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초가을
김천 여고가 폭격 당한 건물뒤에, 가건물을 지어 옮겨갔다. 걸상도 엉성 하지만, 아예 책상은 없이 무릎을 책상 삼아 수업을 받았다.
전쟁중이라 펼쳐지는 행사는, 김천 문화사 주최 웅변대회였다. 참가 자격은 김천 시내의 중고등 학생이었다. 당시 김천시내는...
1. 김천 고등학교. (1930. 2. 23. 최송설당 할머니께서 세우신 명문이다.)
2. 김천 농림 고등학교. (공립으로 알고있음)
3. 김천 성의 고등학교. (캐톨릭 재단에서 세움. 김수환 추기경님이 당시 교장이셨음)
4. 김천 시온 중학교. (장로교에서 세움)
5. 김천 여자 중 고등학교. (공립) 그렇게만 생각이 난다.
그 웅변대회에 나도 신청했다. 수도여중 1학년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3등을 한 경험이 있었다. 문제는 원고를 부탁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국강연을 한 내용에 살을 붙이고 '여러분' 하면서 단상을 '탁' 치니 1등이란다. 상품은 남자 어른의 가죽 가방이었다. 아버지께 보내 드렸으니 효도를 한 셈인가... 김천여고에 우승컵을 두번 안겨 주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상 생활에, 큰 변화가 왔다. 서울과 달리 김천은 시굴이라 그런가 내가 길을 가노라면, 남학생 들이 "여러분" 하면서 주먹을 내리치는 시늉을 한다. 처음엔 당황 했지만, 감수 할수밖에...
나는 그때 황금동 교회에 나갔고 학생회도 참석했다. 어느날 김천 기독학생 연합회가 발족되어 총회날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임원선거를 할때의 일이다. 회장으론 김천 고등 학생이 되었고, 내가 부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주최측에서 생각해둔 여학생이 따로 있었는데, 바로 내친구 배영길이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아주 믿음이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김천 시내 학생들은 내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
내가 살던 자취방은 김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예쁜 꽃나무들이 둘려 있는곳 '구읍'이란 곳이다. 옛날에 원님이 살았던 곳이란다. 내가 학교를 가려면 농림고등학교를 지나가야 한다. 하루는 우리 여학생에게 농고 학생이 등뒤에서 잉크를 뿌렸다. 다행히 나는 조금 묻었지만, 괘씸해서 복수를 시도했다. 토요일 오후에 농림학교 간판을 떼어 논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에 간판 찾느라 야단이 난 모양이다. 얼마후에 만져보니 단단히 못질을 했더라.
차츰 그곳 생활이 적응이 되어, 친구들이 '발자욱 크럽'을 만들어 직지사에도 놀러가고 또 중1때 남영동의 성남극장에 단체관람을 한 영화 '마음의 고향' (최은희 주연)을 촬영 했다는 청암사에도 놀러가고...
한가지 좋은 일을 한것은, 자취방을 학교 앞으로 옮기고 환경이 불우한 친구 송명희를 함께 데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쌀이 넉넉하여 염려가 없었다. 그친구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아주 친했다.
그즈음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우리반 반장인 이정자가 매일밤 홀애비 교감선생댁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너무 놀랐는데, 소문은 걷잡을수 없이 퍼졌다. 의논끝에, 대표로 정의파 세명이 나섰다. 임봉이. 변복수. 박정순 이다. 첫번째로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이런 일은 용납할수 없다. 해서 동맹휴학 을 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선언을 했지... 갑작스런 소식에 교무실에서 난리가 난것같다. "동맹휴학은 절대 안된다." 설득 작전을 쓰다가 협박도 해 가면서... 굽히지 않았다.
교감의 작전이었나 김천 경찰서에서 우리 세사람을 출두하라고 통지가 왔다. 내가 경찰을 향해 외쳤다... "윤리 도덕의 나라에서 있을수 있는 일이냐 당신들도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아니냐"... 따졌다. 결국 그들도 할말이 없었다. 학교는 조기 방학을 했으나 나는 이일이 마무리 안되어 집으로 갈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우리는 선동죄로 퇴학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났다. 나는 학교의 이사장이신 홍윤식 어른께 밤에 찾아가 역설하고 돌아오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테러를 당할것 같기도 하고..... 개학전에 결말이 났다. 미술가이신 최근배 교장님께서 학생들을 희생 시킬순 없다 하셔서 이세우 교감님은 대구에있는 모 여고로 전근 가시고, 우리 친구 이정자는 안동여고로 전학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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