중에 던져서 땅에 떨어뜨리거나, 칼이라는 이름의 그 이상한 빛이 나는 물체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 문명화,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우리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느껴야 한다.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가 우리와 타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며, 추수감사절과 같은 우리의 전통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한다. 나의 개인적인(따라서 정치적인!) 새해 결심은 학살을 경축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신성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모욕적인 날이다.》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 가족 혹은 친지들과 즐겁게 담소하며 기름진 칠면조 요리를 즐기는 동안 현재 그들의 안락함이 원주민을 학살한 토대위에 이루어진 부산물이라는 것을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는 미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원주민들이 그들의 조상을 기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줬던 은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댄 브룩이 지적한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미국 백인들의 선조들이 은인들을 배신하고 학살한 대가로 오늘의 풍요를 이룬 것을 경축하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비참한 역사의 배경 아래 태어난 추수감사절이 한국의 기독인들에게도 성대한 명절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목사들은 한국의 2대 명절인 설날과 추석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대신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 부활절을 손꼽아 기다린다. 교인들이 감사헌금을 즐거이 내는 한국 개신교의 4대 축일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그 은혜를 물질로 표시하는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은 문화침략의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한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을 모욕적인 날로 여기는 댄 브룩 같은 이들이 소수라도 존재하다는 점이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물론 미국과 미국인들 사이에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기류는 전쟁에 대한 지지세가 지배적이다. 아프가니스탄 침략 전쟁 당시 미국 미디어들은 미국인들 중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80%, 90%라고 보도했다. 정치, 경제, 스포츠, 문화예술 등 각종 행사에서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 승리를 바라는 발언과 순서들이 잇따랐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인권 및 종교단체,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가 등을 중심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음도 엄연한 사실이다.
미국 36개주 150개 대학의 반전론자들은 워싱턴에서 전쟁 없는 정의를 요구하는 반전집회를 열었으며,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무정부주의 노선을 표방한 ‘반자본주의 집중’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갖고 시내에 있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건물로 가두행진하면서 반전구호를 외쳤다. 동부 뿐 아니라 미 서부의 주요도시인 LA,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시에서도 반전시위는 거세게 일어났다.
미국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반전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의한 제3세계 침략이 벌어지던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반전운동은 주로 사회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진행됐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와 자유주의세력 그리고 현재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단체, 녹색당, 사회당과 공산당과 같은 좌파정치세력, 인권옹호단체, 생명 중시의 종교조직 등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반전운동 흐름을 보면 유럽이 선도하고 있지만, 이 글에선 제국주의 본국인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지난 반세기 동안 평화, 정의, 민주주의를 위한 주장을 펼쳐 왔고, 미국에서 노동운동에서부터 남부의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회 운동에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한 하워드 진의 견해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미국 반전 운동의 전통을 미국 독립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는 “미국 군대 내에서는 장교들에 맞서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우와 장교들이 누리는 사치를 보면서 전쟁의 계급적 성격에 분개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큰 계기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멕시코 전쟁이었다. 멕시코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가운데는 아일랜드 출신 이주민 외, 전쟁 직전에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다수의 아일랜드 출신들이 여단을 조직해 멕시코와 손잡고, 오히려 멕시코 편을 들어 미국과 싸웠다는 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전쟁에 대한 환상이 깨지며 항명과 탈영 사태가 다수 발생했다는 것은 이 전쟁의 부도덕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남북전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 전쟁은 노예제도에 맞서는 전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북부의 산업과 금융 체제의 지배력을 확립하고 미국을 수익성 있는 단일 시장으로 다지기 위한 전쟁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예제 폐지라는 도덕적 요소가 들어간 남북전쟁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노동 계급 대중은 그 전쟁의 계급적 성격에 불만을 품었으며 부자들이 3백 달러를 내고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이 때문에 뉴욕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징집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봉기 가운데 하나였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 초기에는 미국의 군함 메인 호가 쿠바의 아바나 항에서 스페인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거짓말에 많은 미국인들이 속아 넘어가 반(反)스페인 히스테리가 들끓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찍 끝나버렸기에 반전 운동이 성숙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한편,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 뒤이어 필리핀에서 일어난 전쟁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됐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발전했다. 반제국주의 동맹은 마크 트웨인을 비롯해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이 주도했다. 동 단체의 부회장이었던 마크 트웨인은 1900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미국이 필리핀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복을 목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제국주의자이다. 나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미국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더렵혀진 깃발아래 불명예스런 총사(銃士)로 전락하여 다른 나라로 송출되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흑인 병사들의 탈영이 속출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필리핀 편으로 넘어가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싸웠다. 흑인 병사들은 백인 장교들보다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더 큰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반전 운동은 필리핀 전쟁을 끝장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매우 강력한 반전 운동이 존재했다. 특히 사회당의 활동이 두드려졌다. 전쟁이 끝나자 처음에는 전쟁에 찬성했던 사람들조차 커다란 환멸감을 느꼈다. 1920년대에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더스패서스 등의 작가들이 많은 반전 문학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은 전쟁이 과연 인류에게 무엇인가 하는 의문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를 반대하는 명분으로 인해 평판이 좋았던 전쟁으로 여길 수 있다. 남북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전쟁을 주도한 사람들의 가증스러운 동기는 도덕적 명분에 가려졌다. 히틀러와 파시스트 세력이 유대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의 동기는 파시즘을 응징한다는 숭고한 대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히틀러와 대립했던 서구 열강들 또한 히틀러 못지않게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도 패권을 추구했으며 일본과 독일이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침투하는 것에 분개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 약 6천 명의 미국 시민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우기를 거부한 죄로 감옥에 갔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전쟁의 도의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미국인의 의식 속에 제2차 세계대전은 아직까지 “정당한 전쟁”으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그러한 회의는 그다지 광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회의론자는 분명히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회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에서 비롯했던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일의 드레스덴 시를 폭격하여 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밖에 수많은 민간인들을 폭격했음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이 히틀러, 일본 그리고 무솔리니의 패배로 끝났는데도 인종주의와 독재, 침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전운동은 미국에서는 지난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조직적으로 전개된 반전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기록된다. 최초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적으로 보고 그 공산주의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가는 위협을 막아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그러한 행동은 미국헌법, 국제연합헌장, 국제법, 국제조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미군 사망자가 속출함에 따라 그 의문은 높아 갔다.
지식인들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합법성에 대하여 조사, 분석하는 위원회를 조직했고 1965년 봄,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R. A. 포크를 위원장으로 하여 설치된 미국의 베트남정책에 관한 법률가위원회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의회에서는 정부의 베트남정책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으며, 미디어에서도 갖가지 공개토의가 진행됐다.
이 와중에 북폭이 강화되어 고엽작전과 양민학살 등의 진상이 밝혀짐에 따라 반전운동이 확산되었고 결국 유혈충돌로까지 이어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69년 10월 15일을 베트남 반전의 날로 정하여,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베트남 반전통일행동이다.
이 반전운동은 그해 11월, 12월에도 계속되었으며, 1971년 6월에도 일어났다. 또 베트남전선으로부터의 탈주병을 숨겨주거나 국경을 초월하여 보호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 와중에 펜타곤은 베트남전의 전모에 대한 47권이나 되는 방대한 미국방성 비밀보고서(펜타곤 페이퍼)를 정리하였는데 이것이 뉴욕 타임스를 통해 폭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이 복합적으로 전개되면서 미국 내 반전분위기는 극에 달해 결국 미국은 베트남으로부터의 철수를 결정하게 됐다.
미국 땅으로 되돌아온 병사들 가운데 다수가 전쟁을 반대하게 되고 ‘전쟁에 반대하는 참전 용사들’ 같은 조직을 건설하면서 우리는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1966년에는 미국인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전쟁을 반겼던 반면, 1969년에 이르러서는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전쟁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말로 극적인 반전이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처음으로 정부의 정책을 좌우할 정도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펜타곤 서류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부 내부 문서들을 읽어보면 이러한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펜타곤 서류는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금지된 서류였지만 1971년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압력으로 공개됐다. 문서들을 보면 정부가 반전 시위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탈영, 징집 거부, 학군단 지부 점거 등 일반적인 반전 분위기에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하기 몹시 힘들었다는 사실이 잘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해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부의 거짓말을 사람들이 꿰뚫어 볼까 봐 겁나서 그러는 것이다. 부시는 미국이 9월 11일 테러 공격의 표적이 된 이유는 “극렬분자”들이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못마땅해 한다.” 이런 류의 단순한 설명은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편리한 설명이다. 그렇지만 테러리스트 자신들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미국 정부가 국내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외부에서 하는 일이다.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 UN 추산에 따르면 약 1백만 명의 이라크인을 죽게 만든 대(對) 이라크 경제 봉쇄 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분개하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오사마 빈 라덴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비록 종교적인 수사를 남발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에는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이스라엘 편을 들며 이라크에 경제 재제를 가하는 것에 대한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만행은 계속해서 언급된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경제를 봉쇄하기 전에는 빈 라덴이 누구 편이었던가? 1991년 이전에 빈 라덴은 미국 편이었고 미국 또한 라덴과 손잡고 아프가니스탄의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당시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라덴이 미국에 등을 돌린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미국 내의 민주주의나 자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미국의 대외 정책의 전환점과 일치하며 그 전환점은 1991년이었다.
과거 베트남전쟁 때도 그렇지만 현재도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논리와 신념을 몇 가지로 정리해 내세운다.
첫째, 법에서 벗어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것보다도 국제법규를 준수하는 것이 국가이익이 된다는 것이고
둘째, 미국의 정책이 잘못되어 있고, 국제법에 위배된다면 이를 지적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이며
셋째, 정부가 불법행동을 취할 때는 반대하는 것이 애국하는 일이라는 신념이다.
마지막으로 연방정부가 전쟁종결의 방도를 찾아낼 수 없을 때는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 등이다.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반전운동이 국민들 다수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지만 향후 전쟁에서 미군의 사상자가 늘어나면 수면 하에 있던 반전운동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지적했지만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관여했지만 미 본토가 침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 반전운동의 한계다. 하지만 전쟁을 혐오하며 전쟁이야말로 인류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믿는 소수의 힘은 조금씩 그 힘을 키워가고 있다.
서양 속담에 “여섯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다.”라 는 말이 있다. 사람이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00여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00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00명에 각자 300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700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 명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에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인 셈이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할까?
이렇게 세계가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있는데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존재들이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진정으로 테러를 종식하고 미국 국민이 편안하게 중동의 고대 문명 유적지를 활보하고 미국 국민과 이라크 인이 서로 웃으면서 축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테러를 막는 근본적인 길은 이라크에 폭탄 대신 구호식량을 떨어뜨리고 경제 봉쇄를 푸는 것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300억 달러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며 기초 건강관리를 하며 교육을 받는 등 인간적인 존엄성을 유지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영구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더도 덜도 말고 300억 달러면 전 인류가 기아에서 벗어나는데 그 서른 배에 달하는 9,000억 달러를 이라크 인을 살상하는 데 퍼부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제 전쟁을, 학살을 중지시켜야 한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평화와 공존의 미래를 위해, 피와 살육의 광란으로 몰고 가는 야만적인 세력들과 맞서야 한다. 미친놈이 총을 난사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면 사람들을 살리는 길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친놈에게서 총을 빼앗는 것이다. 미국이 도덕적 권위와 민주주의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의 가슴이 100% 악과 증오로 채워지기 전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평화의 싹들을 키워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자. 상대방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평화와 사랑의 싹들을 틔우도록 하자. 이것이 인류를 살리는 길이자 애국심과 증오의 광기에서 미국 시민을 구하는 길이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메시지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소수가 아니라 조만간 다수가 되리라 확신한다.
명분 없는 멕시코 침략 전쟁에 자신의 이름으로는 결코 세금을 사용하지 말라며 감옥까지 들어갔던 헨리 쏘로우(Henry D. Thoreau)는『시민 불복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수에 속할 때 소수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온 몸을 던져 다수의 횡포를 막을 때 그 소수의 힘은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이 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구럼비를 사랑하는 사람들
미국이 제국주의의 상징인 하와이,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한 것은 1898년에 와서야 가능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과 반제주의자들 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미국-스페인 전쟁 보다 거의 10년 앞서 시작되었고,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논쟁은 1890년대 전반을 통해서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반제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주장할 공식기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마침내 1898년 여름에 전국 주요 도시들에서 ‘반제국주의동맹(Anti-Imperialist League)’이 창설되어야 한다는 공식적인 의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반제동맹은 여성과 흑인을 포함하여 50만에 가까운 회원을 갖고 있었지만, 전형적인 반제주의자들은 백인이자 Anglo-Saxon系 Protestants였고, 상류층 출신이며,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강렬한 신념을 지닌 자들 이었다.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는 그들 중 대다수가 법률가·교수·언론인·성직자 등의 전문 직업인들 이었다. 특히 법률가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는데, 52명중 25명이 법률가였으며 이들의 풍부한 법률 지식은 제국주의자 진영의 주요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부족한 부분이었다.
또 식민지인들을 전도하여 개종시킨다는 목적 하에 여러 교회집단들이 제국주의를 지지하고는 있었지만, 반제동맹 임원들 중에는 포터(Henry C. Potter, 뉴욕 감독주교), 파크허스트(Charles H. Parkhurst, 장로교 목사), 바콘(Leonard W. Bacon, 회중교회 목사)등 저명한 성직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반제운동은 특히 대학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미국 반전 운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동맹의 성립 과정을 간략히 소개했다. 가해자인 미국의 반전운동이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졌고 점차 그 힘이 커지고 있지만, 정작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경우, 반전운동은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반전운동은 노무현 정권 때인 이라크 파병반대운동이 최초의 반전운동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동안은 언급할 필요가 없고, 베트남 전쟁 때도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반전운동을 못했고, 1991년 걸프전 때는 서총련이 시위를 주도하고 선전물을 만들었던 정도였다. 200명 정도가 신촌에서 시위를 하긴 했으나, 했다는 것 자체가 의의였다. 이라크 반전운동은 대중적인 최초의 반전운동이다. 개전일 날 8천 명 정도가 모였고, 김선일 씨 죽음 이후에는 1만5천 명까지 시위에 모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는 참여정부 때 그나마 존속했던 국민행동과 만민공동회 등의 단체와 조직도 대부분 와해되어버렸다. 그래도 조그만 불씨는 남아 있다. 바로 제주도 강정마을이다.
《예부터 ‘물’이 좋아 일강정으로 불리던 서귀포시 강정마을. 2007년 해군기지가 들어서기로 한 이후 이 조그만 마을은 주민들끼리 찬성과 반대를 두고 서로 등을 돌리며 공동체가 무너져 내렸다. 해군기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곳 주민들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이렌이 울려댔고, 밭에서 일하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호미를 내팽개치고 공사현장으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얼마 전 구럼비 바위 발파가 시작되면서 이들의 삶은 더욱 아비규환으로 치달았다.》
제주도의 한 지역신문에 실린 기사다. 거주 인구가 2,000명이 채 되지 않는 이 조그만 마을은 현재,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유명한 곳이 되었다. 강정에는 구럼비 바위가 있다.
'유네스코 제주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Matthew Hoey의 '강정마을'
2012년 3월 7일 11시 22분,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는 해군과 정부는 기어이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구럼비 바위를 지키자!"는 구호가 핫이슈가 되자 제주해군기지를 찬성하고 지지하는 쪽에서 구럼비 바위는 신성한 바위나 특정한 바위가 아니며, 까마귀쪽(구럼비)나무의 제주 방언일 뿐이라고, 일명 '신성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제주에서 흔하디흔한 나무, 가꾸지 않아도 잘도 자라는 까마귀쪽나무가 많이 자라는 해안이다 보니 거기서 '구럼비'라는 이름을 따온 것인데 그 바위가 뭐가 그리 대수냐는 것이다. 마치, 구럼비 바위도 까마귀쪽나무처럼 흔하디흔한 것처럼 말이다.
해군 제주기지사업단장이 말한 것처럼 ‘구럼비 바위’는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위며, 일반 해안 노출암을 뜻하는 보통명사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왜곡된 정보를 보통의 시민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음모의 일환일까?
사실 ‘구럼비’라는 발음은 육지 사람들에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하지만 이제는 친숙하게 되어버린 이 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하자. 해군 제주기지사업단장의 공고문 중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를 뜻하는 제주방언으로 ‘구롬비’, ‘구룬비’라고도 불립니다. 까마귀쪽나무는 제주도, 울릉도, 남해안 섬에서 자생하는 늘푸른작은 키나무를 말합니다. 제주도에는 195Km에 달하는 대부분의 해안이 바위로 형성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위 인근에는 구럼비나무, 즉 ‘까마귀쪽나무’가 자생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맞다.
하지만 그 뒤의 말 즉 ‘구럼비 바위’가 보통명사라는 주장은 명확한 오류다. ‘구럼비’가 제주에서 흔한 보통의 바위라면「강정향토지」(1996,강정마을회),「제주토속지명사전」(1992,민음사),「서귀포시지명유래집」(1999,서귀포시),「제주어사전」(2009, 제주특별자치도) 등 향토관련 전문지에 특별히 소개되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이곳저곳에 ‘구럼비’라는 지명이 제주도 전체에 흔하게 등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구럼비’라는 지명은 제주토속지명사전, 서귀포시지명유래집 단 두 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위치는 두 책 모두 강정마을을 지칭하고 있다.
‘구럼비’라는 표현은 강정마을에만 등장한다. '구럼비 바위'가 제주전역에 흔하게 보이는 까마귀쪽나무가 자생하는 일반 해안 노출암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말한 것은 명백한 거짓임을 이 두 권의 향토사전문지가 증명해주고 있다 ‘구럼비’라는 지명은, 그리고 ‘구럼비 바위’는 강정에만 있는 특정 장소를 뜻한다. 보통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라는 뜻이다.
강정마을 향토 전문가이자, 마을회 노인회장인 김정민 씨는, 해군기지사업단의 설명은 순 엉터리라며 ‘구럼비 바위’는 “구엄부→구렴비→구럼비” 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하며 상기 인용 자료의 신빙성에 보탬을 주고 있다.
사실 ‘구럼비 바위’는 대단히 특별한 바위다. ‘구럼비’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지형으로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우리나라의 자연유산이다. 또한, 바위에서 용천수가 솟아나는, 국내에서 유일한 바위 습지지대로 생태학적 보존가치가 무척 높은 곳이기도 하다. 바닷가 바로 근처에 있는 ‘구럼비 바위’에서 생성된 물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담수라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현상이다. 특히 구럼비 바위는 조각난 듯싶지만 한 덩어리의 바위로 그 길이가 무려 1.2Km에 달한다.
그리고 제주도의 여느 화산석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용천수가 있어 서식하는 동식물의 다양성도 남다르며, 무엇보다도 다른 화산석처럼 날카롭지 않은 부분들이 많고, 검은 바위 사이에 황토색이 점점이 들어있는 바위며, 잘 자란 표고버섯의 무늬마냥 갈라진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만이 아니라 어쩌면 지구촌의 유일한 바위일수도 있는 것이 제주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다.
구럼비 바위가 세계자연유산도 생물권보전지역도 아니라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말은 사실이다. 참고로, 도내 환경단체나 강정마을 주민들이 구럼비 바위를 세계자연유산이라거나 생물권보전지역이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다만, 강정마을 앞바다에서 범섬 인근까지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환경운동가들은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생물권보전지역에 서식하는 희귀생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구럼비 해안에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와 맹꽁이가 서식하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태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해군기지 공사를 멈춰야한다고 주장해왔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횡포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둔갑시키고, 절차를 무시한 여론조사를 앞세워 주민들의 의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환경 훼손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문제가 강정마을 사건이 보여주는 주제의 하나라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담론은 또 다른 큰 주제다. 군사전문가들은 강정해군기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강정위치가 해군기지를 보호할 부대시설 및 관련시설을 배치하는데 적합한가?
둘째, 강정위치가 류큐에서 제주도, 제주도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호송로를 방어하는데 적합한가?
셋째, 적 공군세력 및 적의 기습공격에 강정위치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전문적 군사문제에 대해선 이 글에서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대부분의 군전문가들이 부정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린다. 강정 문제에 대해서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해외의 시각이다. 특히 우리 해군의 전략기동함대 둥지가 주목적이 아니고 핵 항공모함이 들락거리는 미국의 해군기지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미국 내 언론의 반응이 궁금하다. 미국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뉴욕 타임즈와 CNN은 강정마을 사건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먼저 CNN 차례다. 개척가이자 개혁가, 여성운동가이며 여성미디어 공동발기인이기도 한 글로리아 스타이넴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지금 누가 이 기지를 세우려고 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들어가서 보면 이 기지는 대한민국의 기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 기지의 기술적인 체제는 안티볼릭 미사일 구조라고 불리는 우리 미국의 것이고 이 기술은 우리 미국 공중위성들에 의해 의지되는 구조입니다. 만약 궁금해서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이 기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벌써 어떤 기자가 경험한 일이지만- 그 대사관에선 ‘우리에겐 전화하지 말라. 미 국방성으로 전화를 해라’ 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있다면 이 모든 일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력적인 군사적인 전략적 노력에 의해서 중국을 경계하기 위한 기지설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되는 겁니다.》
대한민국 대사관은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미 국방성의 소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뉴욕 타임스의 기사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 2011년 8월 5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 섬에 필요 없는 미사일”이라는 제목으로 크리스틴 안이라는 기자가 서울발 기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이 마을은 중국을 둘러싸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일부가 될 해군 기지 건설을 결사반대 하는 격렬한 저항 운동이 일고 있는 곳이다.…내가 제주 해군 기지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려고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에 전화하자 "우리에게 전화하지 마시고, 미국 정부나 국방부에 전화하세요, 그들이 우리보고 기지를 건설하라고 압박하는 것입니다." 라고 응답했다.…》
모든 것이 확실히 들어났다. 군사전문가들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강정에 해군기지를 무리하게 서둘러 건설하고 있다는 지적은, 미국의 NMD 전략의 일환이라고 보면 대부분의 의문이 풀리게 된다.
미국 국가 미사일 방어(United States national missile defense, USNMD/NMD)는 적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으로부터 국가의 모든 영역을 방어하는 군사전략과 그와 관련된 시스템을 말한다. 왜 제주에 미국의 군사기지가 들어서야만 하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지금 강정에는 많은 시민들이 강정의 문제를 풀기 위해 장기거주하고 있으며,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 육지와 제주를 오가고 있는 중이다. 전쟁을 혐오하며 군사패권주의를 배격하는 작은 불씨들이다.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이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투쟁하고 있는 점이다. 죽음을 무릅쓴 단식 그리고 100배 시위 등이 이들의 주요한 투쟁 방법론이다. 이들의 의로운 움직임은 제국 속에 있는 한국의 현실을 극복케 하는 희망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