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차돈(異次頓. 506~527)은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이다.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厭觸),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태어난 해가 501년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 당시의 왕이었던 법흥왕(法興王)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佛力)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할 수 없었다.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왕에게 '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 '이라 하고, 거짓 전명(傳命)한 죄를 내려 자신의 머리를 베면 만인이 다 굴복하여 교명(敎命)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흥왕이 이를 반대하였으므로 이차돈은 다시 '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身命)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 ..불교)가 행해지면 불일(佛日 .. 부처)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가 길이 편안할 것 '이라 하면서 왕의 허락을 청하였다.
마침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이차돈이 왕명을 받들어 불사(佛事)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신들은 크게 흥분하여 왕에게 물었다. 왕은 자기 자신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이차돈을 불렀다. 이차돈은 불사를 일으켰음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하고 이 불법(佛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에 유익할 것이니 국령(國令)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신하들의 반대가 커지자 왕은 이차돈과 처음 약속한 대로 하리(下吏 .. 신하)를 불러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이차돈은 '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 '이라 하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왕과 군신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公認)하였다. 그때 이차돈의 나이는 26세(또는 22세)이었으며, 연대는 법흥왕 15년 또는 16년이라는 설이 있다. 수년 후인 534년(법흥왕 21)에 천경림(天鏡林)에는 신라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졌다. 절이 완공되자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進興王)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하자 해마다 그의 기일(忌日)에는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를 추모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하자 법흥왕은 북산(北山)의 서령(西嶺 ..금강산)에서 이차돈의 장사를 지내고 이차돈의 명복을 비는 자추사(刺楸寺 .. 후일의 백률사)를 건립하였다. 순교 당시 이차돈(異次頓)의 나이는 약 22~26세 정도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544년에 완공되었다. 817년 국통(國統) 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碑)를 세웠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기록하는 6각 석당(石幢)을 백률사(栢栗寺)에 세웠다.
이차돈 순교비 異次頓 殉敎碑
높이 1.04m의 크기이며, 각 면의 너비 29cm이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불교를 제창하다가 527년(법흥왕 14)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1914년 백률사로부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이차돈순교비 (異次頓殉敎碑)'는 화강암재의 육면 기둥으로 방형(方形)의 석재 윗면을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당 위에 옥개석(屋蓋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제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殉敎) 장면을 부조(浮彫)하였다. 제 2~6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각 정간에는 자경(字徑) 3cm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각 면의 명문(銘文)은 마멸이 심하여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순교비는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에서 발견되었다. 옛 이름이 자추사(刺楸寺)인 백률사(栢栗寺)는 이차돈의 순교 당시 망나니의 칼에 잘려나간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라고 하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는 1914년 3월에 찍은 사진(아래 사진)이 남아있는데, 처형(處刑) 장면을 조각한 비면(碑面)이 하늘을 향한 채 순교비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다. 방치되는 동안 순교비의 지붕돌도 사라져 여지껏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비석(석당기. 石幢記)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불교의 공인(公認)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던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로부터 290여 년이 지난 818년에 세워진 것이다. 몸체는 육각 기둥형으로, 한 면에는 조각을 새기고 나머지 5면에는 단정한 해서체(楷書體)로 그의 사적을 기록하였지만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이 비를 세운 해보다 1년 먼저인 817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스님인 일념(一念)이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어 승속(僧俗)의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며, ' 이차돈의 향기로운 무덤에 예를 올리는 결사문 (香墳禮佛結社文) '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모임에서는 국통(國統)인 혜륭(惠隆) 등이 무덤을 새로 고치고 이차돈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가 바로 지금 남아 있는 이차돈순교비로 추정되고 있다. 모임에서 일을 추진한지 1년만인 818년에 세웠음을 비문의 첫머리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문(銘文)의 대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특히 명문(銘文) 중의 ' 경중백유일장 (頸中白乳一丈) '은 이들 기록과 합치하고 있다. 또한 이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 2종 ' 흥린군신각금생서 (興隣君新刻金生書) ' 그리고 ' 원화첩(元和帖) '이 전래하여, 마멸된 부분을 더욱 보충하게 되었다.
명문 중에는 건립연대라고 고증할만한 확실한 연호나 연도는 없다. 단지 '삼국유사' 권3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록에 의하여 건립연대를 당 헌종 원화(元和) 12년인 헌덕왕 9년인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명문(銘文)에는 석당기의 찬자(撰者), 서자(書者) 모두 밝혀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염촉(厭觸)이라고도 불린 이차돈은 순교 당시 22세이었다. 순교비는 죽음으로 신라시회를 바꾸어 놓은 젊은 '혁명가 (革命家)'를 조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만큼 역사성과 조형미를 두루 갖추고 있다.

위 조각은 이차돈(異次頓)이 불사(佛事)를 일으키다 왕명(王命)을 거역하였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아래쪽의 파도(波濤) 모양 무늬는 진동하는 땅을 표현한 것이며, 이 위에 관(冠)을 쓰고 있는 이차돈의 머리가 굴러 떨어져 있고, 그 옆에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엉덩이를 뒤로 뺀 채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몸이 보인다. 그의 목에서는 몇 줄기 피가 솟아나고 그 좌우로 꽃송이가 날리고 있다. 이에 감동한 왕과 신하들은 비로소 불교를 정식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818년(헌덕왕 10년) 8월 10일에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법흥왕은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여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걱정이 많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천하에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 하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 자신에게 묻기를 청했다. 왕은 주저하였으나 이차돈이 재차 간청하자 불법을 펴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이차돈이 자신의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목을 치게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방책을 건의하였다.
왕이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상하겠느냐고 하자, 이차돈은 자신이 비록 죽어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라고 우겼다. 왕은 이런 사람이라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을 따랐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결국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 가운데에서 흰 우유가 한 길장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북산에 안장하고 서산에 사당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