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등주 공격
개원(開元) 20년(732) ……(중략)…… 9월 을사(乙巳) ……(중략)…… 발해 말갈(渤海靺鞨)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자, 좌령군 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다.
『구당서』권8, 「본기」8 현종 상
개원(開元) 21년(733) 봄 정월 정사(丁巳) ……(중략)……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 대문예(大門藝)를 유주(幽州)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왕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를 토벌하게 하였다. 경신(庚申)에 태복 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1장(丈) 가까이 내리고 산길이 험하여 [신라의] 군졸이 절반이나 죽으니 공(功)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무예는 문예를 원망함을 그치지 아니하여 몰래 자객을 보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죽이려했으나 실패했다. 현종이 하남[부](河南[府])에 [문예를 공격한] 적당(賊黨)들을 찾아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자치통감』권213, 「당기」29 현종
발해 대무예(大武藝)와 동생 [대]문예(門藝)가 나라에서 싸워 문예가 [당나라로] 왔다. 조서를 내려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과 함께 범양(范陽)•신라(新羅)의 군사 10만으로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공이 없었다. 무예가 자객을 보내 동도(東都: 낙양)에서 문예를 습격하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하였다.
『신당서』권136, 「열전」61 오승체
이 사료는 발해가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당나라가 이에 반격을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발해는 아쉽게도 자신들의 손으로 남겨 놓은 사료가 없기 때문에 발해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발해의 존속 시기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중국 측 사료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발해의 등주 공격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료를 제시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구당서』에 의하면 732년(발해 무왕 14) 9월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여 그곳의 자사(刺史)였던 위준(韋俊)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갈등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720년(무왕 2년) 거란을 토벌하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발해의 무왕(武王)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가 거절하였고, 당나라는 이런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726년(무왕 8년) 발해의 배후에 자리한 흑수 말갈(黑水靺鞨)을 기미주(羈縻州)로 삼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발해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흑수 말갈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大門藝)는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하다가 끝내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무왕은 대문예의 송환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와중에 무왕의 큰아들인 대도리행(大都利行, ?~728)이 급작스레 사망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렇듯 당시 발해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따라서 무왕은 등주를 공격해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732년 9월 발해가 등주를 선제 공격하자 『구당서』에는 좌령군 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이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일시적인 반격에 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대응은 그 이듬해 봄부터 시작되었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신당서』 오승체(烏承玼) 열전 등에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전한다. 733년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대문예를 유주(幽州)로 보내 발해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가 발해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는 협공 작전을 구사하였다. 『신당서』 오승체 열전에 따르면 당나라와 신라 군사의 합은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 작전은 추운 날씨와 좋지 않은 도로 사정 탓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왕은 대문예에 대한 원망을 그칠 줄 몰랐고, 마침내 자객을 보내 대문예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도산(馬都山)을 공격하는 등 여전히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발해가 당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하였던 이면에는 거란이 돌궐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던 당시의 정세가 작용하고 있었다. 즉 당나라는 거란‧돌궐 등과 대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해 역시 이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중국 송(宋)나라 때 간행된 『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734년 4월 당나라가 거란을 격파한 후 작성한 「위유주장사설초옥파거란노포(位幽州長史薛楚玉破契丹露布)」라는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거란이 돌궐 및 발해와 제휴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734년 비가가한(毗伽可汗)의 사망으로 돌궐이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거란이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아울러 이 무렵 신라도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는 등 국제 정세가 발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따라 발해는 무왕의 즉위 이래 견지해 오던 대당(對唐) 강경책을 포기하고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요컨대 무왕이 등주를 공격하는 등 대당 강경책을 구사한 배경에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적절히 이용하여 당나라에 대항하고자 했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무왕의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도리행의 죽음으로 인한 국내적 혼란 상황을 수습하고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