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냥을 만들고 팔던 고사리손, 성냥으로 떼돈번 큰손
한겨레 :2017-06-09 20:32수정 :2017-06-09 20:42
[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12) <성냥팔이 소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출간된 1845년은 감자마름병이라는 대재앙이 유럽을 휩쓸어 곳곳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때다. 도시의 가난한 집안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성냥팔이 소녀>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으로 꾸준히 재탄생했다. 위키피디아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한 해의 마지막날.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소녀가 추위에 떨며 성냥을 팔았다. 집집마다 창틈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해어진 옷을 걸쳐 입은 소녀는 애원하듯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다가섰다. 하지만 마차는 쏜살같이 지나쳤고 소녀는 길바닥에 넘어져 신발이 벗겨지고 말았다. 건너편에 있던 작은 사내아이가 냉큼 뛰어와 소녀의 신발을 낚아챘다. “아이, 추워.” 소녀는 맨발을 동동 구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성냥을 내밀었다. 아무도 가엾은 소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너무 추워 안되겠어.” 모퉁이에 웅크린 소녀는 성냥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크고 멋진 방이 눈앞에 꿈처럼 펼쳐졌다.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식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위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불을 붙였을 때, 아름다운 색깔의 촛불로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소녀 앞에 등장했다. “와, 정말 아름다워라.” 그 순간만큼은 추위도 배고픔도 소녀의 삶에 달라붙은 운명이 아닌 듯했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45년 연말 세상에 나온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속 소녀의 모습은 안데르센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여러모로 닮았다. 1805년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은 아버지가 구두공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그나마 안데르센이 11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학교에서 간신히 기초교육만 마친 안데르센은 방직공과 재단사의 도제가 되어 일찌감치 노동의 삶을 몸으로 익혔다. 혈혈단신으로 코펜하겐으로 옮겨 잠시 연극무대에 섰던 안데르센은 우연히 대본을 가다듬는 재주가 눈에 띄었고, 이후 고전동화 번역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830년대부터 창작동화를 선보이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평생 150편 이상의 동화를 남긴 대표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주된 활동 시기는 대략 1835~1850년. 너무도 잘 알려진 <인어공주>(1837), <눈의 여왕>(1844), <성냥팔이 소녀>(1845) 등이 모두 이때 작품이다. 이 시기는 영국에 뒤이어 유럽 여느 나라가 그러했듯이, 덴마크에서도 산업화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1840년대 들어 덴마크 전체 산업노동력은 연평균 3% 이상 꾸준히 증가했고, 이런 바람을 타고 1820년대 0.4%에 그쳤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840년대엔 2.2%까지 높아졌다. 그렇다고 모든 게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빈민구제’ 패러다임의 변화
1845년 <성냥팔이 소녀>가 출간된 바로 그해를 유럽대륙은 오래도록 아픈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해 여름, 갑작스레 감자마름병이 중북부 유럽을 덮쳤다. 대재앙의 불길은 대양을 오가는 대형선박이 드나드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돼 순식간에 네덜란드와 독일, 덴마크로 번지더니 바다 건너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옮겨붙었다.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아일랜드의 감자 생산은 1년 만에 반토막으로 줄었다.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이 굶어죽고 200만명 이상이 고향을 등지고 이민 행렬에 나서야 했던 대기근(1845~1847)은 그렇게 벼락처럼 찾아왔다. 산업혁명에 앞섰던 영국이나 목축업 비중이 높았던 덴마크의 경우엔 외관상 수치로 나타난 경제적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다고는 하나, 도시 하층계급에겐 분명 고통이 배가됐다. 당장 영아사망률(출생아 1000명당)만 놓고 봐도 사정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감자마름병이 퍼진 이듬해인 1846년의 경우, 코펜하겐의 영아사망률은 무려 230명 선까지 치솟았다.
더군다나 세상살이의 이치는 예전 같지 않았다. “어떡하지? 성냥을 하나도 팔지 못했는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한테 혼날 거야.” 엄마처럼 다정했던 할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집엔 술주정뱅이 아버지뿐이었다. 소녀는 빵 한조각을 얻기 위해서라도 구걸에 가까운 ‘노동’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소녀의 비극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려는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었음은 분명할 터이나, 소녀가 맞닥뜨린 현실은 당시 유럽 주요 도시 빈민가정 어린이들의 삶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 세상은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이 전통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빠르게 휩쓸어버리던 대변혁의 한복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냥의 형태는 1844년 스웨덴의 화학자 구스타프 에리크 파슈가 ‘안전성냥’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을 계기로 등장했다. 사진은 경북 의성의 한 성냥공장에서 성냥개비에 자동으로 유황을 묻히고 건조시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무엇보다도,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과 ‘빈민구제’ 패러다임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난은 게으름 탓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 등 외적 요인에 의한 피치 못할 결과라는 의식이 외려 강했고, 빈민구제 역시 교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공동체의 당연한 책무로 받아들여졌다. 산업화는 모든 걸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1834년 영국에서 제정된 ‘신구빈법’은 이런 변화를 더욱 부추겼다. 영국 최초의 빈민구제 행정체계를 확립했다고 할 이 법은 그간 교구가 누렸던 자치권을 없애고 전국적으로 빈민을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하는, ‘복지의 중앙집권화’를 의미했다. 빈민이라고 하더라도 노동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엄격하게 나눈 뒤,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에겐 작업장 강제입소 등 노동 의무를 부과하는 조처가 뼈대였다. 이제 가난은 오롯이 자신의 잘못이자 책임일 뿐이라고, 세상은 가르쳤다.
평생 150편 이상 동화 남긴 안데르센
어린시절 가난·외로움 작품에 새겨
<성냥팔이 소녀> 출간된 1845년
감자마름병 대재앙 유럽대륙 휩쓸어인체에 치명적인 당시 성냥 제조공정
여공 파업으로 대중적 관심 끌기도
세계시장 75% 장악한 ‘성냥왕’ 크뤼게르
대공황 때 ‘피라미드 사기’ 드러나 몰락
<성냥팔이 소녀>에서 헐벗고 굶주린 소녀의 손에 들린 ‘상품’. 이쯤에서 화제를 성냥으로 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성냥은 모든 가정이 반드시 챙겨야 할 생활필수품이었다. 현대적 성냥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초. 백린(白燐)이란 물질이 쉽게 불이 붙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후 이를 제품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1826년엔 마찰열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마찰성냥’이 발명됐다. 하지만 초기 성냥은 늘 골칫거리였다. 작은 마찰력에도 불이 너무 쉽게 붙는 탓에 안전사고가 도처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스웨덴의 화학자 구스타프 에리크 파슈는 1844년 ‘안전성냥’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의 성냥이다. 특히 안전성냥은 인체에 해로운 백린 대신 적린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원래 백린 성냥은 제조과정에서 독가스를 내뿜는데다 피부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등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지닌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 10대 여공들이었던 성냥공장 노동자들이 건강을 해치는 산업재해가 비일비재했다. 1840~50년대 영국 내 성냥공장의 안전 실태를 다룬 근로감독 보고서가 숱하게 나온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까지도 백린 성냥은 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가 1888년 런던의 성냥공장 ‘브라이언트 메이’ 여공들의 파업이다. 10대 여공들은 하루 14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턱없이 낮은 급여를 받았다. 이들을 특히 분노하게 만든 건 백린 사용으로 인해 ‘인산 괴사’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 작업 환경. 언론 보도로 공장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자 경영진은 정보를 외부에 흘린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노동자들은 곧장 파업으로 맞섰다. 이 사건은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 웹 등 저명한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파업 지지 활동에 나서면서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고, 결국 런던 노동위원회가 개입해 근무환경 개선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마무리됐다.
현대적인 성냥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초로, 백린이란 물질이 쉽게 불이 붙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후 이를 제품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봤다. 위키피디아
1929년 기준 세계 3위의 부호
누군가는 거리에서 성냥을 팔았고, 또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성냥을 만들었지만, 성냥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람도 있다. ‘성냥왕’이라 불리는 스웨덴의 이바르 크뤼게르가 그 주인공이다. 스웨덴의 성냥산업은 1844년 안전성냥의 발명과 함께 시작됐다. 이듬해인 1845년 요한과 칼 형제는 남부도시 옌셰핑에 스웨덴 최초의 성냥공장을 세웠다. 목재와 광물자원이 풍부한 이 일대는 유럽 전체를 놓고 봐도 성냥 생산의 최적지로 꼽혔다. 스웨덴이 자랑하는 안전성냥은 곧 대표 수출품목이 됐고, 스웨덴 전역엔 150여 개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그중엔 크뤼게르의 아버지가 세운 공장도 있었다.
‘성냥공장집 아들’ 크뤼게르는 스무살이 되던 1900년 단돈 100달러를 손에 쥐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엔 미국과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오가며 부와 명성을 차곡차곡 쌓았다. 건축업으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은 크뤼게르는 고향으로 돌아와 중소 성냥업체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며 스웨덴 성냥산업 평정에 나섰다. 그 결실이 1917년 탄생한 스웨덴성냥주식회사(STAB)다. 원재료(자원)와 목재, 기계, 인쇄 등 관련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도 완성됐다.
크뤼게르의 장사 수완은 그 무렵부터 날개를 달았다.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각국은 복구를 위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크뤼게르는 각국 정부에 선심 쓰듯 돈을 꿔주며 그 대가로 그 나라의 성냥 생산·판매 독점권을 꿰찼다. 프랑스·폴란드·그리스·독일·유고슬라비아·헝가리·루마니아·터키·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멀리 라틴아메리카 대륙에도 손길이 닿았다. 크뤼게르의 ‘영토’는 단숨에 세계 성냥시장의 75%까지 확대됐다. 크뤼게르의 걸음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제지, 금광 채굴뿐 아니라 철도·은행·언론·영화 등 문어발식 무한확장은 계속됐고, 그는 1929년 기준 세계 3위 부호로 꼽혔다.
19세기 영국 런던의 성냥공장 여공들의 모습. 대부분 10대인 여공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작업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위키피디아
몰락의 시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사실 그의 쾌속행진엔 한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넘쳐나는 투자금을 끌어다가 여러 나라 정부에 빌려주는 자금 중개 노릇을 하면서 투자자들에겐 수익률 25%라는 미끼를 던진 것. 그가 세운 투자회사 ‘인터내셔널 매치 코퍼레이션’(IMCO)은 고수익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투자자들이 몰려든 탓에 7년 새 시가총액이 1100% 폭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세계 성냥시장을 한손에 쥐었다 치더라도 수익률이 고작 8% 남짓한 마당에, 25%(계약)와 8%(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은 사실상 ‘피라미드 사기’뿐이었다. 대공황 여파로 곤경에 처한 크뤼게르가 자회사 에릭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 사기극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급기야 크뤼게르는 1932년 3월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현실의 구원 대신 종교적 구원?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
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크뤼게르는 자산담보부증권(ABS)·차입매수(LBO) 등 현대적인 금융기법 개념을 구체화했고 차등의결권 제도를 주도적으로 고안한 장본인이다. 전후 잿빛 유럽대륙에 앞장서 투자의 물꼬를 텄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는다. 또다른 얼굴도 있다. 그가 남긴 빚은 당시 스웨덴 정부 예산보다도 많았다. 1930년대 들어 미국 월가에서 공시제도를 강화하고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칸막이를 치는 글래스-스티걸법을 도입한 배경에도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어른거린다. 경제학자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사기계의 레오나르도”란 딱지를 붙였고, 1932년 그의 삶을 각색한 <성냥왕>이란 드라마가 제작될 만큼 그의 삶은 ‘천재’와 ‘사기꾼’이란 두 단어의 묘한 조합이었다.
성냥불 연기 위로 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 한 영혼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란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녀는 다시 성냥불을 붙였다. 너무도 사랑했던 할머니가 눈앞에 나타났다. 남은 성냥 다발에 모두 불을 붙이자 할머니는 소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소녀는 뛰어가 할머니 품에 안겼고 할머니는 소녀를 품에 안고 빛이 되어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길모퉁이엔 소녀가 벽에 기댄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타버린 성냥 다발을 손에 쥔 채…. 어쩌면 외려 역설적인 방식으로 산업혁명기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려 했던 걸까? 현실의 구원 대신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의 길을 택한 <성냥팔이 소녀>의 끝자락 이야기는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소녀가 지난밤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는지 몰랐다. 새해 아침에 할머니와 함께 얼마나 행복한 나라로 떠났는지도….
하지만 소녀가 할머니와 함께 떠난 뒤에도, 하느님의 품에서 행복을 찾은 뒤에도, 분명 ‘소녀’는 여전히 남았다. 가난과 배고픔에 애처롭게 맞서는 거리, 위험한 작업환경과 장시간 노동에 짓눌린 공장, 도처에 ‘소녀’는 넘쳐났다. 어딘가에선 감자마름병으로 수백만명이 굶어죽어갈 때, 어딘가에선 훗날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성냥왕 등극의 작은 씨앗이 됐을지도 모를 공장이 지어졌다. 맨발의 소녀가 하늘로 떠난 그해, 땅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