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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유학(儒學)사랑
- 꿈과 사랑을 아름답게 가꾸어 행복의 씨앗을 뿌리다 -
都 命 基(명예교수, 자연과학대학 화학과)
대륜중학교(!951~53년)에 다녔을 때가, 6.25사변 중이라 대구시 대봉동 미8군 주둔지(Camp Henry)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전자상점에서 정류자 역할을 하는 진공관을 구입하여, 호기심의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과학적 통찰력과 기술에 대한 관심은 부모님의 유전자로부터 받은 것 이라, 학창시절 동안 교육 환경의 다양한 변화 속에 과학자로서의 삶에 충분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모든 일처리와 판단의 행동은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으니,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의 깊은 뜻을 숙지(熟知)하고,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일에 몰두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故事를 마음속에 깊이 다짐하였던 사고(思考)가 ‘과학자의 꿈과 유학(儒學)사랑’으로 이어져, 과학자의 길을 걷도록 행복한 지름길로 인도하였던 같다.
그에 감화를 받아 과학자로서 행복한 지름길을 걸어오게 되었고, 퇴직 후에 사람다운 삶의 정신적 교훈을 심어준 유학세계에 들어가 유교경전(儒敎經典)을 살펴보았던 점을 함께 묶어 『’과학자의 유학(儒學)사랑』 이란 자서전으로 엮어보게 되었다.
I. 학창시절
龍 한마리가 한양으로 승천하려다가 금호강 물이 맑아, 머리를 강물에 담구고 그만 잠이 들어 누워버렸다는 전설의 고장, 와룡산(臥龍山 299m)자락에서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1910-1945)에 山水가 아름다운 와룡산 병풍바위에서 내려오는 병암골 옹달샘 정기(精氣)를 이어받고, 낙음공파(洛陰公派) 세거지(世居地) 西村에서 태어났다(丁丑.1937년).
일본이 중국의 난징(南京)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던 1937년이라, 나라 잃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삶은 어떠하였겠는가? ‘姓도 이름도 불러볼 수 없는 빼앗긴 사람’으로 참혹한 사회현실을 당하였을 때, 음력 11월 18일 저녁에 어머님은 담배 잎을 엮으시다가 저를 낳으셨다고 가끔 말씀해 주셨다.
고려왕조(高麗王朝)에서 정승으로 星山府院君(일명 漆谷府院君)에 封해진 上世祖 諱 陳 할아버지께서 팔거현(八莒懸)을 차지하게 되어, 본관이 1432년 세종실록 地理地에 팔거도씨(八莒都氏)로 기록되어 있고, 그 후 팔거현이 성주목(星州牧)에 속하게 되어 성주도씨(星州都氏)단일본으로 이어져 왔다. 족보상에 기세조(起世祖: 1 世祖) 順字할아버지로부터 16대손 우후공(虞侯公) 흠조(欽祖) 할아버지로 이어지고, 17대손 元國, 元結, 元亮, 元禮 4형제 중 셋째 참판공(參判公) 원량(元亮) 할아버지께서 18대손 翠厓, 逸庵, 洛陰 3형제를 낳으셨는데, 그 중 막내 할아버지(洛陰 諱 慶兪)가 와룡산 자락 서촌(西村)으로 우거하시어 洛陰公派 세거지(世居地)로 이어왔다.
척박(瘠薄)한 토질이었지만 산수 좋은 와룡산 정기를 이어받고, 아버지 諱 炳字洪字‧ 어머니 朴蓮伊 사이에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외가는 유학자 槐軒 郭再謙(1547~1615년)의 후손이고, 저의 외가는 菊潭 朴壽春(1572~1652년)의 후예이다. 따라서 가계 혈통을 살펴본다면, 유가풍(儒家風)의 유전자(遺傳子)를 받아, 한건(旱乾)한 토질이었지만, 높이가 299m 정도의 아담한 와룡산 아래 병풍바위 틈 속에서 흘러내리는 옹달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먹고, 자연을 벗 삼아 자라게 되어 과학적 탐구력을 함께 하였으니 행복하였다.
여기서 자라면서 체득한 마음가짐에서 인내심(忍耐心)을 갖고,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올바른 실천을 수행하였던 일을 기억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와룡산에서 소치는 목동의 생활 속에 스스로 체력을 단련하였고, 6.25사변 중에는 잠시 대구시 칠성동으로 피란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인민군이 칠곡 다부동까지 내려왔던 1950년 7월 말 경이라 기억된다. 그 전란 중에 다부동에서 인민군이 쏘아올린 포탄이 대구역 근처 잠시 피란 갔던 곳으로 떨어져, 그 파편이 날아와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지금 회고해 본다면 하늘이 도와 살아남게 되었던 일이라, 어린나이의 가슴속에서는 6.25의 참상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6.25사변(1950.6.25.~1953.7.27) 중에서도 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부모님의 교육열은 소학(小學)에 나오는 ’쇄소응대(灑掃應對)‘의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 주셨다. 특히 3년 동안 고향 서촌에서 수성동까지 왕복 30km를 다녔던 일은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집념과 인내 속에 극기력(克己力: self mind control)을 길러 주었으며, 대륜중·고등학교의 교훈인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남을 사랑하자’라는 가르침에 중·고등학교시절을 보냈으니, ‘사람답게 살아오는 행동강령(行動綱領)’으로 실천하며, 평생 동안 좌우명(座右銘)으로 담아두고, 인내(忍耐)와 긍지(矜持) 속에 살아왔기에 오늘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6.25사변 후 후방 방위를 위해 50사단이 고향 땅에 주둔하게 되어, 부모님이 혼신의 힘으로 마련하신 옥토가 군에 징발 당하고 말았다. 농사일에 전념하셨던 부모님이 땅을 잃고 나니, 집안사정은 갑자기 가장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대학까지 보내 주셨으니, 최선의 힘을 다하기 위해 ‘숙흥야매(夙興夜寐)’ 속에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정신을 실천하며,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하늘이 도와주었던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1957년 3월에 입학하여 1961년 3월에 졸업하고, 부산으로 교사 발령을 받아, 1961년 5. 16 군사정변을 맞이하였다.
II. 교직생활
여기서 또다시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군 입대를 하여 최전방 강원도 양구지역에서 북방 대성산을 쳐다보며 포병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늘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인내로써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극기력을 키워 지냈던 일들이 생활의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마다, 큰 교훈으로 작용하여 군 생활을 무사히 마감하였다. 제대하여 모교인 대륜중‧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들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실천하였던 결과라 생각하였다. 특히 은사님과 함께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하게 된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교사로서 책무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그 후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선생님들에게는 못난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제자들에게는 선생이기 이전에 스승이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다짐이 저의 가슴을 꽉 채우게 되었다.
교사로서 근무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철학에서 동방의 탁월한 민족저력을 강조하면서 문교행정의 교육목표로, 과학입국(科學立國)을 강조하였던 시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발맞추어 과학전람회에 학생들과 함께 탐구한 결과를 출품하였다. 또한 동아리 활동에서 과학실험으로 항공반을 지도하여, 전국 모형 항공기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는데, 21세기에 주목을 받는 드론의 초보기술을 습득하여 하늘에 모형항공기를 날렸던 기억은 창조성이 살아 숨 쉬는 실천교육을 지도하였다고 자부심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흥미를 느껴, 학문의 수준을 더욱 높이기 위해 1967년 3월에 (구)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대학원 화학공학과에 진학하여, 21세기 전자산업의 효시(嚆矢)가 되었던 반도체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거두어 1969년 2월 영남대학교[(구)대구대학과 (구)청구대학의 통합] 화학공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공학석사(工學碩士)를 받아 신설 영남대학교 화학과로 옮겨 전임조교로부터 시작하여 교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III. 대학 교수 생활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 재정사정은 어려워, 연구용 과학기기가 없어 유리기구로만 학생지도를 하였던 시절이라,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연구는 쉽지 않아, 대우 (故)김우중회장의 말씀처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집념 속에, 공자의 말씀이신 ‘서자여사부주야불사(逝者如斯夫晝夜不舍: 조금 다른 의미로 표현한다면 ’학문의 연구에서는 흐르는 저 물과 같이 쉼이 없이 계속하여야 한다‘는 뜻임)’라는 故事를 생각하며, 가정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 故事에 나오는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큰 기러기와 백조의 마음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 연작안지 홍곡지지)’라는 진섭(陳渉)의 故事를 꿈으로 갖고 있던 차에, 1965년까지 막혀있던 일본과 대한민국의 문화교류를 실시하게 되어,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는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6남매를 집 사람에게 맡겨 두고, 1972년 4월 1일에 나 홀로 일본 동북대학(Tohoku Uiv.)으로, 2년 유학기간을 정하여 떠나게 되었다.
이때 떠오른 생각은 부모님에게 그동안 효도하지 못하였던 점을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은 박사학위를 받아 부모님 앞에 큰절을 하고, 인사드리는 일이라 마음을 먹고, 김포에서 일본 항공기(JAL)에 몸을 실어 하네다 공항에 내렸더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동경에서 1주일간 머물다가 일본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모리노야마(숲속의 도시)인 센다이(仙臺)에 도착하였는데, 하루가 24시간이지만 25시가 있다고 생각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숙흥야매(夙興夜寐)’의 정신을 살려 연구에 몰두한다면,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성현의 말씀이 있듯이, 어떠한 어려운 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연구실에만 매달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훌륭한 지도교수를 만나 하늘이 감탄하였던지, 2년 6개월 만에 동북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1974년 9월 26일). 귀국하여 교수로서의 직분에 충실하여 많은 석사, 박사를 배출하고 학맥을 형성하면서 과학자로서 즐거운 학문 생활에 전력을 투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자여사부주야불사(逝者如斯夫晝夜不舍)’의 정신을 머리에 담아,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를 보다 더 충실히 하기 위해, 일본 나고야대학(1979.4~1980.1, 연구교수), 일본 동경공업대학(1988.4~1989.1, 초빙교수), 미국 Washington 주립대학(1999.7~8, 교환교수) 등에서 연구 기회를 가졌고, 독일 Heidelberg대학(2002.7.10.~7.26)과 중국 난징대학(1999.10 3.~13) 등에서의 학회발표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공동 연구와 정보교류 및 인간관계 형성을 아름답게 하게 되어 상당한 기간 E-mail을 주고받으면서 과학자로 교수생활을 하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가끔 논문을 투고하라는 외국학회의 연락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 연구 환경의 비열함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동경공업대학(1988.4~1989.1)을 다녀온 후 그 동안 갈망해오던 연구시설의 필요성에 따라 1991년 공동기기센터 소장을 역임하였을 때, 3억 원이라는 거액을 학교에서 지원받아 분석기기로 독일제 300MHZ NMR을 전국 대학 중에 네 번째로 구입하여 연구 환경을 개선할 수 있었다. 학장 재임시절에 과학관 증축, 그리고 전국 대학평가(화학과)에서 15위 이내로 들어가는 등, 위상을 높였던 일은 대학 근무 중 가장 보람된 일로 기억 되며, 대구광역시 문화상(학술분야)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저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도와준 많은 제자들 덕분에 어느 정도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결과로 판단되었고,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吾道一以貫之’의 깊은 뜻을 알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결과라 생각하고, 행복한 일로 남겨지게 되었다.
IV. 유학(儒學) 세계의 아름다움
그동안 과학자인 동시에, 교수로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퇴직 후에는 사람다운 삶의 기본인 儒學世界에서 윤리도덕성을 강조한 ‘극기복례위인자(克己復禮爲仁者)’라는 성현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 고향에 있는 병암서당에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明心寶鑑)등을 구경하였던 일을 떠 올리기도 하는데, 마침 종사의 책임을 맡게 되어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되신 12代祖 취애공(翠厓公) 應字兪字‧ 낙음공(洛陰公) 慶字兪字의 行狀을 읽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여기에 인용된 四書와 經書에 나오는 성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너무 어려워 대구향교에 들려 一軒 李完栽교수님의 儒學과 유교경전(儒敎經典)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퇴계(退溪) 선생이 강조하셨던 敬 哲學(整齊嚴肅, 常惺惺, 主一無適)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四書(論語, 大學, 孟子, 中庸)와 聖賢의 말씀 중 감화를 받았던 내용을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의 정신으로 읽어 보게 되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해한다.
1. ≪論語≫
(1-1)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 이면 不亦君子乎아(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공부함이 때를 맞춰 공부한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 지 않는다 해도 화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1-2) 顔淵이 問仁한되 子曰 克己復禮爲仁이니라(안연이 인에 관하여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였다. ‘자기 자신을 이겨가며, 욕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仁이니라).
(1-3) 曾子曰 君子는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이니라(증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학문을 가지고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하여 仁을 돕는다).
(1-4) 仲弓問仁한대 子曰, 出門如見大賓하고 使民如承大祭하며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 在 邦無怨하며 在家無怨이니라(중궁이 仁에 관해 물으니, 공자가 말씀하였다. 문밖으로 외출 할 적에는 누구라도 만나면 귀중한 손님을 존경심으로 대하듯 하고, 높은 자리에 있어 백 성을 부릴 적에는 마치 큰 제사를 받들 듯 하고, 내가 하고자 하지 아니 하는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조정에 있어도 원망하는 이가 없으며, 집에 있어도 원망 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라).
2. ≪大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바르게 행동함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할 강령(綱領)으로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을 살펴보았다.
(2-1) 삼강령(三綱領):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
(2-2) 팔조목(八條目);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3. ≪孟子≫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게 되는 모습(浩然之氣)처럼 인간사회에서는 사람의 마음도 상호간에
이해하며, 천심으로 소통이 잘되는 사회로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4. ≪中庸≫
서경대우모(書經大禹謀)및 논어요왈(論語堯曰)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왕위를 전할 때, ‘윤집궐중(允執厥中: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하라는 한마디로 치세(治世)의 모든 방편과 적통성을 부여했다. 그 후에 순(舜)임금께서 우(禹)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실 때, 그 ‘윤집궐중’이라는 한마디 앞에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생각하고, 한결같이 행동하라)’이라는 세 마디를 보태어 네 마디로 만들어 전하였다고 한다.
5. 아름다운 성현의 말씀: 故事成語
(5-1)은악양선(隱惡揚善)
유교경전(儒敎經典)에 관심을 갖고 성현의 말씀을 읽어 볼 기회를 갖게 되면서, 우리 모두 사람다운 행동, 즉 본성을 살려가며 윤리도덕성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마저 무너지고 있음에 우려되는 바가 심하였다. 여기서 중용에 나오는 ‘은악양선(隱惡揚善, 은오양선으로 읽는 경우도 있다)’ 즉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좋은 점을 본 받는다’는 故事成語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경제나 사회가 어렵고 혼란할 때일수록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위정자는 선량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함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그 방법에서 중용(中庸)에 나오는 ‘은악양선’의 故事成語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 오래도록 농경사회를 거쳐 오던 중, 위대한 통치자의 영도력에 힘입어 산업화 및 민주화를 거쳐 오다보니, 개인주의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시대로 접어들어, 더욱이나 4차 산업화시대, 즉 인공지능시대(AI)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으니, 앞으로 사람다운 인간세계는 어떻게 되겠는가? 걱정이 머릿속을 맴돈다.
(5-2) 갱난여수(羹爛汝手)
후한서(後漢書) 유관전(劉寬傳)에 나오는 故事로, 小學 善行篇과 『慕堂日記와 慕堂(孫處訥)文集』에 기록된 사실을 알고 읽어보면서, 자신의 삶을 크게 반성하게 된 동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즉 ‘羹爛汝手’란 더불어 사는 삶에서 상대편을 배려(配慮)하고, 용서(容恕)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함께 가지면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道理라 생각하였다.
‘羹爛汝手’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당시에 朝廷에서 신랑 유관(劉寬)이 성품이 溫和하면서 信望이 두텁다는 말이 많이 떠돌아, 부인이 어느 날 신랑의 성품(性稟)을 시험하기 위해, 하녀(下女)를 시켜 출근하는 신랑의 관복에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쏟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신랑은 태연자약(泰然自若)한 모습을 취하면서, 오히려 엎어진 국그릇에 당황하는 하녀를 보고, ‘네 손이 국에 데지 않았느냐(羹爛汝手)’며 위로하였다는 말씀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생각하며 상대편을 배려하고, 용서(容恕)하는 마음을 찾기 어려운 오늘날의 사회현실을 바라보았을 때, 크게 감화를 받게 되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어떻게 하였던가? 스스로 묻고 크게 반성하였다. 지금까지 제시한 성현의 말씀을 머리에 담아 여생에서도 행동함에 신중을 기하면서, 큰 교훈으로 가슴에 새겨두며, 귀중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 실천하려고 한다.
6. 특히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故事成語
(6-1)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과 〈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 라는 聖人의 말씀을 생각하며, ‘일이관지’란 깊은 뜻을 통찰(洞察)하여 보았는데, 특히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故事成語로 생각되었다. 하나의 이치(理致)로써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며, 물질에 대한 숨은 진리를 탐구하게 되었던 점은 ‘학문을 벗 삼아 살아온 인생’을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6-2)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나오는 숙흥야매(夙興夜寐)의 교훈을 정신으로 담아, 과학자로서 국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과학기술 개발의 지름길을 걷기 위해, 용감하게 선진국 유학에 꿈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사마천사기(司馬遷史記)의 ‘陳涉世家(陳勝)편에 나오는 제비와 참새가 어찌 두루미와 고니의 뜻을 올바르게 알리오(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는 故事成語의 진의를 성찰하여, 대망(大望)의 꿈을 가슴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창조력을 살리는 데 노력할 수 있었던 점은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살리도록 노력하고, 매진(邁進)하였던 일로 나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Ⅴ.마무리
과학자로서 살아온 교수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직 후에 문중활동을 하게 되면서, 종사에는 儒學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향교에 나가 일헌(一軒) 이완재(李完栽) 교수님의 유교경전(儒敎經典) 강의를 듣게 되었던 기회는 나를 행복의 지름길로 인도해 주었던 같다. 이 때 퇴계(退溪)선생님의 敬(整齊嚴肅, 常惺惺, 主一無適)哲學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敬)공부의 실천성이란 첫째로 정재엄숙(整齊嚴肅), 즉 몸과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마음의 중심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로 상성성(常惺惺), 즉 마음 공부나 사회 현실을 생각할 때, 언제나 눈초리가 초롱초롱하게 밝게 깨어 있어야 할 것이고, 셋째로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하여,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열중하고, 동시에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의 올바른 실천을 함께 하였더니, 과학자도 선비다운 삶에 충실하게 되었던 같았으며, 과학실험을 하면서도, 언제나 유학의 계시(啓示)가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는 과학자로 살아온 나의 삶에서의 마음가짐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사람다운 삶을 지향하는 가운데 ‘은악양선(隱惡揚善)’이란 故事成語에 크게 감화를 받게 되었다.
2022년 7월 7일 와룡산 아래 병암서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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