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운사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고창읍성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743m)을 둘러싸고 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1453년(조선 단종 원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이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버렸고
현재 북문 공북루, 서문 진서루, 동문 등양루와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풍화루, 내아, 관청, 향청, 서청, 장청, 옥사 등 일부만 복원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 고인돌
도산리 지역은 10%미만의 평지는 8.8%에 해당하는 2,975㎡ 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경사도가 10~30%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일대 고인돌군은 주로 경사도가 낮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상태이다. 토지 이용을 보면 전형적인 농촌 토지이용 형태로 남쪽에 논을 중심으로 한
농지가 분포하고, 북쪽으로 경사면을 따라 산림이 형성되어 있으며, 논과 산림의 경계선상의 완만한 사면에 취락과 밭이 동쪽으로 길게 분포하는데
고인돌은 산림과 농지 사이의 경계선상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이곳 방장산에서 비롯되는 하천은 선운사 일대를 끼고 북상하여 서해로 흘러 들어 간다.
이 하천이 고창을 빠져 나가기 직전, 그 입구라 할수있는 도산리(道山里), 상갑리(上甲里), 죽림리(竹林里) 일대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고인돌들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도 500여기가 넘으며, 그 양식 또한 여러가지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고인돌의 양식을 포함하여
변종이거나 조합적인 성격의 양식까지 보이고 있으며, 횡혈식 석실 봉토분(橫穴式 石室 封土墳)까지 고인돌 떼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어
한반도 고대 무덤의 야외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 영광[법성포]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소금에 절여 바위에 말린 조기의 맛이
너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면서 ‘결코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과 함께 자기의 옳은 뜻을 비굴하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이름 지어 진상한데서 유래됐다. 특히, 이자겸이 귀양살이를 한 영광과 법성포의 지명 이름을 붙여,
‘영광굴비’ ‘법성포굴비’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아가미 속에 가득히 소금을 넣고 생선 몸 전체에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아
2일쯤 절인다. 절인 조기를 꺼내어 보에 싸서 하루쯤 눌러 놓았다가 채반에 널어 빳빳해질 때까지
말린다. 한국연안에서 잡히는 조기류는 13여종 정도이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참조기와
수조기이다. 황석어(黃石魚)라고도 불리는 참조기는 몸 빛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며,
입이 불그스레하고 몸통 가운데 있는 옆줄이 다른 조기에 견주어 굵고 선명하다.
참조기와 모양이 비슷한 수조기(부세)는 참조기보다 몸이 가늘고 편평하며 머리가 몸체에 비해
크고 몸 빛깔이 황색이다. 수입 조기는 국산 조기보다 비늘이 거칠고 옆줄이 선명하며 목 부위가
회백색, 또는 흰색을 띠고 몸에 광택이 있다. 수조기나 수입산 참조기는 국내산 참조기보다 맛이
떨어지며 뒷맛이 개운하지 않고 육질도 단단하지 못하다. 특히 산란을 위해 3월 중순 영광 법성포
칠산 앞 바다를 지나는 참조기를 쓴 굴비를 영광굴비라 하며 가장 유명하다. 고려 17대 인종 때,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정주(지금의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이 뛰어나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한다. 그는 말린 조기를 보내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의미의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부터 영광굴비는 수라상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타 지역에서 소금물에 조기를 담갔다 말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영광굴비는 섶간이라 하여 1년 넘게 보관해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재는 것이
특징이다. 예전에는 "돈 실로 가세. 돈 실로 가세. 영광 법성으로 돈 실로 가세."라는 뱃노래가 있을 만큼
참조기 어업이 성행했었으나 이제는 참조기나 굴비 값이 올라 모양이 비슷한 수조기를 참조기로 속여
파는 일도 더러 있다. 좋은 굴비는 머리가 둥글고 두툼하며, 비늘이 몸통에 잘 붙어 있고 배나 아가미에
상처가 없다. 또한 특유의 윤기 있는 노란 빛을 띠고 있다. 보관시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 두고,
오래 두면 배에서부터 누런 기름기가 배어 나와 맛이 변하므로 적당한 시기에 냉장보관 한다.
찌게, 조림, 찜, 구이 등 다양한 조리가 가능하며 그냥 쭉쭉 찢어서 먹거나, 고추장에 재어두었다가 밑반찬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A와 D가 풍부하여 몸이 쇠약할 때나 야맹증,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
지방질이 적어 소화가 잘되므로 발육기의 어린이나 소화기관이 약한 노인에게도 좋다.
약성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강하거나 약하지도 않아 평이하며, 약간 단맛이 있고 전혀 독이 없다.
위(胃)에도 유익하며, 복창(腹脹 - 뱃속에 탈이 생겨 배가 답답하고 팽팽하게 부어오르는 병)과 폭리(暴痢 - 설사를 심하게 하는 병)를 다스리고,
식체(음식물이 체한 증상)와 기체(기가 약해서 생기는 신경성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