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은 1912년 4월 6일 경상남도 단성군(현 상천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나 1993년 11월 4일(향념 81세, 법랍 58세)에 입적했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 중 한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철스님에 대한 위상은 종교를 떠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철스님의 생전에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에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부분과 가족의 구성 및 출가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생전에 성철스님을 만나려면 조건이 있었다. 누구를 불문하고 불상에 삼천 배를 올려야 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와 함께 절을 찾아온 한 어린이는 절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나머지 “스님, 다시는 백련암에 안 오겠습니다. 다시 오면 제가 개새끼입니다.”라고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성철은 화내기는커녕, 그 어린이가 간 뒤 “그래도 그 놈 대단하다. 지 할 소리는 다 하고 갔제.”라며 감탄했다. 나중에 이 아이가 부모 손에 끌려 백련암에 다시 오자 반갑게 맞이했으며, 이 아이는 커서 결국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성철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성철을 보필한 원택이 저술한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와 성철의 딸 불필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등이 있다.
성철의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정식 출가는 안했지만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생활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겠다.”며 여생을 마쳤다. 또한 성철의 아내 이덕명은 남편과 외동딸이 모두 출가하고 시부모도 사망한 이후 딸 불필이 은사 인홍의 권유로 출가하여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고 비구니로 삶을 마감하였다.
1982년 1월 1일 법정과의 선문답에서 성철은 “신도들이 자꾸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아니 보고 나만 만나려고 하니 안될 일이라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를 만나느냐, 그래서 내가 3천 배를 하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러 온다는 사람들에게 이를 이용해 부처님에게 기도를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께 3천 배를 하면 심적으로 변화가 오고 도움이 된다. 절대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3천 배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핑계삼아 부처님에게 3천 배를 시킴으로써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도움도 안 되는 나를 보려면 3천 배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철이 상죄였던 승려의 회고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3천 배를 할 정도로 간절한 사람, 불심이 깊은 사람이면 만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성철은 출가하기 전에 혼인해서 딸이 2명 있었는데, 큰 딸은 14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고, 둘째 딸이 태어나기 직전인 1936년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수경(壽卿)이라고 대신 지어주었다. 둘째 딸 불필(성철에게서 받은 법명)에게 아버지 성철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는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승려의 딸”이라는 얘기가 너무 싫었기에 불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서울로 유학을 보내달라 하였고, 다행히 집안이 넉넉하였기에 어렵지 않게 서울로 올라와 혜화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묘엄이라는 비구니가 불필을 찾아와 아버지 성철이 묘관음사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자는 권유를 받고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로 향했다. 성철은 딸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피해 있다가 다시 와서는 딸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가라, 가!”라는 말을 하고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 후 6.25 전쟁이 일어나 불필은 전쟁을 피해 진주로 내려와 진주사범 병설중학교를 거처 진주사범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승려가 불필에게 찾아와 통영의 안정사에 있으니 잠시 다녀가라고 했다는 성철의 말을 전해 주었다. 당시 불필은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데다 성철을 만나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았다. 여름방학에 불필은 산청의 할아버지 댁에 가게 되었다. 이미 보살계를 받고 초연화라는 불명까지 가지고 계신 할머니가 불필에게 성철을 보러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낸다. 결국 불필은 할머니, 고모와 함께 통영의 안정사로 가게 된다.
딸을 만난 성철은 불필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대뜸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행복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자 성철은 “행복에는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다. 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때까지 성철(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던 불필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압도당하고 말았다. 어떤 것이 영원하고 어떤 것이 일시적이냐는 불필의 질문에 성철은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부처님처럼 도를 깨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의 오욕락은 일시적 행복일 뿐이다.”는 말을 해준다. 이 말을 들은 불필은 뭔가를 크게 깨치고 그 때 성철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출가하겠다고 하자 성철은 지금 다니는 학교는 마치라는 조언을 해준다.
학교를 마친 후 불필은 성철에게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不必)의 뜻을 안다는 뜻에서 불필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문을 들었다. 언양 석삼사에서 인홍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로는 아버지 성철을 속세의 아버지가 아닌 불가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성철은 딸에 대한 일말의 정은 있었는지 “세상에 남자들은 믿을 게 못된다. 부모만 믿어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불교계의 최고의 고승으로 불리던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용성은 다른 스님에게는 선생으로 불렀지만, 성철에게 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워서 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중에 하나는, 하루는 어떤 신도가 자신의 아들이 시험에 합격했다며 당시로는 엄청나게 비싼 스위스제 라도(Rado)시계를 보시했다고 한다. 신도가 가고 나자 성철스님은 시자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게 라도시계라는 것인데 너는 처음 보재.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싶어하는 거다.”
스님은 이 말을 하고 난 뒤 그 비싼 라도시계를 나무토막 위에 얹어 놓더니 난데없이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 광경을 본 시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 스님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돌로 쳐서 시계를 부숴버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슥아, 이 깊은 산중에서 수행승이 시계가 무슨 소용이 있노. 공부하는 놈은 시계를 볼 시간도 없다.”
만약 이 같은 일을 신도가 알았다면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성철 스님은 바로 시자에게 탐욕의 경계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꺼이 비싼 라도시계를 부숴버린 것이다.
불교에서 貪慾(탐욕:탐내는 욕심)·瞋恚(진에:성냄,노여움)·愚癡(우치:어리석음)를 가리켜 세 가지 번뇌[結使(결사)라고 한다: 중생을 결박하여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라고 한다. 이것은 깨달음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칭하기도 한다. 탐욕이 있으면 그걸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성철스님은 시자를 훈계하기 위해 비싼 라도시계를 단호하게 부숴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이 어찌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많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스님은 열반 당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한국 불교의 얼굴”등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법어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입적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성철스님을 그리워하며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고) ⓛ성철(승려), 나무위키에서 일부 인용
②오심 스님, 백유경 이야기에서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