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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탄생배경
1920년대 무렵 유럽과 남미에는 프로화의 물결이 밀려오며 세계선수권 대회의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게다가 기존의 올림픽무대는 아마추어만 출전할수 있게 되어서 실력있는 프로선수들이 뛸수있는 세계무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FIFA의 제3대 회장인 프랑스의 줄 리메는 세계선수권대회 개최에 정열을 기울였다. 줄리메의 노력에 1928년 FIFA회의는 2년후인 1930년 제1회 월드컵대회를 열고, 그후로는 4년마다 개최할것을 찬성25표, 반대5표로 가결했다. 단일종목으로는 가장먼저 세계선수권대회가 탄생한것이다. |
| 설립
국제축구연맹(FIFA)은 1904년 5월 21일 파리의 프랑스체육협회연합 본부 뒷편에 설립되었다. 이날 국제축구연맹 설립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7개국 축구 협회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프랑스 - 프랑스체육협회연합(USFSA) 벨기에 - 벨기에체육협회연합(UBSSA) 덴마크 - 덴마크축구협회(DBU) 네덜란드 - 네덜란드축구협회(NVB) 스페인 - 마드리드축구클럽 스웨덴 - 스웨덴축구협회(SBF) 스위스 - 스위스축구협회(ASF)
조직의 정비
이틀 후인 1904년 5월 23일 열린 제1차 FIFA 총회에서 로베르 게렝(프랑스)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빅토르 E. 슈나이더(스위스)와 카를 안톤 빌헬름 히르츠만(네덜란드)이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사무총장 겸 재정위원장에는 루이스 멀링하우스(벨기에), 부사무총장에는 루드빅 실로우(덴마크)가 임명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FIFA는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이들 초창기 임원들이 해야 할 일은 매우 많았다. 전체적인 조직을 정비하면서 국가별로 각국을 대표하는 축구 단체인 축구협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도록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잉글랜드가 새로 설립된 FIFA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FIFA는 원래 유럽의 축구협회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나 1909년부터는 비유럽 지역 국가들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1909/19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입을 시작으로 1912년에는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1913년에는 미국이 차례로 회원국이 됨으로써 FIFA가 국제적으로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이미 마련한 상태였다.
회원국 수의 증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1914)이 FIFA에 준 타격은 컸다. 모든 국제 교류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미미한 수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3월 1일 프랑스 출신 줄 리메가 3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48세였던 리메 회장은 이후 FIFA에 자신의 삶을 걸고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그가 새로 이끌어 가게 된 국제축구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회원국 수가 20개국에 불과했다. 영국의 협회들은 모두 함께 FIFA를 탈퇴했고 브라질이나 우루과이도 회원국이 아니었다. 줄 리메가 회장으로 있는 33년 동안 FIFA는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줄 리메 시대' 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 그는 FIFA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월드컵의 꿈을 실현시켰다. 줄 리메는 1954년 제5회 스위스에서 월드컵 개막 선포 후 회장직을 사임했는데 당시 FIFA 회원국 수는 무려 85개국에 이르렀다!
제1회 월드컵 개최
올림픽 경기는 자체적인 세계 대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FIFA의 희망을 더욱 강하게 부추겼다. 그리하여 집행위원회의 강력한 제안에 따라 1928년 5월 FIFA 총회에서 FIFA가 주관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개최국을 선정해야 했다. 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우루과이가 개최를 희망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이유로 인해 처음부터 우루과이는 가장 강력한 개최 후보지로 떠올랐다. 1924년과 1928년, 두 번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1930년은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930년 7월 18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백주년 기념 경기장(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제1회 월드컵의 막이 올랐다. 세계 축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4년 후, '월드컵의 아버지' 줄 리메는 그의 평소 소망대로 제3회 월드컵이 그의 모국인 프랑스에서 열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원칙대로라면 1942년에 제4회 월드컵이 개최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1938년 파리 총회에서 개최국을 결정하지 못해 1942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다음 총회는 1946년 7월 1일에야 다시 열렸다. 이 총회에서 유일한 후보국이었던 브라질의 다음 월드컵 개최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영국 협회들의 재가입
1946년 영국의 네 개의 축구협회들이 FIFA에 재가입했다. 이 역시 줄 리메의 외교적인 수완 덕분이었다. 그는 아서 드루리, 스탠리 라우스 경과 같이 선견지명을 가진 인물들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를 만들어 갔다. 4년 후 스위스에서 제5회 월드컵이 열리던 해 베른 총회에서 80세의 줄 리메는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1954년 6월 21일, 그는 최초의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마지막으로 '월드컵의 아버지'는 우승한 독일팀 주장에게 그의 이름을 딴 '줄리메컵'을 수여한 뒤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립 50주년
FIFA의 4대 회장에는 벨기에의 로돌프 윌리엄 실드레이어스가 선출되었다. 그가 취임하던 해 FIFA는 설립 50주년을 맞이했으며 회원국은 85개국에 이르고 있었다. 25년간 FIFA의 부회장으로 줄 리메를 도왔던 실드레이어스는 1955년 10월 사망했다. 1956년 6월 9일 그의 후임으로 아서 드루리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이미 반 년 이상 FIFA 임시 회장직을 맡아 오고 있었다. 아서 드루리는 FIFA의 새로운 법규 제정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58년 매우 발전된 모습의 제6회 월드컵 대회가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1961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61년 9월 28일 임시 총회가 열릴 때까지 FIFA의 운영은 스위스의 에른스트 B. 톰멘이 맡았다. 그는1954년, 1958년, 1962년 월드컵 대회의 조직위원회장으로서 국제축구연맹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 후 FIFA의 6대 회장으로 스탠리 라우스 경이 선출되었다. 신생 독립국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조치 중 하나는 FIFA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회원국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월드컵 경기의 TV 중계 또한 전세계적으로 FIFA를 알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FIFA는 사립 기관이었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이나 외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았다. 자금은 엄격하게 월드컵 대회를 통한 수익으로만 조달되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새로운 일을 성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커다란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새로운 일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고 유지시켜 나가야만 했는데 스탠리 라우스 경이 이 모든 일을 해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6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 박사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시대
1974년 제39차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주앙 아벨란제 박사는 축구를 단순한 운동 경기로만 여기지 않고 세계적인 축구 기술 발전을 위한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고 동시에 이를 위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벨란제가 FIFA 본부 입성은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순전히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 대회에서 나오는 수익에만 의존해 왔었다. 따라서 FIFA는 의사 결정에 있어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행정력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되어 왔었다. 아벨란제는 이렇게 행정적인 성격의 기관인 FIFA를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가 넘치는 활기찬 기업으로 바꿔 놓았다. 현재 FIFA 본부는 여전히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1974년 12명의 직원이 일하던 취리히베르크의 낭만적인 데르발트 빌라 대신 이제는 5개의 건물에서 120명 이상 되는 직원들이 계속 증가하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세계화
지난 25년 동안 축구는 단지 전세계인이 즐기는 주요 스포츠로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방면으로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지역,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그 모두를 포용해 왔다. 전세계적으로 약 2억 인구가 직접 발로 뛰며 즐기고 있는 축구는 이제 레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204개 회원국
1998년 6월 8일 파리에서 열린 제51차 정기 총회에서 후앙 아벨란제의 후임으로 스위스 출신 제프 S. 블라터가 FIFA 8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이미 23년간 FIFA에서 다양한 지위를 거치며 활동해 오다 마침내 세계 축구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우승컵
 줄 리메컵 |
초창기의 월드컵트로피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벨 리플레가 1.8kg의 순금으로 만든것으로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용기를 손으로 떠받치 고 있는 형상이다. 이트로피는 당시 FIFA 회장이자 월드컵대회 창시자인 프랑스의 줄 리메(Jules Rimet)를 기려 1946년에 '줄리메컵' 으로 개칭되었다. 1930년 제1회 월드컵 대회에서 주최국인 우루과이가 우승을 함으로써 감격적인 첫 키스를 한 이컵은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 브라질이 최초로 통산 세번째 우승을 차지해서 브라질이 영구히 보관하고 있던 이컵은 1983년에 도난당하고 말았다. 금으로 녹여져 팔려버렸다는 후문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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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FA컵 |
1970년 브라질이 줄 리메컵을 영구 소유하게 되자 FIFA는 월드컵 트로피를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 'FIFA 월드컵'으로 명명된 이 트로 피는 이탈리아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의 작품으로, 두명의 선수가 서로 손을 맞대고 양손을 뻗쳐 지구를 떠받치고 있으며 높이 36cm, 4.97kg의 18금으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는 FIFA컵으로 불린다. 줄 리메컵과는 달리 우승국이 4년동안 소유하다가 다음 대회때 반환 하고 대신 도금한 복제품을 따로 받는다. 그러나 이 컵 역시 2038년 대회를 끝으로 FIFA가 영구 보존 하게된다. 줄 리메컵의 비극을 의식한 FIFA는 도난을 우려해서 25만 스위스 프랑(약23만 달러)의 보험에 이 트로피를 가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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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fifaworldcup.yahoo.com/06/en/p/h/index.html http://www.worldcupland.w`o.ro/ http://2002.fifaworldcup.yahoo.com/02/kr/pf/h/fifa.html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