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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행위에 내포된 것들
밥 먹듯이 책을 읽는다
다독가로 이름이 알려진 경우라 독서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책이 밥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날마다 밥을 먹듯이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일정이 없는 한 하루에 네다섯 시간 정도는 책을 읽지요. 어렸을 때는 재미 때문에 책 읽기에 빠졌고, 지금도 재미와 즐거움이 책 읽기의 큰 동기를 이룹니다. 책 읽기가 재미가 없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독서에 매달렸을 리는 없었겠지요.
책 읽기에는 일상에서 못 느끼는 기분 전환, 정신적 고양, 도파민 분출로 인한 열락감 같은 게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책읽기를 통해 내면에 잠재된 실존의 불안이 가라앉고, 탁월한 지적 명석함을 얻게 되지요. 독서 행위 속에서 무지에서 앎으로 자신을 밀고 나아가는 데 수반되는 짜릿한 흥분을 겪는데, 그 흥분이란 나보다 높은 존재에 내 존재가 쿵, 하고 부딪치면서 생겨나는 기쁨과 지적인 충격이겠지요.
제가 어린 시절의 잡독 수준을 넘어서서 비로소 체계를 갖춘 책 읽기에 나선 것은 스무 살 무렵인데, 주로 국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 등을 드나들며 책을 읽었지요. 그 시절 독서가 제 천직 같은 것, 혹은 운명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지 않는 삶이란 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배가 고프면 위에서 그르렁거리잖아요. 주변에 책이 없으면 제 뇌가 굶주렸다고 그르렁거립니다. 그게 좀 지속되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서 활자가 인쇄된 것이 무엇이든지 찾기 위해 두리번거립니다. 그 무엇에도 잘 중독되지 않는데, 제 유일한 중독이 바로 활자 중독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아프거나 죽지는 않아요.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은 없어요. 그래서 ‘살아가는 데 독서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만납니다. 책은커녕 신문조차 읽지 않는 사람도 드물지 않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핍과 부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래도록 책을 읽어온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책을 멀리 하는 사람은 겉은 멀쩡해도 참다운 인생을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겐 대개 자기 생각이라는 게 결락된 경우가 많습니다. 독서는 그 책에 담긴 지식이나 사상이 자신의 인격과 내면으로 스며들어와 생각이 쳘쳐지고, 자아가 확장되는 과정 그 자체이지요. 메이지대학 교수인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력』이란 책에서 독서의 효과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자신의 경험과 저자의 경험, 자신의 뇌와 저자의 뇌가 혼재해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독서의 참 맛이다. 이는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본질적인 부분을 공유해보는 것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그 안에서만 생각이 머문다면 정체성은 형성되지 않는다.//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의 형성에 보탬이 되지요. 사람들은 책 읽기를 통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 속 타인의 경험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키워나가는데, 거꾸로 그런 것들을 거울삼아 내 경험의 진정한 뜻을 들여다보기도 하고요. 독서란 나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 보탬이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독서를 통해 내 상상력과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이걸 바탕으로 자아를 구축하고,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게 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만일 사람으로 태어나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인격과 자아를 쇄신하고 확장하는 계기는 쉽게 주어지지 않아요. 어디 그뿐일까요? 뇌 근육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결국 쓰지 않는 뇌세포가 사라져 뇌세포의 개수가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몇 해 전 한 금융기업의 임직원 연수회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기업의 중간 간부들과 1박 2일 동안 함께 하면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임직원들 발표에서 자기 생각이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었거든요. 교육 수준도 높고 상당히 똑똑한 사람들인데, 한결같이 피상적인 어휘와 즉은 사유들, 제가 아니라 어디선가 빌려온 표현들을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 같아요. 특히 정치에 대한 생각을 말할 때 대중매체의 칼럼에서 읽은 진부한 견해를 마치 자기 생각처럼 말하더군요. 보수 미디어에 실린 칼럼니스트 의견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자기 의견인양 말하는 거지요. 우리 사회의 중추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토록 자기만의 사유 없이 산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들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소용돌이 치고 있을까요? 단순화하자면 넓은 집과 비싼 자동차를 사고 누리는 것,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부자 되는 것, 이런 류의 물질을 향한 과도한 욕망이 전부였는데, 생물학적 욕망과 목전의 필요에 국한된 인생의 목표 자체가 협소하고 부박해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천박한 실용주의적 가치관에 감염되고 말겠지요. 평생 먹고사는 것에만 매달리다보면 정말 찾아야 할 본질이나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는 한 걸음도 더 다가가지 못하겠지요.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저는 그들을 향한 연민과 회의에 빠졌는데, 그건 높은 연봉으로도 보상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불행에 삶이 감염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던 까닭이었지요. 안정된 직장과 고액 연봉의 수혜자인 건 분명하지만 자기 삶 배제된 노동-기계들로 살다가 죽는 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자기 업무에 통달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소통하는 법, 자신과 가족의 감정과 자아를 돌보는 법에 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잘 모르고 산다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게 또 있을까요? 과도한 업무에 혹사당하느라 자기를 돌볼 시간이 없으니 사는 의미가 흐릿해진 채로 산다는 건 비극적이겠지요. 그들을 가장으로 둔 가족은 행복할까요? 저는 그 질문에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 읽기는 제 내면 우주를 확장하는 것
책 읽기는 ‘지적 노동’이고, 노동이라는 점에서 인내와 수고가 따릅니다. 독서는 인내와 수고 둘 중 하나도 회피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숙련된 책 읽기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학습과 훈련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책은 잃어버린 본성을 일깨우고, 어둠 속에 있는 존재에게 인지의 빛을 비추는 도구지요. 그 빛이 무지에서 앎으로 걸음을 떼도록 우리 뇌를 자극하고 실행으로 이끌어가겠지요. 그리고 독서 행위가 내 안을 돌아보는 일도 수반하는 까닭에 책은 자기 반성적이며 성찰적인 매개물이라고 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읽은 책들이 내 사유의 우주를 창조한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우주 바깥으로 나가 살 수는 없지요. 우리는 오직 자기 우주 안에서만 숨 쉬고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제 우주의 경계를 더 넓게 확장하는 활동입니다. 자기의 우주가 넓어지면 그만큼 운신의 폭이 넓어지니 자유로워지겠지요. 저는 책 읽기야말로 제 우주를 발명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독서와 아예 담을 쌓거나 읽더라도 조금만 읽은 사람의 우주는 어떨까요? 아마도 독방 같이 협소한 공간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제 우주가 그런 좁고 누추한 곳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실제로 뇌 구조 자체가 변하거든요.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 구조도 바뀝니다. 이런 얘기를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이건 진실입니다.
런던 블랙캡(Black Cab) 택시를 모는 운전기사들은 도시 안의 어느 목적지로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런던에서 택시운전 자격증을 따는 게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택시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사람은 책 크기만 한 음성지도가 부착된 스쿠터를 타고 런던 거리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런던의 모든 거리와 장소들을 돌아다녀한다고 해요. 자격증 시험에만 몇 달, 그리고 자격증을 따는 데 소요되는 기간도 최소 2년이 필요하다고 해요. 굉장히 어려운 시험인 거지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신경과학자들이 어려운 시험을 거치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택시 기사들의 뇌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보려고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보았습니다. 일반인 50명과 택시 기사 50명을 뽑아서 뇌 구조를 견줘 사펴보았더니, 단 하나 기억을 관리하는 부분인 해마가 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해요. 일반인들에 비해 택시 기사들은 해마 후방 끝이 더 컸고, 전방 끝이 더 작았지요. 해마라는 부위는 인간과 동물의 공간탐지와 관련된 부위인데 그 부위에서 일반인과 런던 택시 운전사들 간에 큰 차이가 나타난 거지요.
여기서 간접적으로 유추해낼 수 있는 사실은 책을 읽을 때 우리 뇌는 바뀐다는 거지요. 제가 책을 50년 동안이나 읽어온 사람이니 제 뇌는 책을 이만큼 읽지 않은 사람의 뇌와는 다를 겁니다. 제가 남보다 책을 빨리 읽고, 많이 읽을 수 있는 흡수력이 커진 것 말고, 책을 읽는 방식도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손에 쥐고 읽는 동안 저는 독서에 친밀하지 않은 사람과 견줘 빨리 몰입 상태에 빠집니다. 책에 빠져 든 순간은 세상과는 멀어지다가 그만 책의 시공간으로 빨려들고 마는 거지요. 먼지가 가라앉듯이 죽음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근심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진공상태와 같은 고요 속으로 침잠하지요. 책이 내면을 다독이고 정화시켜줍니다. 또 자기 내면과 무자하게 만들고 제 안의 흐트러진 질서를 여미게 하지요. 책을 읽는 인간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변화가 지적인 부분이든 영적인 부분이든 자기 성장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독서 능력은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앨런 제이콥스(Alan Jacobs)는 《유혹하는 책 읽기(The Pleasures of Reading in an Age of Distraction)》에서 이 놀라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망막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좌측 후두측두 열구의 가장자리에 전달되고, 해독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곳에서 해독된 내용이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웃음을 유발하거나, 사랑하는 엄마와 이별해서 지극히 우울한 소년에게 단 몇 시간이라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책 읽기란 판독과 해석의 동시적 작동이에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활자가 인쇄한 단어들과 문장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봅니다. 편의상 눈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망막이고, 그 중심을 안와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빛에 반응하는 고해상도의 세포들이 밀집되어 있어요.
책을 읽는 건 바로 이 안와를 통해 불러들인 정보들을 판독하고 동시에 해석하는 행위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단어들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살펴보고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반추합니다. 이것이 뇌에서 일어나는 정보처리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앨런 제이콥스는 이것을 아무 마찰력 없이 굉장히 빠른 속도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광학적 춤”이라고 말해요. 책 읽는 사람의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 멋지게 표현한 것이지요.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좌측 후두측두 열구’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책을 읽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의 작동으로 성립됩니다.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는 《독서 만능(讀書術)》에서 이 두 가지를 “눈으로 글자를 쫓는 생리적인 면과, 문자들의 연속에서 의미를 짜맞추어가는 심리적인 면”이라고 설명하지요. 의미를 짜맞추어가며 읽는 심리 속도는 책의 지적 밀도와 수준으로 결정됩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지적 수준을 뛰어넘는 책은 그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 독서 유별난 습관은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접지 않는 겁니다. 제가 읽은 책은 대체로 깨끗해요. 사람들은 니런 저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엔 책을 읽을 때 접고 줄을 긋고 여백에 뭔가를 써놓기도 했어요. 헌데 갑자기 그게 무용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보다는 독서에 온전하게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각성한 거지요. 책을 깨끗하게 읽는 것은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 처음에 놓친 부분들을 새롭게 찾고 싶은 생각에서 빚어진 습관이었어요. 만약 책에 줄을 그어 놓으면 다시 읽을 때 그 부분에서 눈길이 멈추고 그 순간 사유의 지속성이 멈추겠지요.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독서는 생각과 느낌의 흐름을 따라가는 행위이지요. 책의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며 발생하는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중요합니다. 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순간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저는 책의 문장이나 구절에 멈추고 밑줄을 긋거나 메모나 접기를 하지 않아요.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관련된 분야의 책을 동시에 여러 권을 겹쳐 읽으며 크로스 체크를 해야 합니다. 한 주제에 대해 숙고를 해야 할 때 그 주제와 연관된 책을 다섯 권, 열 권씩 옆에 쌓아두고 읽어요. 각각의 텍스트에 담긴 지식과 정보들을 견주며 사유의 교집합을 찾고, 지식과 정보의 오류들이 없는가를 크로스 체크하는 거지요. 책 읽기를 하다보면 상호충돌하는 지식과 정보들이 드러나는데, 그럴 때 차이의 연원을 꼼꼼하게 따지고 맥락을 찾는 게 중요해요. 그게 균형 있는 관점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데 도움이 되거든요. 저는 이런 책 읽기를 ‘맥락의 책 읽기’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모든 책이 무오류일 거라고 단정하지만 사실 많은 책들이 잘못된 지식을 펼치고, 의도하지 않은 오류들을 유포합니다. 그걸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책 읽기를 통해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제 안에 쌓을 수가 있고요.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같은 분야의 책들을 크로스 체크를 하며 읽는 게 필요한 거지요.
독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프로세스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과 훈련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책을 읽으려면 “주의와 기억 그리고 시각, 청각, 언어 프로세스”(매리언 울프, 앞의책)를 작동하면서, ‘나’라는 존재 지평을 넘어가야 하지요. 넘어간다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의식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관점을 시도해 보고 거기에 동화되어 결국 이입(移入)하는 프로세스”(매리언 울프, 앞의책)를 가리키지요. 책읽기는 인류가 인지신경의 발달 과정에서 이뤄낸 기적의 발명입니다. 문자를 발명하고 책을 읽게 되면서 인류의 뇌는 크게 혁신되었지요. 책을 읽는 것은 “뇌 안에 이미 생리적, 인지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매리언 울프, 앞의책)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독서 행위는 어휘들을 읽고 독해하는 것 이상이 요구됩니다. 책을 이해하려면 “기초적인 주의, 지각, 개념, 언어 및 운동의 프로세스로 이루어진” 인지 수준(cognitive level)에서 “언어 정보와 개념 정보를 모두 연결한 뒤 당신은 각자의 배경 지식과 관여(engagement)에 기반을 두고 나름대로 고유한 추론과 가설을 생성”(매리언 울프, 앞의책)이 전제되어야 하지요. 뇌의 뉴런 회로들을 책을 읽기에 최적화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책읽는 뇌로 포맷되어야함을 뜻해요.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독서가가 추론을 하는 경우, 좌뇌와 우뇌의 전두 시스템이 브로카 영역 주변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게다가 사용된 단어가 의미론적, 통사론적으로 복잡할 경우 이 전두 영역은 측두엽의 베르니카 영역, 두정 영역의 일부분, 우측 소뇌와도 상호작용을 한다.”(매리언 울프, 앞의책) 그렇지 않고는 한 쪽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책을 읽을 때 자아라는 비좁은 울타리를 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책읽기란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가는 행위이지요. 책을 읽는 행위는 혁신적인 사유를 촉발시키고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하며 우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책을 한권씩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가지요.
어떤 책을 읽었다면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존재의 생물학적·인지적 형질이 미묘하게 바뀌어버려는 것이지요. 책과 읽는 주체 사이에서 역동적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텍스트와 인생의 경험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은 양방향적이다. 우리는 인생 경험을 실어 텍스트를 이해하고 텍스트는 삶의 경험을 뒤바꿔 놓는다.”(매리언 울프, 앞의책)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뇌의 역량이 커지고 생각과 감정은 성장합니다. 존재의 내적 형질이 바뀔 뿐만 아니라 내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까닭이지요. 아울러 책읽기는 치유와 정화의 힘을 줍니다. “오랜 기간의 혹독한 참회,/삶의 과오에 대한 각성, 그리고/오류의 끝없는 반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로렌스, 「치유」). 우울한가요? 따분한가요? 화가 나나요? 무력하다고 느껴지나요? 그때마다 나는 책으로 달려갑니다. 책읽기는 인생의 슬픈 터널을 지나서 의식의 고양(高揚)이라는 신세계로 가는 길이지요. 제가 읽은 책들이 살아서 나를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 해요. 이 가을 아침 가슴이 뛰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책을 읽어요.
글쓰기의 첫째 동력, 책 읽기
진정한 독서가라면 다양한 분야에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읽어야 합니다. 저는 문학이나 철학책만이 아니라 역사, 미술, 음악, 건축, 축구, 요리…… 같은 항상 광범위한 장르를 읽고자 합니다. 저는 독창적인 사유가 담긴 책들을 선호합니다만. 제 책 읽기의 중심축은 인문학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한정한다면 반쪽짜리 지식인에 머물고 말겠지요. 문학과 철학, 역사책들에 더해 자연과학, 우주나 천체, 진화생물학, 동식물의 생태 책들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하지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고 관심이 가는 주제들을 다룬 책들을 널리 구하고 읽다보니 독서와 관심의 저변이 자연스럽게 넓어졌습니다.
제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게 요리책이에요. 인류는 불을 다루고 불로 익힌 음식을 먹게 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어요. 소화가 잘 되면서 대뇌가 커지고 현생 인류가 만들어졌지요. 화식은 문명 발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핵심 요소에요. 무엇을 먹느냐, 그걸 어떻게 먹느냐를 따라가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요리하는 사람들이 집필한 책을 읽으면, 추상적이고 관념에 머물던 본질들이 감각의 형태로 드러나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제 생활을 돌아보면 밥 먹고 잠자는 것 빼고는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날마다 산책을 합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반드시 외부 공기를 들이마시며 걸으려고 합니다. 손목에 애플워치를 차고 걸으면 걷기에 소요된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고 에너지 소모량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깊은 잠과 얕은 잠의 시간, 잠자면서 뒤척인 횟수, 맥박 따위도 정확한 수치로 기록됩니다. 애플 워치의 앱에 컴퓨터와 연동되어서 이 정보는 주간이나 월간 단위로 업데이트 되어 기록됩니다.
제 서재엔 다양한 책들이 있지만, 저는 날마다 온라인 서점에 자주 들어가 새로 나온 책을 살펴보고 책을 주문합니다. 책을 주문해서 배송 받을 때마다 기대감에 차올라 설렘 속에서 흥분됩니다. 책과 책을 읽을 공간이 있더라도, 더 필요한 게 있어요. 바로 독서 주체의 건강이에요. 책을 읽으려면 신체 컨디션이 중요합니다. 하루 1만보 이상을 걷는데, 산책에서 큰 즐거움을 얻습니다. 제 글쓰기의 동력은 주로 책 읽기에서 나오기 까닭에 신체 조건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쓰는 거지요. 책을 읽으려면 척추를 수직으로 세우고 몇 시간 집중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어려서는 몸이 약했는데, 20대 후반 수영을 배워 몸을 꾸준히 단련했어요. 그리고 명상을 하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면서 기초 체력이 향상되었어요.
사실 감기 같은 병은 고마운 병이라고 생각해요. ‘감기’에서 ‘감’자가 ‘느낄 감(感)’자잖아요. 기운을 느낀다는 거지요. ‘그 동안 힘들게 고생했으니 감기는 이제 그만 쉬어라’ 하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몸의 흐트러진 리듬을 찾으라는 경고 신호인 거지요. 몸에 열이 난다고 해열제를 먹고 항생제를 투여하면 몸이 본디 가진 회생력이나 면역체계를 무화시질 수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몸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순응해야 합니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우선 물을 충분히 마시고, 잘 자고, 잘 먹고 쉬어야 합니다. 감기를 잘 앓고 나면 몸속 독소나 노폐물이 빠져나가 몸이 가뿐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아플 때 항생제 따위의 약에 의존하면 면역력이 떨어져요. 저는 되도록 해열제나 항생제 같은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병이 나면 휴식을 취하면서 몸이 병을 떨치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우리 몸은 충분한 자생력을 갖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삼십대에는 출판사를 꾸리면서 부득이 하게 음주도 잦고, 일에 미쳤었는데, 그때 무리를 한 탓에 잔병치레를 했어요. 사십대 이후로는 술을 거의 끊었고 담배는 본래 안 피웠고요. 사십대로 접어들며 노자나 장자, 동의보감 같은 책을 접하면서 동양의 양생법이나 체질론 따위를 공부하며 제 몸을 돌아보게 되고, 그 앎을 바탕으로 제 몸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지요.
제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를 가늠해봅니다. 나이가 들면 신체 능력이나 뇌의 융합력도 차츰 쇠락하고 말겠지요. 자연히 지력도 위축하겠지요. 언제까지나 책만 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과 동시에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죽기 전 한가롭게 빈둥거리며 누적된 경험과 삶의 두터운 연륜에서 산출된 숙고를 담은 지혜로운 책 한 권을 쓰는 게 제 소원입니다. 아직은 제 안에 활화산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계속 쓰는 한에서 제 삶의 리듬은 읽고 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책 읽기도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
책 한 권은 지식의 숲을 이루고, 어 나아가 더 큰 지식 생태계의 일부를 이룹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그 생태계 속으로 제 전 존재를 들이미는 것이지요. 또한 그 속에서 상상력을 확장하고 지적 모험을 즐기는 것이지요. 아마도 책을 집중해서 읽는 동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뇌에서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사람들은 문자를 해독하면 누구나 책을 다 읽는다고 생각하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책 읽기는 뇌의 복잡한 과정들이 동시에 작동해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에요.
텍스트와 접속하면 뇌가 활성화되면 작업 기억과 같은 주요 실행 기능과 추리, 유추 같은 이해력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독서라는 최종적인 행위가 빚어지는데, 그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면서 독해하는 과정 그 이상이지요. 그런 이유로 문자 해독자라고 다 책을 읽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려면 반복적인 학습과 훈련을 통한 복합적 사유를 견딜 수 있게 뇌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적 진화의 관점에서 책 읽는 뇌에 대한 이해는 더 말할 필요는\도 없겠지요. 인지신경과학자로 유명한 메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프루스트와 오징어(Proust and The Squid)》에서 이렇게 말해요.
//지금은 독서하는 뇌에서 디지털 뇌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과도기이다. 따라서 독서를 하기 위해 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인간의 사고와 감성과 추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아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독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화했는지, 아이가 독서를 어떻게 학습하는지, 독서 때문에 뇌 안의 생물학적 기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해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지적 동물의 불가사의한 복잡성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적 능력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은 두 개로 나뉜 대뇌반구를 가졌고, 이것들은 각각 다른 방식과 체계로 작동하지요. 좌뇌는 논리, 언어, 정돈 능력, 순차적 시간 인식, 산수 등의 능력으로 특화되고, 우뇌는 시각적 이미지, 공간적 관계, 얼굴이나 패턴 인식, 몸짓, 비율 등을 처리하는 능력이 더 우세하고 특화되지요. 쉽게 설명하자면 좌뇌는 단어들과 숫자들을 통해 생각을 펼치고, 우뇌는 3차원 공간의 그림이나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생각을 펼치지요. 이것은 아주 투박하게 그 특징들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고요. 언어활동이 좌뇌에 한정된 능력이 아니라는 연구도 있어요. 우뇌도 좌뇌와 다른 특별한 언어 기능을 갖고 있다는 거지요. 단어의 함축적 의미 같은 언어의 비문자적 측면에 대한 감수성은 우뇌가 더 우세하다고 합니다. 언어활동 역시 양쪽 뇌가 협업을 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토머스 웨스트(Thomas G. West)의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람(n the mind’s eye)》라는 책이 이런 내용이 언급되는데, 결론적으로 좌뇌는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생각하지만, 우뇌는 언어가 없어도 무언가를 의식하고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책 읽기를 위해 뇌를 최적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좌뇌를 작동하면서 책을 읽는데요. 사람에 따라서는 우뇌를 동시에 작동하면서 책을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우뇌를 쓰며 책을 읽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쓰면서 독해력을 높이고 인지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좌뇌를 통한 책 읽기가 내용과 논리를 따라간다면, 우뇌를 통한 책 읽기는 지식 정보를 그림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합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텍스트를 수용하는 거지요. 좌뇌와 우뇌를 함께 쓴다면 텍스트의 독해와 기억 능력이 훨씬 향상될 수 있게 됩니다.
초보 독서가의 뇌는 어떨까요? 처음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을 익히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경우, 뇌의 세 부분에서 활성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요. 후두엽(시각 영역과 시각 연합 영역)의 넓은 부분과 후두엽 안쪽 깊은 곳, 즉 측두엽 가까운 곳에 있는 방추상회라는 진화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역이 그곳입니다. 처음엔 많은 양의 인지적, 운동적 프로세싱과 그 기반이 되는 뉴런 영역이 필요하지만, 그게 기술적으로 숙달지면 인지적 소비량은 줄고 뉴런 경로도 한결 간결해지고 능률이 향상된다고 해요. 뇌가 이런 방식으로 특화되면서 자동화되는 발달과정을 겪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보통 좌뇌를 더 많이 쓰게 되는데, 어린아이일수록 좌뇌의 각회와 상변연회를 저 많이 쓴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영역은 음운론적 프로세스를 시각, 철자, 의미론적 프로세스를 통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측두엽의 베로니카 영역(Wernecke's area)은 언어 이해에 필수적인 부위들이 모여 있는 곳, 즉 아이들의 뇌에서는 이 베로니카 영역이 성인들에 견줘서 활성화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초보 독서가의 뇌가 학습의 결과를 받아들이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책 읽는 뇌’가 탄생한다고 봐야 합니다.
독서는 글쓰기의 준비 작업
책 읽기와 글쓰기는 손의 안팎 같은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관계를 인풋과 아웃풋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책 읽기가 인풋이라면 글쓰기는 아웃풋이라는 뜻이지요. 당연히 인풋의 양이 많고 밀도가 높아야 아웃풋의 밀도가 높게 표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다양한 책을 본다는 건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아요. 제 경우는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제가 살아보지 못한 다양한 인생을 간접 체험으로 체화해온 셈이지요 독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키울 수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인문서 중심의 독서에 집중하는데, 사고의 균형을 위해서는 자연과학서도 그만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주와 자연, 생태계의 원리는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적어도 인문서와 자연과학서를 같은 비율 정도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이십대 초반 방황하던 시기에 재게 지적 자극을 주었던 두 사람 있습니다. 영국의 콜린 윌슨(Colin Wilson)이라는 작가와 프랑스 출신의 시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지요. 콜린 윌슨은 17세까지 정규 교육을 받고, 이후로는 1년에 반은 노동하고 반은 국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글을 썼어요. 훗날 《아웃사이더(The Outsider)》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지요. 저는 《아웃사이더》를 감동하며 읽었는데 무엇보다 그의 박학다식함에 놀랐습니다. ‘그는 놀라운 독학 지식인이다!’, ‘내가 갈 길을 이 사람이 먼저 갔구나!’하고 생각했지요.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학에 과학을 접목해 새 지평을 연 사람이에요. 그의 책 중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초의 불꽃》을 읽었을 때 역시 엄청난 놀랐어요. 그때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책이었으니까요. 그 뒤로 국내에 번역된 그의 모든 책을 다 찾아서 봤어요. 이십대 초반 4~5년에 걸쳐 읽었던 책이 제 인생의 기틀과 지적 기초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 시기를 거쳐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고 출판사 입사와 편집장을 경력을 거친 뒤 출판사 창업을 하고 다양한 책들을 만들었습니다. 출판 기획자와 편집자로 15년을 상다가 갑작스럽게 출판사를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남단의 소도시 안성에 전원주택을 짓고 전업 작가로 살았어요. 그 시절 심란하고 막막한 마음을 달래려고 노자 《도덕경》을 읽은 걸 계기로 동양 철학에 집중해서 공부를 했고요. 《도덕경》은 지금까지 최소 100번 이상을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노자와 장자에 관한 책들을 두어 권 썼는데,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궁핍했던 시골 살림이 펴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해마다 원고를 5천매씩을 쉬지 않고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건 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행도 자주 다니고, 좋은 전시나, 영화와 연극도 틈틈이 찾아 다면서 사니까요. 아주 바쁜데 한가롭게 살고 있어요. 역설인가요?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바쁜 것이야말로 진짜 게으른 것이다’라는 문장을 썼는데, 거꾸로 말하면 한가로운 사람이야말로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쁜 사람은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 게으른 사람이고, 한가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많으니 부지런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날마다 한 시간 반 정도는 걷기를, 나머지 시간은 책 읽기를 하며 보냅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한한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면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제 뜻대로 쓸 수가 있어요. 이렇게 단순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덕분에 젊어 보인다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부지런한 글쓰기 습관은 어쩌면 고독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사람들은 고독을 무서워하고 심심함을 못 견뎌하지요. 지하철에서도 한 좌석에 나란히 앉은 일곱 명이 전부 스마트 폰을 집중하며 들여다보고 있어요. 어찌 보면 끔찍한 풍경입니다.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고독이야말로 내면을 풍요롭게 만드는 기반입니다. 심심해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결국 불필요한 일로 바쁘게 지내면서 자기 내면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리니까요.
문화 창조로서의 책읽기와 글쓰기
우리는 이미 디지털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삶이 무수히 많은 ‘외부’들과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이 디지털 맥시멀리즘 (Digital Maximalism)이 펼치는 네트워크에 구속되었다는 뜻닙니다. 눈을 뜨는 순간에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 폰의 작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광경은 흔한 일이지요. 사람의 뇌가 새 자극에 더욱 반응하게끔 설계되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낯선 환경에 놓일 때 우리 뇌에서는 보상체계가 활성화되고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와 뇌수를 적십니다. 아마도 선사시대에 포식자들에 둘러싼 자연에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들의 위치를 빨리 파악하고 감지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졌지요. 아울러 피식자를 빨리 포착하고 반응해야만 굶지 않을 수 있지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고 진화된 여자 친구의 뇌가 디지털 기기에 호응하고 있을 뿐이니까 여자 친구의 스마트폰을 질투할 필요는 없겠지요.
디지털의 네트워크 세상 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음성 메시지, 포크와 프로드와 트윗, 알림과 댓글, 링크와 태그와 포스트, 사진과 동영상, 블로그와 비디오로그, 검색과 다운로드, 업로드, 파일과 폴더, 피드와 필터, 담벼락과 위젯, 태그와 태그 구름, 아이디와 비밀번호, 단축키, 팝업과 배너, 신호음과 진동.”(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들입니다. 디지털은 외부 세계와 더 긴밀한 연결을 만들지만, 반면에 자신의 내면에서는 멀어지게 합니다. 삶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리게 되지요. “이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리고 쉽게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윌리엄 파워스, 앞의책)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우리는 디지털 군중 속으로 밀려들어갑니다. 디지털 군중은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지향적 사고를 강요당하지요.
디지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지요. 인간은 이 속도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디지털 문명인으로 진화합니다. 잉여의 속도가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행복이지만, 우리가 받은 것은 재미와 효율성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삶의 중요한 핵심인 ‘깊이’를 잃었어요.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윌리엄 파워스, 앞의책) 우리가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디지털의 분주함에 빠져 외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쏟는 사이에 개인의 삶에서 충분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과 더불어 삶의 깊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증발합니다. 뇌, 두 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창조하는 사이버 세계에서 사는 디지털 군중의 삶 속에는 깊이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깊이는 우리가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본질이자 정수다. 깊이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풍요롭게 만든다. 또한 훌륭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자 우리가 타인의 모습에서 감탄해 마지않는 특징 혹은 자질이다.”(윌리엄 파워스, 앞의책)
삶에서 깊이를 앗아간 속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속도는 우리에게 권태의 지루함을 면제해주고, 기다림의 수고가 필요 없음이라는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만 속도는 일종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지요. 수단이 우리 정체성과 지위, 그리고 삶의 외피에 덧씌워지면서 목적으로 뒤바뀌어버리는 전도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빠른 속도에 대한 갈망과 그 갈망으로 마음이 그르렁거리는 상태, 즉 ‘형이상학적 조급증’에 빠뜨리게 됩니다.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로 진화한 우리에게 디지털 세상이 만든 것은 편리함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창의적이고 똑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동력으로 전환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느림의 숭고함, 고요한 시간의 평화, 충만한 삶, 활력이 넘치는 건강, 세계와 나의 조화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앗아갑니다.
디지털 문명은 우리 삶에 끼어 든 침입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로 인해 우리는 “군중과 자아,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 사이의 균형”(윌리엄 파워스, 앞의책)을 잃어버리지요.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깊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디지털을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과 거리를 두고 지나친 외부지향적 삶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가, 두가지의 선택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컴퓨터를 꺼라! 휴대전화도 꺼라! 디지털 기기들과 물리적 거리를 두면 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이 조장한 거품들이 꺼지면 우리 생은 진짜 땀과 수고로 견인되는 생의 뜨거움으로 가득 차겠지요. “생이 생으로 가득 찰 때 기쁘다. 생에서 생이 다 빠져나가버리면 괴롭다. 저 자신이 된 삶은 조화롭고, 자기에게 낯선 삶은 찢어진다. 우리는 이 조화와 찢김 사이에서 산다. 나뉘고, 주저하고, 불안해하며, 자주 길을 잃고, 하지만 또 다행히 가끔은 의기양양해하면서.”(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디지털 세상에서도 행복은 디지털의 광속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속도로 다가옵니다. 인터넷을 끄고, 손에서 스마트폰도 놓아보세요! 멈추고, 깊이 호흡하고,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감싼 세상을 돌아보세요.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고 집중함으로써 돌연 얻어지는 보람과 기쁨 속에서 느낄 수 있으니까요. 행복의 유예만이, 행복이 전적으로 결핍된 불행과 불운만이 오로지 행복을 발견하게 합니다! 행복은 그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만 얻어집니다. 이게 행복에 깃든 부조리함이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행복도 부조리하지요.
쓰기에 관하여
뭔가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호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저마다 뭔가를 씁니다. 그 열정이 자기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자극과 독려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뭔가를 쓰는 사람은 뭔가를 쓴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뭔가를 쓴다는 것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아요. “글쓰기는 지각이 지각 자체에 나타나기도 전에 지각을 대신한다. ‘기억’ 혹은 글쓰기는 이 나타남 자체의 개시이다. ‘지각된 것’은 지각의 저 밑에서, 그리고 지각 이후에, 과거로만 읽혀질 수 있다.” 그 본질을 이해하면 우리가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지, 그것을 통해 도달하려는 지점이 어디인지가 보다 분명해지겠지요.
글을 쓰는 것은 언표행위입니다. 글쓰기는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의 의식, 무의식, 지각, 기억들을 다 드러내 보입니다. 숨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일종의 노출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못 말리는 노출증이라는 질병! 당신이 뭔가를 쓰고 있다면 당신은 노출증 환자이지요. 글쓰기에 몰입할수록 노출증은 심해집니다. 마침내 당신은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병원에 입원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실은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동입니다. 당신은 큰 병동에서 작은 병동으로 이동했을 뿐이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병동의 입원환자라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병 들었는데 아무도 자기가 환자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당신은 자기가 환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아웃사이더’라고 명명한 것은 콜린 윌슨(Colin Wilson, 1931~2013)이라는 사람입니다.
글쓰기는 항상 힘들고, 누군가는 그 끔찍함에 놀라 재빨리 도망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 힘듦을 인내심을 갖고 묵묵하게 견뎌내는데, 그들은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요. 고통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킨 뒤에도 그들은 다시 일어나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다가갑니다. 마치 상대 선수에게 카운터펀치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는 복싱선수 같지요. 그들은 패배라고는 모르는 불굴의 전사이지요. 그들은 패배에 꺾이기는커녕 패배를 통해 더욱 내면 의지가 강해집니다. 그들은 사자의 심장을 갖고 덤벼듭니다. 글쓰기의 재능이란 글쓰기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 고통 속에서도 쓰기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 마침내 살아남는 능력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쓰고, 쓰고, 또 씁니다. 사자의 심장을 갖고 도전하고, 도전하고, 다시 도전하는 것, 그게 재능의 실체입니다.
문학만이 제 밋밋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메마른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에 불을 지피고 키우는 것은 자신의 생래적인 기질, 즉 본성이지요. 그것은 누가 말려서 그만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저는 지금도 젊은이가 문학을 하겠다고 말하면, 그런 젊은이를 연민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뻔한 비극, 뻔한 불가능의 세계 속에 몸을 던지겠다니, 어찌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젊음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게 세상을 뒤바꿀 정도의 놀라운 부(富), 대체 불가능한 재능이라고 믿지는 않아요. 젊음이란 거저 얻었고 잠시 스쳐 갈 뿐인 재능이지요. 물론 그건 함부로 낭비하기에는 아까운 것이지요. 만약 작가로 살고자 한다면 이 젊음을 송두리째 문학이라는 재단 위에 바쳐야 합니다. 문학을 하겠다면 먼저 자신을 문학에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진지하게 따지고 물어야 합니다.
미국의 저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도 많이. 키플링의 재능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훈련이다. 플로베르가 했던 것처럼 부단히 훈련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파리에서 사용하는 미터 기준처럼 변하지 않는 절대 양심과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가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한 작가는 지적이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한 사람의 작가 안에 있는 이 모든 자질을 끌어내어 그를 압박하는 모든 세력을 통과하게 하라. 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살아남아 자신의 글을 끝내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재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재능은 매우 모호한 개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능이란 문학을 향한 열정의 다른 이름이지요. 문학을 향한 열정이 크면 클수록 재능이 더 많은 것이지요. 이제 열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훈련하고, 살아남아 포기하지 않고 써서 자신의 글을 끝내는 사람이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 )은 작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가장 훌륭한 훈련 방식입니다. 그런 훈련을 거듭하면서 글쓰기에 필요한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근육을 키운 사람은 영감이 고갈되고, 정신이 바짝 메말라버려도 도중에 글쓰기를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이게 바로 글쓰기의 재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로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가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작가로 키워집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1936~ )는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 인간의 운명이 모태(母胎)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장난이 아닙니다. 변덕스러운 신이 우리 인간을 내능 있거나 무능하게, 의욕이 넘치거나 부족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저도 젊었을 때에는 프랑스 실존주의자들 — 그 누구보다 사르트르의 영향이 컸습니다 — 의 자기의지라는 영향 때문에 이런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직업도 일종의 ‘선택’이다, 우리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저는 작가들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 즉 작가로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훈련과 불굴의 의지가 때로 천재 작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도 인정합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선택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선택은 두 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요소일 뿐입니다. 우리는 유년기나 사춘기 시절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는 작가로서 타고난 사람이다,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라는 생각을 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이 그 생각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을 했다고 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한 작가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작가는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자기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입니다. 어느 순간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에 따른 학습과 훈련이 필요해요. 끊임없는 훈련과 불굴의 의지 없이도 작가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 재산의 반을 떼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과정에서 학습과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합니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열정과 의지가 부족한 탓이지요.
자, ‘첫 문장을 쓰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선택하는 일에 내재된 위험과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경고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미심쩍으니, 다시 한번 경종을 올리는 뜻으로, 스페인 작가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Manuel Vazquez Montalban, 1939~ )이 쓴 한 문장을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작가들이란 지나치게 일찍, 혹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저주받은 동물들이다.” 문학이, 혹은 글쓰기가 천형이라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작가의 삶이란 언제 부서지고 깨질지 모를 불안이 잠재된 삶이지요.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저주받은’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굳힌 당신에게, 이제 문학을 하는데 필요한 재능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순진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 자연을 처음 태어나 바라보듯 낯설고 눈부신 것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하지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당연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세요! ‘순진과 사랑’을 담고 바라보면 모든 게 사랑할 만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쓴 대상에 대해 오래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글을 못 쓰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지요. 더 많이 사랑하세요! 자기를 바쳐 더 많이 사랑하게 되면 쓰는 데 거침이 없게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는 극명한 차이는 변명입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쓰지 못할 수밖에 없는 백가지의 이유를 댑니다. 헌데 세상의 그럴 듯한 것들은 실은 다 거짓입니다. 거짓에 갇혀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못합니다. 글을 써내는 사람은 변명을 하지 않아요. 다만 쓸 뿐입니다. 쓰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글을 쓸 때는 태풍이 휩쓸고 가듯 써야 해요. 태풍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필기구, 종이, 문법, 문장, 소설의 형식, 소재, 주제, 수준, 시간, 체면…… 이건 태풍에 날아가는 먼지에 불과하합니다. 기를 집중하고 자신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면 됩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명작을 쓰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비극과 저주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문학은 때때로 쓰는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줍니다. “……좋은 글은 저절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도전으로 내가 지금껏 했던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글이 잘 써질 때 저는 행복하답니다.” 글쓰기는 반복되는 도전입니다. 그것을 즐기세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고 동시에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시고 경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