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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을 보다가 "김C"라는 연예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세상을 향해 시큰둥한 얼굴을 보여주면서 거침없는 말투에 좀처럼 보기 드문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지요. "정규직과 일용직의 대결"이라는 말을 아주 아무렇지 않게 던지기도 해서 방송을 하던 사람이나 그걸 지켜본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었습니다. 또 어느날은 아침방송에서 자신의 방송이 탐탁치 않으면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맞추시라 했던가요? 뛰는 생생함과 세상 사람들을 품어안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죠. 들려오는 소리나 신문에서 밝힌 성장 과정이나 그 동안의 살아온 방식을 보자니 그는 "길 위의 사람' 이더군요. 사람이라는 느낌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그 흔한 학벌 하나 없이, 든든한 부모 재산 없이 그저 검정고시를 거치고 경력이라고는 남의 이름으로 공장노동자 생활한 것이 전부인 제가 가진 것은 오로지 "길" 위에서 온몸으로 온맘을 다해 배운 것들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했으며 턱없이 모자라는 그나마 제때에 주어지지 않는 월급을 받기 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과 어깨를 함께 하였고 분명 국민이 주인인 시대는 되었건만 여전히 그들 위에 군림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행정관료들과 싸우느라 여전히 저는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 있을 때에만 배울 수 있는 "길 위에서 하는 공부"가 오늘의 저를 키웠습니다.
저와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 이웃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그들과 함께 한다면 바로 이 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저는 배웠습니다. 진정 세상을 보는 따뜻한 눈과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희망뿐임을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도 힘이 세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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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해가 지도록 돌투성이뿐인 밭에서 돌을 골라내느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했던, 집어내는 돌들이 쌀 한 톨이고 감자 한 알이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상상을 하던 그 거친 땅,육지의 섬이라는 경상북도 안동의 한 깡촌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숟가락 쥘 새도 없이 손으로 허겁지겁 밥을 입 안 가득 쑤셔넣는 거지 아이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주린 배를 그저 채우고 싶은 간절함,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기억합니다.
그날도 보리 한 줌, 좁쌀 한 줌 넣고 밥도 아닌 죽을 끓이려던 저녁 무렵 저를 낳으셨답니다.
정신이 없으셨다는 어머니는 제가 세상에 나온 날을 정확히 알지 못하십니다. 9남매의 일곱째,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머니의 그 지독한 고생을 조금이나 덜어드릴 수 있었을까요? 모르는 친구의 아버지가 부러웠습니다. 당시로서는 대학 중퇴라는 거창한 학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쌀도 돈도 되지 않는 바깥일만 몰두 하셨습니다. 두 발을 대지에 굳건히 딛고 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고, 허기진 내 배를 채워줄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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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초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에 내려 다시 239번 버스를 타고 구종점에 내리니 새벽, 상대원1동 아버지와 형이 마련한 단칸방으로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큰길가에 몇 채의 집만 드문드문 있는 진창길... 그것이 제가 성남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기억입니다. 끌어 당겼습니다.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네, 익숙한 이름은 마찌꼬바 입니다)에서 초보(시다)로 취업해서 납땜질을 하고 그 일이 익을 무렵이 되니 사장은 야반도주를 해서 석달치 월급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는 회사에 앞집 사는 학생 이름을 빌려 모자란 나이를 속이고 들어갔 습니다만 모터 벨트에 왼손이 감기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직도 손톱아래엔 그 때 미처 빼지 못한 고무가루가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아주냉동"이란 회사였습니다. 용접 기술이라도 배워보고 싶은 욕심에 들어갔던 회사에서 용접은 해보지도못하고 함석 절단을 했습니다.
절단기에 잘려 꿈틀대는 손가락을 집어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헛웃음을 짓던 절단공을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뒤덮은 진달래를 바라볼 때 그 꽂빛깔은 왜 그리 서글프던지요.
시장 2층 화장실 청소를, 다른 형제들은 모두 공장을 다녔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다들 제 몫의 생존을 위해 싸우듯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장에서 , 시장 바닥에서 돌아와 좁디 좁은 셋방에 몸을 누이며 그나마 가족 모두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도 기쁜 나날들이었습니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공장 선배들의 거친 심정은 때로 저같은 어린 후배들에게 모진 폭력으로 불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때로 악에 받쳐서 대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뒤에 닥쳐올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평생 껴볼 수도 없을 물건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프레스 공정에서 일하던 저는 프레스에 왼쪽 손목이 끼어 골절상을 당했습니다. 성장판이 손상된 팔은 뼈 하나가 자라나지 않아 뒤틀어졌습니다. 많이 들여 마셔 후각을 잃어버린 것도 모른 채 단 하루 병원에 누워 있어 보지도 못하고 또 다른하루하루를 시작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없는 서글픔, 먹고 산다는 것의 고단함.
밥상을 대하는게 당연한 사람에게 이런 고단함이 절실하게 느껴질까요? 에서 어디에 방 한칸 마련할까 전전긍긍하는 고단한 사람들의 삶....
진통제 털어넣고 일어나야 하는 그 절실함 말입니다. 이대로 그저 뒤틀린 장애를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는 암담한 미래, 가족에 대한 원망과 설움은 자꾸만 저를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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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관리직이 된다는 것은 공장 노동자들에겐 하나의 성공 모델입니다. 힘든 철야작업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저는 검정고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증명이라도 있으면 관리직이라도 하면서 비록 장애를 입었지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결코 공장 노동자,공돌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맘 하나로 검정고시를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하는 저를 못마땅히 여기시며 하루 공장이라도 쉬는 날이면 시장 청소로 내몰고 밤늦게 공부하는 아들이 켜놓은 전깃불을 꺼버리는 아버지가 야속해서 저는 더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82년, 운좋게도(?)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받은 보상금 8만원과 오리엔트 퇴직금을 모아 입학금을 마련하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법시험을 통과한다면 정말 대단한 "신분상승"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검정고시 출신에 변변한 학벌 하나 없이, 없는 집 자식으로, 장애마저 가진 제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목표는 이것 밖에 없었습니다. 함성이 울리고 있었지만 질끈 눈을 감고 귀를 닫으려 애썼습니다.
그나마 힘겹게 얻은 대학 뺏지와 어쩌면 출세할 수도 있는 사다리에 발을 이제 겨우 올린 제가 사회정의, 민주주의라는 거창한 물결 앞에 알량한 그것들을 던져버릴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습니다.
고단한 삶을 거치느라 제대로 돌아 볼 수 없었던 저의 지나온 시간들과 창밖으로 들려오는 시민들의 함성은 쏟아지는 잠에 빠져버린,알량한 신분상승에 목을 맨 제 어깨 위에 서늘하고도 엄중한 죽비소리였습니다. 깨달음이었습니다. 저와 제 가족, 많은 시간을 공장의 희뿌연 형광등 불빛 속에서 함께했던 내 공돌이 친구들이 겪었던 아픔들은 그저 개개 인의 고달픈 팔자 탓이 아니고 사회가 안고 있고 오로지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배불리고 등 따뜻하게 쓰는 게 출세입니까? 뼛골 빠지는 고생 속에서 힘들게 공부해서 검사,판사 되어 좋은 자리 꿰차고 앉아 호령하며 가족들 호의호식하게 하고 이름 드날리며 사는 거, 그게 출세라면, 그걸로 만족하는 삶이 내가 추구하는 출세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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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7년, 2년간의 사법 연수원 시절은 제 자신의 변화보다도 더 큰 사회변화의 물결이 더 거친 시기였습니다. 민주화의 물결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저를 포함한 사법연수생들에게도 들이닥쳤습니다. 사법 연수원에 사상 최초로 노동법학회등 각종 학회가 생겨나고 무변촌 법률봉사활동을 기획하는 일도 있었지만 "너희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공무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실무수습을 나간 연수생들을 법원과 검찰을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국민들은 생명을 건 투쟁을 하는 역사의 엄중한 시기였기에 그저 저의 미래와 안위만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무모하지만 과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상락, 건설 노동자 이태영, 이용원 총장등을 만나고 노동법 상담역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성남에 일터라는 노동운동 지원단체를 만들게 되었을 때 이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결국 저는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길이 아닌 지역운동의 중심이 되는 길거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저버릴 수 없는 소명을 느끼며 이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뛰어다니는 시위대였고 시위가 끝난 후엔 경찰에 체포된 시위대를 위한 노상 변호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최루탄 연기 가득한 길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힘겨운 노동자들의 삶이 곧 저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난에 쫒겨와 성남에서 소년노동자로 뼈아픈 시절을 보낸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가장 자랑스러운 제가 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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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에 걸친 노동인권변호사의 역할 끝에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지역시민운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비로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목소리가 바닥에서 위로 울려퍼지고 봉사하는 행정관청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발족되었습니다.성남과 성남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오랜 관행과 군림하는 자세로굳어져온 행정관료들에게 이해시키고 제대로 된 자치를 실천하게 하기 위헤서 저는사무국 차장을 맡았습니다. 거부하고 시민의감시와 견제라는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오만방자한 지역권력과 싸우기를 거듭했습니다. 용도변경(파크뷰 특혜분양) 반대운동, 현 이대엽 시장의 민선3기에는 시립병원설립운동과 같은 대규모 시민운동의 모습으로 지역권력 앞에 맞섰습니다. 큰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시립병원 하나 짓는게 왜 이리 어려운 일입니까? 피땀 흘려 벌어 낸 세금을 그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지방권력과 투쟁해야 겨우 얻어낼 수 있는 일이라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일이 아닙니까? 정치공무원, 시장실에 줄 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시정운영만 펼치는 민선시장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지방자치이며 시민을 위한 지방자치인지 묻고 싶어집니다. 지방자치의 주체가 과연 시민인지 시장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단지 건설, 도시기본계획, 공약이면서도 실천할 의지마저 보이지 않는 시립병원 설립문제등을 보면서 실질적인 시민들의 삶의 개선과는 상관없는 전시행정, 선심행정의 피해등은 씁쓸함을 넘어 지방자치에 대한 실망을 갖게 합니다. 지위는 권력이아니고 책임일 뿐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알지 못하니 결국 사법처리라는 오명만 뒤집어쓰는 시장만 낳고 있을 뿐입니다.
이 씁쓸한 상황은 우리 성남 시민에게도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을 갖게 할 뿐이며 시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공무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통하지 않을 때 부부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가정을 망치는 싸움이 아니기에 갈등의 끝, 싸움의 끝은 칼로 물베기 처럼 싱거울 수 있는 것이지요. 무관심 보다는 지혜롭게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 그것에 부부싸움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관행대로, 아니면 시장의 입맛대로 행해지는 시민행정과 정책들을 그저 무관심하게 볼 수 없었기에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싸움은 시민의 삶에 무엇이 진정 필요한가, 시민이 원하는게 무엇이고 행정이 어떻게 펼쳐져야 옳은가를 항상 생각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싸움이 시민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지극한 천생연분이 아니고서야 평생 싸움 한 번 없이 사는 부부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서로 무관심하게 살거나 어느 한편이 남모르게 고통과 희생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은 결코 행복한 부부, 행복한 가정일 수 없는 일이지요. 이름만이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지방자치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저 단체장과 지방의원 뽑는데만 그친다는 것은 허울뿐인 민주주의입니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시정에 참여하고 제 목소리를 내야만 자치단체장의 전횡과 지방의회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결을 따르면서도 소수의 목소리를 아우를 수 있는 타협과 협의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고 지방자치라는 지극히 단순한 진실, 이것만이 지역주의로 갈라진 성남을 통합할 수 있으며, 시민의 편에 서는 우직하고 충실한 지방자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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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고 제법 무게도 있으면서 날렵하게 생긴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무심히 흐르는 물 위로 비스듬히 날리는 물수제비 뜨기를 아시지요? 만들어 내고 다시 물에 튕겨진 돌멩이는 운이 좋으면 몇 번이고 그런 동그라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제 자신은 그런 돌멩이가 되고 싶습니다. 무기력한 지방권력에 비판과 감시라는 수많은 파문을 만들어내는 돌멩이였다면 이제 저는 실천하고 봉사하는 지방권력, 참여하고 책임지는 지방권력을 만들어 내는 작은 돌멩이가 되고 싶습니다. 오물을 정화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생명들을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친 비가 필요하고 작은 아이들의 물수제비 뜨는 돌멩이들이 필요합니다. 꽃을 피울 수 있는 건강한 성남이 될 수 있기를, 그런 성숙하고 지혜로운 성남시민임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제 민선 4기는 더 이상 지방자치의 철학 없이 시민이 소외된 이름뿐인 지방자치일 수 없습니다. 돌멩이입니다.
던져주십시오.
저의 짧지 않은 인생을 키운 것은 거칠지만 인정 넘치는 성남의 시장통, 공장의 차가운 불빛, 그리고 길거리입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시장바닥에 좌판을 펼쳐놓은 아주머니들과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부신 그들의 청춘을 바치는 공장노동자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지친 어깨의 아저씨들....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저는 살아갈 힘을 얻으며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명감도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동동거린 서러움을 아는 사람, 찬밥 한 덩어리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겨워 하는 동료에게 따뜻한 국 한그릇 내미는 소박한 인정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몸을 다쳤을 때의 막막함과 그 절망 속에서 희망을 퍼올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가족과 오붓한 오후를 즐길 때의 소박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
이제사 저는 저의 소명, 운명이 결국은 여러분과 맞닿아 있었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공장 노동자로 얻은 장애와 그 고통을 이기고자 시작한 힘겨운 공부, 힘겨웠기에 그 고생의 열매를 기꺼이 노동자와 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끝없이 거리로 나섰던 일. 싸움닭이 되어서 나태하고 서민을 소외시키는 도시행정과 싸운 일,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시장으로서 여러분께 봉사하는 일로 연결되는 하나의 인연이었음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완성하는 선구적인 시민, 바로 우리 국민입니다. |
첫댓글 읽다가 눈물이 왜나지 가슴이 왜이리 아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