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조》 계간평
아픔과 트라우마, 광장의 시학
이송희 시인 •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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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폭력의 역사와 시대의 아픔은 왜 늘 숙명처럼 반복될까? 역사적 트라우마와 아픔을 계속 품은 채 신음할 수 없어서, 우리가 애써 회피하고 지우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들을 애써 망각하거나 무시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상생과 평화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과 폭력의 역사를 끌어안고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그 아픔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모순적으로 담겨 있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과 마 주할 때마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그 고통 속에서 괴로워한다. 우리는 왜 그 기억을 잊지 못한 채 괴로워하며 왜 또 그 기억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시인은 이런 물음을 안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시화하며 시대적 망각에 저항하며, 혹은 동시대의 아픔을 공유해온 존재다. 이들은 사건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들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거나 동시대의 사건을 객관화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이번 계절에 주목한 시조들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제주 4·3과 분단의 역사와 화합의 상징, 자본주의의 여전한 그늘을 관통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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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남의 작품은 '인면조'의 상징을 통해 분단된 우리 역사의 화합을 상징화하고 있다. 우리는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일본의 침략으로 파행적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분단국가로서의 아픔을 겪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파행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과 슬픔의 원천이 되었으며 미래 삶을 위협하는 동인으 로 작용하기도 한다.
김덕남은 민족 수난의 슬픔과 분단 현실의 극복, 통일을 염원하는 목소리를 '인면조'의 상징 안에 담아내면서 분단 비극의 슬픔을 희망적으로 바꿔놓는다.
캄캄한 하늘 질러 천년을 날아왔나
마른 목 축여주는 설원이 눈부시다
예맥족 숨결로 빚은 마중물을 붓는다
함성과 탄성으로 박차는 힘을 모아
세상 끝 달려가서 별자리를 잡을거나
은하에 씻은 몸으로 마중불을 댕긴다
쪽물든 반도기로 백두대간 종단하다
봄 햇살 활짝 풀어 얼음장 녹일거나
쩌엉 쩡 금 가는 소리, 꽃샘추위 몸 푼다
-김덕남 「인면조」 <좋은시조> 2018 여름호
인면조는 고구려 벽화 등에 나타나는 사람의 얼굴을 한 새로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고 하여, 평창올림픽 개·폐막 식에 등장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듯 분단된 남과 북도 이어주고 냉전의 꽃샘추위도 풀어준다는 염원을 담은 일 종의 통일 기원 시다. 인면조가 마중물을 붓고 마중불을 댕기며 남북 화해 모드로 전환되고 급기야는 한반도의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기원이 점층적으로 표현되었다.
신선 사상과 도가 사상이 녹아든 고구려 벽화에서 발굴한 인면조는 동남아시아에서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신묘하고 상서로운 존재로 알려져 왔다. 고대인들은 동물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신화에서 새는 보통 치유와 생명을 상징하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불사조 '피닉스'를 비롯하여 인도의 가루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수호 조인 선더버드, 중국의 봉황, 일본의 야타가라스는 전부 인간의 생명을 수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 상징들이 존재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등장한 인면조는 백두대간을 종단하며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의미를 더했다. "캄캄한 하늘 질러 천년을 날아" 온 새는 마른 목을 축여주며 마중물을 붓고, 마중불을 댕기며 얼음장을 녹인다. 예맥족 숨결로 빚고, 은하에 씻은 몸으로 댕기고 봄 햇살 활짝 풀 어 녹이는 '붓고 → 댕기고 → 녹이는' 과정들은 우리가 단일종족으로서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의미한다.
하략...
이송희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면사무소』. 평론집 『눈물로 읽은 사서함』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등.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무등시조문학상 수상.
- 《좋은시조》 2018.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