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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회 영시(英詩) 공부모임 보고서(출처:관훈클럽)
‘상실의 아픔’을 시(詩)로 승화한 앤 카슨의 문학세계와 대표 시 4편
캐나다 시인 앤 카슨(Anne Carson, 1950.06.21.~)은 2020년부터 노벨문학상 철이 되면 유력한 수상자 후보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고 있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며 고대그리스어 번역가, 고전학자이기도 한 그는 ‘생업(生業)으로 고대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짧은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캐나다 최대도시인 토론토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운 고대그리스어 실력으로 토론토대학교에서 고대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에서 고대문학을 더 공부했다. 이후 캐나다의 맥길대학교와 미국의 프린스턴, 미시간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고대그리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고전은 그에게 삶의 중심이고, 그가 시인으로 문단에 발을 딛게 된 것도 고전덕분이다. 1986년에 펴낸 첫 작품 <달콤씁쓸한 에로스(Eros the Bittersweet: An Essay)>는 고대그리스의 에로스 개념을 시를 통해 짚어냈다.
2025년 7월8일 서울 관훈동 정신영기금회관에서 열린 제 126회 관훈클럽 영시공부모임에서는 홍인표 회원이 발표를 맡아 앤 카슨의 문학세계 소개에 이어 대표 시 4편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홍 발표자는 “카슨은 고전과 현대를 접목(융합)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며 “고대그리스·로마 문학은 물론 중국 고전에도 정통해 상실의 아픔을 노장사상의 핵심인 ‘비움’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많이 썼다”고 소개했다. “그의 시 세계는 상실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겪은 가정사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보면 ‘상실’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앤 카슨은 아버지(로버트 카슨)가 2차 세계대전에 항법사로 참전한 뒤 은행원으로 변신, 이리저리 지점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는 바람에 학창시절 잦은 전학을 해야 했고, 친구를 사귀지 못해 책을 읽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하나뿐이었던 오빠는 동네 형들과 쏘다니느라 여동생을 챙겨주지 않았고, 마약사범으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뒤에는 가족들과 소식을 끊고 해외에 잠적해 주검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마가렛 카슨)는 공부 잘하는 딸(앤 카슨)에게 질투심을 드러냈고, 하나뿐인 딸 보다는 종적을 감춘 아들을 더 그리워했다. 앤 카슨은 15세에 만난 남자친구와 22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의 외도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결혼한 지 8년만인 1980년에 이혼했다. 가족 중에 그가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고통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노장철학의 ‘비움’ 사상은 그에게 이런 ‘상실’의 삶을 이겨낼 힘이 돼주었다. 실(失)을 도(道) 및 덕(德)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실(失)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승화시켜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삶’을 설파한 노장사상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전공인 그리스·로마 고전문학은 그의 시작(試作)에 보다 풍부한 자양분이 됐다. 어린 시절 앤 카슨은 서점에서 윌리스 반스톤이 번역한 <사포 시 전집>을 보고 고대문학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선생님이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가르쳐준 고대그리스어로 고전을 읽기 시작하며 사포,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등 수천 년 전 시인들을 벗으로 삼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그의 작품으로 꼽히는 <빨강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Red, 1998년 출간)>은 고대그리스 최초의 서정시 고전인 <게리오네이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로 쓴 소설’이다.
앤 카슨 작품의 주요 주제로 ‘생사애욕(生死愛慾)에 대한 통찰’이 꼽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의 공통주제인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자기존재에 대한 성찰을 시로 풀어냈다. 요절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를 동경해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남편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Husband)>의 29개 서두(序頭)를 모두 키츠의 편지와 메모에서 인용한 구절로 장식할 정도였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시를 쓴 두 선배 여성시인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의 전통을 승계한 것으로 더 평가받는다. 브론테와 디킨슨은 세상과 떨어져 내면의 세계에 침잠한 작품을 썼다.
그가 쓴 작품들은 ‘고전문학의 재현과 재해석’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존 키츠 외에도 오에겐자부로 등 동서고금을 오가며 여러 선대 문인들의 작품을 창작물에 인용했다. 앤 카슨 문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장르와 형식 파괴’가 꼽힌다. 시(詩)와 에세이를 융합한 하이브리드 작품을 여럿 내놓은 게 대표적 예다.
이런 작품세계는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너무 추상적이고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특징을 간과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성 중심주의와 거대 서사(敍事)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20세기 중반에 등장, 문화·예술·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온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과감한 생략과 재구성을 통해 모호하고 단편적인 서사를 던지면서 독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요구를 한다. 작품내용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인 만큼 기존 문학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친절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앤 카슨의 작품은 또 ‘고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극적인 만남’으로 꼽힌다. 문학의 역사라는 장구한 흐름에서 시발점을 이루는 고전과 가장 현대적인 경향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융합해냈기 때문이다. 홍인표 발표자는 “이 둘은 물리적인 거리로도 너무 멀고, 성격도 상반돼 섞이기가 쉽지 않아 보이지만, 앤 카슨은 성공적으로 경이로운 융합을 이뤄냈다”고 했다. 이런 문학적 성과 덕분에 그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시를 쓰는 진정한 시인’ ‘고전 연구로 혁신적인 시학(詩學)을 구축하고 현시대를 인식하도록 했다’는 등의 극찬을 받고 있다. 2024년에 내놓은 신작 <잘못된 규범(Wrong Norma)>는 전미(全美)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앤 카슨이 올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Father’s Old Blue Cardigan
By Anne Carson
Now it hangs on the back of the kitchen chair/ where I always sit, as it did/ on the back of the kitchen chair where he always sat.// I put it on whenever I come in,/ as he did, stamping/ the snow from his boots.// I put it on and sit in the dark./ He would not have done this./ Coldness comes paring down from the moonbone in the sky.// His laws were a secret./ But I remember the moment at which I knew/ he was going mad inside his laws.// He was standing at the turn of the driveway when I arrived./ He had on the blue cardigan with the buttons done up all the way to the top./ Not only because it was a hot July afternoon// but the look on his face --/ as a small child who has been dressed by some aunt early in the morning/ for a long trip// on cold trains and windy platforms/ will sit very straight at the edge of his seat/ while the shadows like long fingers// over the haystacks that sweep past/ keep shocking him/ because he is riding backwards.
아빠의 낡은 파란 카디건
___앤 카슨
지금 그것은/ 내가 늘 앉는/ 부엌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다,// 그가 늘 앉던/ 부엌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듯이./ 나는 들어오면 늘 그것을 입는다,// 그가 그랬듯이,/ 부츠에서 눈을 털며./ 나는 그것을 입고/ 어둠 속에 앉는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차가움이/ 하늘에 있는 달뼈에서/ 깎이며 내려온다./ 그의 법칙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그가 그 법칙 안에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차린 순간을.// 그는 내가 도착했을 때/ 진입로의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그 푸른 카디건을 입고 있었고,/ 단추를 꼭대기까지/ 모두 잠그고 있었다.// 그것이 한여름/ 7월의 더운 오후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이모가/ 이른 아침에 입혀준 옷을 입고/ 긴 여정을 떠나려는/ 어린아이처럼,// 추운 기차들과/ 바람 부는 승강장을 지나기 위해,/ 그 아이는/ 의자 끝에 똑바로 앉아/ 긴 손가락 같은 그림자들이/ 건초더미 위를 스치며 지나가는 걸/ 바라보게 된다—// 그 그림자들이 그를/ 계속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뒤를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의 남자들에서> (번역: 홍인표)
☞이 시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다가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을 담았다. 앤 카슨은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입던 카디건을 자신이 입고서는 그가 앉던 자리에 앉아있다는 묘사로 시를 시작한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그 슬픔을 ‘Coldness comes paring down from the moonbone in the sky(차가움이 하늘에 있는 달뼈에서 깎이며 내려온다)’는 시구(詩句)로 표현했다. ‘moonbone(달뼈)’은 ‘moonbeam(한 줄기 달빛)’을 달리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다. 홍 발표자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뼈를 때리는 아픔’이었을 것이라고 풀이했고, 손우현 회원은 “아버지의 엄격하고 차가운 성격을 은유하기 위한 조어(助語)였을 것”으로 봤다. 그 ‘moonbone’이 ‘comes paring down(깎이며 내려온다)’고 한 것은 칼로 과일껍질을 벗기듯, 살을 에듯 삶을 상실해 가는 아픔이 내려왔다는 은유다.
이어지는 연(聯)의 ‘His laws were a secret(그의 법칙은 비밀이었다)’에도 병든 아버지를 지켜보는 딸의 아픈 마음이 배어있다. 조영주 회원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의 행동규칙을 알 도리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같은 연의 마지막 구절 ‘he was going mad inside his laws(그가 그 법칙 안에서 미쳐가고 있었다)’에 ‘law’가 또 등장한다. 홍 발표자는 “아버지가 은행원으로서 규정대로 살아온 사람이었고, 융통성 없이 엄격한 분이었음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다음 연의 ‘Not only because it was a hot July afternoon(7월의 더운 오후였기 때문만이 아니다)’에 이르러 갑작스러운 반전(反轉)이 찾아온다. “치매에 걸리면 계절 감각이 없어지고, 그래서 한여름에 코트를 입기도 한다.” 시인은 그 다음 연의 ‘as a small child(어린아이처럼)’를 통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기에 이른다.
김인모 회원은 “이 시는 회화적(繪畵的)”이라며 “시를 쭉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앤 카슨이 고대그리스 서정시인 사포를 얼마나 좋아했고, 그리스고전을 왜 공부했는지 짐작케 한다.”
Glass, Irony & God,
The Fall of Rome: A traveller’s Guide
By Anne Carson
LXX.
We kiss in slow motion./ She turns and heads off/ in her small red soldier’s coat.// Off, and stepping cleanly/ toward the first day of school./ Off and down the ramp,/ almost deaf in the glare of the white sand ahead,/ the tiny gladiator,/ stuffing her shadow into her mouth as she goes./ Until/ we meet again./ So long.
유리, 아이러니와 신
로마 이야기: 여행자의 가이드
우리는 슬로모션으로 서로 입맞춤한다./ 작고 붉은 군용 외투를 걸친 그녀가/ 뒤돌아서 떠나간다.// 공부의 첫날을 향해/ 멋진 걸음을 내딛는다./ 눈앞의 흰 모래가 뿜어내는 환한 빛에 거의 귀가 먹먹해진// 작은 검투사가/ 입안에 자신의 그림자를 쑤셔 넣으며/ 경사로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우리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번역:황유원)
☞<유리, 아이러니와 신>에 나오는 첫 번째 작품 <유리 에세이(The Glass Essay)>는 앤 카슨의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상실과 고독, 그리고 결국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다루고 있어서다. 영어 glass는 투명한 물질, 즉 거울이며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 glace는 얼음과 거울을 뜻한다. 이 작품은 glass의 다양한 의미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실험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중 일부인 <로마의 몰락: 여행자 가이드>에서 시인은 로마를 찾아간 자신을 ‘작은 검투사’로 표현했다. 손우현 회원은 ‘She turns and heads off … toward the first day of school’을 “여자가 성인이 되어 출가하기 위해 부모 품을 떠나가는 것을 은유했다”고 봤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용기 있게 떠나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우혜전 회원은 “시 곳곳에서 시인이 로마를 여행하면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투영돼 있다”고 했고, 이덕규 회원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새로운 학창생활의 시작점에 서서 ‘한 번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다짐했었는데, ‘입안에 자신의 그림자를 쑤셔 넣으며 공부의 첫날을 향해 경사로를 따라 멋진 걸음을 내딛는’ 화자(話者)의 모습에서 걸 크러쉬(girl crush)가 느껴진다”고 했다.
민혜경 회원은 “학창시절 친구를 사귀지 못해 외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공부뿐이었던 시인이 ‘나는 검투사다’고 되뇌는 이 시가 아주 좋다”고 했고, 김인모 회원은 “여행이 곧 공부, 교육임을 은유하고도 있다”고 봤다.
The Beauty of the Husband
V. Here Is My Propaganda One One One One Oneing On Your Forehead Like Droplets of Luminous Sin
By Anne Carson
Like many a wife I boosted the husband up to Godhood and held him there./ What is strength?/ Opposition of friends or family merely toughens it./ I recall my mother’s first encounter with him./ Glancing// at a book I’d brought home from school with his name inscribed on the flyleaf/ she said/ I wouldn’t trust anyone who calls himself X—and/ something exposed itself in her voice,/ a Babel// thrust between us at that instant which we would never/ learn to construe—/ taste of iron.// Prophetic. Her prophecies all came true although she didn’t/ mean them to.// Well it’s his name I said and put the book away. That was the first night/ (I was fifteen)/ I raised my bedroom window creak by creak and went out to meet him/ in the ravine, traipsing till dawn in the drenched things/ and avowals// of the language that is “alone and first in mind.” I stood stupid/ before it,/ watched its old golds and lieblicher blues abandon themselves/ like peacocks stepping out of cages into an empty kitchen of God./ God// or some blessed royal personage. Napoleon. Hirohito. You know/ how novelist Ōe/ describes the day Hirohito went on air and spoke/ as a mortal man. “The adults sat around the radio/ and cried.// Children gathered in the dusty road and whispered bewilderment./ Astonished/ and disappointed that their emperor had spoken in a voice./ Looked at one another in silence. How to believe God had/ become human// on a designated summer day?” Less than a year after our marriage/ my husband/ began to receive calls from [a woman] late at night./ If I answered [she]/ hung up. My ears grew hoarse.// How are you.// — // No.// — // Maybe. Eight. Can you.// — // The white oh yes.// — // Yes.// What is so ecstatic unknowable cutthroat glad as the walls/ of the flesh/ of the voice of betrayal —yet all the while lapped in talk more dull/ than the tick of a clock./ A puppy// learns to listen this way. Sting in the silver./ Ōe says/ many children were told and some believed that when the war was over/ the emperor would wipe away their tears/ with his own hand.
남편의 아름다움
5. 나의 선전이 빛나는 죄의 방울처럼 당신의 이마 위로 하나 하나 하나 하나씩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나는 어머니와 그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내가// 학교에서 가져온 책 면지에 적힌 그의 이름을 흘끗 보고/ 어머니가/ 나는 스스로를 X라고 부르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드러났다./ 그 순간/ 우리가 영원히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 못할 바벨탑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쇠의 맛./ 예언적인. 어머니의 예언들은 어머니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모두 실현되었다.// 그 사람 이름이에요 나는 말하고 책을 치워버렸다. 그게 첫날밤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침실 창문을 밀어 올리고 그를 만나러 나갔다/ 협곡에서, 동이 틀 때까지 흠씬 젖은 것들과/ “마음속 유일한 그리고 첫째라는”/ 고백 속에서 헤매고 다녔다. 나는 그 앞에/ 멍청하게 서서,// 그것의 해묵은 금빛과 lieblicher(사랑스러운) 푸른빛이/ 우리에서 나와 신의 빈 부엌으로 들어가는 공작새들처럼/ 스스로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 혹은 신성한 왕. 나폴레옹. 히로히토. 히로히토가 방송에 나와/ 한 인간으로서/ 연설한 날을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당신도 알 것이다. “어른들은 라디오 주위에 둘러앉아/ 울었다.// 아이들은 먼지 이는 길에 모여 당혹스러워하며 속닥거렸다./ 천황이/ 하나의 목소리로 연설한 것에 놀라고 실망한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특정한 여름날/ 신이// 인간이 된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결혼 후 1년도 안되어/ 내 남편은/ 밤늦게 (여자의)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내가 전화를 받으면 (그 여자는)/ 그냥 끊어버렸다. 내 귀는 점점 쉬어갔다.// 잘 지내지?/ - / 아니./ - / 어쩌면. 8시. 그때 돼?/ - / 흰색 아 그래./ - / 그래.// 그 무엇이 배신의 목소리의 살의 벽만큼 황홀하고 불가사의하고/ 무자비하고/ 기쁠 수 있으랴-그럼에도 내내 시계 초침 소리보다도 단조로운 말에 둘러싸여 있다./ 강아지는// 이런 식으로 듣는 법을 배운다. 은빛 가시./ 오에 겐자부로는/ 전쟁이 끝나면 천황이 친히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거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많았고/ 그걸 믿은 아이들도 일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번역: 민승남)
☞앤 카슨은 2001년 출간한 를 영국 낭만주의 천재시인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에게 헌정하고 29편으로 나뉜 작품의 서두를 모두 키츠의 편지와 메모에서 인용한 구절로 장식했다. 키츠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미(美)의 탐구와 창조에만 헌신했다.
앤 카슨의 실패한 첫 결혼을 다룬 이 작품은 그에게 여성 최초로 T.S.엘리엇상(賞)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줬다. 너무나 잘생긴 남자친구에게 반해서 결혼한 여성 화자가 남편의 외도에 충격 받고 이혼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시 소제목에 ‘Oneing’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카슨이 ‘상대방과 하나가 된다’는 뜻을 담아 지어낸 말이다. 다섯 번째 연(聯)에는 ‘lieblicher(lieblich-사랑스러운, 유쾌한-의 비교격)’라는 독일어 단어가 등장한다. 시를 쓰다가 아무데서나 외국어를 그냥 집어넣는 게 카슨 작품의 특징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시 후반부에는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1945년 8월15일 2차 세계대전 적국이었던 미국 등 연합국진영에 ‘항복 선언’을 한 장면을 일본작가 오에 겐자부로(1935~2023)의 글을 인용해 삽입했다. 항복 선언 당시 천황이 ‘무슨 신비한 하얀 새’라고 상상했던 열 살짜리 소년이었던 그는 에세이 <전후 세대의 초상>에서 자신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다. “라디오 주위에 모여 앉은 어른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아이들은 바깥 먼지투성이 길에 모여 있었고, 어리둥절함과 당혹감을 되뇌거나 속삭였다. 우리가 가장 놀라고, 또 실망했던 것은, 천황이 사람 말을 쓴다는 거였다.”
시의 화자에게 남편의 외도와 그로 인한 이혼은 일본인들이 ‘신으로 믿었던 천황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과 비견된다. 시의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잘생긴 사람이었으므로. 카슨의 남편은 금발의 미남이었다. 카슨은 이 시편을 “Beauty is truth, truth is beauty(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는 키츠의 어록으로 시작했다.
시의 맨 마지막 구절 ‘the emperor would wipe away their tears/ with his own hand’는 기독교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의 7장 15~17절(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을 인용했다. ‘하나님’ 자리에 ‘천황’을 들어앉혀서.
The Beauty of the Husband
XXⅣ. AND KNEELING AT THE EDGE OF THE TRANSPARENT SEA I SHALL SHAPE FOR MYSELF A NEW HEART FROM SALT AND MUD
By Anne Carson
A wife is in the grip of being./ Easy to say Why not give up on this?/ But let’s suppose your husband and a certain dark woman/ like to meet at a bar in early afternoon./ Love is not conditional./ Living is very conditional./ The wife positions herself in an enclosed verandah across the street./ Watches the dark woman/ reach out to touch his temple as if filtering something onto it./ Watches him/ bend slightly towards the woman then back. They are both serious./ Their seriousness wracks her./ People who can be serious together, it goes deep./ They have a bottle of mineral water on the table between them/ and two glasses./ No inebriates necessary!/ When did he develop/ this puritan new taste?/ A cold ship/ moves out of harbor somewhere way inside the wife/ and slides off toward the flat gray horizon,/ not a bird not a breath in sight.
남편의 아름다움
24. 그리고 나는 투명한 바다 끄트머리에 무릎을 꿇고 나 자신을 위해 소금과 진흙으로 새 심장을 빚으리
아내는 존재에 속박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다 왜 포기해버리지 않는가?/ 하지만 당신 남편과 어떤 까무잡잡한 여자가/ 이른 오후에 술집에서 즐겨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삶은 매우 조건적이다./ 아내는 길 건너편의 페쇄형 베란다에 자리 잡는다./ 까무잡잡한 여자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스며들게 하듯 남편의 관자놀이를 만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남편이 여자를 향해/ 살짝 몸을 기울였다가 도로 펴는 모습을 지켜본다. 둘 다 진지하다./ 그들의 진지함이 아내를 고문한다./ 둘이 함께 진지해질 수 있다면,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탁자에는 광천수 한 병과/ 유리잔 두 개가 놓여 있다./ 알코올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부터 이 청교도적인 새로운 취향을/ 갖게 된 걸까?/ 차가운 배 한 척이/ 아내의 마음속 어딘가의 항구에서 나와/ 평평한 잿빛 수평선을 향해 미끄러지고,/ 새 한 마리 숨결 하나 보이지 않는다. (번역: 민승남)
☞홍인표 발표자는 “개인의 가정사(家庭史)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사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며 쓴 시”라고 소개했다. 시 앞부분의 ‘Love is not conditional./ Living is very conditional.’은 유명한 시구(詩句)이기도 하다.
시를 함께 읽고 난 회원들 사이에 ‘dark (woman)’의 의미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조영주 회원은 “누군지 모를 여자라는 뜻이 아닐까”라고 했고, 손우현 회원은 “도덕적으로 불분명한(enigmatic and ambiguous), 그래서 위험한 여자라는 뜻을 담았을 것”으로 봤다. 손 회원은 시 끝부분의 ‘A cold ship’에 대해서는 “결혼생활을 파탄 낸 남편을 차갑게 떠나가는 배로 은유한 것”으로 풀이했다. 이덕규 회원은 “이 시는 딜라일라(Delilah, 영국 웨일스의 가수 톰 존스가 1967년에 발매한 노래로 남자인 화자(話者)가 자신의 여자친구인 딜라일라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보고 칼로 ‘응징’했음을 암시하는 가사를 담음)의 여자 version인 것 같다”고 했고, 김인모 회원은 “이 시를 읽으며 오셀로(Othello,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가 생각났다”고 했다.
The Glass Essay
By Anne Carson
I can hear little clicks inside my dream./ Night drips its silver tap/ down the back./ At 4 A.M. I wake. Thinking// of the man who/ left in September./ His name was Law.// My face in the bathroom mirror/ has white streaks down it./ I rinse the face and return to bed./ Tomorrow I am going to visit my mother.
유리 에세이
꿈속에서 딸깍하는 작은 소리들 들려온다./ 뒤로는 은빛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밤의 물방울 소리./ 새벽 4시에 나는 잠에서 깬다. 9월에// 떠나간 그/ 남자를 생각하며./ 그의 이름은 로우였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길고 흰 줄들이 내리그어져 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침대로 돌아간다./ 내일은 어머니를 만나러 갈 것이다. (번역: 황유원)
☞1992년에 발표한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의 첫 작품인 <유리 에세이>는 글자 그대로 ‘거울을 보면서 생각하며 쓴 수필’이다. 앤 카슨이 캐나다 북부지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면서 그가 좋아하는 에밀리 브론테 작품집을 들고 가는 장면을 다뤘다. 세 번째 연(聯)의 ‘My face in the bathroom mirror/ has white streaks down it’은 ‘거울을 보니 허연 눈물자국이 있더라. 그걸 닦았다’는 의미다.
출처:
제126회 ‘상실의 아픔’을 시(詩)로 승화한 앤 카슨의 시 4편
주최자 : 신연숙 장소 : 관훈클럽 정신영기금회관 행사일 : 2025-07-08 조회수 : 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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