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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모두 3권, 윤홍식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2019.
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의 사회복지 제도의 <기원과 궤적>을 각 시대별로 그냥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 체제와 연관시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사회복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각 시대의 세계의 자본주의의 흐름과 산업의 구조 변화, 권력자원 문제를 논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사건들과 경제적인 경향, 사회적인 문제 설명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당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제도라고 하는 것이 정권과 자본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형성·발전되어 온 것이기에 그 관계를 논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발달에 있어서 시작 단계에서는 서구 사회보다는 많이 뒤쳐졌지만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 단계에서는 더욱 더 해외 자본시장과의 상호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에 다른 나라와의 비교연구도 필요하다. 대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에 관한 연구들이 국내 정치·경제에 대한 영향력 문제는 많이 다루었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흐름을 ‘딴나라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책은 그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책의 장점이자 업적인데 이 책을 쓴 저자(윤홍식 교수)의 노고는 엄청 많았겠다. 연구년이나 방학 때면 하루에 14시간씩 연구를 했고 그렇게 7년간 연구한 결과물이 전체 1800쪽에 이르는 이 책이라니 대단하다. 그러한 어렵고 방대한 작업을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최초로 수행하였고, 세계적인 그리고 다방면의 연구를 거시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 책은 두꺼워졌다. 나도 이런 방면의 거시적인 연구는 1980년대 말에 지금 서울시 교육감인 조희연 박사가 펴낸 ‘한국 사회구성체론 논쟁’이라는 책을 접한 이후에 처음이다. 이러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저자가 추구하는 복지국가를 향한 열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지극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찬사들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한국의 복지국가에 대한 수많은 저서 중에 이 책만한 역작(力作)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단언한다. 1970년대부터 박근혜 정부 말까지 150여년에 걸친 통사적(通史的)인 시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를 모두 다루는 통섭적(統攝的) 시각을 갖추었다는 점이 그 이유이다.” 이태수 – 꽃동네대학교 교수
“18세기부터 2016년까지의 복지 여정을 서술의 영역을 넘어 마침내 한국 복지국가 역사 연구라는 학문적 영역으로 진입하게 한 대담한 시도이자 문제작.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했던 헌걸찬 역작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그 변화의 궤적을 경제구조와 복지체제 그리고 권력관계라는 3축의 입체적 틀을 통해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됐다.” -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이 책은 1권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작 – 18세기부터 1945년까지
2권 반공개발국가 복지체제의 형성 – 1945년부터 1980년까지
3권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 -1980년부터 2016년까지
로 되어 있고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 별로 마지막 부분에 ‘정리와 함의’가 있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각 부분을 요약 정리하는 것은 불필요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통으로 사회복지를 연구하지 않은) 나로서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사회복지의 역사적 흐름과 경향과 논쟁을 거론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언급되고 있는 한국 복지국가 역사 단계에 있어서 그 흐름과 특징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과 문제 될 만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할 것이다.
1. 사회복지의 기원은 언제? 1870년대부터 시작?
제1권의 제6장 <전(前)자본주의 분배체제의 해체: 18세기부터 1910년 강제병탄까지>
이 장의 결론은 이렇다.
“새로운 경제체제는 변하고 있는데 (상품화폐 경제는 확대 발전 하는데) 이에 조응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분배체제는 형성되지 않았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0년 강제병탄까지 조선은 경제, 정치, 분배체제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헛도는 톱니바퀴 같았다.”
이 시기는 “환곡을 중심으로 한 자족적 분배체제가 해체·붕괴되어 갔지만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을 반영하는 새로운 분배체제는 아직 제도화되지 못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렇다면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을 어떻게 조선말에서 찾을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라는 것은 개인이나 가족이 누구를 사적으로 누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금으로 국가 시스템에 의해서 정교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인데 돈도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외세에 많이 흔들리는 저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의지와 여력이 있었을까?
이 책에도 환곡제도가 제도화 되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분배기능보다는 조세기능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제도를 복지국가의 기원으로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저자는 환곡제도의 병폐가 많아져서 많은 민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소개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기원을 환곡에서 보고 있는데 나로서는 전혀 납득하기가 힘들다.
제1권의 제7장은 “식민지, 강요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화, 1910~1945년: 반공주의와 민간 중심의 잔여적 복지체제의 시작”인데 이 장의 결론은 이렇다.
“일제는 여전히 친일 지주와 자본의 이해를 대변했으며 사회복지제도에서는 잔여적 수준에서 소수의 극빈층에 대한 임시적 구호로 일관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빈곤과 불평등을 방임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으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고 대륙병참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임금노동자들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가 구축해 놓은 복지체제는 지극히 제한적인 극소수의 극빈층을 위한 잔여적 제도에 머물렀다.”
있기는 있었다는 얘기인데 아주 미약하였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았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그것을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으로 볼 수 있을까? 일제의 조선 침탈의 주목적이 수탈이었을 텐데 특히 1930년 이후에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는데 극빈층의 구호에 얼마나 신경을 썼겠는가?
제2권의 제9장은 “대역전과 자본주의의 분배체제의 시작, 1945~1948년: 좌절된 혁명과 미군정체제하의 분배체제”인데 미군정 3년동안에 해방 직후의 좌익의 압도적 우위에서 우파의 압도적 우위로 재구조화 되었고, 남한이 그 당시에 대세였던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지주계급이 몰락하고 새로운 신흥 자본가그룹이 등장하고...
미군정은 어차피 처음부터 한시적인 주둔이고 지배였기에 광범위한 요(要)구호 빈민들에 대한 구호사업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8선 분단과 함께 월남한 사람들과 빈민들에 대한 공공부조 사업은 빈약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시대를 근대적 사회복지가 실시된 시기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저자는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을 많이 우리가 개항이 되고 새로운 상품이 팔려나가던 1870년대로 앞당기려 하는데 글쎄? 나는 다음에 언급하는 한국전쟁 후의 구호사업이 근대적 복지국가의 기원으로 본다.
3.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미약하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지주계급 해체를 가속화 시켰고, 지주계급은 1950년의 5.30선거 이전에 이미 해체된 상태였다” 225쪽.
북한에서의 농지개혁에 자극받아 어쩔 수 없이 진행된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지만 남한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지가증권의 액면가의 실질가격이 하락하여 소작인들이 큰 부담 없이 농토를 분배받아 자영농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지주계급은 해체 되었지만 남한에서(북한에서도) 고려시대 - 조선시대,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대표되던, 신분질서가 급격하게 무너진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고 사회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신분질서가 이렇게 단시일내에 급격히 무너진 경우는 없었다. 이 한국전쟁은 우리나라를 초토화하였고 우리 사회를 하향평준화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고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탄생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한국의 복지국가 형성에 영향을 미친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면들이 아주 세세하게 열거되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이 책 제10장의 제목이 “원조복지체제의 형성과 위기, 1948~1961년”인데 그 원조복지체제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도와주기 위한 해외원조(이 책에서는 ‘외원’이라는 단어를 사용)임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많은 원조물품이 직접 해외원조기관(특히 기독교)에 의하여 분배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제기반이 대부분이 파괴되고 취약하여 이 당시의 이승만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외원조 물품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학생 시절인 1960년대에도 초등학교에서 해외에서 원조된 밀가루와 옥수수로 만든 빵을 배급받아 먹었었다.
“1955년부터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이 전환되는 1958년까지 원조가 한국의 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세 수입보다 컸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은 그야말로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고자 그리고 그 후유증을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해외원조를 기반으로 상이군경을 도와주고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을 보호하는 제도와 시설이 많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인 1970년 즈음에도 고아원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것이 근대적 한국 복지국가의 태동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시스템이었는데, 웬만한 교과서도도 다 언급되는 이러한 사실들이 이 복지국가의 궤적을 꼼꼼하게 탐구한 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그 전의 미군정과 함께 그 이후에 우리나라가 반공국가로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반공국가의 기치(旗幟)는 제대로 된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고 노동운동을 방해하고 저자가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당연히 우리나라가 늦게나마 제대로 된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사회복지 궤적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꼭 필요한 것이었는데 다른 사건들은 세밀하게 추적하면서도 한국전쟁의 영향에 대한 언급은 없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일까?
4. ‘사적 탈상품화’와 ‘공적 탈상품화’ 용어가 부적절하다.
사회복지를 정통으로 전공하지 않았지만 십수년째 사회복지를 강의하고 있는 나로서도 이 용어들이 낯설다. 그래서 저자도 이 두 개념을 둘러싼 우리나라 사회복지 학회에서의 찬반 견해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탈상품화’란 “개인 또는 가족이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적절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시장에 대응하는 개념이며, 공적 탈상품화는 공적 연금, 실업보험, 건강보험 같은 사회보장제도를 의미하며 사적 탈상품화는 개인이 실업, 질병, 노령 등에 의한 노동력 상실에 대비하여 드는 개인연금, 개인보험을 의미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사적 탈상품화는 국가의 권유와 세제지원과 같은 제도로 정착되었고 이러한 사적 자산 또한 개인과 가족이 직면할 수 있는 위험에 대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에 특별히 ‘형용모순적인 개념’이지만 사회복지 분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세제혜택을 보기 위해 개인연금을 열심히 납부하고 있고 만약을 위해 (많이 가입하고 있는 실손보험은 안 들었지만) 암보험도 들고 있다. 언젠가 건강보험 관계자를 만났는데 개인이 가입하고 있는 사(私)보험의 1/10만 국민건강보험료로 더 내면 보장성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국민건강보험의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보험에 많이 가입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험아줌마’로 대변되는 이러한 사보험의 등장과 창궐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지만,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위험 대비가 개인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못할 때 적절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부의 편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고 사회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러한 개인 상품을, 그리고 개인이 시장에서 축척한 상품을 ‘사적 탈상품화’로 명명하여 사회복지 분야로 끄집어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사회복지를 ‘탈상품화’ 전략으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이 책의 그 부분을 나름 꼼꼼하게 읽은 지금도, 그리고 저자의 학문적인 열정과 신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에 다 공감하지만, 이 ‘사적 탈상품화’ 개념에는 여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5. ‘역진적 선별성’ 문제
사회복지 분야에는 사회보장(4대 사회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까지 포함하면 5대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복지서비스가 있는데 이 책은 그 중에 사회보장, 그리고 그 중에서도 국민연금에 초점을 맞추어 ‘역진적 선별성’(이 용어도 낯설다)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역진적 선별성’은 원래 사회복지라는 것은 가난하고 불우한 사회적 약자들이 혜택을 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오히려 거꾸로 탄탄한 직장과 많은 자산을 가진 자들이 수혜를 보는 사회복지 제도가 되었다는 개념이다. 이 책에서는 2권 “제11장 개발국가 복지체제의 형성, 1961 ~ 1979년”부터 3권 마지막 장까지의 사회복지의 궤적에서 줄곧 ‘역진적 선별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 개념을 중심으로 이 책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치밀하고 일관되고 설득력이 있어 반론이 있을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역진적 선별성’은 주로 사회보장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국민건강보험은 예외로 취급하여야 한다. 국민건강보험은 우리나라에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은 비교적 잘 정착되어 대부분의 국민들(특히 노인들)이 많은 혜택을 입고 있고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제도이다. 물론 이런저런 문제도 있지만 이 국민건강보험은 소득재분배 기능도 하고, 가진 자-못 가진 자, 직장가입자-지역가입자, 아픈 사람-건강한 사람간의 연대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어 역진적 선별성 문제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직장가입자에게만 소용 있는 제도이기에 어차피 ‘역진적 선별성’의 문제를 내포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이다. 국가에서도 취약한 지위에 있는 비정규직이나 영세자영업자에게는 사회보험료가 부담스러우며 가입을 강제하기도 쉽지 않다. 알바생들에게 고용주가 사회보험을 들어 주겠다고 해도 본인이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고용보험이 회사에서 강제로 퇴직을 당했을 때, 산재보험이 산업재해를 당했을 때 보상 받는 것이니까 아무래도 자영업자나 계약직-비정규직보다는 직장에 적을 두고 있는 정규직 직장인들에게만 주로 적용되고 그러니까 역진적 선별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방비상태에서 홀몸으로 감수하기보다는 보험의 형식으로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당연히 좋은 대책이지만 오히려 불안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에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저자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공감한다.
저자는 국민연금에서 나타나는 ‘역진적 선별성’을 우리나라 사회복지 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다. 물론 노후의 생활기반이 될 수 있는 국민연금제도에 처음부터 실업자나 자영업자, 가정주부, 노인들이 처음부터 배제되었고, 가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노후에 대부분의 노인들이 용돈 정도만 받고 있는 실정인데, 탄탄한 직장과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국민연금(직역연금 포함)을 포함하여 3중 4중으로 노후 준비를 하고 있어, 국민연금이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는 불평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고 우리 사회의 뼈아픈 현실이다. 그 기원과 궤적을 추적한 것이 이 책이고!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 제도의 예산은 급격히 늘어났고 사회보장뿐만 아니라 공공부조와 사회복지서비스와 관련된 제도와 시설은 아주 많아졌다. 그렇지만 사회보장 이외의 제도들은 ‘역진적 선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 혜택을 보려면 우선 관계 기관에 자신의 소득과 재산 상태의 열람을 허락하는 개인정보 열람동의를 하여야 한다. 이것은 재산과 소득이 일정 기준 이상이면 사회복지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제도적 의지이다. 공공부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사회복지서비스에서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학생들에게 지급되는 국가장학금도 소득분위를 엄격히 따진다. 우리나라가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를 시행하고 있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보육서비스만은 보편적 복지 지향).
사회보장제도 중에 국민연금이 노후에 중요한 소득원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불충분하지만 그 전에는 물론 60~70년대에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공공부조와 많은 각종의 사회복지서비스가 확대 시행되고 있어 가난한 취약계층들이 많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은 저러한 역진적 선별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하위 70%의 노인들에게 지금은 25만원씩(앞으로 매달 30만원씩. 모두에게 25만원씩 지급하는 것은 아니다.)을 지급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국민연금을 전혀 수령하지 못하거나(고령층 55세~79세의 54.1%) 받더라도 조금만 수령하는 노인들(연금수급자의 67.3%가 50만원 미만)에게 지급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회복지서비스가 민간(사회복지법인 포함)의 형태로 제공되고 있지만, 그래서 비효율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不正)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지만, 다 국가예산이 투입되고 사회복지 공무원의 감독 하에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복지제도들에게는 저자가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의 대표적인 문제로 거론한 ‘역진적 선별성’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복지의 70~80%는 사회보험을 통해 이뤄지고 20~30%만이 취약계층 복지나 보편적 복지다”하고 했는데 사회보험 중에서 국민건강보험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지금 점점 많아지고 있는 공공부조와 사회복지서비스(특히 보육비 지원)를 감안하면 전형적으로 ‘역진적 선별성’ 문제가 나타는 국민연금의 비중은 저 정도보다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나의 추측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회보장제도의 ‘역진적 선별성’ 문제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과도한(?) 주장이 자칫 지금 정착되고 있는 우리의 사회복지제도 전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켜 일상적인 저항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나의 우려가 기우(杞憂)였으면 좋겠다.
5. 사회복지 일자리의 특성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 민간 중심의 돌봄(보육 포함)시설 - 서비스 질 저하 -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 - 매우 열악한 노동조건 - 부정수급...
노인돌보미 사업이나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사업, 특히 노무현 정권에서 탄생하여 많이 정착된 노인장기요양보험 등에 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사회서비스의 확대와 함께 만들어진 (여성의) 일자리 대부분이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가 되면서 사회서비스 확대가 오히려 노동빈곤층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났다.”(381쪽)는 지적은 타당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보급되어 정착되어 가고 있는 저런 제도들에게 이런저런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지만 어차피 이제 문제들을 수정 보완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도 (가시기 싫어 하셨지만) 요양원에 모셨다가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요양병원으로 옮겼고 거기서 돌아가셨다. 나도 어차피 요양시설에서 내 삶을 마감할 가능성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모든 보육시설이나 돌봄서비스 시설들을 처음부터 공공기관화 하여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시설들이 처음 도입될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무원 증원과 관련된 재정문제는 큰 문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사회복지 분야는 정말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일자리가 최선의 복지’임을 감안한다면 사회복지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고 경제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사회복지 분야는 저임금이고 노동조건은 열악하다고 정평이 나 있지만 그래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열심히 보람 있게 일하고 있다. 지방에는 한국인 요양보호사가 부족해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은 사회보험료 인상이 답이겠지만 이것 또한 정치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평범한 진리: 더 많은 부담 없이는 더 좋은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다.
6. 계층의 ‘3중구조화’ 문제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양극화’라는 표현을 안 쓰고 우리 사회가 ‘3중구조화’되었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1)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이외에는 다른 소득원이나 자산이 없고, 불안정한 일자리와 낮은 소득으로 사적 자산을 축척할 수 없고, 공적 사회보험에도 배척된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 +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없어 엄격한 요건의 공공부조에는 매달리는 장애인-노인-아동-여성 등 취약계층
2) 안정된 직장과 임금을 바탕으로 부동산을 포함한 사적 자산을 축척하여 사적으로 사회위험에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공적 사회보험으로 이를 보완하는 계층.
저자는 이 둘 사이의 중간계급을 상정한다.
3) 중소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로 사회위험의 대부분을 공적 사회보장제도에 의존하면서도, 사회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사적 자산 축척할 여유가 없는 계층. 우리가 중산층이라고 말하는 계층을 말한다. 여기에 공적 사회보장에는 의존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계층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중산층이라는 제3계층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립적인 두 계급으로 나누는 것 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 계층에도 노후까지 무난하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 항상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셌지만. 그렇다면 이 계층을 또 나눌 것인가?
국민연금(직역연금 포함)과 같은 노후 소득을 포함해서 소득과 재산을 계산해서 전(全)국민을 어떻게 계층으로 나누느냐는 어려운 문제다. 대학생들이 혜택을 받는 국가장학금을 지급하는 기준에서 보듯이 소득과 재산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10단계로 나누어 사회복지혜택에 차별을 두는 방법도 있겠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보듯이 중간소득을 기준으로 나누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다. 저자는 위의 1) 2) 3) 계층이 우리 인구에서 대략 어느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 누구라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계층적 구조가 점점 고착되고 있다는 것과 그 중산층이 양분되어 양극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수저 흑수저 얘기가 그것이다. 중간의 은수저 얘기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공적인 사회보장제도조차 양극화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IMF사태 때에 우리는 우리 사회가 20:80 사회로 재편될 것이라고 했는데, 몇 년 전에는 미국 맨하탄 거리에서는 1:99 사회가 도래했다고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현대국가에서는 이러한 양극화 사회를 사회복지를 통해서 해소해야 하는데 사회복지 제도 자체가 문제가 많아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니 저자는 그러한 문제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애써 책을 발간했고 나도 그 책을 보고 이 글을 쓰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7. 그러면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저자는 기존의 재벌·대기업·수출 중심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맞춰 성장해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도록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십년간 걸어온 경로를 벗어나려고 할 때는 일정 기간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인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를 버텨낼 정치적 기반이 중요하다. 그래서 정치적 노동자계급과 진보적 시민단체 형성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 분배 이슈를 최우선으로 하는 복지국가에 동의하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조직, 진보적 시민운동단체, 복지국가의 건설과 확대에 동의하는 시민이 연대하여 복지제도의 변화를 가능케 하고 개혁을 지속시킬 정치적 주체인 진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추구하는 사민주의 계열의 정당일 것이다.
나도 사민주의 정당을 희망한다. 그렇지만 한때는 진보정당에 대한 기운이 왕성했지만, 지금처럼 진보정당의 기반이 취약해진 상황에서는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문제인 대통령에 기대하고 협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개량주의적인 태도로 보이나 문재인 대통령은 고(故)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변호사 시절에 부산에서 노동자들을 엄청 열심히 지원했으며 그 이후에도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각료들이나 민주당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예전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분들이 많으므로 민주당과 잘 협력하여 노동과 관련된 개혁입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와 노동문제 가지고 지금처럼 대립적으로 나간다면 앞으로 그 어떤 정부와도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없고 계속 안티세력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만큼의 개혁적인-민주적인-친노동적인 정부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그 어떤 정부도 우리나라 정치-경제 구조적 특성상 재벌-대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려 할 것이고 그것이 반(反)노동-반서민 정책이라고 매도할 수도 없다. 균형 있는 상생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계 쪽에 일방적으로 편들어 달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좌쪽으로 방향을 더 틀어서 사회복지를 확대해서 대책 없이 어렵게 살아가는 가난하고-늙고-아프고-소외된 계층에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재산과 소득이 많은 고소득자들과 대기업에 대한 증세가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 또한 정치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정치운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기에 답은 또 다시 ‘정치’인데 현실적으로 별로 기대할 수 없고 전망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정치 상황이기에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