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의 도리 아는 것 중요”
깨달음에 가려면 ‘상(相)’ 없애야
평생 선원 만들어 ‘명안종사’ 배출 서원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회초리 3개를 가져와서 1000대를 맞으면 얘기해 주겠습니다. 방귀를 끼어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가진 납자들이 오면 춤을 추겠습니다. 깨달음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애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에서 정진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상(我相)은 자아에 대한 고집을, 인상(人相)은 인간에 대한 고집을, 중생상(衆生相)은 중생에 대한 고집을, 수자상(壽者相)은 수명에 대한 고집을 말한다. 중생들이 갖고 있는 ‘상’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다.
대중법문을 하고 있는 성수스님.
-화두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禪)은 누가 일러줄 수 없는 자오자득(自悟自得)의 길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화두를 탄 일이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새벽 별을 보고 대각을 이루었는데, 싯다르타가 새벽 별에게 화두 달라고 마음 낸 일도 없고, 새벽 별도 화두를 준 일이 없습니다.
화두는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지엄선사가 화두를 하나 받기 위해 벽송선사에게 10년을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들여도 화두를 일러주지 않자 하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우레 같은 항의를 하며 울고 돌아서 내려가는데, 벽송선사가 ‘지엄아, 지엄아!’하고 부른 데서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화두로 깨달은 게 아닙니다. 지엄선사가 간절한 마음을 내도록 해 준 벽송선사가 진정한 선지식입니다.”
스님은 “화두를 받으러 오는 대중은 많지만, 견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목을 베어가도 좋다”고 했다. 도(道)가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십년을 공부해도 모른다는 것이다. 스님은 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도 도인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남의 다리 긁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스님은 “교리나 화두라고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죽고 사는 근본문제, 그 생사의 도리 자체가 화두이고,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본 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수스님은 시간이 날 때 책을 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여러 선지식들과 함께 공부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스님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봉암사 결사가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성철스님이 봉암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성철스님은 무턱대고 열심히 닦으라고 했습니다. ‘일념(一念) 하라’고만 해요. 그래서 스님 멱살을 잡고 ‘일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닦으라고 해라’고 대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성철스님이 ‘억!’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시 봉암사에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다시 해인사로 갔습니다. 그 후 성철스님은 봉암사 결사에서도 만나고 해인사 선원에서도 만나고 그랬습니다.
설봉스님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어느 날 부산 금수사에 들렀더니 한 노승이 빨간 홍가사를 입고 법문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법문을 잘 하길래 ‘현재 하신 법문이 당신 거요, 남의 거요?’라고 물었습니다. ‘내 것도 무진장인데, 남의 재산 탐하겠소?’라고 해요. 그래서 다시 ‘누더기 속의 옥동자로구나’라고 했더니 스님이 ‘요즘 선방에는 밥값 하는 중이 있구려’라며 웃었습니다. 그 노승이 바로 설봉스님입니다. 설봉스님은 내가 참석한 법회에는 2시간 이상 열변을 토했지만, 내가 없으면 딱 10분만 하고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분이 현칙스님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학교 교장을 하다가 오대산에 찾아가 한암스님에게 덤벼들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한암스님을 깨부수기는커녕 감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했습니다. 내원사에서 현칙스님을 만났었는데, 그때 철이 좀 든 것 같습니다. 허허. 현칙스님에게 겸손함과 마음 씀씀이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봉암사 결사 때 입승을 했던 보문스님이 많이 생각납니다. 보문스님은 13살 때 한암스님을 찾아가 도를 물었을 정도로 타고난 천재였습니다. 법당에서 법문을 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3살 때부터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10년을 했다는데, 염불을 참 잘했습니다.”
서울 법수선원 대웅전 모습.
-법수선원, 해동선원, 황대선원을 세우셨습니다. 많은 도량을 세운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 ‘묵은 땅에서는 새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73년 서울에 법수선원을, 1994년에 황대선원을, 2002년 산청에 해동선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선원을 세우는 것은 경봉스님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40여 년 전이었습니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이 ‘명인도사가 쉽지 않고 흔치도 않은데 자네가 금년 내로 50년 지도한 결과를 내 보이라’ 하면서 등을 세 번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명안종사를 배출하는 선원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고 불사를 해 온 것입니다.” 3곳의 절 모두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선하는 재가자들로 항상 붐빈다.
-1967년 조계사 주지를 하면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조계사 신도회장으로 임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계사 주지를 맡고 나서 김현옥 시장을 찾아가 ‘경상도 무지랭이 일 좀 해봅시다’라며 회장을 권했습니다. 김 시장은 ‘서울시장이 신도회장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어요. 내가 ‘당신이 신도회장을 해야 서울 시내 구청장을 부회장으로 앉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고 했더니 ‘그 말이 맞다’며 회장을 수락했습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에 3만개의 빵을 구해 서울시내 111개 양로원에 1만개를 나눠줬고, 1만개는 조계사를 찾는 불자와 국민들에게, 나머지 1만개는 서울역에서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범어사 주지 시절 강원 졸업생들과 함께 한 모습. 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성수스님. 그 오른쪽 옆은 고산스님이다.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생활 원칙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절대 눕지 말 것, 많이 먹지 말 것, 새벽 예불에 반드시 참여할 것, 휴지 한 장도 아낄 것, 잡기에 손대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서울 법수선원 주지 영주스님은 “은사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법거량을 받아주며, 경책하고 탁마하는 법문을 많이 내리신다”며 “실천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많기 때문에 후학들이 정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예전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으시다”고 전했다. 영주스님은 또 “은사스님은 지금도 매일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9시에 주무실 때까지 허투로 시간을 낭비한 적이 결코 없다”며 성수스님의 철저한 일상생활을 전했다.
황대선원에서 정진 중인 재가불자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성수스님.
-스님과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람의 몸 한번 받는 것이 사천(四天) 위에서 바늘을 떨어뜨려서 사바세계에 겨자씨를 꽂히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우리는 모두가 다해야 합니다. 늙은이는 늙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젊은이는 젊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이 귀중한 몸을 아무렇게나 내던지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소중한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이 보물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참된 정신입니다.”
성수스님은 그러면서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에게 법을 구하던 그런 자세가 요즘 스님과 불자들에게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법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붓글씨를 쓰고 있는 성수스님.
혜가스님은 선종의 2조로서, 초조인 달마대사에게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 구법(求法)의 의지를 보였던 스님이다.
내용은 이렇다. 혜가는 소림사에 와서 매일 법을 물었으나 달마대사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혜가는 달마대사의 방문 앞에서 밤새 눈을 맞으며 꼼짝도 않고 날을 새웠다. 이윽고 동이 트고 꼼짝도 않고 있는 혜가의 모습을 발견한 달마대사가 물었다. “너는 눈 속에 서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혜가는 꼿꼿이 선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바라옵건대 감로의 문을 활짝 열어 뭇 중생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이에 달마대사가 말했다. “부처님들의 위없는 지혜는 여러 겁을 수행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너의 작은 뜻으로는 큰 법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혜가는 즉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 앞에 놓았다. 그때서야 달마대사는 입을 열었다. “여러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법을 구할 때 육신을 육신으로 보지 않았고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았다.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법을 구할 만 하다.” 이렇게 해서 혜가는 달마대사의 제자가 됐다. 혜가는 달마대사에게 여쭈었다. “저의 마음이 불안하니 부디 제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했다.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 마땅히 편케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찾아지면 그것이 어찌 너의 마음이겠느냐. 나는 벌써 너의 마음을 편케 해주었느니라.” 달마와 혜가의 안심법문(安心法問)이다. 이렇게 두 선지식에서 시작된 선종의 법맥(法脈)은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성수스님이 황대선원 법당에 들러 참배하고 있다.
-공부를 하면 무엇이 좋습니까?
“공부를 하면 견성(見性)할 수 있습니다. 견성을 하면 정신을 잃지 않게 됩니다. 몸과 정신이 맑아지니, 견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인간은 천지 차이입니다. 견성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길을 찾는 것’입니다. 견성한 뒤에는 정진을 해야 하고, 그러면 힘이 생깁니다. 공부는 말만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체험해야 합니다.”
-종단의 원로로서 종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 법을 그대로 실천 수행하면 현재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되고,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도 마음이 어지럽고 흐트러지면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한마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알고 무릎을 치면 산과 들이 모두 내 것처럼 반갑습니다. 부처님은 49년을 설하고 ‘설한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도는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글 밖의 도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포행에 나선 성수스님이 황대선원 경내를 거닐고 있다.
불법(佛法)의 도리를 제대로 알 때 마음도 열린다는 성수스님의 말씀은 끝없이 이어졌다. 장시간의 말씀에도 흐트러짐 없는 스님의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덕유산 줄기처럼 굽이 굽이 이어지는 감로수(甘露水) 법문에 환희심이 절로 난다.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고 그 안에서 뛰노는 생명들이 많다는 것을 성수스님을 뵈면서 다시 확인한다.
*대한불교조계종 큰스님의 삶과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