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행(四川行) 22
“저 고개만 넘으면 바로 요성이 보입니다. 무대장님....”
빗물에 흠뻑 적셔진 옷의 무게를 바람에 털며, 조금은 옅게 내려진 물안개를 찢고 달려온 그들은 이름 모를 야산을 타고 넘으며 달리고 있었다.
아문이 아는 최대한 빠른 지름길이었다.
무정은 아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약 삼 십 여장 앞에 고개의 끝이 보였다. 무정은 고개를 끄떡이며 일행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행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무정의 고개는 전방으로 빠르게 다시 돌려졌다.
“아.......아......아”
무정의 귀에 흐릿한 함성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흐릿한 묵기가 전신에서 스며 나왔다. 무정의 몸은 괜찮은 듯 했다. 허나 보이는 것만 그런 것이었다. 현재 안으로 묵기를 갈무리할 수는 없었다. 오다가 마상에서 잠깐 해보다 엄청난 고통이 오는 경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히 갈무리 할 생각은 못하고 예전처럼 밖으로 조금씩 피워내기만 하고 있었다.
“!”
함성소리가 훨씬 또렷해 졌다. 익숙한 소리였다. 군의 집단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는 안색을 굳혔다. 슬쩍 본 조란사태의 일행도 들은 듯 했다. 무정은 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말의 양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찼다.
무정의 말이 긴 울음과 함께 앞발을 들었다가 내리면서 힘차게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일행들도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옅어진 빗줄기속에 흙탕물이 진하게 튀고 있었다.
“아......이....이런!”
조란사태는 경악했다. 이건 전쟁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는 꼴밖에는 안되었다.
고개는 생각보다 높았다. 그들의 눈에 고개 아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의 눈에 저멀리 오백 여장 앞에서 벌어지는 살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서장군(西臧軍) 이천의 병력 중 현재 전투를 벌이는 병력은 단 오백정도로 보였다. 그것도 그들은 백여 명 단위로 앞뒤로 번갈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앞의 아군의 병력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정은 눈빛을 가라 앉혔다.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전법이었다. 차륜전(車輪戰)이었다.
저 백여 명 뒤에 사백여명이 있을 것이고 그 뒤에는 일천오백의 병력이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본대가 다시 오고 있을 것이고,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병력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동안의 악전고투가 눈에 선했다. 그들은 거의 잠도 못 잤을 것이었다. 차륜전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집중력도, 체력도 모두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진군하여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는 최대화 하는 전법이었다. 지친 사람들은 도망도 못갈 것이었다.
“이......이익!”
갑자기 여신의 입에서 신음성이 나더니 말을 박차려고 했다. 허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정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말고삐를 움켜쥐고 있었다.
“ ! ”
여신의 눈이 무정으로 향했다. 그녀는 무정의 손을 어서 치우라는 듯 눈에서 기광을 발하고 있었다.
“무작정 가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소!”
무정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여신은 눈을 역팔자로 그리며 항의 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녀는 이 또한 할 수 없었다. 무정의 눈에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정 또한 그녀 못지않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정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쪽에 험준한 산이 가로 막혀 있었고 정면은 커다란 벌판이었다. 마치 병목 같은 요지였다. 이곳만 잘 지켜도 잘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이였다. 문제는 명군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만.........
무정은 이윽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조란사태룰 보며 입을 열었다.
“사태님, 내려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과 바로 좌측으로 가서 방어해 주시오. 적을 죽이려 하시지 말고 물러서게만 하도록 해주시오 될 수 있으면 화려한 무공을 사용해서....”
무정은 말을 마치고 아문을 돌아보았다.
“아문, 자네는 내려가자마자 지금 무림인들이 싸우는 곳 뒤쪽에 목책을 이동시켜라.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무정은 이어 말의 배를 박찼다. 그의 오른손이 등 뒤의 초우를 잡아 꺼냈다. 새벽의 빗줄기를 가르며 초우의 도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 다들 무시주의 말을 들었겠지. 그가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그대로 하자꾸나. 다들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가자!”
조란사태는 말을 마치고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 얼굴색이 새파래진 여신과 여청, 여명이 따르고 있었다.
“수영, 우리도 가자!”
아문의 목소리에 수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혈신의 명령이었다.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들도 그나마 여려진 빗줄기를 뚫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타핫!”
“커어억!”
명각은 눈앞의 병사에게 나한권을 쏟아 붇고 있었다. 그의 옷은 쟃빗의 승복이 아니었다.
마치 서장의 라마인듯, 검붉은 색깔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미 그는 불자임을 망각한 듯 했다. 문득 그의 손길이 저어해졌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불자는 불자였다. 그의 손길이 순간 무뎌졌다.
“까앙!”
병기가 맞부딫 히는 소리가 명각의 오른편 귀에서 강하게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쓰벌!, 뭐해 명각!. 죽고 싶어서 그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냥 질러, 지르라고!”
상귀의 부르짖음이 빗소리를 뚫고 들렸다. 적병의 누군가가 그의 옆 얼굴로 창을 휘드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카아악!”
창을 휘두르던 병사는 상귀의 장창에 목이 뚫렸다. 그는 창대를 막은 순간 그 힘으로 적의 창을 누르고 바로 찔러 올린 것이었다.
“ ! ”
명각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었다. 죄가 있다면 세존의 앞에서 모든 것을 밝히고 죄를 청할 것이다. 그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에서 나한권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명경은 명각의 왼쪽에서 수비를 맡았다. 그는 슬쩍 전장을 돌아보았다. 벌써 며칠째 잠을 못 잤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들의 차륜전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런 그의 눈에 상귀가 명각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보였다.
이정도의 세를 유지하는 것은 고죽노인과 상귀, 하귀의 역할이 컸다. 엄청난 병력의 차이를 그들은 끈기와 용기로 맞서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전쟁의 경험이 있기에 그들의 말은 곧 전술이 되었고, 전략이 되었다. 지금도 그들은 전방을 굳건하게 막고 있었다. 그들이 없는 이틀간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과 각파의 제자들이 다치고 죽었는지 모른다. 명경도 지금 가슴에 무명천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들도 계속되는 차륜전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나 내력이 제일 약한 하귀는 죽을 맛이었다. 그의 창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하귀, 이 자식아! 정신 못 차려, 대장이 올 거다, 반드시 온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휘둘러,...........이야야야야”
상귀의 호통이 터졌다. 그의 장창이 전방을 향해 빛살처럼 뻗어갔다. 이름도 모르는 적병사 하나가 목에 혈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귀는 눈가풀이 점점 무거워 지고 있었다. 무리였다.......... 사일인가?, 아니면 오일 정도 한 잠도 못 잤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젠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눈에 적의 창날이 보였다. 중원의 창날과는 다른 넓고 휘어진 칼을 달고 있었다.
하귀는 창대를 들었다. 아니 들려했다. 허나 창대는 들어지지 않았다. 천근의 무게가 그의 창을 잡고 있었다. 이윽고 적의 장창이 그의 눈앞에 두개나 오고 있었다.
“야 임마. 정신 못 차려!”
상귀가 소리쳤다. 하귀는 아무것도 못들은 것 같았다. 상귀은 이를 악물고 하귀를 향해 신형을 날리려 했다.
“차앙.”
“쓰벌, 저리 비켜 이 자식들아!”
하귀한테 갈수가 없었다. 어느새 몇 명의 적들이 상귀와 하귀를 갈라놓고 있었다. 고죽노인은 달려오고는 있지만 너무 멀리 있었다. 이대로라면 하귀는 죽는 길 뿐이었다.
“문탁아!........”
다급한 상귀의 입에서 하귀의 본명이 나왔다. 그의 핏발 선 눈에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다. 적의 창이 하귀의 목앞 한자에 이르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커억,,,칵...”
갑자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하귀를 죽이려던 적병 둘이 뒤로 튕겨 나갔다. 상귀는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자신의 창을 놀리면서 적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이 이마에는 검은색의 투환침이 깊숙이 꽃혀 있었다. 너무나도 낮 익은 것이었다. 순간 상귀의 입에서 터질 듯한 함성이 새어 나왔다.
“이,,, 쓰벌,,,대~에~자~앙~!”
흘러내리는 빗줄기와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는 상귀였다.
전속력으로 말을 모는 무정의 눈에 하귀가 위험한 것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상귀의 목이 뚫리는 것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거리는 오장이상이었다. 그는 초우를 도갑으로 넣고는 뒷춤의 투환침을 꺼내들어 양손에 쥐었다. 그의 몸에서 묵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말의 등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순간 그의 몸이 달리는 말의 탄력을 받으며 앞으로 이장정도 솟구쳤다. 그의 파풍의가 바람을 타고 하늘높이 펄력였다.
“타앗”
무정의 기합과 함께 투환침이 쏘아져 나갔다. 온 정신을 집중한 일격이었다. 주위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조금 느리게 보이는 정도로 묵기를 조정해서 잘 될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자신의 몸상태를 고려 할 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의 눈에 하귀의 몸이 약간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쌔액~”
두개의 투환침이 삼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하귀의 양 귓가를 스쳐 갔다. 그리고는 장창을 꼬나쥐고 달려오는 두 적병의 얼굴에 섬뜩한 소리를 내며 한 치 이상 박혀 들어갔다.
“퍼퍽...”
한사람은 왼쪽눈 위에 또한 사람은 광때 뼈 위쪽에 박혀버린 두 병사는 창대를 하늘로 던지며 뒤로 튕겨지었다.
무정의 눈에 다행히 두 적병이 모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그 탄력 그대로 달려 하귀 앞에 섰다. 하귀는 땅에 창대를 박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무정은 눈을 굳혔다. 그는 하귀를 들어 자신의 말 쪽으로 던졌다. 다행히 일장 이상 하귀의 신형이 굴러갔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문득 그의 귀에 상귀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무정은 고개를 돌려 상귀를 향해 소리쳤다.
“상귀, 고죽노인 내 뒤를 받쳐. 명각, 명경, 이쪽을 맡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무정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죽노인과 상귀는 무정의 말을 듣고 얼굴색을 환하게 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쓰벌,,,대~에~자~앙~!”
여린 빗줄기를 뚫고 들리는 소리에 명각과 명경은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렸다.
대장이란다.... 그럼 무정이 온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무정이 하귀를 구해 내는 것이 보였다. 몸은 괜찮은 것 같았다. 명각의 눈에 기쁨의 감정이 묻어났다. 이젠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어느새 무정을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한 명각이었다.
그런 그의 귀에 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을 맡으라는.... 명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명경과 함께 무정의 말을 따랐다.
무정은 몸 상태에 주의하며 묵기를 몸 밖으로 뿜어냈다. 그동안 힘겨운 적을 상대하느라 한동안 안 써본 방법이었다. 이들 정도라면 이정도로 충분 할 것 같았다. 그는 초우를 휘두르며 빛살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지친 고죽노인과 상귀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할 속도로...
“헉헉...쓰벌 대장, 뭐 좋은거 혼자 다 쳐 먹구 왔어!. 천천히 좀 가!”
“후우,,후우... 진짜 힘들구먼..”
차라리 좀 전처럼 그냥 싸우는 것이 더 편했던 고죽노인이었다. 그는 단창을 힘겹게 돌리며 상귀와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눈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정이 하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뱀의 머리를 치듯 적장부터 잡을 생각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만한 결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자신들은 결정권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여기 있는 무림인들 중 그들과 호흡이 맞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무정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좌우로 신형을 흔들며 장창병들을 쳐내고 있었다. 이제 약 오장정도만 전진하면 이 적병들의 후미로 들어서게 되는 그였다. 그는 전투 중에 적병사이로 전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전방에는 약 삼십 여장 떨어진 곳에 웬 갑주를 입은 자가 몇 명의 창병을 지니고 말에 타고 있었다. 이 적병들의 인솔자 인 듯 했다.
애당초 무정의 목표는 그였다. 적장, 백명으로 이루어진 차륜전의 대장급인 그의 목을 취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고죽노인, 상귀, 이곳에서 잠시만 버텨!. 곧 쉬게 해 주겠다!”
“헉, 쓰벌, 지발 좀 그렇게 해라 대장, 진짜 죽겠다.”
“뭔지 모르지만 빨리하게나....이러다 나도 죽겠네!”
무정은 고죽노인과 상귀의 상태가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난화개벽장(亂花開闢掌)”
“퍼버버버벙!”
“크아....크아악...크아아악.”
좌측 후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면서 적병들이 한꺼번에 튕겨졌다. 아미의 조란 사태였다. 무정의 주문대로 그녀가 위력이 크고 강한 무공을 선보인 것이었다.
무정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적장이 눈은 왼쪽으로 향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그의 묵기가 삼척이상 몸 밖으로 흘러나오며 강한 살기가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는 적장의 머리에 한 점을 찍었다. 그리고는 땅을 박찼다.
이번 차륜대의 책임자. 나달은 좌측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꺼번에 세 명의 병사가 날아갔다. 아까 뒤쪽 구릉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달려오더니 저쪽으로 간 것 같았다. 오자마자 내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붓다니.......전장을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좌측을 보강해라 전면의 병사를 그쪽으로 보내.......!”
지시를 하던 나달은 눈을 크게 떴다. 강한 살기가 자신에게 폭사 되었다. 그는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다.
무정은 공기를 찢고 나가려 했다. 허나 그의 묵기는 그만한 힘을 내지 못했다. 속도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속도로 내고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속도는 아니었다. 환영이 고작 대여섯 개 정도뿐이었다. 공기를 찢는 것도 주욱 찢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멈칫 멈칫 점
점이 찢고 나가고 있었다. 몸이 이상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정의 마음에 어느덧 자리 잡은 불안감은 그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정의 눈이 가라 앉았다. 그는 공중으로 도약해 나갈 생각을 고쳐먹고 최대한 신형을 숙이며 말의 머리 바로 아래까지 움직였다.
“ ! ”
나달은 눈을 크게 떴다. 빗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시커먼 것이 사람 같기는 한데 몇 개의 환영을 보이면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왔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몸이 보이질 않았다. 말밑에 있는 것 같았다.
“파앗!”
“!”
나달의 눈에 어떤 장면이 보였다. 말의 목이 잘리며 이어서 흐릿한 빗줄기가 넓은 도면에 튕겨져 나가는 장면.... 찰나였지만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이 장면을 기억하고 싶었다. 허나 더 이상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생각할 머리가 붉은 대지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정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뱀이 목을 자르고 몸통을 짓이기는 것 이었다. 조란사태가 주의를 끌고 자신이 적장을 베는.... 작전은 잘 맞아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적장의 손에 반쯤 뽑혀진 검이 들려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자신이 오는 것도 몰랐을 것이었다. 거의 하급무사 수준에도 신형이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공중으로 쉽게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말 앞까지 바짝 접근해 사각에서 쳐 올린 것이었다. 적장이 말에 타고 있었기에 그는 말의 목과 함께 쳐 버린 것이었다. .
“퍽..!”
질척한 땅에 말과 사람이 함께 쓰러졌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초우를 올렸다. 이번엔 그의 호위병들이었다.
“이야야야야야!”
무정의 입에서 벼락같은 함성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주위의 적들이 도륙되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좋지 않다지만 이정도의 병사도 상대하지 못할 무정이 아니었다. 이미 묵기를 올린 그의 초우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다.
고죽노인은 뒤에서 무정이 적장을 베는 것을 보았다. 그동안 많이 봤던 일이니, 별 신경이 안 쓰였다. 허나 곧 그의 기합소리를 들었다. 이상했다. 무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것은 예전의 패도 구여력이나 했던 방법이었다.
“ !"
문득 그의 뇌리에 섬전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난전이었다. 더구나 빗속이었다. 적군은 적장이 죽은 것을 보지 못했다. 그거였다.
“하야야야야야야양!”
고죽노인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단창을 높이 휘드르며 무정쪽으로 신형을 옮기면서 말이다. 이러면 적군은 볼 것이었다. 자신들의 장수가 죽은 것을...
“헥헥...어이 노친네!, 누가 머리에 창질했수?,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쓰벌!”
눈치 없는 상귀가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지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도움 안 되는 인간이었다.
고죽노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적군의 진영이 일파만파로 무너지기 시했다. 당장공수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선두부터 후미까지 약 다섯 겹의 인의 장막에 군데 군데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크악”
“아아악”
서장군의 비명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능력으로 본다면 절대로 무림인을 당할 수 없었다. 조직력을 잃은 서장의 군대는 분노한 중원무림인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정은 호위병을 처치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인 중에 그가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낮익은 얼굴도 보였다. 명경과 명각, 당문의 당패성, 당혜, 아미의 조경사태와 자신과 같이온 여승들. 그리고 을와산 정상에서 잠시 본 청성의 사람들......... 점창은 오지 않은 듯 했다. 문득 무정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 나온 사람들 치고 너무 젊었다. 누군가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각파에 한 두 명씩은 있을 법도 한데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하다못해 군문에서도 반드시 선참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보내는데 어느 정도 알 법한 무림인들이 그런 것을 생각지 않다니 의외였다.
“헥,.... 쓰벌......죽갔네.... 대장 이제 어쩔까?”
상귀의 물음에 무정의 생각은 접혔다. 지친 모습이 역력한 상귀의 모습에 무정은 고개를 끄떡였다. 여기 있는 이들도 자신도 우선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바아아아아앙........바아아아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나발소리가 들였다. 무정의 후미인 것으로 보아 적 선발대의 본영이었다. 그와 함께 서장군이 뒤로 썰물 빠지듯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적군의 퇴각나발소리인 것 같았다.
“저놈들이........ 곱게 보내줄 것 같으냐!”
얼굴에 피칠을 한 당패성이 검을 왼손에 쥐고 품속에 손을 넣어 철질려를 꺼내 힘차게 뿌렸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철질려는 여러 병사의 몸에 박혔다. 당패성은 득달 같이 달려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어느새 당가의 제자들이 주위로 몰려 있었다.
“둘째 사형, 이대로 적군을 추적합시다. 그동안 당한 것이 억울해서라도 이렇게는 못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사형, 당문의 위세를 보여줍시다.!”
여기저기 창상을 맞은 몇 사람이 동조했다. 아마도 당문의 사형제들인 것 같았다. 당패성은 고개를 끄떡였다. 피곤했지만 여기서 전공을 세운다면 사천에서 당가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 질 것이었다. 그는 입을 열고 출전을 말하려고 했다. 허나 곧 입을 닫았다.
그의 눈앞에 서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무....무대협?”
당패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어쩐지 적의 진형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정이 온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비켜라!. 웬 놈인데 감히 당문의 앞을 가로 막는 게냐!”
쏫아붇는 빗줄기가 내리는 가운데 한 당문의 제자인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부라렸다. 쥐 눈에 전체적으로 얄팍한 인상의 그는 무정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청성의 예음검 유정봉은 퇴각하는 적군을 보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정을 보았다. 유정봉은 무정의 등장을 알고 있었다. 고죽노인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당문의 한 제자가 무정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보였다. 눈에 쌍심지가 켜져 있는 것을 보니 고운 소리는 아닐 듯 싶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사제들을 봤다. 그의 눈에 교검 문세음과 무변검 종음이 들어왔다.
“저기 니들처럼 미친놈 하나 더 있다. 가서 인사라도 하지 그러냐?”
나직한 비웃음이었다. 문세음과 종음은 고개를 벌겋게 물들이며 바닥으로 떨구었다.
“조용히들 해라. 어디라고 함부로 나서느냐!”
황급히 말문을 열며 당패성은 일행을 달랬다. 눈앞의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해 보였다. 무정의 앞에 나와 소리 질렀던 쥐 눈의 사내는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중인 속으로 숨겼다.
“반갑습니다. 무정대협 아미파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당패성을 보고 무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그는 자신에게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날 때가 생각났다. 사람 자체는 좋았지만 너무나도 생각이 많은 사람, 항상 주위를 의식하는 사람, 전혀 변하지 않았던 그였다.
“당공자, 지금 즉시 병력을 후방의 목책 뒷편으로 이동하시오,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오!”
무정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귀에도 무정의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몇몇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좀 쉴 수 있을 것이었다.
몇몇의 사람들은 무정의 말에 반대를 하며 지금 추격을 하자고 입을 열
었지만 가고 싶으면 가보라는 무정의 말에 입만 쭈삣거리고 있었다.
무정은 신형을 돌려 자신의 말 쪽으로 갔다. 그 앞에는 하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하귀를 말 위에 얹었다. 조그많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무정의 손이 말고삐를 조용히 잡았다. 그와 그의 말이 빗속을 천천히 걸으며 목책으로 향하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