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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에 있었던 일은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폭발 후에 다시 폭발. 가장 무서웠던 칠흑같은 악몽보다 더 뒤에 있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타고 부상을 당했다. 숨쉬면 숨쉴수록 점점 호흡을 하기 힘들어졌다. 밖은 어두웠고, 우리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감에 빠져 지하 벙커로 대피했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은 짓밟혀지고, 수하물들은 버려지거나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잡혀져 구출되었다. 우리 가족의 쌍둥이 아기들은 바구니 속에 넣어 젖은 옷들을 그 위에 덮어 엄마가 손으로 붙잡았고, 우리는 사람들 뒤에서 사람들을 밀며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거리가 타는 것과 떨어지는 잔해, 무서운 화염폭풍을 지켜보았다. 우리 엄마는 물통에서 찾아낸 젖은 담요와 코트로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끔찍한 것들을 보았다 - 조그만 아이 크기만큼 타버린 어른 시체, 팔과 다리 조각들, 시체, 불타서 죽은 가족, 몸에 불이 붙은 채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피난민 시체가 가득 들어있는 불타버린 4륜 마차, 죽은 구조대원들과 병사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가족을 부르거나 찾는 장면,
그리고 도시가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 도시 어디를 가든 모두 불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화염폭풍으로 부는 뜨거운 바람 때문에 사람들이 이미 불타버린 집으로 돌아가서 그곳으로부터 대피하려는 것. 나는 이 끔찍하고 사소한 장면들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 ” |
— 생존자 중 한명인 로타르 메츠거의 증언 |
드레스덴의 사이렌은 오후 9시 51분 (CET)에 울리기 시작했다. 프레드릭 테일러는 '독일 주민들은 동쪽 하늘 어딘가에서부터 폭격기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무리 — 또는 "아인 디커 훈트" (뚱뚱한 개) 라고 그들은 불렀다 — 가 자신들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 저술했다. 9시 39분, 독일 항공방위대의 지도부는 그 상황에서 라이프치히가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드레스덴에 침입한 적의 항공기에게 경고했다.
9시 59분, 지방 항공공습방위대의 지도부는 폭격기들이 드레스덴-피르나 지방을 폭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테일러는 도시 전체가 무방비 상태였다고 저술한다; 밤중의 전투기들이 클로츠쉐 활주로에 있던 열 대의 매셔슈미트들을 으깨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적들이 공격 태세를 준비할 시간을 반시간이나 벌게 해주었다.
10시 3분, 지방 항공공습방위대의 지도부는 처음으로 완전한 경고 방송을 내보냈다: "경고! 경고! 경고! 적의 폭격기들 중 선두 전투기가 지금 도시 외곽으로 접근하고 있음."
재의 수요일인 2월 14일의 이른 아침, 도심부와 알슈타트를 포함한 지역이 1500 °C (2700 °F)가 넘는 온도의 화재 폭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 | 내 왼쪽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 여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팔에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기였다. 그녀는 달리다가 넘어졌고, 그 아이는 그대로 아치 문 안의 불속으로 날라갔다.
갑자기 나는 내 오른쪽에서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겁에 질렸고 손짓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며, 그 다음 — 나는 공포를 느끼고 경악했다 — 나는 그들이 스스로 순서대로 하나씩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훗날 그 불쌍한 사람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졸도했고 곧 불에 타서 재로 변해버렸다.
나는 때때로 미치도록 두려울 적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반복하고 새뇌긴다: "나는 불에 타서 죽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을 안다 - 나 스스로 타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 |
— 생존자인 마거렛 프레예의 증언 |
많은 사람들이 피신할 대피소를 찾았지만, 드레스덴의 방공호들은 수가 아주 적었다. 가장 넓은 드레스덴 역의 방공호는 6,000명만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의 공습 예비대책 중 하나는 일렬로 늘어선 건물들 아래 지하실의 두꺼운 벽을 제거하고, 얇은 칸막이로 벽을 대신해 비상시에 부순 뒤 들어가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건물이 붕괴되어 무너지면서 연기가 가득 찰 때, 인접한 건물로 대피해서 벽을 부순 뒤에 지하실을 대피실로 만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을때 사람들은 불타는 건물 지하실에서 쉽게 다른 곳으로 대피할 수 있었지만, 이 결과로 한 방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는데 실제로 도시 거리 끝에 있는 한 집의 지하실에서는 천 명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드레스덴 경찰은 곧바로 이번 공격으로 구시가지와 동쪽 지역에 화재가 발생해 거의 12,000채나 되는 집들이 파괴되었다고 통계를 만들어 발표했다. 리포트에는 이번 공습으로 24개의 은행, 26개의 보호 건물, 31개의 상점과 소매상점, 640개의 상점, 64개의 창고, 2개의 시장, 31개의 대형 호텔, 26개의 술집, 63개의 행정기관, 3개의 극장, 18개의 영화관, 11개의 교회, 6개의 예배당; 5개의 기타 문화재, 19개의 병원, 기타 병원, 그리고 개인 병원, 39개의 학교, 5개의 영사관, 동물원, 상수도, 철도, 19개의 우편 시설, 4개의 트램 시설, 그리고 19개의 선박과 유람선이 파괴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켐핀스키 호텔에 위치한 독일 국방군의 중요 지시 우편소, 19개의 군병원과 그 아래의 군 시설들도 모두 파괴되었다. 200여개에 달하는 공장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 136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차이스 회사의 정밀 광학기관 공장 포함), 28개는 중간 정도 피해를 입었으며, 35개는 약간 피해를 입었다.
영국 공군은 전체 중 23퍼센트의 산업 시설, 그리고 56퍼센트의 비산업 시설 (주거 시설은 포함하지 않음)이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78,000채의 집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27,700채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64,500채는 재건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종전 후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폭격 이후 드레스덴의 산업 재건이 아주 빨랐다고 의문을 표시하며 지적하기도 했다.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 (지시의 날) no. 47 ("TB47")에 따르면, 3월 22일에 다시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이라고 예상했다.
다른 보고서에는 4월 3일 집계된 시체 수는 22,096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시립 공동묘지에서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시립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은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 죽은 사람들에 의한 노동력 부족으로 매장과 화장을 할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시체들은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화장되기도 했다.
또한 이 집계는 다른 지역에서 매장된 희생자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는 분명치 않다. 게다가 1966년에는 재건을 위한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는 새로운 빌딩을 건설하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또다시 폭격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된 10,000구의 시체를 포함해서 당국의 권한에 의해 제외됐던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 된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서 깊은 도시는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다. 파리, 로마처럼 말이다. 드레스덴은 매우 유서 깊고 역사 있는 도시였는데, 그곳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산업지대 파괴를 위해서 영국과 미국은 드레스덴을 폭격했으며, 그 결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드레스덴(Dresden, 소르브어: Drježdźany, 고대 소르브어: Drežďany, 어원은 강변 숲에 사는 사람들, 문화어: 드레즈덴)은 독일 동부에 위치한 작센 주의 주도로 엘베 강변에 위치해 있다. 작센 삼각 대도시권의 한 부분으로서, 예로부터 독일 남부 문화·정치·상공업의 중심지이다. 문화 중심지로 유명하여 '독일의 피렌체'로 불리며, 특히 엘베 강변의 '브륄의 테라쎄'는 '유럽의 발코니'라 불릴만큼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