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4.12.31(금)
08:40반선-09:20와운마을-12:10명선봉-12:30연하천산장 중식 및 출발-13:45토끼봉-14:10뱀사골산장-15:00간장소-15:30병풍소-15:45금포교-16:00반선
송년 산행과 신년산행이 끝나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이틀간의 지리산행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눈을 수북이 뒤집어쓴 채 올랐던 와운골 산행. 산행을 마친 후 남원에서 먹었던 푸짐하고 맛난 생태탕. 그리고 다음 날 대성골 산행까지.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아주 가까운 뇌리에 아직도 진한 잔상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처음 계획했던 일들과 차질이 생겨 인천서부터 출발이 늦었다. 눈발이 살살 날리는 반선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오전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매표소를 지날 때 나의 애마를 국립공원이 직원이 쓱 살피더니 4륜인가요. 묻는다. 아니 2륜인데요. 그럼 올라가기 힘들 텐데요. 반선 마을까지만 갑니다. 내가 아마 성삼재까지 올라가는 줄 알았나 보다.
차에서 내려 하늘을 바라보니 회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온통 잿빛이다. 금세라도 눈이 펑펑 날릴 것만 같은 날씨이다. 날이 추워 혹시나 해서 자동차 보넷을 열고 신문지와 수건으로 밧데리를 따뜻하게 감싸 보온시켜 놓고 2개의 배낭 중 35L 배낭을 질끈 들쳐 매었다. 출발 때 집에서 배낭을 2개 꾸려 놓았었다. 다른 1개는 70L. 각각의 배낭엔 당일용과 2박 3일용 장비가 꾸려져 있었고, 그중 35L는 당일용이다. 눈에 젖을 것을 대비하여 등산화도 2개를 챙겨 놓았고 이 정도 장비면 며칠이라도 지리산 속에서 빨치산처럼 견딜 수 있는 자신도 있었다.
뱀사골로 향하는 길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노면을 살짝 덮어 걸을 때마다 포근하게 느껴졌으며 신설에 첫 발자국을 남기고 걷는 느낌도 아주 상큼하다. 최근에는 여름철보다 겨울철에 뱀사골을 찾는 횟수가 많았다. 석실 못 미쳐 뱀사골 산장에서 밤을 보내고 일찍 하산하는 2명의 산님과 인사를 나눈 후, 경사가 가파른 와운 마을로 발길을 부지런히 놀린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와운골. 며칠 전 지리산 자락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고 지리산에서 눈 구경을 하려면 칠선이나 한신, 뱀사골 쪽처럼 북쪽이 훨씬 좋을 것 같아 이곳으로 산행 들머리를 잡았다.
날이 추웠던지 와운 마을에는 주민의 기척을 느낄 수 없고 낯선 산객을 보고 개가 사납게 짖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따듯한 방에서 아침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다. 굴뚝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어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정겨운 아침이다. 천년송 쪽으로 오르는 길을 버리고 와운 마을로 진입하면 곧 계곡 쪽으로 평탄한 길이 열려있고, 그 계곡을 건너 산자락을 타고 와운골에서 명선봉이 있는 연하천까지 산행이 이루어지는데 포인트는 초입이다.
와운골은 곳곳이 이미 두껍게 얼어붙었고 바위도 반질반질 눈에 얼어붙어 있어 계곡을 건너는데 상당히 주의를 요한다. 와운 마을에서 시작되는 산행은 사실 계곡 산행이 아니다. 따라서 리본만 몇 개 바라보고 계곡으로 잘못 들어섰다가는 개고생을 하게 된다. 명선봉에서 뻗어내리는 이 능선(명선 북릉)은 중북부 능선과 나란히 진행하다가 영원령을 정점으로 와운 마을로 뚝 떨어지는데 그사이의 골짜기가 바로 와운골인 것이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살펴보자" 냉전 시대였던 꼬마 시절 아버지를 따라 산행을 다닐 때 많이 유행되던 표어이다. 그때는 울진, 삼척지구 공비 침투사건을 비롯하여 이승복 어린이 학살사건 그리고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 굵직굵직한 북한의 도발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청와대 뒷산인 북한산은 곳곳에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주둔하고 있었으며 산행을 나섰던 아버지와 나는 군인들의 검문을 자주 받기도 했었다. 이 말은 그 시절 그만큼 등산 인구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산을 찾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등산용품을 파는 제조회사들과 대리점들은 경기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호황을 질펀하게 누리고 있다.
눈이 수북이 쌓인 산자락은 흰 쌀가루를 뒤집어쓴 듯 형상을 하고 있다. 날씨는 그리 춥게 느껴지진 않는다. 쌓인 눈 위에는 앞서간 선배 산님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다행히 길을 잃거나 헤매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명선봉으로 직등하는 이 코스는 시작부터 계속해서 연하천까지 고도를 높여 나가는 일만 있으므로 절대 쉽지만은 않은 루트이기도 하다. 게다가 눈이 쌓여 있어 순탄한 산행이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와운 마을을 출발한 지 30여 분 만에 좌측에 영원령의 모습이 보인다. 뒤를 바라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와운 마을이 가깝게 보인다. 제법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능선을 따라 우회한 모양이다. 능선길을 따라 계속 고도를 높여 나가자 전방에는 삼각형의 모습을 한 근사한 토끼봉과 화개재와 반야봉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다. 고도를 높혀감에 따라 적설량은 점차 많아진다. 아이젠과 스패치를 하지 않았으나 발목을 눈 속에 빠뜨리거나 큰 슬립이 없어 그냥 진행하기로 한다. 배가 고프나 배낭을 풀기가 귀찮아 역시 그대로 진행한다. 어느 정도 고도를 높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북부 능선 너머 중봉과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는 점차 가팔라져 온다. 미끄러져 중심을 잃기도 하고 스틱을 의지한 채 오름길을 잡아채기도 한다.
많이 올랐다고 생각은 했지만 영원령의 위치 변화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뱀사골 쪽의 능선을 따라 우회를 하며 등로가 이어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름길에는 수명이 다된 고목이 쓰러져 앞길을 막기도 하고, 풍도목과 바람에 꺾인 나무가지가 나뒹굴고 있어 무릎을 꿇고 기어서 진행하기도 하고 포복도 하기도 한다. 제법 웃자란 산죽을 헤쳐나갈 땐 눈가루를 뒤집어써 눈사람이 되기도 한다. 머릿속을 흐르는 땀은 눈과 뒤섞여 나도 모르게 딱딱히 얼어붙었고 명선봉이 다가올수록 산정엔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반야봉에서 뻗어내린 심마니 능선 너머에는 하얀 봉우리가 멋지게 조망되는데 바로 만복대다. 만복대는 겨울철에 보아야 제맛이다. 그리고 그 끝자락으로는 역시 하얀 모습의 바래봉이 뚜렷이 조망된다. 북쪽으로는 삼정산. 동쪽으로는 지리산의 동부 산자락이 시야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삼각고지와 덕평봉 쪽의 주능선이 가깝다. 정면에는 커다란 봉우리가 보이고 안부가 나타나니 바로 연하천 산장이 있는 명선봉의 헬기장이다. 지금의 시각이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반선에서 대략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 정도면 선방을 한 셈이다. 산장에 내려서니 잠시 머무르는 산님들이 나의 모습을 보더니 의아해한다. 주능선을 정상적으로 얌전히 걸어왔다면 나의 모습은 아주 양호했을 것이다.
땀이 식으니 온몸에 추위가 엄습해온다. 바람이 휭하니 부는 취사장에 들어가 배낭을 풀어 점심을 먹는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즉석 어묵을 코펠에 붇고 따끈하게 데워 얼어붙은 김밥을 몇 개 입안에 털어 넣었으나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어묵만 겨우 몇 개 삼킨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날씨가 춥다. 발이 시려 동동 구르며 허겁지겁 배낭을 다시 꾸려 연하천을 떠난다. 주능에 올라서니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빨리 걸어 몸을 데우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어 부지런히 발품을 판다. 오후 4시경에 남원에서 친구들을 만나야 하니 서둘러야 한다. 오늘은 2004년도의 마지막 날. 내일은 신년이기 때문에 간간이 지리산 종주 산행에 나선 산님을 볼 수가 있다. 홀로 산행이나 몇몇씩 짝을 이룬 산님과 교행하는데 모두 마음의 여유없이 얼어붙은 모습이다. 추위에 견디기 위하여 모두 온몸을 중무장하여 산행에 나서고 있다.
발걸음은 이미 명선봉을 우회하여 나무계단을 내려서더니 총각샘을 지난다. 눈보라가 날리는 바람과 안개에 토끼봉이 뿌옇다. 쉬엄쉬엄 느긋하게 토끼봉 정상에 올랐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토끼봉 정상은 황량하다. 지척인 삼도봉과 반야봉의 모습이 흐릿하다. 노고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개재에 도착해서도 바람이 강하다. 화개재 안부는 눈이 많이 쌓여 있고, 최근 데크가 설치되어 예전의 화개재의 모습이 아니다. 뱀사골 산장에 내려선다. 뱀사골의 산장으로 내려서자 바람은 사라지고 아늑하다. 새로 지어진 취사장에는 몇몇 산님이 추위를 피해 식사를 한다. 설경의 뱀사골 산장이 아름답다. 지리산에는 많은 산장이 있지만, 뱀사골의 산장은 유난히 정감이 간다.
뱀사골계곡 상류는 꽁꽁 얼었다. 그러나 겨울에도 간장소를 지나면서 뱀사골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병풍소-병소-뱀소-탁용소로 이어지는 겨울 계곡은 한여름의 푸르름과 가을의 화려함은 없었으나 겨울만의 그윽한 풍경은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두꺼운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세월의 무상함에 몸을 떠는 한 인간의 심중을 헤아리는 듯했다. 잘 닦여진 뱀사골의 등산로를 따라 내려와 오후 4시가 다 되어 반선 마을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켜고 남원산O에게 전화하여 하산 신고를 한다. 전주의 L 선생이 합류하기로 되어 송년회를 하고 내일 또 산행하기로 했는데 L 선생이 불참하여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같다.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남원에서 남원산O을 만났다. 여름철 만복대 산행 후 오랜 만남이다. 남원산O과 맛집 대성식당에서 먹은 생태탕의 칼칼하고 얼큰한 국물 맛이 오늘 고단한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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