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日暮途遠)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오자서(伍子胥)의 열전에 나온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의 평왕(平王)에 복수하기 위해 이미 죽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 300번이나 채찍질을 가하였다. 친구인 신포서(申包胥)가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오자서가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라고 말하였다.
요즘에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사소한 일에 매달려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더 크게 쓰인다. 한편으로 이런 말도 젊은 시절에나 와 닿는 말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곧 이 세상과 작별이 멀지 않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에서 오는 말인 듯싶다. 더구나 만추의 계절이면 마음도 바빠지니 무심한 세월에 대한 원망의 느낌도 더해진 셈이다.
엊그제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갔다가 귀한 「최용원」 친구를 만났다. 물론 서로가 근황은 들어서 알고 지냈지만 실제로 대면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옛날에 우연히도 같은 날에 각각 인접학교에 다니다가 편입 시험을 치루고 같은 학급으로 편성되어 친구가 되었다. 가끔 그의 집에 놀러가기도 하였는데 몰래 난생 처음으로 친구 아버지가 비장하신 꼬냑 술을 조금 딸아 마시기도 하였다. 우리 집보다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으며 집도 잘 가꾸어진 넓은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집안에는 묵향이 은은하고 각종 그림과 서예작품도 여러 편이 걸려 있었다. 묵직한 장서도 정돈이 가지런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친과도 교분이 두터운 분으로 당시 이미 서예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선생이셨다. 이미 우리 집에도 선생이 쓰신 지덕겸수(知德兼修)의 표구된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각 선친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고 적극적으로 성원하시어 둘이는 더욱 각별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한 친구 집이 있는 부암동 자택을 찾아 어른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이후로 많은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러니까 1971년 1월 초였다. 친구 선친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것이다. 아들의 친구이며, 친구의 아들이기도 한 내게 귀한 글씨를 준비해 두셨다가 면전에서 육사 입학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성명 및 낙관을 찍어 선물하셨다. 글씨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바로 표구하여 가보로써 지금까지 잘 보관하고 있다.
그 내용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 1720~1799)이 젊은 시절에 쓴 글이라고 한다. 어떤 어려움도 꿋꿋이 이겨내고 청운의 꿈을 이루길 성원하는 격려의 말씀이었다. 이후 오늘 까지도 마음에 간직하고 옛 선인들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지 않고 지내는 생활의 금언이 되고 있다.
한상고백 응생자(寒霜古栢鷹生子)
찬 서리 내리는 잣나무에 매는 새끼를 치고
설월공림 호양정(雪月空林虎養精)
눈 내린 빈숲에 호랑이는 정기를 기른다.
채제공(1720~1799)은 18세기 후반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정치가이다. 그는 영조대에 탕평정치의 수혜자로 문장과 실무에 두루 통하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영조의 명으로 요직에 진출하였다. 능력과 실무능력을 두루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정조대에는 남인의 영수로 개혁정치를 주도하여 적체된 영남 남인들을 조정에 수용하도록 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추사」가 일곱 살 때 입춘첩(立春帖)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나가다 이것을 보고 들어와 누구 집이냐고 물으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하였다. 대문에 붙인 글씨는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남정」 선생은 한 시대를 빛 낸 서예의 대가이시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한학을 배워 한문에도 능통하셨고, 국전에 3회 입선과 6회의 특선을 하였으며, 추천 및 초대 작가와 국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셨다. 일찍이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선생에게 15년간을 수학하여 수제자로서 필명을 떨친 분으로 이 땅에 처음으로 서예학과를 대학에 설치하셨다. 더구나 본인은 문인화(文人畵)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 분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신 분이다.
사실 문인화는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구비한 작가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낸다 하나 생각을 한문 시문으로 표현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한문을 예전처럼 익히지 않으니 스스로 시를 짓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은 잘 표현하고서도 한글로 시를 지으니 그 운치와 멋이 격에 떨어진다.
이따금 육사에 있는 『화랑대』의 현판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한 옛 선인들의 숨결이 새삼 가슴에 닿는다. 주지하다시피 『화랑대』 현판에 휘호한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선생은 당대의 명필가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서예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 중의 한 분이다.
바로 이 「소전」 선생이 일제 치하에서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가 일인(日人)의 수중에 들어가 있음을 알고는, 100 여 일간 끈질긴 설득 끝에 그 정성에 감복한 일인이 마침내 이 영원한 동양의 보물을 이 땅에 다시 되돌려 주도록 한 장본인인 것이다. 황금에 두 눈이 멀어 조상이 남긴 얼을 국외로 빼돌리는 요즈음의 작태와 비교해보면 우리 것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선생의 깊은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바이다.
여하튼 졸업을 하는 해에 후배들에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남정」 선생의 글씨를 받아 선물로 기증을 하였다. 벽면에 걸어두고 떠났는데 몇 해가 지난 후 교수부에 근무하면서, 그리고 다시 얼마가 지나 훈육관을 하면서도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생도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해보니 보이질 않아 구석구석을 뒤져보니 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바로 정비하여 제 자리에 둔 일이 있다. 문화재 급 유물에 대한 무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는데 지금도 건재한지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친구는 곧 선친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24년에 추모 행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라고 하였다. 「남정」 선생이 남긴 600여점의 유작은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 기증되어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친구의 동생 중 세 명이나 서울 미대를 졸업했다하니 선친을 닮아 우리 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그 정성에 깜짝 놀랐다.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하였으며, 후대들이 만나는 모임에 친구를 초대하기로 하였다.
문득 일모도원의 고사가 생각난 것은 웬 일인가? 아직 더 무슨 일을 도모할 것이며, 마음속의 온갖 번민과 미련을 왜 떨치지 못하고 있는가? 곰곰 생각하면 아직도 몇 가지는 정리와 마무리를 하여 후대에 누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에서 비롯된 발상인 듯싶다. 차라리 유유자적하며 여유로운 심신을 유지하는 것이 좋으련만 욕심이 앞서니 어찌 섶을 지고 불구덩이를 들어가려 하는 것인가! 스스로 반성할 일이다. (2022.11.13.작성/ 11.13.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