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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오르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하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치며 소까지 끌고 갔네. ……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쌀 한 톨, 베 한 치도 바치는 일 없구나. …… - ‘애절양(哀絶陽)’, 정약용(1803) -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오늘날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나라란ㄴ 것은 백성이 모인 것이고, 백성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미곡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백성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서 소요가 일어난니, 흰 수건을 둘러스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 영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승정원 일기', 고종 1년(1864) -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2.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책
| 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회의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중략) 대개 천리 지척이란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란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말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황현, '매천야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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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그 가장 심한 곳은 서원이었다. 편지 하나를 띄워 먹도장을 찍은 다음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제사 비용)을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그 편지를 받으면 즉시 주머니를 쏟아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은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 박제형, '근세 조선 정감' -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 못한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유(先儒)를 제사지내는 곳인데 어찌 이런 곳이 도적이 숨는 곳이 되겠느냐?”
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하고 폐단이 큰 서원을 철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선비들 수만 명이 대궐 앞에 모여 만동묘와 서원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청하니, 대원군이 크게 노하여 병졸로 하여금 한강 밖으로 몰아내고 드디어 1천여 곳의 서원을 철폐하고 그 토지를 몰수하여 관에 속하게 하였다. -정교, '대한 계년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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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제도로서 인정(人丁)에 대한 세를 신포(身布)라 하였는데 충신과 공신의 자손에게는 모두 신포가 면제되었다. 이 법이 실행된 지도 오래됨에 턱없이 면제된 자가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무른 사족(양반)이란 자는 모두 신포를 바치지 않고, 그 모자라는 액수를 반드시 평민에게 덧붙여 징수하여 보충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이를 시정하고자 '동포(洞布)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예전에 변제되던 자라도 신포를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정의 관리들이 이 법의 시행을 저지하고자 하여, "만약 이와 같이 하면 국가에서 충신과 공신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후한 뜻이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듣지 않으면서 "충신과 공신이 이룩한 사업도 종사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그 후손이 면세를 받기 때문에 일반 평민이 법에 정한 세금보다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된다면 충신의 본뜻이 아닐 것이다."하여 단연 그 법을 시행하였다. -박제형, '근세 조선 정감' -
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과 천민에게 1정(丁)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세납전 2냥씩을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호포전)이라 한다. - 황현, '매천야록' - |
3.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두 차례의 양요
| 대개 우리 나라에 잠입하여 사학(邪學)을 전파하려고 하는 자는, 그 무리를 이 땅에 심어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며 우리의 허실을 살피고, 군대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리의 옷을 더럽히고 우리의 재물을 탈취하여 큰 탐욕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 이항로의 상소문, 1866 -
비록 교역을 하자고 한다 해도 한번 외국과 서로 통하게 되면 사학이 반드시 융성해져 공자의 도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신미양요 때 고종이 한 말, 18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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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양이 보국책(攘夷保國策)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그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릭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六丁六甲)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邪學)보다도 더욱 심할 것이다. |
| 너희 나라와 우리 나라 사이에는 원래 왕래도 없었고, 은혜를 입거나 원수를 진 일도 없다. 이번 덕산 묘지에서 저지른 사건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한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아 몰래 들이 닥쳐 소동을 일으키며, 무기를 빼앗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하는 것도 사리로 볼 때, 어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사태에서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네놈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뿐이다. -고종실록, 1868,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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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첫댓글 대단한 자료 네요 정말 알찬 사이트를 찼은것 같아
뿌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