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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장 백타산장의 여인들
날이 갈수록 모용쟁의 몸이 무거워지자 구양봉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젠 사부님이 당부한 대로 유운장의 망나니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최후에 제갈정까지 죽여 버렸으니 화근을 깡그리 없애 버린 셈이다. 이제 모용쟁이 무사히 아들만 낳으면 만사 시름을 놓고 합마공을 익힐 수 있다. 그는 무예를 든든히 닦은 다음 화산에 가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참이었다. 왕중양, 단지흥,
홍칠, 그리고 황약사는 모두 천하에 드문 무학 대사들이다. 그자들을 꺼꾸러뜨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부의 유언을 실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구양봉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화산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합마공은 물론이고 한 가지 병장기를 익숙하게 다를 줄 알아야 했다. 그 병장기는 다름 아니라 형님이 다루었던 사두장이었다. 사두장만 능숙하게 다루면 화산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구양봉은 날마다 정실에서 무예를 연마했다. 무예 연마가 끝나면 그는 곧장 모용쟁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나 모용쟁은 구양봉과 말하기를 싫어했다. 바로 구양봉과 제갈정이 혈전을 벌인 그날부터 모용쟁은 아예 구양봉의 말은 믿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구양봉이 아무리 설명하고 달래도 모용쟁은 쓴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오늘도 구양봉이 찾아왔건만 모용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여보, 지나치게 마음을 썩이고 화를 내면 태아에게 해롭다고 임자도 늘 말하더니만, 그렇다면 임자 스스로 제 몸을 돌봐야 하지 않겠소?"
모용쟁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당신에게 이까짓 아이 하나가 뭐 중요한가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아이 서넛쯤 무우 뽑듯 할 수 있다지 않았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오? 임자도 알지만 형님은 자식을 낳을 수 없소. 요행 임자와 나 사이에 살붙이가 생기게 됐으니 이야말로 우리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천금 같은 자식이 아니겠소?"
"미안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 아들이 아닐 거예요. 당신은 혈기왕성하니까 지금도 얼마든지 아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서넛 된다니까 그 여자들에게서 아들을 낳으시지요."
모용쟁이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자 구양봉은 언짢은 기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제갈정을 속여넘기려고 얼렁뚱땅 꾸며댄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이 구양봉을 어떻게 보고 저러는 걸까? 구양봉은 모용쟁의 처사가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다.
구양봉은 장승처럼 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며칠간을 홀로 지내자니 여간 쓸쓸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아득히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에서는 아기별들이 모여 숨바꼭질을 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구양봉의 가슴은 거친 황야처럼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 선과 악,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구양봉은 본디 고리타
분한 선비에 불과했다. 어쩌다 절세의 신공을 몸에 익힌 까닭에 백타산의 주인이 된 것으로, 실로 사람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 모용쟁만 해도 그토록 살갑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살얼음이 낀 듯하지 않는가. 구양봉은 자기 같은 호걸이 한낱 유약한 여인의 경멸과 냉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가 한참을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돌아서니 언제부턴지 백타산장을 관리하는 총관이 구양봉의 뒤에 공손히 서 있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겼는가?"
그가 묻자 총관은 비로소 조용히 아뢰었다.
"주인님께서 저희 백타산장에 오신 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주인님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서역에서 저희 산장의 위세가 더욱 강해 졌음은 말할 것도 없구요. 소인은 주인님을 위해 정성껏 일하고 있사온데, 산장의 자질구레한 일로 주인님을 성가시게 굴지 않으려 하옵니다만 한 가지 일만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물라 주인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사
옵니다."
"그게 무슨 일인데?"
"산장의 옛 주인 임일천은 두 가지 취미가 있었사온데, 하나는 세상의 귀중한 골동품들을 수집하는 것이옵고 다른 하나는 천하의 미녀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옵니다. 임일천은 미녀들을 노리개처럼 깊이 가두어 놓았사온데 아마도 한무제의 '금옥장교(金壓藏嬌)'라 는 고사를 본딴 듯하옵니다. 여쭙기 황송하오나, 주인님께서도 이 골동품들과 미녀들을 한번 보아야 하시지 않겠사옵니까?"
구양봉은 비 맞은 장닭처럼 후줄근해 있던 차였다. 아무리 구슬리고 어루만져도 모용쟁은 독 오른 고추처럼 앙앙불락이었다. 남산처럼 배가 불러 가지고 톡톡 쏘아대기만 하는 모용쟁이 은근히 괘씸하던 터에 미녀와 골동품들이 있다니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내색하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좋아, 가 보자."
총관은 앞에서 초롱을 들고 뜰을 지나 문을 빠져 나갔다. 구양봉이 성큼성큼 총관의 뒤를 따라가노라니 한마당 가득 꽃밭이 펼쳐졌다. 교교한 달빛 아래 꽃송이들은 서로 시샘하듯 살랑살랑 키돋움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호젓하고 아늑한 곳인가! 구양봉은 산장에 머무른 지 수십 일이 되도록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호젓한 곳에 어떤 미녀와 골동품들을 숨겨 두었는지
한시 빨리 보고 싶어졌다.
총관은 구양봉을 이끌고 뛴 대청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은 모두 일곱 개나 되었다. 문에는 모두 주먹만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임일천이 이곳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심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총관은 자물쇠들을 열고 곧장 밀실로 들어가더니 벽을 톡톡 쳤다. 그러자 봉당 한복판이 양쪽으로 드르륵 열리더니 널찍한 땅굴이 나타났다. 구양봉은 총관을 따라 땅굴로 내려
갔다. 한참 땅굴을 지나다가 다시 한걸음 올라가니 홀연 아늑한 뜰이 나타났다. 뜰 둘레에는 단독으로 세운 집들이 들쭉날쭉 서 있는데, 삼층짜리, 이층짜리가 있는가 하면 본채는 땅밑에 묻히고 지붕만 봉긋하게 솟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집들마다 출입문이 없고 무쇠로 만든 창만 빼꼼히 뚫려 있었다. 총관은 구양봉을 이끌고 나지막한 집 옆으로 갔다. 이 집은 창마저 없이 괴상망측한 짐
승의 모양을 새겨 넣은 기왓장들이 달빛을 받아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총관은 공손한 어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이 집 안에는 천하에 다시 없는 열두 가지 진귀한 보물이 있사온데, 옛 주인 임일천이 10년 간이나 공을 들여 걷어들인 것이옵니다. 주인님께서 한번 보시지요."
"어디 한번 보자."
구양봉은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총관은 껑충 몸을 날리더니 용마루에 올라섰다.
"주인님도 올라오시지요?"
구양봉도 살짝 몸을 날려 용마루에 올랐다. 두 사람이 집 안에 내려서자 지붕은 다시 봉해졌다. 바깥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겹지붕이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연신 감탄을 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독특하게 지어진 집으로, 겉보기에는 정사각 모양이었으나 집 안은 큰 종처럼 둥그랬다. 높은 천장에 오색 찬란한 신비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열두 가닥의 밧줄이 치렁치렁 드리워져 있고 그 밧줄마다에는 보물함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주인님, 이 첫번째 보물함에는 당 황제 현종이 쓰던 옥관(玉冠)이 들어 있사옵니다."
총관의 말에 구양봉은 놀라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친 당 현종! 먼저는 매비(梅妃)에게 깊이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후에는 여지( 枝)를 즐겨 먹는 양옥환에게 반하여 끝내 나라를 망쳤지. 오죽하면 말방울 소리 울리면 양귀비 얼굴에 꽃이 핀다네. 뉘라서 알리오, 천리 밖의 여지를 가져오는 사나이의 신고를!, 하는 시구까지 생겨났겠는가?'
구양봉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당 현종의 옥관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허공에 매달린 보물함을 올려다보았다.
"소인이 보물함을 풀어 오겠사오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총관은 껑충 몸을 날려 상자를 풀어 가지고 아래로 내려왔다.
보물함을 열어 보니 한눈에 당 현종의 사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환관은 가늘게 뽑은 금실로 가로 세로 정교하게 잔 것으로 서른 두 개의 옥패가 박혀 있었다. 금실도 귀한 것이지만 오색 찬란한 옥패는 더욱 값진 것들이었다. 당 현종은 이 황관을 쓰고 무더운 여름철이면 시원한 정자에 나앉아 친히 북채를 잡았다고 한다. 현종이 친히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 유명한 악공 이귀(李龜)가 장
단을 맞추었고, 옥 같은 가인들이 노래하였으며, 양옥환이 잠자리 날개 같은 비단옷을 떨쳐 입고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실로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이었다.
총관은 나머지 열한 가지 보물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한옥성 (寒玉星), 금옥편(金玉鞭), 원타명주(讀騷明珠), 벽독수화쌍섬(酸毒水火雙蟾), 운왕선(雲王扇), 현철쟁(玄鐵箏)…… 등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구양봉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임일천이란 놈은 정말 욕심 사납고 오달진 놈이었구나. 이 열 두가지 보물만 해도 천하의 호걸들이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겠어.'
구양봉은 보물들 중에 현철쟁도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흥이 나서 급히 가져와 열어 보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현철쟁은 얼핏 봐선 보통 아쟁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아쟁이로구나. 정말 좋은 거야!"
구양봉이 좋다는 말에 총관은 풍악도 모르는 주제에 덩달아 좋아했다.
"주인님께서는 음률에 능하신 것 같사온데 한번 만져 보시지요."
구양봉은 흥에 겨워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진목공(秦種公)에게 딸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농옥(弄玉)이었지. 그 아가씨가 아쟁을 멋지게 뜯었단다. 부드럽게 탈 때는 찬 줄기 맑은 샘물에 고요히 흐르는 듯하고 급하게 뜯을 때는 도도한 강물이나 천둥 치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농옥은 나중에 소사(蕭史)라는 젊은이의 배필이 되었는데, 소사가 피리를 불고 농옥이 아쟁을 타면 온 나라 사람들이 취할 지경이었단다. 그 후
두 사람은 용과 봉을 타고 멀리 가 버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아쟁은 진대의 것일 게고 어쩌면 농옥이 타던 아쟁일지도 모르겠다."
구양봉은 자리를 고쳐 앉더니 마음을 가라앉힌 뒤 두 손을 아쟁위에 올려 줄을 고르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어느덧 자기의 한없는 울분과 고뇌를 아쟁 줄에 쏟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쟁 소리는 푸른 산이 둘러선 그윽한 호수 위에 쪽배 한 척이 유유히 떠가는 듯싶었다. 노 젓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 오고 온갖 고기 테가 수면에서 재롱을 피우듯 뛰어오른다. 문득 돛폭이 찢어지고 파도가 일면서 먹장구름이 밀려 오고 천둥이 친다. 하늘이 노하고 땅이 아우성치는 듯싶다.
총관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는 두 귀를 막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만약 움직일 수 있었다면 구양봉 앞에 꿇어앉아 더는 아쟁을 뜯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을 것이다. 그는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얼빠진 놈처럼 입을 헤벌리고 서 있었다. 무서운 파도가 연신 자기 머리를 짓부수는 것 같았고 콧구멍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구양봉은 음률에 도취되어 자신은 물론이요, 모용쟁과 백타산장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둥 치는 듯한 아쟁 소리에 속에 묻혀 있던 분노와 저주, 욕정과 살기가 쏟아져 나가니 가슴이 너무나 후련했다.
정 있는 사나이, 알뜰한 남편이란 게 다 무슨 말라빠진 소린가? 아기자기한 사랑은 구린내 나는 선비들이나 할 노릇이다. 사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다면 자질구레한 정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 큰 뜻을 품고 호걸답게 살아야 한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것 없다. 바람이 불면 부평초는 밀려 가지만 아름드리 나무는 끄떡하지 않는 법이다.
코를 싸쥐고 있는 총관의 손가락 사이로 뻘건 코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그는 한 손으로 다른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에는 임일천이 모아 둔 금과 은이 있사옵고 저쪽 집에는 중원과 서역에서 빼앗아 온 귀중한 고서적들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임 장주가 여러 곳에서 사들인 병 장기들이 쌓여 있고, 바로 저쪽 몇 채의 집에 임 장주가 감추어 둔 미인들이 살고 있사옵니다."
"그리로 가 보세."
가까이 가 보니 3층으로 된 자그마한 집이었다. 이 집은 죽통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둘레에 마루가 있고 꼭대기엔 종탑처럼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출입문 위에는 '금옥(金屋)'이라고 쓴 현판이 달려 있었다. 구양봉은 그 현판을 얼핏 보고 한무제의 '금옥장교'라는 고사에서 따온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무제가 어릴 때였다. 태후가 물었다.
"아교(阿嬌)라는 아가씨가 어떠하냐?"
무제는 아교를 흘끔 홈쳐보고 나서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교를 아내로 삼으면 금으로 만든 집에서 살게 하겠소이다."
후에 한무제는 황제가 되더니 과연 아교를 귀비로 책봉했을 뿐만 아니라 금으로 만든 집을 지어 거기서 살게 했는데, 이리하여 '금옥장교'라는 고사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구양봉은 지금 '금옥'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적이 흥분되어 있었다. '금옥장교'라고 했으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갖은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게 아닌가? 구양봉은 여인들을 만나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흐뭇해졌다.
총관의 안내를 받으며 아래층에 들어서니 허리가 절굿공이같이 날씬한 여인네 서넛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들이 총관을 둘러싸고 아첨을 부리자 그는 바삐 구양봉을 내세웠다.
"어서들 인사를 드리라구. 이 어른이 바로 백타산장의 새 주인이시네."
그러자 여인네들은 '장주님' '나으리'소리를 연발하며 부산을 떨었다. 구양봉이 한마디 물었다.
"임자들은 금옥에서 사는 여인들인가?"
"어머나, 장주님두. 저희들은 비천한 종년들인뎁쇼."
얼굴에 덕지덕지 연지를 바른 여인네가 키드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 집은 삼층으로 되었사온데 각 층마다 미녀 아홉씩이 살고 있사와요. 제일 아래층은 인자루(人字樓)라고 하는데요, 여기에 사는 미녀 아홉은 여염집 딸자식들로 하나같이 꽃처럼 예쁘고 아련한 계집들이죠. 이층은 지자루(地字樓)라고 하는데요, 여기엔 세상 드물게 음란하고 요사스러운 계집 아홉이 살고 있사온데 역시 하나같이 예쁘장하지요. 그리고 삼층은 천자루(天字樓)라고 하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미녀들은 천하의 절색인 서시나 황소군도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답지요. 실로 십호야 보름달도 무색할 지경이죠. 임 장주님은 이 미녀들을 금옥에 숨겨 두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 오곤 했답니다. 임 장주님은 이 미녀들에게 정신이 팔려 반나절씩 멍청하니 바라보곤 했지요."
"시끄럽다! 꽤나 수다스럽군 그래! 어서 주인 어른을 모시고 인자루로 가거라."
총관이 꽥 소리쳤다.
그들 몇몇은 곧 인자루에 들어섰다. 덕지덕지 연지를 바른 아낙네가 구양봉으로 하여금 복판에 서게 했다. 아낙네가 소리를 질렀다.
"불을 켜!"
그러자 삽시에 방안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주위에는 둥그런 방이 꽃잎처럼 설치되어 있고 방마다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차례로 둘러보니 명주(明珠), 혜랑(慧娘), 문군(文君), 수연(秀娟), 향옥(香玉), 사사(思思), 호미(胡媚), 아문(雅文), 용기(龍琪) 등 아홉 여자의 이름이었다. 구양봉이 자세히 살펴본즉 이 방은 귤 쪽처럼 꾸며져 자신은 복판에 있고 미녀들은 둘레에 있었다. 미녀들은 앉아서 끄덕끄덕 졸기도 하고 한 뜸 한 뜸 수
를 놓으면서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여기 계집중 가운데 누가 가장 나으냐?"
구양봉이 묻자 연지투성이인 아낙네가 대답했다.
"여염집 딸자식들이라고 하오나 개중에는 대갓집의 규수도 있고 농가의 외동딸도 있지요. 아홉이 하나같이 귀엽고 예쁘장하오니 주인님께서 한번 보시지요, 뭐."
"그렇다면 어떻게 보지?"
"오죽하면 임 장주님도 일단 여기에 오시면 떠날 줄을 몰랐겠어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옆에 있는 돌기둥을 톡톡 두들겼다.
별안간 구양봉이 서 있는 곳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계집들이 있는 방과 수평이 되는 위치에서 멎었다.
"임 장주님도 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아야 직성이 풀리곤 했지요."
아낙네는 너스레를 떨더니 한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리 와!"
그녀의 명령에 난데없이 열두어 살 먹은 계집애 서넛이 쟁반을 받쳐 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에는 자그마한 술잔 몇 개와 기묘한 모양의 술병이 놓여 있었다. 계집애들이 쟁반을 받쳐 들고 미녀들의 방 앞으로 사뿐사뿐 다가가자 수를 놓던 여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끄덕끄덕 졸던 여인들까지 우르르 창가에 몰려와서 무엇인가 먼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계집애들도 잽싸게 술잔에 무엇인가를 부어 미녀들에게 주었다. 미녀들은 굶주리기라도 한 듯 너도나도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장주님, 이제 볼 만할 겁니다."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입을 싸쥐고 키득거리는데, 어느새 춘정이 동한 미녀들은 침대에 엎드려 신음하기도 하고 두 눈이 벌개서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방안을 맴돌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미녀들은 창 밖으로 손을 흔들면서 애꿎은 계집애들을 부르기도 했다. 실로 발정한 짐승의 행동 그 자체였다. 그녀들에게 미약을 먹인 것이 분명했다.
"대관절 무슨 약인가?"
구양봉의 물음에 아낙네가 대답했다.
"임 장주님의 술이온데 '춘심부동(春心浮動)'이라고 하옵니다. 남녀의 욕정을 자극하는 술이지요."
구양봉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문자 그대로 춘심부동이로구나! 멀쩡하던 계집들이 눈 깜짝할 새에 모두 발정한 짐승처럼 돼 버렸으니.'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살살 웃음을 쳤다.
"임 장주님은 보기만 했사오나 새 장주님께서도 눈요기만 하시지는 않겠지요?"
구양봉은 미녀들을 정복하고 싶은 생각에 피가 끓었다. 하지만 그는 내공이 매우 강한 만큼 욕정을 누르며 말했다.
"됐어, 어서 지자루에나 가 보자!"
"장주님께서는 정말이지 점잖은 어른이시군요. 임 장주님었다면 벌써……."
연지투성이는 실눈이 되어 야릇하게 웃었다.
임 장주는 얼빠진 놈처럼 미녀들의 화용월태를 구경하다가는 욕정이 끓어 별의별 추태를 다 보였던 모양이었다.
둘이 지자루에 이르자 연지투성이는 구양봉을 향해 헤벌쭉 웃어 보였다.
"여기 계집들도 먼저 술대접부터 해야 하는가?"
구양봉이 묻자 연지투성이는 다시 히죽 웃었다.
"아니, 아니에요. 여기 계집들은 본디 활달하고 음탕하거든요. 좌우간 한번 보시면 알 거예요."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한마디 소리치자 대뜸 방안이 밝아졌다. 휙 둘러보니 어느새 창문마다 휘장을 거두어 방이 한결 밝아 보였다.
여기의 방 아홉 칸도 아래층과 똑같은 모양새로 꾸며져 있었는데, 아래층과는 달리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아래층의 여인들과는 성미가 다른 여인들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기에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신녀(神女), 달기(袒己), 미고(媚姑), 포사(褻 ) , 비연 (飛燕)…… 등이었다.
'모두 음탕한 계집들이라고 했지?'
구양봉은 편액들을 둘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보자꾸나."
한 방 앞에 이르자 얼굴이 해맑고 쌍꺼풀진 두 눈에 반짝반짝 영채가 도는 어린 소녀가 맞아 주었다. 얼핏 보니 몸매도 실한 편이 아니다. 저렇게 애호박같이 풋풋한 소녀가 음란한 여자라니, 구양봉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저 여자는 누구지?"
덤덤히 묻는 구양봉의 말에 연지투성이가 살짝 눈을 치떴다.
"아니, 저 아가씨도 몰라요? 저 아가씨가 바로 숱한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워 죽인 남원(南苑)의 명기 청청(靑靑)이에요. 저 아가씬 강남의 으뜸가는 명기래요. 아마 저 아가씨를 쫓아다니다가 죽은 사내가 적게 잡아도 열두 명은 될 거예요."
구양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여리디여린 계집이 그렇게 재주가 많단 말인가? 구양봉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작은 괴물 임 장주와 어떤 사이죠? 임 장주가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다니 이상하군요!"
"내가 바로 장주다."
구양봉의 말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무슨 말씀인가요? 그 양반이 죽었나요?"
"그래, 죽었다."
그 말에 청청은 주루룩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어댔다.
"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거냐?"
구양봉이 이상한 듯 물었다. 청청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양반은 여자라면 오금을 못 쓰는 색골이거든요.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구양봉이 덤덤히 듣고만 있자 청청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그 양반은 천하에 드문 가짜 방망이라는 걸!"
"가짜 방망이라니?"
구양봉이 짐짓 모르는 체하자 청청이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아이고, 바보 같은 양반을 다 보겠네. 이리 좀 오세요, 이리로! ……당신의 물건도 가짜 방망이인지 아닌지 한번 봅시다."
그러자 양옆에 있던 둥실한 얼굴의 여인과 갸름한 얼굴의 여인도 키드득키드득 웃어댔다.
"이 어르신의 물건이 진짜 방망이인지 가짜 방망이인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봐야겠는데?"
둥실한 얼굴의 미녀가 말하자 청청이 입을 삐죽하며 톡 쏘아붙였다.
"그 절구통 같은 몸으로 어떻게 시험을 한다고 큰소리야?"
그러자 갸름한 얼굴의 미녀도 한마디했다.
"새 주인님이 오시니까 찰떡같이 들러붙는 판이로구나!"
여인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입방아를 찧어 댔다.
구양봉이 언제 이런 여자들을 보았겠는가? 모용쟁도 정숙한 여자에 속하여 사내들 앞에서 남녀간의 정사를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구양봉은 가슴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등실하게 생긴 여자가 계속 지껄였다.
"장주님, 이리로 와 보세요."
구양봉은 스적스적 다가갔다.
여자는 구양봉의 팔과 엉덩이를 열심히 주물러 보더니 다른 여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즐겁게 됐네. 이 장주님의 방망이는 이만저만한 방망이가 아니라 홍두깨 방망이야!"
그녀의 말에 계집들은 왁자그르 웃어댔다.
그 중 한 계집이 물었다.
"장주님, 장주님의 성함은요? 언제까지나 장주님, 장주님 하고 어렵게만 부를 수는 없잖겠어요?"
그러자 다른 한 계집이 거들었다.
"장주님은 여자들이 어떻게 부르면 좋으시겠어요? 어떤 사내들은 '요 내 새끼야'하면 좋아하고, 또 어떤 사내들은 '아버님, 아버님' 하면 입을 다물지 못하거든요. 장주님은 어떻게 부르면 좋아 요? 또 어떤 여인들을 좋아하시는지요?"
계집들이 서로 질세라 찧고 까부는데 유독 청청만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구양봉이 넌지시 물었다.
"너는 왜 말이 없느냐?"
그러자 청청이 새초롬해서 대꾸했다.
"제가 꼭 입방아를 찧어야 할 까닭이 있나요?"
구양봉은 청청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이 강남의 명기 청청은 몸매는 작아도 틀림없는 명물이었다. 그녀는 다른 미녀들과는 달리 영특해 보였다.
구양봉이 또 말을 걸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청청이 쌩긋 웃더니 휙 손을 저었다. 떠들던 계집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원형으로 된 대청이라 모두들 구양봉의 몸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청청이 달콤한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새로 오신 주인님이시죠?"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청청이 당돌하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뭘 하던 사람인가요? 강호의 협객인가요, 아니면 길목을 지키는 강도인가요, 아니면 녹림의 호걸인가요?"
"잘 물었다. 내가 바로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 구양봉이다."
구양봉의 솔직한 대답에 청청은 키드득 웃었다.
"저희들을 어떻게 할 셈이죠? 팔아 버릴 건가요, 아니면 남겨 두고 당신이 데리고 놀 건가요? 그렇잖으면 임 장주님처럼 날마다 찾아와 구경만 할 건가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키드득거렸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듯싶었다.
"왜 웃는 거냐?"
구양봉이 책망조로 나무라자 청청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임 장주님이 올 때마다 저희들은 은근히 짜곤 했지요. 애간장을 태워 죽게 하자고요. 저희들끼리 재미를 보면서 놀아 대면 임 장주님은 어쩌지도 못하고 속만 타서 죽어나는 거죠. 안 믿어지세요?"
구양봉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 계집들은 스스로 자기의 미모에 자신을 가지고 음탕한 짓으로 사내를 꼬인다. 하지만 네 년들이 아무리 애교를 부리고 웃음을 팔아도 임일천 같은 악귀를 매일 붙잡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청청이 신이 나서 계속 재잘거렸다.
"그 양반은 매일 찾아왔고, 우린 그분이 올 때마다 기진맥진 오줌을 싸게 만들어 주었지요. 그래도 못 믿겠어요?"
"못 믿겠는걸!"
"주인님은 믿으셔야 해요. 정 못 믿겠으면 한번 시험해 보시죠?"
청청이 웃으며 바짝 다가들었다.
"어떻게 시험한다는 거냐?"
구양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들의 눈은 온통 불이 켜진 듯했고 하나같이 구양봉을 삼켜 버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계집은 사내의 뼈를 갉아먹는 독충이라더니…….'
구양봉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구양봉은 필경 피끓는 쾌남아였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천하의 아름다운 여인은 모두 내 것이 돼야 한다. 진시황도 천하를 통일하고 여섯 나라의 미인들을 아방궁에 실어다 놓고 엿새 동안이나 즐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하루면 족하다. 이 계집들이 정말 재주가 있는지 한번 봐야겠다…….'
구양봉을 안내하던 뚱보 여인이 부추겼다.
"장주님, 저 여인들이 시험해 보라고 조르는데요. 춘궁(春宮)에 가서 시험하시죠?"
"좋다!"
구양봉은 좋다고는 했지만 어디가 춘궁인지도 모르는 터였다 좌우간 한번 시험해 볼 판이었다.
뚱보 아낙네가 미녀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문을 열어 주자 아홉 미녀들은 새장에서 풀려 나온 새떼처럼 구양봉을 스쳐 지나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몇 개의 층계를 계속 내려가자 널따랗고 호젓한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엔 알록달록한 비단요를 깔아 놓은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2, 30명은 족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 둘레는 신기한 무늬가 박힌 옥돌로 되어 있었고 새하얀 이불은
모두 비단 이불이었다. 아홉 미녀는 조용히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아홉 미녀! 그녀들을 보노라니 구양봉의 가슴엔 피가 솟구치고 오금이 저려왔다.
청청은 다른 한 계집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면서 약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우리는 필경 여자들이에요. 사실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어야 진짜 재민데, 한데 임일천이란 녀석은 고자란 말예요. 알겠어요?"
차츰 불빛이 어두워지면서 지하실은 밤안개가 긴 듯 희끄무레해졌다. 그 몽롱한 분위기 속에 발가벗은 미녀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물고 빨고 하면서 뒹구는 모양은 구양봉의 넋을 앗아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청청이 다시 말을 건넨다.
"장주님, 왜 보기만 하고 침대에 오르지 않지요? 당신은 천하에 으뜸가는 악인이라면서요? 당신은 만 가지 악 중에서 무엇이 으뜸인지 아세요?"
"음란함이겠지 ."
구양봉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맞았어요. 하지만 무엇이 음란함인지 아세요?"
"나는 몰라."
청청은 어느새 구양봉의 옆에 다가와서 슬그머니 구양봉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햇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청청이 속살거렸다.
"구양 장주님, 한번 체험해 보셔야죠. 천하의 호걸들이 왜 저마다 군왕이 되려고 하는지 아세요? 군왕이 누리는 향락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왜 누려 보지 못하나요, 네?"
모용쟁은 집 안에 틀어박혀서 해산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절망한 나머지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뱃속에 든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아이마저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죽게 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살인 행위가 아닌가. 그녀는 일단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견뎌 내기로 결심했다. 몇 날을 꼼짝하지 않고 방안에만 붙박혀 있노라니 자꾸만 귓전에
암자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사부나 주지가 경을 읽고 설법할 때는 정신통일을 해야 부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마음이 산란하기만 했다.
불현듯 어디선가 '등기당당……' 하는 아쟁을 뜯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쟁은 흠칫 놀라 옆에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얘야, 이건 아쟁을 타는 소리가 아니냐?"
"아니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시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애두 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니? 분명 누군가 아쟁을 타고 있는데."
모용쟁은 강남의 전통 있고 권세 있는 가문의 딸자식이니만큼 음률에 아주 밝았다. 그녀는 한참 귀를 기울이더니 중얼거렸다.
"지금까진 괜찮구나. 아쟁을 타는 이의 마음에 고통이 있긴 해도 아직은 마음을 고쳐 먹을 수가 있어. 아쟁 소리가 맑고 부드러우니까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아쟁 소리는 천군만마가 내달리듯 하더니 강물처럼 흐느끼고 바다처럼 솟구치면서 급박하게 들려 왔다. 아쟁 소리가 불바다 속의 아우성처럼 거칠어지자 모용쟁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 사람은 벌써 마귀에게 홀렸어. 이젠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이야. 한데 아쟁을 타는 사람이 구양봉이 아닐까? 그이만이 이런 곡조를 탈 수 있어. 그이는 천하를 독차지하려고 천하의 호걸들과 자웅을 다투고 있어. 만약 취미로 저런 광란적인 곡조를 들었다면 몰라도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려는 마음에서 저런 곡조를 들었다면 큰일이구나. 지나친 탐욕이야.'
모용쟁은 새삼스럽게 아이의 장래가 근심되었다.
"아이야, 내 아이야, 너는 구양씨 가문에 태어나지만 장래에 닥칠 일은 모르고 있겠지. 아무튼 이 에미는 저 세상에 가서도 너의 행운을 빌겠다."
어느덧 아쟁 소리가 사라지고 사위가 잠잠해졌다.
모용쟁이 시녀에게 물었다.
"얘야, 장주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알고 있느냐?"
"듣자니 저쪽에는 임 장주가 모아 둔 골동품과 미녀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리로 놀러 가셨나 봐요."
"알겠다. 이젠 네 방으로 가서 쉬거라."
모용쟁도 임 장주에게 잡혀 들어온 미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양봉이 그곳에 갔다면 요망스러운 계집들의 함정에 빠질 게 분명했고 다시는 그녀에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모용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때 구양봉은 운우지정에 빠져 모용쟁의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모름지기 대장부라면 눈앞에 차려진 향락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영웅 호색이라지 않던가. 더구나 이 아홉 계집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영특한가! 귀여운 청청은 구양봉의 발치에 누워 어리광을 부리고 아양을 떨었다. 구양봉이 쾌락에 빠져 자신조차 잊고 있는데 이를 지켜 뚱보 여인이 히죽 웃으며 농
담을 던졌다.
"재미가 어떠세요?"
구양봉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어느새 철두철미한 악인이 되어 있었다. 만악의 근원은 음란함이라는 옛사람들의 말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내가 백타산의 주인이거늘 색을 즐긴다고 뉘 감히 탓할소냐? 이 계집들을 보라, 내 말 한마디면 설설 기지 않는가.'
구양봉은 우쭐한 기분이 되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여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나도 가짜 방망이에 속하느냐?"
계집들은 구양봉을 끌어안으면서 숨이 넘어가게 웃어대더니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구양봉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모두들 자기 방에만 붙박혀 있지 말고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사는 게 어떨까?"
그의 말에 계집들이 이구동성으로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의 허락 없이 아무 짓이나 함부로 했다가는 가차없이 죽을 줄 알아라!"
구양봉이 으름장을 놓자 계집들은 서로를 보며 방글거렸다. 구양봉이 말을 이었다.
"나는 흰색을 제일 좋아해. 울긋불긋한 색깔은 딱 질색이니까 모두 흰옷으로 바꿔 입도록 해라. 그러면 선녀처럼 아름답게 보일 거야."
그 말에 청청이 입을 삐죽거렸다.
"장주님도 보통 양반이 아니시군요. 옷차림까지 장주님 뜻에 따르란 말씀이세요? 좋아요. 정 원하신다면 하라는 대로 하지요, 뭐."
계집들은 저마다 침대에서 내려가 울긋불긋한 비단옷을 보란 듯이 찢어 버리고 히히덕거리면서 옷을 바꿔 입으러 갔다.
홀로 된 구양봉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불쑥 청청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장주님, 옷을 바꿔 입었으니 들어가 보일까요?"
"좋다!"
허락이 떨어지자 교태를 머금은 여인들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구양봉은 하늘에서 백조 테가 내려앉은 듯한 순백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거칠고 음탕하던 계집들이 눈 깜짝할 새에 얌전한 여염집 규수로 환생한 듯싶었다. 청청이 입을 열었다.
"장주님, 우리 아홉은 모두 성심성의껏 장주님을 받들고 따를 것을 약속했어요. 장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저희들은 한평생 다락방에 갇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거예요……."
여인들은 모두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이 총관을 불러 분부했다.
"덕분에 잘 구경했네. 이제부터 이 계집들은 모두 나의 시중을 들게 하게. 나의 환심을 얻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내 눈 밖에 날 경우엔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임을 명심하도록 하게."
총관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렸다.
"그리고 저 계집들이 원한다면 다른 곳에 마땅한 집을 얻어 주게. 내 가끔 가 볼 테니까."
총관은 분부를 받들어 바삐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