庭園이야기
요즘 불현듯이 뜨락 정원수를 수수한 야생의 잡목으로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기호(嗜好)가 바뀐 때문인지 모른다.
한 10년쯤 전에 낡은 한옥을 헐고서 집을 새로 지었다. 그때 집을 한구석으로 몰아서 지었더니 건물부지와 둘레의 지스러기 땅을 빼고서도 뜨락으로 떨어지는 공지가 넉넉히 1백여 평은 될 것 같았다. 가운데는 잔디를 깔고 그 주변에는 향나무류의 상록수를 비롯해서 영산홍 · 철쭉 · 목련 · 수국 · 장미 등 반반한 관상용 화훼들을 손에 닿는 대로 구해다 심었다.
그때만 해도 '가이쓰까 이부끼' 라는 일본 이름의 향나무가 귀한 정원수라고 했다. 뜨락 언저리에 빼곡하게 심었더니 어느새 주인 키의 두 곱씩이나 자랐는데, 이제는 너무 흔한 탓인지 별로 귀물(貴物)로 여겨지지를 않는다. 다즉천(多卽賤)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처음, 돌을 날라오고 구덩이를 파면서 식수계획을 세울 무렵이었다. 마침 서울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인 오(吳) 형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었는데 나에게 야생의 잡목 정원을 은근히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서울 같은 큰 도시의 한복판이면 촌스러운 잡목의 정원도 그럴 듯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문 밖이 바로 잡목의 숲이요, 울 너머가 곧장 야산인 지방의 작은 고을에서는 잡목의 정원은 있으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뒤에도 자주 농원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끌리는 대로 나무, 꽃이며 닥치는 대로 사다 심었다. 그런데 요즘은 은근히 오형의 말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뒤늦게나마 나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뜻 옛날 중국의 대유학자(大儒學者)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두 형제의 일화가 생각난다.
예절 바르기로 호가 난 형 명도(明道) 선생이 어느 날 어떤 주연(酒宴)에서 너무 흐트러진 작태를 부리자 아우인 이천(伊川) 선생은 도무지 형이 못마땅했고 납득이 가지를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형의 뒤를 따르며 백 리 길을 거의 다 오도록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지를 않았다. 이천(伊川) 선생은 참다못해서 형에게 그 연우를 따져 물었다.
명도(明道) 선생은 “나는 파연 (罷宴)과 더불어 이미 잊었던 일인데 너는 아직도 그것을 마음속에 접어두고 있었더란 말이냐?”하고 도리어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이천(伊川)선생은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는 형님보다 99리 뒤떨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황은 다르지만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같다고나 할까? 나는 오형보다 99리 아닌 99개월쯤은 뒤떨어진 셈이다. 그때 오형의 시사(示唆)는 너무 사람손이 간 정원수는 머지않아서 싫증이 날 것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의 소탈한 안목에 감탄을 한다.
실상 성형수술을 한 것처럼 휘고 자르고 지나치게 손질했거나 삭발한 머리통처럼 박박 깎아놓은 나무는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오랜 세월 겪고 보면 식상(食傷)한 때처럼 역겨운 경우가 많다. 나무뿐이 아니라 재배화(栽培花)의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며칠 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첫 인사가 튤립 안부(?)였다. 지금도 집안에 튤립을 많이 가꾸고 있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아마 오래 전에 튤립이 귀할 대 우리 집 뜨락의 튤립이 인상에 남았던 모양인데, 아무려나 사람 안부보다 꽃 안부가 앞서는 것은 아무래도 본말(本末)이 전도된 느낌이다.
내가 이 지방에서는 처음이다시피 오래 전부터 뜨락에 튤립을 가꿔왔었다. 그런데 튤립은 봄이 되기가 무섭게 일찍 싹이 트고 다른 꽃들에 앞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에 우리 집 뜨락은 이른 봄부터 이웃간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아직도 뜨락의 구석에는 그때의 흔적이 다소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우리 주변에 그러한 재배용 꽃들이 지천이어서 튤립도 역시 가이쓰까 향나무와 마찬가지로 한물 간 느낌이다. 교배(交配)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품종개량한 꽃은 사람으로 치면 짙은 화장으로 요염하게 꾸민 여인 같아서 세월이 지나면 싫증이 나기마련이다. 그 대신 그동안 등한시했던 조물주의 창작품 그대로인 야생화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소박하고 꾸밈없는 진실한 모습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재배화처럼 보호를 받지 않고서도 때만 되면, 저절로 피는 그 강인한 서민성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야생의 잡목이나 야생화를 즐기는 기분을 이해하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그러나 관상수나 잔디의 손질이 잘되어있는 공원이나 관광지의 거리를 걷는 것만 못하지 않게 수수한 잡목의 숲 사이의 오솔길이나 아카시아 꽃이 너우러진 방죽길을걷는 맛은 또 나름대로 소박한 멋이 있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 도 수수한 그것이 더 멋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의 글에선가 ‘사람은 얼마나 이름이 나고 또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보다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타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좌절을 모르고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인 노어부(老漁夫)를 인류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시켰다고 말한다. 요즘 돈벌이에만 급급한 악덕업자나 출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속물들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은데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출세의 길이 우러러 보일는지 모르지만 나이 먹으면 대개 소박하고 욕심없는 오솔길에 더 마음이 끌릴 것 같다.
이야기의 방향이 다소 빗나가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입맛도 비슷한 경우가 아닌지 모르겠다. 젊어서는 단맛에 살고 늙어서는 쓴맛에 산다고나 할까? 지난날 노인들이 나물 중에서 씀바귀를 즐기시던 생각이 난다. 어릴 때는 감미품(甘味品)을 즐겨 먹지만, 세상의 신산고초를 겪은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단맛보다 쓴맛이 도리어 감칠맛이 나는지도 모른다. 여러 맛 중에서 쓴맛은 구미를 돋구는 가장 고상한 맛이라는 말도 그런데서 연유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잡목의 숲, 야생화, 오솔길, 가꾸지 않은 맨 얼굴,쓴맛 등에서 도리어 인생의 어떤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억지를 쓴다고 꼬집으면 할 말은 없지만, 인생도 옷과 같아서 무턱대고 화려한 천보다는 검소하나마 몸에 맞으면 어울린다는 소생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보니 나는 지금 취미나 기호 이야기가 지나쳐서 무슨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꽃이 어떻고 맛이 어떻고 옷이 어떻고 하면서, 백화난만(百花爛漫)의 계절에 꽃 푸념은 말할 것도 없고, 조경업자 · 화훼재배가 · 사탕장수 · 화장품 장수 등의 비위를 한없이 거슬리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이 변변치 못한 글이 그런 분들에게 직접 어떤 영향이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우리 업자들이 나의 취미나 기호와는 관계없이 더욱 번창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다시 정원이야기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다. 정원의 수종을 바꾸는 일은 아무리 가장(家長)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독재성을 발휘하면서까지 혼자의 뜻대로 밀고 나갈 생각은 없다.
차차 집안의 뜻이 모아지면 고향 뒷동산의 흔한 잡목들 - 참나무를 비롯해서 떡갈나무 · 자작나무 · 오리나무 · 소태나무 · 노간주나무 등을 골고루 옮겨 심고서 아침 저녁, 이 고향 닮은 숲을 바라보면서 꾸밈없이 살고 싶다. 인생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담담한 마음으로 분수에 맞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첫댓글 올해 나의 정원은 어떤 나무 어떤 꽃으로 채울수 있을까?
마음에 빈 뜰을 들여 우선 갈이부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