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저희 은사 스님께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지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한줄기의 향을 사르며 부디 마음 편하시길 빌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많은 글을 남겨두셨습니다. 그간 저는 은사 스님의 글을 살펴보면서 종류별로 분류하고 문맥을 다듬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좋은 글이 참 많더군요.
그리고... 스님의 글에는 법화사를 잃은 것, 백양사 소임을 중도에 그렇게 그만두신 것에 대한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상좌로서 은사 스님에 대한 감정으로 인간적인 연민(憐憫) 같은 게 느껴졌다면 욕 먹을까요?) ‘불교성전’ 간행에 대한 열정과 서옹 노스님의 못다 이룬 꿈 ‘국제선센터’에 대한 미련도 가득하더군요.
마음 같아서야 행적비를 세우는 날 문집(文集)이라도 내드리고 싶습니다만, 모르겠습니다. 상좌들이 변변찮아서 그게 뜻대로 되려는지요.
은사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49재를 지내는 동안 많은 분들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은사 스님의 글 한 편으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우리 스님에게는 종자기(鍾子期)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저의 이 심정은 누가 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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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줄을 끊은 백아의 마음(시몽스님)
춘추시대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인이 있었고 그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들어주는 명수였다.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서 높은 산을 형용하려 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종지기가 “참으로 훌륭하네, 높이 솟아 있는 듯하며 마치 태산 같구나.”라고 칭찬하였다. 흘러가는 물을 그리려 하면 “정말 잘 지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장강이나 황하와도 같구나”라며 기뻐하였다. 이처럼 백아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거문고의 가락에 의탁하는 곡조마다 종자기는 마음을 꿰뚫는 것처럼 그의 생각을 알아주었다.
이들 두 사람이 어느 날 태산의 산중을 깊숙이 들어간 일이 있었다.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 어떤 바위 곁에 몸을 피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고 물에 떠내려가는 토사(土沙)소리만 요란하였다. 난감하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까지 일어났으나 거문고의 명인 백아는 그때도 손에서 거문고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거문고를 부드럽게 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임우(霖雨-장마)의 곡을 켜다가 다음에는 붕산(崩山-산이 무너짐)의 곡을 뜯었다.
한 곡조를 켜고 날 때마다 종자기는 그 곡의 취지를 귀신같이 맞추고 찬송하였다. 그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 그날은 때가 때인지라 백아는 타던 거문고를 멈추고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아아, 잘도 알아맞히는구나! 자네의 듣는 귀라니! 자네가 생각하는 것은 꼭 내 마음속과 같구나. 자네 앞에서는 나도 거문고 소리를 속일 수 없네.”
이렇게 두 사람은 마음이 맞는 명인이요 청수(聽手-들어주는 고수)였지만 불행히도 종자기가 병으로 일찍이 죽고 말았다. 백아는 그토록 금도(琴道)에 정혼을 쏟아 넣어 일세의 명인이라 불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자기가 죽자 그렇게 사랑하던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렸다. 백아는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거문고를 손에 대지 않았다. 그것은 종자기라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서가 아니라 얻기 어려운 지음지기(知音知己)를 잃어 자신의 거문고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참다운 예술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만이 아니다. 또한 이들이 사는 시대만이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거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그리고 그 일을 지탱하는 자기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참다운 친구로서 지기(知己)를 갖는다는 것은 무상(無上)의 행복일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할 때 사람들은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고사[伯牙絶絃]를 들어 아픔을 함께 나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는 세상을 헛되게 살지 않은 사람이다. 백아와 종자기, 이 두 사람이야말로 지기지음의 지남(指南)이 되고 표본이 되는 사람들로서 오늘도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