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번에 읽는 삼국지 [2]
조 성 민 (한양대 로스쿨 명예교수)
[2] 승상이 된 조조의 독주
1. 대권을 잡은 조조
조정에서는 황제의 권위를 찬탈한 이각과 곽사 사이가 틀어져 싸우는 동안, 헌제가 장안에서 우여곡절 끝에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낙양은 너무나 황폐해져 버려진 땅이 되어 버렸다. 이에 헌제가 사직을 지켜줄 신하로 삼기위해 산동에 있는 조조를 낙양으로 불러들이자, 조조는 드디어 세상을 얻을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불렀다.
조정으로 들어온 조조는 동탁을 능가할 정도로 횡포와 악독을 자행한 이각과 곽사를 무찌르고 가장 유력한 제후가 되었다. 조조는 황폐된 낙양을 복원하기 힘들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도를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허창)로 옮기고 둔전제를 실시하였다(196년), 이때부터 조조는 사실상 권력의 2인자가 되었다. 천하를 차지했으나 조조는 서주의 유비와 소패성에 있는 여포가 손을 잡고 공격해 올 것을 걱정했다.
이때 조조의 걱정을 알고 있는 순욱이 조조에게 황제의 조서를 내려 유비를 서주목에 제수하고 여포를 죽이게 하라는 계책을 냈다. 순욱의 계책에 따라 조조가 황제의 명으로 유비를 서주목으로 삼고, 유비에게 밀서를 보내 여포를 치도록 했다. 이러한 조조의 술책을 안 유비가 이를 여포에게 알려주었다. 계책이 실패하자 순욱이 조조에게 원술에게는 유비가 쳐들어온다는 거짓정보를 흘리고, 유비에게는 원술을 치라는 황제의 조서를 내리라고 또 다른 계책을 주었다. 이 계책은 유비와 원술이 싸우면 여포가 다른 마음을 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술은 거짓정보에 흥분해 전투태세를 갖췄고, 유비는 조조의 계략일줄 알면서도 서주성을 장비에게 맡기고 황명을 받들어 원술을 치러갔다.
2. 서주성을 가로챈 여포
유비는 출동을 하면서 장비에게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병사들에게 매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했다. 그럼에도 장비는 도겸의 옛 부하이자 여포의 장인인 조표가 술잔을 거부하자 매질을 했다. 분이 난 조표는 장비가 만취되어 있는 틈을 타서 소패성에 있는 여포에게 서주성을 공략하여 접수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여포가 군사를 일으켜 서주성을 차지해버렸다. 서주성을 가로챈 여포는 미처 피하지 못한 유비가족을 극진히 대우했다.
한편 원술과의 전투에서 군사태반을 잃은 유비는 여포와 화친하기로 하고 서주성으로 돌아왔다. 여포는 장비가 술을 마시고 부하에게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자기가 서주성으로 들어와 지키게 되었다고 변명했으나, 유비는 깨끗이 서주성을 포기했다.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소패성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장비가 전력보강을 위해 독단적으로 여포부하들에게서 말 150마리를 빼앗았다. 이 소식을 들은 여포가 화가 나서 군사를 이끌고 소패성으로 가서 유비에게 항의를 했다. 이 내용을 모르는 유비는 말을 뺏은 적이 없다고 하자, 여포가 거짓말 하지 말라며 다그쳤다. 그러다가 여포와 장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 유비가 여포에게 말을 돌려줄 테니 군사를 물리라고 화해를 청했다. 이때 여포의 모사인 진궁이 지금 유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앙갚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자, 여포가 명을 내려 군사들이에게 소패성을 공격하라고 했다. 여포의 군사력에 크게 뒤진 유비는 소패성을 버리고 허도에 있는 조조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3. 여포와 조조의 하비성 전투
조조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유비를 맞아들이고 황제에게 청해 그를 예주목으로 삼았다. 조조는 유비에게 세력을 키워 여포를 치라고 당부했다. 한참 후에 서주성을 차지하고 싶은 조조가 자신에게 의탁해 있던 유비에게 여포를 치게 했으나 실패하자, 조조 자신이 여포를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여포가 패해 서주성을 함락당하고 하비성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여포를 추격하여 하비성을 공략했다(하비성 전투). 조조가 공격해 오자 주색에 빠져있던 여포가 반성을 하고 군사들에게 금주령을 내렸다.
어느 날 여포의 장수 후성의 부하가 말을 훔쳐 유비에게 바치려고 성을 나섰는데, 후성이 이를 알고 추격하여 그 군사를 죽이고 말을 되찾아 왔다. 후성이 이 사실을 동료장수들에게 알리자, 그들이 후성을 축하하고자 모여들었다. 후성이 이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담가두었던 술을 가지고 여포에게 가서 허락을 받고자 했다. 이에 금주령을 내린 여포는 화가 치밀어 후성의 목을 베려했지만, 다른 장수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곤장 50대를 치게 했다. 치욕을 당한 후성이 여포를 배반하고 적토마를 훔쳐 조조에게 바치고 투항을 하여 여포가 조조에게 생포되었다. 여포는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조조는 그를 천하의 배신자로 몰아 청을 거절했다. 결국 여포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198년).
4. 조조와 유비의 애증(愛憎)
조조가 여포를 토벌하고 부하장수인 차주에게 서주를 맡기고 유비와 함께 허도로 개선하였다. 조조가 황제에게 유비의 공이 크다며 상을 내려달라고 하자, 헌제가 유비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헌제는 유비가 황실의 종친이 된다는 말에 족보를 따져보니 유비가 헌제의 아저씨뻘이었다. 헌제는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의성정후로 봉했다. 또 유비와 숙질의 예를 올리고 황숙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유비는 조조가 자기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낮추며 조심했다. 또한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조조는 이러한 유비를 허도에 잘 묶어두고 있다고 내심 반겼으나, 그 속내를 알고 싶어 어느 날 유비를 그의 거처로 불러 함께 술잔을 나눴다. 조조가 유비에게 천하에 영웅은 조조와 유비뿐이라고 하자, 마침 내리던 비가 천둥번개를 동반하자 유비는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몸을 움츠렸다. 유비는 천둥번개를 핑계 삼아 속내를 들킬 뻔한 것을 무마하고 소심한 듯 행동했다. 조조는 이런 유비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원소가 공손찬을 죽이고 하북일대(기주, 청주, 유주, 병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조조의 부하가 전했다. 이 전갈을 들은 조조는 원소와 원술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올 것을 걱정했다. 원술이 원소에게 가려면 서주를 거쳐 가야하는데, 공손찬이 원소에게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조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원술의 길목을 치겠다는 구실을 댔다. 그러자 조조가 유비에게 군사 5만 명을 내주면서, 자신의 부하 장수인 주령과 노소를 딸려 보내 유비를 감시하게 했다. 드디어 허창을 벗어나게 된 유비는 원술진영을 향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급행군을 했다. 유비와 원술의 싸움에서 원술이 유비에게 패해 사망했다(199년). 이때 유비는 원술이 지니고 있던 전국옥새를 보았다. 유비는 자신이 조조의 5만 대군을 거두는 대신에 주령과 노소에게 전국옥새를 주어 허창의 조조에게로 보냈다. 화가 난 조조는 두 사람을 참수해 버렸다.
이제 5만 대군을 거느리게 된 유비는 조조의 병부(장수가 군대를 동원할 때 쓰는 징표)를 빌어서 서주성을 지키고 있는 조조의 부하 차주를 속이고 성문을 열게 한 뒤 함락시켜버렸다. 반란으로 서주를 차지한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원소와 손을 잡았다. 이에 배신을 당해 화가 치민 조조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유비를 격퇴하고 소패성과 서주성을 취했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원소에게 의탁했고, 장비는 산속으로 도망쳐 행방불명되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키고 있어, 이들 3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5. 조조의 포로가 된 관우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관우는 유비 부인 2명을 모시고 하비성을 지키고 있었다. 유비를 제압한 조조는 하비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조조는 관우의 뛰어난 무예와 고상한 인격을 좋아해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무력으로 하비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지만, 조조는 그러나 관우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고자했다. 그리하여 조조가 관우를 성 밖으로 유인하여 고립무원을 시켰다.
대군을 상대하기에 힘이 부친 관우가 다음의 항복조건을 내세워 조조에게 항복했다(200년). ① 한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고, ② 유비 부인 2명에게 황제봉록을 내리고 누구도 그 거처에 들어가지 못하며, ③ 유비의 종적을 알면 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극한상황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관우에게 탄복을 하고 관우를 맞이했다.
조조가 하비성을 취하고 허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군신의 예를 어지럽힐 속셈으로 관우와 두 형수를 한 방을 쓰게 했다. 관우는 밤에 등불을 들고 날이 밝을 때까지 두 형수의 문 밖에 서있었다. 허도에 돌아온 조조는 관우에게 헌제를 알현하게 했고, 헌제는 관우에게 편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조조는 관우에게 집을 주고 미인 10명을 관우에게 보냈다. 그런데 관우는 미인을 취하지 않고 이들에게 두 형수의 시중을 들게 했다.
6.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한편 하북일대를 장악한 원소가 안량을 앞장세워 조조를 공격했다. 선봉장인 안량은 황하를 건너 조조의 전진기지인 백마성(하남성 황현–현재 황하 남쪽 강변)을 공격했다. 백마전투에서 조조에게 포로로 있던 관우가 안량을 죽임으로써 원소가 패배했다. 백마전투는 조조와 원소가 격돌한 관도 전역의 첫 전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조가 승리했지만, 조조는 관도를 지켜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 아래 백마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원소는 패배했지만 결과적으로 백마, 연진에 이르는 양자강을 건너는 주요 도하 거점을 확보했다,
몇 달 뒤에 원소가 문추를 선봉장으로 관도(하남성 중모)로 조조를 공격했지만, 원소의 자만심과 치우친 용병술, 관우가 문추를 죽임으로 원소가 대패한다. 특히 원소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모사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의 식량창고가 있는 오소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조조는 정예군 5천명을 이끌고 야습을 감행하여 군량미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급보를 들은 원소가 오소에 구원부대를 급파하고, 관도에 공격부대를 파견했으나 두 부대 모두가 패했다. 이 전투가 2만의 군사로 10만의 원소군대를 섬멸시킨 유명한 관도대전이다(200년). 관도대전의 패배로 건강이 악화된 원소는 병사했고(202년), 조조는 관도대전의 승리로 중국대륙의 북부일대를 자기의 세력권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하북의 패자가 되었다.
관도대전을 치루면서 관우가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자,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겠다고 했다. 조조의 부하 채양이 관우를 사로잡겠다고 하자, 조조가 옛 주인을 잊지 않는 것은 진정한 장부이니 너희들도 본 받으라고 했다. 또 조조는 재물·직위·봉록으로는 관우의 의지와 바꿀 수 없으므로 관우를 존경한다고 했다.
관우는 조조로부터 미처 여행증명서를 받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관우가 하북의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는 유비가 있는 여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조의 장수들이 관할하고 있는 다섯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오관돌파 - 五關突破).
① 관우가 유비가 머물고 있는 여남으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은 동령관이었다. 동령관을 지키는 수문장 공수는 관우가 조조의 적인 원소의 하북 땅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조조가 발행한 여행증명서를 요구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다 관우가 공수를 베어버리고 동령관을 돌파했다.
② 제2관은 낙양성으로 태수 한복이 관우를 막으려고 했다. 한복의 심복인 맹탄이 관우를 유인하여 화살로 쏘아 죽이자고 하고, 맹탄이 관우와 맞서는 척하며 관우를 낙양성 앞으로 유인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한복이 관우에게 활을 쏘아 팔을 마쳤으나 관우가 한복을 베어버렸다.
③ 제3관은 기수관으로 수문장 변희가 관우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는 관우를 안심시켜 진국사라는 절 안으로 유인해 자객들로 하여금 처치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마침 관우의 고향사람 보정 스님에 의해 변희의 음모를 알게 된 관우가 자객들과 변희를 죽여 버렸다.
④ 제4관은 형양성인데 태수 왕식이 관우를 환대하는 척하며 숙소에서 불태워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관우가 숙소에서 이를 알고 도망쳤는데, 왕식이 추격해오다가 죽임을 당했다.
⑤ 제5관은 활주관으로 하후돈의 부하인 진기가 수문장이었다. 진기가 관우에게 통 행증을 요구하자 관우가 그를 베어버렸다.
관우는 어렵게 오관을 돌파하여 배를 얻어 타고 여남으로 가서 유비, 장비와 재회를 했다.
7. 유비와 조조의 여남전투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을 치루기 위해 허도를 비우자, 여남에 있던 유비는 이를 노리고 허도를 공격했다(201년), 그러자 조조는 군사를 돌려 15만 대군을 이끌고 허도로 가는 길목인 양상에서 유비와 결전을 벌였다. 첫 전투에서 조자룡이 허저를 무찔러 유비가 승리했다. 그러자 조조는 10일 동안 응전을 하지 않다가 하후연을 시켜 유비의 군량미 수송부대를 공격하게 하여 유비의 부하 장수 공도가 전사했다. 이에 장비가 나서지만 조조군에게 패해 포위되고, 조조는 하후돈을 시켜 유비의 본거지인 여남을 공격하자 유비가 관우를 시켜 막도록 한다.
그러나 관우마저 조조군에게 포위당하자, 유비는 어두운 밤을 이용해 여남으로 후퇴하려다가 조조에게 기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군사들과 헤어져 산길로 피신한다. 다행이 여남을 지키던 장비의 부하 장수 유벽과 손건이 유비의 가족을 데리고 합류하여 산길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조조의 장수 고담과 마주쳤다. 유벽이 유비를 지키려고 맞서지만 고담에게 전사하고 유비는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조자룡이 나타나 고담을 베어 유비를 구하고 관우는 포위망을 뚫고나가 장합을 무찔렀다. 그리고 장비와도 합류해 전열을 재정비하지만 패배를 당했다. 유비는 여남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었다(201년).
8. 삼고초려로 얻은 제갈량
유비의 꿈은 한나라 황실을 재건하고 요, 순 임금과 같은 성군의 시대가 다시 오기를 바랬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 같은 용장은 있었으나 책략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유표의 배려로 유비가 양양의 신야현에서 지낼 때 만난 서서가 유비에게 융중 땅에 사는 제갈량을 얻으면,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느 날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신야에서 20리 떨어진 융중으로 제갈량을 찾아갔으나 부재중이라 만나질 못했다. 삼형제는 겨울에 눈길을 헤치고 두 번째로 제갈량에게 갔으나 또 허탕을 쳤다. 며칠 후에 유비는 세 번째 융중으로 가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감) 끝에 드디어 제갈량을 만났다(207년). 어렵게 제갈량을 만난 유비는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제갈양이 유비에게 조조가 원소를 물리치고 100만 대군을 이끌어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므로 그와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했다. 또 강동의 손권과는 잘 지내는 것이 우선이고 형주와 익주를 얻은 후에 낙양으로 들어가면 한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북쪽의 조조, 남쪽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지계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비가 제갈량은 얻은 후에 신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가 하후돈에게 10만의 군사로 유비를 공격하게 했으나,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하후돈을 물리쳤다. 이때 평소에 제갈량이 어리다고 무시하던 관우와 장비가 공명의 군사작전에 감탄했다. 하후돈이 유비에게 패한 후에 조조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조조에게 대적할 수 없는 유비는 신야를 버리고 번성으로 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당양에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 조조가 형주를 취하고 유비는 한수(장강 지류)를 건너 강하로 피신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강동으로 가서 손권을 설득해 조조에게 함께 대항하도록 하자고 했다.
"단번에 읽는 삼국지" [1] - [5] 중 [2]
(참고문헌) 조성민, 삼국지에서 내 성격을 찾다(제2쇄), 박영사, 2018.3
|
첫댓글 와우! 감사히 읽고 갑니다.
화이팅!
주 박사님
건필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