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죽녹원, 매타 세쿼이아길, 창평 슬로 시티, 담양 장날)
정현수
한 겨울의 세찬 바람은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른다. 추위의 절정인 함박눈이 온 다음 날, 6시에 집을 나서는 내 모습은 뭔가를 터득하려는, 범주를 못 벗어난 고독한 철학자처럼 꾀죄죄하다. 칭칭 감은 목도리는 볼썽사납고 두툼한 방한복은 갑갑하고 거추장스럽다. 아직 어두움이 깔린 아스팔트 도로에 간간이 네온만이 깜박거리고 을씨년스러운 앙상한 은행나무 가지는 된바람에 휘~익 휘파람을 분다. 교회 담벼락 밑 길 고양이는 안식처 없는 서러움에 야옹 거리고 온기 없는 지하철역은 여행자의 마음을 처량하게 한다. 이번 여행은 한 해가 가기 전 어딘가를 가고 싶은 의도도 있었지만 눈 오는 매타 세쿼이아 길을 걸으며 아스라 한 추억에 젖어 지나간 모든 것, 그것들의 따뜻한 진정의 분위기에 빠져보고 싶어서이다. 7시 05분 용산 발 광주 송정행 무궁화 열차는 평일이라 영등포역부터 출근하는 사람들 때문에 만 차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찌든 삶이 엿보이고 축 처진 어깨는 마음에 쓰이는 듯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산다는 것! 그 인생은 누군가를 위한 서서히 타버리는 아궁이 속 장작불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그 희생으로 가족이나 또 다른 누군가가 안심하는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강인한 삶의 의지는 그들 구성원은 꿈의 원천이고 기쁨이 되는 훈훈한 행복이다.
오산역인가? 공장 건물 넘어 작은 민둥산에서 해가 떠오른다. 붉디붉은, 둥근 해오름은 차창 너머의 찬란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붉은 해는 정해진 자유로움이고 간섭받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장엄하게 아름답다. 기차 바깥 풍경은 백색의 들판이다. 꾸밈없고 청조한 분위기에 마냥 눈길이 간다.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흰 눈이 풍성하게 얹어 저 있고 작은집 지붕은 쓸쓸하고도 빛이 나는 듯하다. 그 지붕 아래엔 어느 누군가의 또 다른 삶이 있을 것이다. 뭔가 만져 보고 싶어도 만져지지 않거나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까? 혹은 축복 속에서 살며 순간순간마다 기쁨과 행복에 젖어 무탈한 나날을 지내는 사람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창 너머 고적한 그곳은 삶의 고단함이 보이기도 하고 새 아침에 신의 은총이 서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곧 각박한 현실이 질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차 바퀴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처연한 이의 하소연처럼 들려온다.
잠깐 졸았는데 벌써 광주 송정역이다. 시간을 보니 11시 15분이다. 역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160번)로 갈아타고 50여 분을 지나 서방시장에서 하차, 죽녹원행으로(311번) 바꿔 타고, 죽녹원 앞에서 내려 담양 여행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군중(관광객)과 함께 하는 여행은 역시 내가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죽녹원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어색하게 꾸며 놓은 듯, 자연을 상실하고 댓잎은 빛을 잃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꾸며 놓으면 그 자연은 별로 보 잘 것이 없어진다. 군데군데 파헤쳐 지고 요소요소에 설치물과 건물이 들어선 게 원래 그대로가 아닌 여간 불협화음이다. 길도 많고 정(亭)도 많다. 여기저기 어설프고 유치 찬란한 판다 조형물도 많다. 아무리 대나무 숲이지만 중국 상징인 판다 조형물이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언짢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한여름의 죽림욕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원함과 상쾌함을 줄 것이다. 홀로 걸어가는 길, 주위에 꾸밈이 없고 속살이 들여다 보이는 호젓한 외진 길이 그리워진다. 후딱 원내를 돌아보고 빠져나와 개울가 노점에서 호떡과 커피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대신하고 징검다리 건너 관방제림에 들어섰다. 참! 수더분하고 아기자기한 길이다. 300여 년 전 제방 둑에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나무들인데 아름드리 푸조나무, 느티나무, 개서어나무 등이 천변 길 1.2킬로 천 변 둑에 심어져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질서하게 심어진 나무들은, 그 무질서의 아름다움은 수수하면서 섬세하고 세월의 역경을 이겨낸 듯,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 모습이다. 가지 사이로 조용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감미로운 멜로디가 들려오듯이 밝은 햇볕에 나를 안아주는 바람이 따뜻하다. 추위와 따뜻함의 이분된 개념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순간만은 어느 편도 들고 싶지 않다. 산림청이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단다. 관방제림 길 끝에서 조금 더 걸어 매타 세쿼이아 길에 도달했다. 미술 교과서의 원근법의 전형을 보듯 반듯하게 나열된 나무들은 정감을 준다. 오후, 이곳은 쾌청 맑음이다. 기온도 올라가 나뭇가지에 잔설은 없지만 응달진 곳에 제법 눈이 쌓여있다. 눈 쌓인 길을 연인이 팔짱을 끼고 천천히 속삭이며 걸어간다. 둘의 모습은 로맨틱의 절정이고 한껏 행복에 취해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길에 그 연인의 모습은 여기까지 온 나를 위한 믿음과 기대를 더해준 대리만족이다. 가까이에서 거기에 몰입할 가치가 있는 예쁜 장면이다. 오래전 아내와 강원도 여행을 자주 한 적이 있다. 딱히 그곳이 썩 좋다기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때의 감정은 홀로 여행하는 지금만 못하다. 왜일까? 아마, 서로 느끼는 감정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센티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못해 그랬을까? 아니면, 그때의 감성은 진정 지금과 같은 나를 찾지 못하여 그랬나? 고작, 설악산은 케이블카 만 타고 오르내리고 삼척 추암 해돋이는 손잡는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추위에 내 온기만 지켰었던 것 같다. 화천 운수골에서는 천방지축 나 혼자만이 재미 본 것 같다. 왜 포근하게 감싸주지 못했나? 왜 좀 더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했을까? 사랑은 귀한 것이고 인색하지 말아야 함인데 후회되고 내가 바보스럽다. 나는 책 읽고 셈할 수 있는 평범한 지식인일지 몰라도 이성으로 판단하고 감성으로 느끼는 지성인은 못 되는 것인가 보다. 매타 세쿼이아 고즈넉한 길의 구석진 카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지금 이 순간 소홀히 할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소박한 시간이다. 아내와 아이들 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서로 의지하고 때론 아웅다웅하며 또는 애정 어린 모습으로 다가가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애틋함이 우리 모두에게 오래오래 지속될 때, 그때의 그 감정이, 그 사랑이 절절히 저미어 온다. 앞으로 나에게 남겨진 나날들도 중요하지만 그때 그 시절 아스라한 추억들이 그리워진다. 다시 담양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저녁을 먹은 뒤 창평 슬로시티로 가는 버스를 탔다. 완전한 어두움이 깔릴 때 도착, 정갈하고 깨끗한 한옥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받은 창평면 상지내 마을 고씨 일가의 집성 촌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곡선이 날렵한 한옥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아늑하고 꽤 큰 한옥들이 즐비하다. 골목길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흙이 깔린 골목길 한편에 멋스러운 개울에 맑은 물이 흐르고 돌담 위에 기와장이 얹어 저 있는 정겨움은 참, 소박하다. 골목길 허물어진 돌담 담장 위에 가시덤불이 널브러져 있고 그 너머 보이는 교회 뾰족탑은 왠지 서정적이다. 아쉬운 건 그 품위 있는 한옥들이 일부는 방치되어 허물어져 가는 것이다. 빈집도 더러 있거니와 고옥인지라 손상이 많아 보였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고 재선 가옥(빈집)만 해도 내가 보기엔 훼손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 지자체에서는 무얼 하는지? 선걸음에 방문자 센터에서 거저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옛 정원을 꾸며놓은 명옥헌에 들를까 했지만 나는 담양 장날이 더 보고 싶다. 담양 장날은(2.7일) 하천변에 있는 시장을 끼고 개천 둑 위에 죽 늘어져 있다. 어물전의 홍어도, 엿 판의 붉은 호박 엿도, 주전부리인 옛날 과자도 모두가 정겹다. 검정콩 한 줌과 말린 나물 몇 덩이, 약간의 푸성귀를 좌판에 벌린 할머니는 벌써 한 잔 술에 취하신 듯하다. 흥겨운 노랫가락으로 주위의 분위기를 돋운다. 건어물 전에서 영광굴비를 놓고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흥정하는 모습이랑, 덤 달라고 떼쓰는 초로의 아낙은 대놓고 삼베 과자를 한 움큼 움켜 쥔다. 이 모두가 사람 냄새가 훈훈하고 정이 있는 온기가 느껴진다. 그냥 시장 판이 아니고 5일장이라 이런 정겨운 장면을 볼 수가 있다. 나도 된장찌개에 넣어 먹을 요량으로 말린 바지락과 라면에 같이 끓일 썬 떡을 샀다. 점심은 곰국을 포기하고 시장 좌판에서 파는 옹심이가 잔뜩 들어간 팥죽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 본 정겨운 맛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행복한 즐거움을 준다. 여행의 참 맛을 알 수 있도록 서로 어울려 일부러 짜인 게 아닐까? 아스라한 기차 여행도, 길을 걷는 여행도, 정이 있는 5일 장도 그냥 흐뭇하고 기쁨이다.
그 안에서 내 스스로의 멋진 삶을 만들어 가기에 나는 지금 그지없이 행복하다.
2013.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