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보성선씨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안렴사공께서 중국에서 오셨느냐>입니다. 정여창 선생의 문집과 순조실록에는 <선윤지는 황조문연각학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여창 선생의 직계후손 종중인 문헌공파 종중에서 2011년에<선평양공행장은 후세에 조작된 글>이라는 취지로 결정하고, 대종회에 내용증명으로 통보하였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조도파의 병오보(1786년 발간)에는
1673년 선문환(1세 선용신의 12세손) 어른께서 쓰신 <계축 가승>의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계축 가승>은 현존하지 않으며 서문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서문을 보면,
1673년 당시에는 당연히 선원지 할아버지와 선윤지 할아버지는 형제입니다.
또한 선중의 호구첩 내용에 따라 일단 선용신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삼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 조도파의 병오보에는 만력 41년(1613년)에 계축 가승 서문을 쓰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선문환 어른은 1598年生~1677年卒이므로 1613년(계축년)이 아니라 1673년(계축년)에 서문을 쓰신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어른이 사시는 동안 계축년이 2회였기 때문에, 병오보(1786년) 발간시 실수하여 <만력 41년(1613년)>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사공파 선필하(宣弼夏, 12세)․선수귀(宣壽龜, 13세) 어른께서 선용신(宣用臣, 1세) 중시조와 선유(宣儒, 2세) 할아버지를 후대(後代)로 낮춰버리고, 선윤지 할아버지를 시조공으로 하여 1749년에 기사보를 발간합니다.
<宣氏麗史所載>에서 3명, <萬姓譜所錄>에서 1명을 선택하여, 1세 宣允祉, 2세 宣謹, 3세 宣坦, 4세 宣韙, 5세 宣汝諧로 세대를 구성합니다.
최종적으로 1978년에 수보할 때, 1세 선윤지, 2세 선안경, 3세 선구령, 4세 선시중으로 함으로써, 1749년에 시작된 선윤지 할아버지 후손끼리의 내부적 갈등은 230년이 지나서야 세대논쟁이 종결됩니다.
예를 들어, 竹山安氏의 入寶城 시조인 安民 어른은 3세 선구령(宣龜齡) 할아버지의 사위입니다. 그런데 竹山安氏 족보의 기록을 보면, 安民의 配位는 寶城宣氏이고, 그 父는 宣龜齡, 祖父는 宣安景, 曾祖父는 宣汝諧이며, 宣允祉의 後孫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조를 바꿈에 따라 빚어지는 부작용은 타 종중의 족보까지 기록이 틀리게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명나라 사신이라 함에 따른 부작용
ㅇ 윤지 할아버지께서 명나라에서 오셨다는 1382년에 선윤지 할아버지께서는 실제로 추동번(秋冬番, 임기 6개월)으로 전라안렴사를 지내셨습니다. <전라감사> 책자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1382년에 명나라에서 오셨다고 얘기합니다.
1997년 대동보에서 선안혁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선정훈 어른께서 신림동에서 비석과 묘지석을 찾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선안혁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년월일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비석과 묘지석의 글씨를 충분히 해독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보 기록대로 1382년에 선안혁 할아버지가 태어나셨으면, 兄인 선안경 할아버지는 명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얘기가 되며 어떻게 성씨가 보성 선 씨로 기록하였으며 允祉 조의 配位가 연안(황해도)李씨로 기록되었다.(아들의 나이와 배위의 기록으로 볼 때 의문점 있으며 구보에는 배위 기록이 없음)
舊己巳譜序文(1749년)
綾城公의 七世孫인 應賚의 序文(1741년)에 선 씨가 중국 에서 왔는데 혹은 팔학 사에 참여되어서, 혹은 칠 대신에 참여되어서 왔다고 하나 전설이라 믿을 수는 없고 중국에서 왔다 는 것은 확실하다고 기록하였다. 말미에 분파된 부분이 자 상하지 못한데 가 있으므로 족보의 끝에 별록 하였으니 후에 아는 사람들의
보정을 하기 위해서 라고 기록하였다.(윤지 할아버지께서 우왕8년에
문연각학사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는 기록이 없음)
ㅇ 1441년에 옥암공 宣時中 할아버지께서 8명의 자녀에게 재산상속을 하는 분금유서(分襟遺書)를 작성하셨습니다. 1441년에 자녀가 8명이니까 대략 선시중 할아버지는 1400년대 초에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면, 선윤지 할아버지께서 1382년에 중국에서 오셔서, 2세 선안경 할아버지, 3세 선구령 할아버지를 거쳐서 1400년 초에 4세 선시중 할아버지가 태어나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1세에서 4세까지 대략 20년이 걸렸다고 하면 이 또한 얼마나 어색한 이야기입니까?
※ 선중의(宣仲義) 호구첩에 의하면, 선중의 할아버지는 국가공인문서에 의해 1358년생입니다. 따라서 선중의 할아버지의 叔父되시는 선윤지 할아버지는 대략 1330년~1340년생으로 추정됩니다.
1813년에 宣始啓, 宣守信, 宣光顯, 宣宗恪, 宣始億, 宣益洙, 宣致行, 宣基煥 어른 등 당시 대종회를 이끌어가시는 어른들이 편찬하신 보성선씨삼강록(寶城宣氏三綱錄)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중입니다.
이 삼강록에 孝子 14명과 忠臣 21명에 대한 공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삼강록에서 선윤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 역사적 사실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한 글자라도 사실보다 과장한 것이 없으며, 또한 명나라에서 오셨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1830년 오충사액을 받기 위해 <선평양공행장>이 나온 이후, 1844년에 편찬한 寶城宣氏五世忠義錄에는 선윤지 할아버지께서 명나라에서 오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ㅇ 정여창 선생의 증손자 정수민 어른이 살아계실 때, 1656년에 쓰신 천령지(天嶺誌)에는 고려시대 천령지방(지금의 함양군)의 역사적 인물로 大司成 宣國忠, 校理 宣一德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대동보에는 순무사공(宣淸裕)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ㅇ 관동지(關東誌)에는 宣國衡 어른과 宣厚德 어른께서 횡성현감을 하셨다고 나옵니다. 선국형 어른은 선전공파(선학령의 후손)임이 분명하지만, 선후덕 어른은 조도파 중 도촌파의 중파 중시조입니다. 선용신 중시조의 9世孫입니다. 그런데 1997년 대동보에는 참판공파로 되어 있고, 선윤지 할아버지의 10세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성군 득량면 정흥리 선산 아래에 선무원종공신녹권에 나오는 보성선씨 임난공신 28人 중에서 조도파 6人의 육충절의비가 있습니다.
조도파 6人의 공적은 선조임금이 몽진떠났을 때 임금을 지키겠다고 평양 근처의 용만(龍灣)까지 달려가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용만전투에서 모두 순절하신 것 입니다.
그런데 임난공신 28人 중에서 선전공파의 선광회(宣光回) 功臣,
선대로(宣大老) 功臣, 그의 아들 선덕봉(宣德鳳) 功臣 등 3人은 조도파 6人과
똑 같이 용만(龍灣)까지 달려가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용만전투에서 모두
순절하셨습니다.( 왜 같이 전투에 참여 했을까요?)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성군이 군명이 복홀,산양.패주로 기록하고 성씨가 박,오,강,선,화,지씨등이 있으며 인물 편에 선윤지,선형이 기록되었고, 윤지의 행적이 郡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옲겨져 내지로 가서 살자 윤지가 안렴사가 되어 백성을 위로하고 재물을 모아 郡 사람들을 안정시키니 지금까지 이를 칭한다.
족보를 발간하기 220여 년 전의 문헌에는 선 씨는 보성이 본관임을 기록하였고, 1421년 선중의 호구에도 본관을 보성으로 기록함.
함안 조씨 족보에 덕곡 조승숙(1357~1417)의 배위가 보성 선 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묘소의 비문 확인 결과 「高麗 奉正大夫 扶餘監務 趙承肅 之墓 配位는 寶城宣氏之墓」로 기록 되어 있으며 부는 수찬을 지낸 양좌로 기록하였다.
(용신의2자로 유(儒)의 동생이며 휘는 좌이고 초휘가 양좌로 족보에 기록 되었다.)
(조승숙묘비)
▷ 윤지조와 조승숙은 고려의 학자며 충신들이고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온점으로 볼 때 나이가 비슷한 연배(年輩)로 보는것이 타당(妥當)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