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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7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13. 초품 중 불토원(佛土願)을 풀이함
【經】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서원했다.
【論】 보살들은 여러 부처님의 세계가 한량없이 장엄하고 깨끗함을 보고는 갖가지 서원을 일으킨다.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뭇 고통이 아주 없고 나아가서는 3악(惡)1)의 이름조차 없는 것을 보고는
보살이 스스로 서원을 일으켜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루거든 그 세계에는 온갖 고통이 없고 나아가서는
삼악도의 이름조차도 없으리니, 반드시 이와 같아지리다” 한다.
또한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7보(寶)2)로 장엄되어 있어 주야로 항상 청정한 광명을 뿜어 해와 달이 없는 것을 보고는
서원을 일으켜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루거든 그 세계에는 항상 장엄하고 깨끗한 광명이 있으리니,
반드시 이와 같이 되리다” 한다.
또한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중생들이 모두가 10선(善)을 행하고 큰 지혜가 있으며, 의복과 음식이 생각하는
즉시 생겨나는 것을 보고는 서원을 일으켜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루거든 그 세계의 중생들의 의복과 음식도
반드시 이와 같아지리다” 한다.
또한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순수하게 보살들만이 있는데, 부처님의 몸매와 같아 32상(相)3)이 있고 광명을 환하게 비추고,
나아가서는 성문이나 벽지불은 이름조차 없고 또 없으며, 모두가 깊고 묘한 불도를 행하여 시방으로 유행하면서 일체를 교화한다.
이것을 보고는 서원을 일으켜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이루거든 그 세계의 중생들도 반드시 이와 같아지리다”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의 갖가지 장엄하고 깨끗함을 보고는 모두 얻겠다고 서원한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서원하였다’고 한다.
【문】 보살들은 행과 업이 청정하여 스스로 깨끗한 과보를 얻거늘 어찌하여 반드시 서원을 세운 뒤에야 그것을 얻는가?
비유하건데 농사짓는 이가 곡식을 얻는 것과 같으니, 어찌 다시 서원을 기다리겠는가.
【답】 복을 짓되 원하는 것이 없으면 표방할 바가 없나니, 서원을 세워 인도자[導御]가 되어야 능히 이루어질 바가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금을 녹이는 일은 세공사의 뜻에 따를 뿐이요, 만들어질 금에 모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보시의 복덕을 닦고 조그마한 지계의 복덕을 닦으면서 선법(禪法)을 알지 못하더라도
인간 세상에 부귀 안락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에 항상 생각하고 집착하고 서원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부귀 안락한 인간으로 태어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보시의 복덕과 조그마한 지계의
복덕을 닦으면서 선법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천왕천처(四天王天處)나
삼십삼천(三十三天)ㆍ
야마천(夜摩天)4)ㆍ
도솔타천(兜率陀天)ㆍ
화락천(化樂天)색욕을 전일하게 생각함으로써
변화한 색욕이 내게로 와서 나를 기쁘게 하는 곳이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하늘은 남을 색욕의 경계로 만들어 그와 더불어 음욕을 행하며, 또한 전전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까닭에 타화자재라 한다.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항상 원한다면 목숨이 다한 뒤에 제각기 원한 곳에 태어난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깨끗한 세계로의 서원을 닦은 뒤에야 그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원에 의해서 수승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세계를 장엄함은 커다란 일이어서 홀로 행해 공덕을 이룰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서원에 의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비록 소의 힘이 수레를 끌기에 족하지만 반드시 마부가 있어야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세계를 맑히고자 하는 서원 역시 그러하니, 복덕은 소와 같고 서원은 마부와 같은 것이다.
【문】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복덕을 얻지 못하는가?
【답】 비록 얻기는 하나 서원이 있는 것만 못하다. 서원은 능히 복을 도우니, 항상 행한 바를 생각하면 복덕이 자라나는 것이다.
【문】 서원을 세워야 과보를 얻는다면 어떤 사람이 10악(惡)을 저지르고도
지옥에 태어나기를 서원하지 않는다면 지옥의 과보도 얻지 않아야 하리라.
【답】 죄와 복에는 정해진 과보가 있지만, 다만 서원을 세운 이는 적은 복을 닦아도 원력 때문에 큰 과보를 얻게 된다.
앞에서 말하기를 ‘죄의 갚음은 괴롭다’고 하였는데, 일체 중생은 모두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괴로움을 원하는 이는 없다.
그러므로 복에는 한량없는 과보가 있지만, 죄의 과보는 한량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가장 큰 죄는 아비지옥(阿鼻地獄)5)에서 한 겁(劫) 동안 과보를 받는 것이며,
가장 큰 복은 비유상비무상처에서 8만 대겁 동안 과보를 받는 것이다.
보살들이 세계를 맑히려는 서원 역시 한량없는 겁 동안 도에 들어가서 열반을 얻게 하니,
이것이 항상하는 즐거움[常樂]이다”고 한다.
【문】 니리품(泥黎品)에서는 “반야바라밀을 비방한 죄는 이 세계의 겁이 다하면 다시 다른 지방의 니리6) 가운데로
옮겨간다”고 하였거늘 어찌하여 가장 큰 죄는 지옥 안에서 한 겁의 과보를 받는다 하는가?
【답】 불법은 중생을 위하여
두 가지 교화방법이 있으니,
하나는 불도요,
둘은 성문도이다.
성문도에서는 5역죄(逆罪)7)를 지은 사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지옥의 과보를 한 겁 동안 받는다’ 하시고,
보살도에서 불법을 파괴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기서 겁이 다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한량없는 죄를 받는다’ 하셨다.
성문법에서 가장 으뜸가는 복은 8만 겁 동안 받고, 보살도에서 받는 큰 복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받는다.
그러므로 복덕은 반드시 서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량없는 부처님의 세계를 받아들이고자 서원한다’고 말한다.
【經】 한량없는 국토의 부처님들의 삼매를 생각하니,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論】 한량없는 불국토라 함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말한다.
염불삼매란 시방 3세의 부처님들을 항상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되 마치 눈앞에서 드러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문】 무엇을 염불삼매라 하는가?
【답】 염불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의 법에서 한 불신(佛身)에 대해 마음의 눈으로써 관찰하여
시방에 가득하심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도로서 한량없는 불국토 가운데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불국토의 모든 부처님들의 삼매를 생각하니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문】 보살의 삼매가 갖가지로 한량이 없다면 어찌하여 보살은
이 염불삼매만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만을 찬탄하는가?
【답】 이 보살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까닭에 불도(佛道)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염불삼매로써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염불삼매는 갖가지 번뇌와 전생의 죄를 제거하지만, 다른 삼매로는 능히 음욕을 제거하나 성냄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능히 성냄을 제거하나 음욕을 제거하지 못하고, 능히 우치를 제거하나 음욕과 분노를 제거하지 못하고,
능히 3독(毒)을 제거하나 전생의 죄를 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염불삼매는 능히 갖가지 번뇌와 갖가지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또한 염불삼매에는 큰 복덕이 있어서 능히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 보살들이 중생을 제도하려 함에
다른 삼매들 가운데 이 염불삼매만큼 복덕으로 모든 죄를 속히 없앨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5백 명의 상인들이 바다에 들어가서 보물을 캐다가 마가라어왕(摩伽羅漁王)을 만나게 됐다.
그 입을 여니 바닷물이 그 가운데로 들어가고 배가 쏜살같이 쓸려 들어가는 난을 당하였다.
이때 사공[船師]이 망루 위의 사람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망루 위의 사람이 대답했다.
“해가 셋이 있고 횐 산이 늘어섰는데 물이 쏠려들기를 마치 큰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사공이 말했다.
“이는 마가라어왕이 입을 벌린 것이다. 하나는 진짜 해요,
두 개의 해는 고기의 두 눈이요,
흰 산은 고기의 이빨이다.
물이 흘러드는 것은 그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제 우리들은 끝장이 났다.
제각기 천신(天神)에게 기도하여 스스로를 구제하라.”
이때 사람들이 제각기 섬기는 바에 구원을 청했으나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이 가운데 5계(戒)를 받은 우바새가 있다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나무불(南無佛)8)을 외웁시다.
부처님은 가장 높으시니,
능히 모든 사람들의 고액(苦厄)을 구제해 주십니다.”
이에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소리를 맞추어 ‘나무불’을 외쳤다. 이 고기는 전생에 계를 파한 불제자로서
전생 일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는데,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저절로 뉘우치고 깨달았다.
곧 입을 다무니, 뱃사람들은 벗어날 수가 있었다. 부처님을 억념한 까닭에 능히 무거운 죄를 제하고
모든 고액을 면했거늘 하물며 염불삼매이겠는가.
또한 부처님은 법의 왕이시며 보살은 법의 장수이니, 존중받을 분은 오직 불세존뿐이시다.
그러므로 항상 부처님을 억념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항상 염불을 하면 갖가지 공덕의 이익을 얻나니, 비유하건대 대신이 남달리 은총을 입어 항상
그 주인을 생각하듯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갖가지 공덕과 한량없는 지혜는 모두 부처님으로부터
얻음을 알고 그 은혜가 중함을 아는 까닭에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가 묻기를 “어찌하여 항상 부처님만 생각하고 다른 삼매는 행하지 않는가” 하였으나,
지금은 “항상 생각한다”고 말했을 뿐 다른 삼매는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단 염불삼매를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상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앞에서는
공(空)ㆍ
무상(無相)ㆍ
무작(無作) 삼매를 말했으나
아직 염불삼매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말한 것이다.
【經】 능히 한량없는 부처님들께 청했다.
【論】 청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셨을 때 보살이 밤낮으로 세 차례씩 여섯 차례 예배하여 청한 것이니,
곧 오른 어깨를 걷어 올리고 합장한 채 여쭙기를 “시방의 불국토의 한량없는 부처님들이 처음으로
불도를 성취하시고 아직 법륜을 굴리시기 전에 나 아무개는 일체의 부처님들께서 중생을 위해
법륜을 굴리셔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들께서 한량없는 수명을 버리시고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보살이 또한 밤낮으로
세 차례씩 오른쪽 어깨를 걷어 올리고 합장한 채 여쭙기를 “시방의 불국토의 한량없는 부처님들이시여,
나 아무개는 청하오니 세간에 오래오래 끝없는 겁 동안 머무시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 것이다.이것을 ‘능히 한량없는 부처님들께 청한다’고 말한다.
【문】 부처님들의 법이란, 가르침을 설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하셔야 하기에 청하건 청하지 않건
마땅히 그렇게 하셔야 하거늘 어찌하여 청을 기다리는가?
만일 목전에서 부처님들께 청한다면 이는 가능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시방의 한량없는 불국토의 부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거늘 어찌 청할 수 있겠는가?
【답】 부처님들은 반드시 법을 설하시니, 남이 청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지만 청하는 이도 또한 복을 받아야 된다.
비록 대국의 왕에게는 맛좋은 음식이 많지만 드시라고 청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복덕이 내려지는 것과 같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까닭이다.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들 모두가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생각하는 경우,
비록 그 중생은 즐거움을 받지 못해도 생각하는 이는 많은 복을 받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것도 그러하다.
또한 부처님들은 청하는 이가 없으면 바로 열반에 들어 설법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법화경(法華經)』9)에서 다보(多寶)부처님10)은 아무도 청하는 이가 없는 까닭에 곧 열반에 드셨다가
나중에 변화한 불신(佛身) 및 칠보탑으로 『법화경』을 설하시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 잠시 나타나셨다고 했다.
또한 수선다(須扇多)부처님의 제자는 전생의 행이 아직 익어지지 않았기에 문득 버리고 열반에 드셨으니,
화불(化佛)로 머물기를 한 겁 동안 중생을 제도하셨다.
지금의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도를 얻으신 뒤 57일 동안 잠자코 계시어 법을 설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기를 “나의 법은 심히 깊어서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일체의 중생들은 세간의 법에 결박되고 집착되어 능히 이해할 자가 없다.
차라리 잠자코 열반의 즐거움에 드느니만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때에 여러 보살들과 석제환인과 범천왕과 하늘들이 합장하여 공경히 예를 올리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최초의 법륜을 굴리소서”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청을 받아들이시고는 바라내(波羅奈)11)의 사슴동산으로 가셔서 법륜을 굴리셨다.
이와 같거늘 어찌 청해도 이익이 없다고 하겠는가.
또한 부처님이란 중생을 평등하게 바라보시어 귀천도 경중도 없다.
누구라도 청하기만 하면 그가 청하는 까닭에 법을 말씀해 주신다.
비록 중생이 면전에서 부처님께 청하지 않더라도 부처님은 항상 그 마음을 보시고
그의 청함을 들으신다. 설사 부처님들께서 직접 듣거나 보시지 않는다 해도 부처님께
청하면 복덕을 받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다 듣고 보시고 계시거늘 어찌 이익이 없겠는가.
【문】 이미 부처님께 청한다면 이익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꼭 두 가지 일로써 청해야만 하는가?
【답】 다른 것이라면 청할 필요가 없지만, 이 두 가지 일만은 꼭 청해야 된다. 만일 청하지 않는데도
말한다면 외도들이 비난하기를 “본체의 도는 항상 일정하거늘 어찌하여 법에 집착해서 말을 많이 하고
일을 많이 벌리는가”라고 하리라. 이런 까닭에 청을 기다려 말씀하신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모든 법의 모습을 알았다면 수명을 탐내어 오랫동안 세간에 머물지 말아야 하리라.
그런데 어째서 빨리 열반에 들지 않는가?”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사람이 청하기를 기다려 법륜을 굴리신다.
또한 청하기도 않았는데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법에 애착되어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사람들이 청한 뒤에야 법을 펴신다.
외도들은 스스로가 법에 집착되어 청하건 청하지 않건 자진해서 남에게 말하지만
부처님은 모든 법에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않으신다. 다만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사
부처님께 청하는 이가 있으면 부처님은 당장 말씀해 주신다.
부처님들께서는 청하는 이가 없는데도 최초의 법륜을 굴리시는 일은 없다.
이런 게송이 있다.
부처님들의 말씀은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진실하지 못함인가?
진실함과 진실치 못함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네.
이와 같이 진실한 모습이니
모든 법을 희롱삼지 않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방편으로 법륜을 굴리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청하는 이 없이 스스로 법을 말씀하신다면 이는 스스로 드러내 스스로 집착하는 것이 되어
응당 열네 가지 질문[難]에도 대답을 하셔야 하리라. 그러나 지금 여러 하늘들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함은
단지 노ㆍ병ㆍ사를 끊기 위함일 뿐 희론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열네 가지 질문에 대답치 않아도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꼭 청한 뒤에야 법륜을 굴리신다.
또한 부처님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셔서 대인(大人)의 법을 부리시는 까닭에 비록 큰 자비가 있다 해도
청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신다. 만일 청하지 않았는데도 말씀하셨다면 외도에게 조롱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반드시 청함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은 범천(梵天)을 숭상하는데, 범천이 스스로 부처님께 청하면 곧 외도의 마음도 굴복한다.
또한 보살의 법으로는 밤과 낮으로 세 차례씩 항상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는 이른 아침에 오른 어깨를 걷어 올리고 합장한 채 시방(十方) 부처님께 예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나 아무개는 이 세상이나 지난 세상, 한량없는 겁 동안에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악업의 죄를
시방 현재의 부처님께 참회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모두 소멸케 해 주시고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해 주소서”라고 한다.
낮과 초저녁 그리고 저녁의 세 차례에도 이와 같이 한다.
둘째는 시방 3세의 부처님들이 행하신 공덕과 제자들의 공덕을 억념하고 따라 기뻐하면서 권하고 돕는다.
셋째는 현재 시방의 부처님들께 최초의 법륜을 굴리실 것을 삼가 청하고, 또한 부처님들께서 오래도
세간에 머무시면서 한량없는 겁 동안 일체를 제도하고 벗어나기 해 주시기를 청한다.
보살이 이 세 가지를 행하면 공덕이 한량없고, 부처를 이루는 일에 가까이 가게 된다.
【經】 능히 갖가지 견해ㆍ얽매임 및 모든 번뇌를 끊었다.
【論】 견해[見]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견[常]이요,
둘째는 단견[斷]이다.
상견이라 함은
5중(衆)의 항상함을 보고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요,
단견이라 함은
5중의 소멸을 보고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체의 중생은 대개 이 두 가지 견해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보살은 스스로 이 두 가지를 끊고 또한 일체 중생들의
두 가지 견해를 제거해 중도(中道)에 처하게 한다.
다시 두 가지 견해가 있으니,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이다.
다시 세 가지 견해가 있으니,
일체법을 받아들임[一切法忍]과
일체법을 받아들이지 않음[一切法不忍]과
일체법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함[一切法亦忍亦不忍]이다.
다시 네 가지 견해가 있으니,
세간이 항상하다는 것과 세간이 무상하다는 것과 세간이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는 것과 세간이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와 세간의 끝이 있음과 끝이 없음도 이와 같아서 죽은 뒤에 여실하게 가기도 하며,
죽은 뒤에 여실하게 가지 않기도 하며, 죽은 뒤에 여실히 가기도 하고 여실히 가지 못하기도 하며,
죽은 뒤에 여실히 가지도 못하고 여실히 가지 못하기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다섯 가지 견해가 있으니,
신견(身見)과
변견(邊)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12)와
계견(戒見)13)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견해에서 62견에 이르기까지를 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견해는 갖가지 인연에서 생한 것이며,
갖가지 지혜의 문으로 관찰되고, 갖가지 스승에게서 듣게 된다.
이와 같은 갖가지 모습은 능히 갖가지 번뇌[結使]를 이루고
갖가지 원인을 지어 중생들에게 종종의 고통을 가져다준다.
이를 갖가지 견해라 한다. 견해의 뜻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리라.
얽매임[纏]이라 함은
열 가지 얽매임[十纏]을 말한다.
곧 성냄의 얽매임ㆍ
죄를 숨김의 얽매임ㆍ
졸음의 얽매임ㆍ
잠의 얽매임ㆍ
희롱의 얽매임ㆍ
들뜸의 얽매임ㆍ
제 부끄러움 없음의 얽매임ㆍ
남부끄러움 없음의 얽매임ㆍ
인색함의 얽매임ㆍ
질투의 얽매임이다.
또한 일체의 번뇌는
마음을 얽어매는 까닭에 모두 일컬어 얽매임이라 한다.
번뇌라 함은
능히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번뇌라 한다.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내적인 집착[內著]과
외적인 집착[外著]이다.
내적인 집착이란
다섯 가지 견해[五見]와 의심과 교만 등이요,
외적인 집착이란
음욕ㆍ성냄 등이다.무명은 안팎에 동시에 속한다.
다시 두 가지 결(結)이 있으니,
첫째는 애욕에 속하는 것이요,
둘째는 견해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음욕에 속하는 것과 성냄에 속하는 것과
어리석음에 속하는 것이다.이것을 번뇌라고 한다.
얽매임[纏]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열 가지 얽매임이 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백 가지 얽매임이 있다”고 한다.
번뇌를 일체의 결사(結使)라 하는데,
결에는
아홉 가지가 있고,
사에는
일곱 가지가 있어 합치면 98결(結)이 된다.
가전연자 아비담에 말하기를 “10전(纏)과 98결(結)이 합해 108번뇌가 된다.
독자아(犢子兒)14)의 아비담 가운데에서는 결과 사는 같은 것으로 5백의 얽매임[纏]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번뇌를 보살은 능히 갖가지 방편으로 스스로 끊으며,
또한 교묘한 방편으로써 다른 사람의 번뇌들도 끊게 한다.
부처님께서 생존하셨을 때 세 사람이 있었다.
큰형과 둘째 형과 막내인 이들이 “비야리국(毘耶離國)에는 음녀 암라바리(菴羅婆利)가 있고,
사바제(舍婆提)에는 음녀 수만나(須曼那)가 있으며, 왕사성(王舍城)에는 음녀 우발나반나(優鉢羅槃那)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한 두 사람은 각각 “이 세 여인은 단정하기 견줄 이 없다”며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을 듣고는
밤낮으로 오로지 세 여자를 생각하여 잠시도 멈추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꿈속에서 그들을 만나 정사를 하고 말았다.
꿈을 깬 뒤에 생각했다.‘저 여자가 오지도 않았고 내가 가지 않았는데도 음사(淫事)를 이룰 수 있구나.’
이 일로 인하여 모든 법이 다 이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발타바라(颰陀婆羅)보살에게 가서 이 일을 물으니, 발타바라보살이 대답했다.
“모든 법이 실로 그러하여서 모두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방편으로 세 사람에게 방편을 부려 교묘히 모든 법의 공함을 말해 주니
이때 세 사람은 곧 아비발치(阿鞞跋致)15)를 얻었다.
이 보살들 역시 그와 같아서 중생들을 위해 갖가지 방편으로 모든 법을 교묘하게 말해 주어
모든 견해와 얽매임과 번뇌를 끊어 주니, 이것을 일컬어 “능히 갖가지 견해와 얽매임 및 번뇌를 끊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經】 백천 가지 삼매에서 유희하며 [삼매를] 냈다.
【論】 보살들은 선정으로 마음이 조복되어 청정한 지혜와 방편의 힘 때문에 능히 갖가지 삼매를 낸다.
어떤 것이 삼매인가?
곧 착한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요동치 않는 것을 삼매라 한다.
또한 세 가지 삼매가 있으니,
유각유관(有覺有觀)삼매와
무각무관(無覺無觀)삼매와
무각유관(無覺有觀)삼매이다.
또한 네 가지 삼매가 있으니
욕계에 얽매인 삼매와
색계에 얽매인 삼매와
무색계에 얽매인 삼매와
얽매이지 않은 삼매이니,
이 가운데서 부리는 보살의 삼매는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부처님의 삼매에 대해서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여 부지런히 행하고 닦는 까닭에 ‘능히 낸다’고 한다.
【문】 보살들은 무슨 까닭에 이 백천 가지 삼매를 내고 또한 유희하는가?
【답】 중생들이 한량없고 마음씨[心行]도 한결같지 않아서 근기가 예리한 이도 있고 둔한 이도 있으며,
번뇌가 얇은 이도 있고 두터운 이도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백천 가지 삼매를 행하여 그 번뇌[塵勞]를 끊게 한다.
비유하건대 가난한 사람들을 큰 부자로 만들어 주려거든
반드시 갖가지 재물과 온갖 것을 갖춘 뒤에야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모든 병을 고쳐 주려거든 반드시 갖가지 약을 준비한 뒤에야 고칠 수 있듯이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 갖가지 백ㆍ천 삼매를 행한다.
【문】 다만 이 삼매를 내기만 하면 될 것이거늘 어찌하여 또한 그 가운데서 유희하는가?
【답】 보살이 마음으로 모든 삼매를 내며
기쁜 마음으로 들고나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희(戱)라 한다.
이는 애착에 결박된 유희가 아니다.
유희자재라고 함은 마치 사자가 사슴들 가운데서
자재롭고 두려움 없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따라서 희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보살들이 삼매에 대하여 자재로운 힘이 있어서 능히 나오고 들 수 있음도 또한 이와 같다.
다른 사람들은 삼매에 대하여 자재롭게 들어가나
자재롭게 머무르거나 나오지 못하며,
자재롭게 머무르나 자재롭게 들고나지 못하며,
자재롭게 나오지만 자재롭게 머무르거나 들지 못하며,
자재롭게 들고 머무르지만 자재롭게 나오지 못하며,
자재롭게 머무르고 나오지만 자재롭게 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보살들은 세 가지에 능히 자재로운 까닭에
“백천 가지 삼매에 능히 유희하기도 하고 내기도 한다”고 한다.
【經】 보살들은 이와 같이 갖가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했다.
【論】 이 보살들은 부처님과 함께 머무르니, 그 공덕을 찬탄하려면 한량없는 억겁에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했다”고 한다.
【經】 그들의 이름은 발타바라(颰陀婆羅)16)진나라 말로는 선수(善守)보살ㆍ날나가라(刺那伽羅)17)
진나라 말로는 보적(寶積)보살ㆍ도사(導師)18)보살ㆍ나라달(那羅達)19)보살ㆍ성득(星得)20)보살ㆍ수천(水天)21)보살ㆍ
주천(主天)22)보살ㆍ대의(大意)23)보살ㆍ익의(益意)24)보살ㆍ증의(增意)25)보살ㆍ불허견(不虛見)26)보살ㆍ선진(善進)27)보살ㆍ세승(勢勝)28)보살ㆍ상근(常勤)29)보살ㆍ불사정진(不捨精進)30)보살ㆍ일장(日藏)31)보살ㆍ불결의(不缺意)32)보살ㆍ
관세음(觀世音)33)보살ㆍ문수시리(文殊尸利)34)진나라 말로는 묘덕(妙德)보살ㆍ집보인(執寶印)35)보살ㆍ상거수(常擧手)36)보살ㆍ미륵(彌勒)37)보살이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나유타의 보살마하살들은 모두가 보처(補處)38)이자
거룩한 지위를 이어받은 이들이었다.39)
【論】 이렇듯 여러 보살들이 부처님과 함께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셨다.
【문】 이 같은 보살들은 많이 있거늘 어째서 스물두 보살만 말하는가?
【답】 보살들은 그 수가 한량없는 천만억이어서 말로 다 할 수 없다. 만일 다 말하려면 문자로 다 표시할 수 없다.
또한 여기에 두 종류의 보살이 있으니,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이다.
선수(善守) 등 16보살은 집에 거주하는 보살인데,
발타바라 거사보살은 왕사성의 옛 종족의 사람이요,
보적왕자보살은 비야리국의 사람이요,
성득장자의 아들 보살은 첨파국(瞻波國) 사람이요,
도사거사보살은 사바제국 사람이요,
나라달(那羅達) 바라문보살은 미제라국(彌梯羅國) 사람이요,
수천(水天)은 우바새보살이다.
자씨(慈氏)보살과 묘덕보살 등은 출가한 보살이요,
관세음보살 등은 다른 불토에서 이 세계로 오신 보살이니,
만약에 집에 있는 보살을 말하면 집에 있는 모든 보살을 포함하게 된다.
집을 떠간 보살이나 다른 세계에서 오신 보살도 이와 같다.
【문】 선수보살에게는 어떤 수승함이 있기에 가장 처음에 말했는가?
만일 가장 큰 이를 앞에 둔다면 변길(遍吉)40)이나 관세음이나 득대세(得大勢)41)보살 등이어야 할 것이요,
만일 가장 작은 이를 먼저 말해야 한다면 육신(肉身)을 지닌 이들로서 갓 발심한 보살들이어야 할 것이다.
【답】 커서도 아니요, 작아서도 아니다.
선수보살은 왕사성에 살던 사람으로서 백의(白衣) 보살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려 할 적에 그를 맨 먼저 말씀하셨다.
또한 이 선수보살은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니,
반주삼매에서는 부처님이 스스로 나타나셔서 그의 공덕을 찬탄하셨다.
【문】 미륵보살의 경우라면 보처(補處)라 불러 마땅하겠지만 다른 보살들은 어찌하여
거룩한 지위[尊位]를 이어받았다 말하는가?
【답】 이 보살들은 시방의 불국토에서 모두 불처(佛處)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14. 초품 중 광명을 놓으시다를 풀이함①
【經】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스스로 사자좌를 펴셨다. 그리고는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시고는 염(念)을 모아 눈 앞에 두고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에 드시니, 모든 삼매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갔다.
【論】 【문】 부처님께는 시자들도 있고 보살들도 있거늘 어찌하여 손수 사자좌를 펴셨는가?
【답】 이는 부처님께서 변화해 나투신 것으로서 대중에게 적절히 맞추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아난이 펴지 못했다.또한 부처님의 마음에서 변화해 낸 것이므로 ‘스스로 폈다’고 했다.
【문】 어째서 사자좌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사자를 변화해 내셨는가?
아니면 보배 사자가 왔는가? 혹은 금ㆍ은ㆍ나무ㆍ돌로 사자를 만들었는가?
또한 사자는 착하지 못한 짐승이므로 부처님에게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며 또한 까닭 없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답】 그 이름을 사자라 부르지만, 보배 사자는 아니다.
부처님은 인간 가운데 사자인지라
부처님이 앉으신 곳은 평상이건 땅이건 모두가 사자좌라 한다.
마치 지금 국왕이 앉는 곳을 모두 사자좌라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왕이 건전한 사람을 부를 때에는 인간 사자[人獅子]라 하며,
사람들이 국왕을 부를 때에도 인간 사자라 한다.
또한 사자는 네발 가진 짐승 가운데서 으뜸이어서 두려울 것이 없이 능히 일체를 굴복시키는데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96종의 길에 대해 그 모두를 항복시키되 두려움이 없는 까닭에 인간 사자라 한다.
【문】 앉는 법이 많거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결가부좌만을 쓰시는가?
【답】 모든 좌법 가운데 결가부좌가 가장 편안하여 피로하지 않다.
이것은 곧 좌선하는 사람의 앉는 법으로 손과 발을 거두어 지니면 마음도 역시 흐트러지지 않는다.
또한 온갖 네 가지 몸의 위의 가운데서 가장 편안하니, 이것은 곧 참선할 때의 앉음새이며
도법(道法)을 취하는 앉음새이어서 마왕이 이를 보면 그 마음으로 두려워하게 된다.
이렇게 앉는 법은 출가한 사람의 법이니,
나무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뭇 사람이 이것을 보고 모두 환희하며,
그 도인은 반드시 도를 얻으리라고 안다.
이런 게송이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몸이 평안하여 삼매에 들고
그 위덕을 사람들이 우러르니
태양이 천하를 비춤과 같다.
졸음과 게으름과 번뇌심을 제하고
몸이 가벼워 피로하지 않으며
깨달음도 역시 가볍고 편하니
의젓이 앉았음이 용이 도사린 것 같다.
가부좌로 앉은 그림만 보아도
마왕이 겁을 내고 두려워하거늘
하물며 도에 든 사람이
편안히 앉아 동요하지 않음이랴.
이런 까닭에 가부좌로 앉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앉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어떤 외도들은 항상 한 발로 서서 도를 구하고, 혹은 항상 서 있거나 혹은 발을 올려 메기도 한다.
이런 기이한 모습[狷]으로는 마음이 삿된 바다에 빠지고 몸은 안온하지 못하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부좌를 맺고 몸을 곧게 하라 하셨다.
왜냐하면 몸을 바로 하면 마음을 바로 잡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 몸을 똑바로 세워 앉으면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나니,
단정한 마음으로 뜻을 바르게 하여 염을 모아 눈앞에 두며,
마음이 흐트러지면 이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삼매에 들려는 까닭에 갖가지 잡념을 모두 거두어 모으니,
이와 같이 염을 모아 삼매왕삼매에 드는 것이다.
어찌하여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라 하는가?
곧 이 삼매는 모든 삼매 가운데 가장 으뜸이고 자재하여서 능히 한량없는 법을 반연한다.
마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왕이 제일이요,
왕 가운데에서는 전륜성왕이 제일이요,
모든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는 부처님이 으뜸이듯이
이 삼매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삼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것이다.
【문】 만일 부처님의 힘 때문이라면 모든 삼매가 다 제일이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삼매왕삼매만을 제일이라 하는가?
【답】 비록 부처님의 힘 때문에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삼매가 다 제일이겠지만 모든 법에는 응당 차등이 있는 법이다.
마치 전륜성왕의 뭇 보배가 비록 모든 왕들의 보배보다는 훨씬 수승하지만,
이 보배 가운데에도 스스로 차별이 있어서 귀하고 천함이 아득히 먼 것과 같다.
이 삼매왕삼매는 어떤 선정에 속하며,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매왕삼매는 자재상(自在相)이라 부르니, 능히 5중(衆)을 포섭하며 제4선(禪) 가운데 있다.
왜냐하면 일체의 부처님들이 제4선에서 견제도(見諦道)를 행하여 아나함42)을 얻고,
즉시에 18심 가운데서 불도를 얻으며, 제4선에서 수명을 버리고,
제4선에서 일어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기 때문이다.
제4선 가운데 여덟 가지 태어나 머무는 곳[八生住處]이 있으며,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일체의 입(入)은 대개 제4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제4선은 부동이라 하는데, 선정의 상태[法]가 차단되지 않는다.
곧 욕계에서의 모든 욕심은 선정의 마음을 막고,
초선에서는 각관(覺觀)의 마음이 움직이고,
2선에서는 큰 기쁨이 움직이고,
3선에서는 큰 즐거움이 움직이지만
4선에서는 움직임이 없다.
또한 초선은 불에 타고
2선은 물이 이르고
3선은 바람이 이르지만,
4선에는 이러한 세 가지 근심이 없고
들고 나는 숨[息]이 없으며 잡념을 버리어 청정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삼매왕삼매는 제4선 가운데 있으니,
마치 좋은 보물은 좋은 창고에 두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삼매에 대해 누가 그 모습을 알 수 있으랴” 한다.
일체의 부처님들의 법은 한 모습이고 형상 없고[無相]
한량없고 셀 수도 없어서 불가사의하다.
나머지 다른 삼매조차도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고
불가사의하거늘 하물며 삼매왕삼매이겠는가.
이러한 삼매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
부처님의 신족(神足)과 지계도 알 수가 없거늘 하물며 삼매왕삼매이겠는가.
또한 삼매왕삼매에는
일체의 삼매가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삼매왕삼매라 한다.
비유하건대 염부제의 여러 강이 모두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또한 모든 백성이 모두 국왕에게 예속된 것과 같다.
【문】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이시니 모르시는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이 삼매왕삼매에 드신 뒤에야 능히 아시는가?
【답】 지혜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까닭이며,
외도인 6사(師)들이 “우리의 지혜는 언제라도 항상 존재하고 항상 안다”고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삼매왕삼매에 드심으로써 아시며, 이 삼매에 드시지 않았다면 아시지 못하는 것이다.
【문】 만약에 그와 같다면 부처님의 힘이 줄어든 것인가?
【답】 이 삼매왕삼매에 드시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생각을 내시자마자 곧 드시나니,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작은 보살들이 방편을 써서 들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이 삼매왕삼매에 들면 6신통이 시방에 두루 퍼져서 한계도 없고 한량도 없게 된다.
또한 부처님은 삼매왕삼매에 드셔야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어 큰 신통력을 드러내신다.
만일 이 삼매왕삼매에 드시지 않고 신통을 나타내시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환술의 힘이나 주술의 힘을 부리시는 것이다.
혹은 이는 힘센 용이거나 하늘이지 인간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한 몸에서 한량없는
몸을 내어 갖가지 광명과 변화를 부리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혹을 끊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만약에 다른 삼매에 드시면 하늘이나 성문이나 벽지불들이 곧 엿보아 알게 된다.
비록 부처님의 신력이 위대하다고는 해도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공경하는 마음이 정중치 못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일체의 성현들과 나아가서는 10주(住) 보살들까지도 부처님의 마음이 어디에 의지하였는지
무엇을 반연하시는지 헤아려 알지 못하나니, 이 까닭에 부처님이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가끔 큰 광명을 놓으시고 큰 신통의 힘을 나타내시는 경우가 있다.
곧 처음 탄생하실 때와 도를 깨치실 때와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실 때와 하늘 무리나
여러 성인들이 많이 모일 때와 외도를 무찌를 때는 모두 큰 광명을 놓으셨는데,
이제 그 수승하고 특출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큰 광명을 놓으셔서 시방의 일체의 천인과
중생 및 모든 아라한ㆍ벽지불ㆍ보살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알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에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또한 광명과 신통력에 상ㆍ중ㆍ하가 있으니,
주술과 환술로 능히
광명ㆍ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하등이요,
하늘과 용과 신들이 과보로
광명과 신통력을 얻는 것은 중등이요,
모든 삼매에 들어가서 금생의 공덕심의
힘으로 큰 광명을 놓아 큰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은 상등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문】 모든 삼매에는 각기 모습이 있거늘 어찌하여 일체의 삼매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 하는가?
【답】 이 삼매왕삼매를 얻을 때는 모든 삼매를 다 얻기 때문에 모두가 그 속에 든다고 한다.
이 삼매의 힘 때문에 일체의 삼매를 얻음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히 헤아릴 수 없으니, 이런 까닭에 들어간다고 한다.
또한 이 삼매왕삼매에 들면 일체의 삼매가 들고자하는 대로 곧 들게 된다.
또한 이 삼매왕삼매에 들면 모든 삼매의 모습을 능히 볼 수 있나니,
마치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 삼매왕삼매에 드시어 시방세계를 능히 보시며,
모든 중생들을 능히 관찰하시나니, 이런 까닭에 삼매왕삼매에 드신 것이다.
【經】 이때 세존께서는 삼매로부터 편안히 일어나시어 천안으로 세계를 관찰하시고는 온몸으로 미소 지으셨다.
【論】 【문】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삼매왕삼매에 드셨다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고 선정에서 일어나셔서 세계를 관찰하셨는가?
【답】 부처님께서 이 삼매왕삼매에 드시면 모든 불법의 보배 창고가 모두 열리고 모두 보이게 된다.
이 삼매왕삼매 가운데서 보신 뒤에 생각하셨다.
‘나의 이 가르침의 보배 창고는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히 생각할 수 없도다.’
그런 뒤에 다시 삼매로부터 천천히 일어나셔서 천안으로 중생들을 관찰하시고는 중생들의 빈곤을 아셨다.
이 보장은 인연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일체의 중생들도 얻을 수 있건만 다만 우치하고 어두운 곳에 앉은 채
구하거나 찾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웃으신 것이다.
【문】 부처님에게는 불안과 혜안과 법안이 있으셔서
천안보다 훌륭하거늘 어찌하여 천안으로 세계를 관찰하셨는가?
【답】 육안으로 보는 바는 두루하지 못한 까닭이다.
혜안은
모든 법의 실상을 알고,
법안은
그 사람은 어떤 방편으로 어떤 법을 행하게 하여야 도를 얻겠는가 함을 보고,
불안은
온갖 법을 눈앞에서 명료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제의 천안은 세계와 중생을 반연하되 장애가 없으나 다른 눈은 그렇지 못하다.
혜안ㆍ법안ㆍ불안이 비록 수승하나 중생을 보는 법이 아니다.
중생을 보고자 하면 오직 두 가지 눈, 즉 육안과 천안이어야 하는데,
육안은 두루하지 못하여 장애가 있기 때문에 천안으로 관찰하신다.
【문】 지금의 이 눈은 부처님께 있거늘 어찌하여 천안이라 하는가?
【답】 이 눈이 하늘 세계에 많기 때문이다. 또한 천안으로 보는 바는 산ㆍ수목에 장애되지 않나니,
어떤 사람이 지계와 선정을 부지런히 닦아 행력(行力)으로 얻는다면 이는 태어날 때 얻은 부분[生分]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천안이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하늘을 귀히 여기어 하늘을 주인[主]으로 삼나니,
부처님께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천안이라 한다.
또한 하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명천(名天)ㆍ
생천(生天)ㆍ
정천(淨天)이다.
명천이라 함은
천왕이나 천자(天子) 등이요,
생천이라 함은
제석ㆍ범왕 등 여러 하늘이요,
정천이라 함은
부처님ㆍ벽지불ㆍ아라한을 말한다.
정천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분이 부처님이니,
이제 천안이라 해도 허물이 없다.
‘천안으로써 세계를 관찰한다’고 했는데,
세계의 중생은 항상 안락을 구하나 더욱 고통을 받고 마음은 나에 집착한다.
여기에는 실제로 나라 할 것이 없거늘 중생들은 항상 괴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리어 괴로움을 행하니,
이는 마치 맹인이 좋은 길을 구하건만 도리어 깊은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관찰하신 뒤에 온몸으로 미소지으신 것이다.
【문】 웃음이란 입으로 나오거나 눈으로 웃을 뿐이거늘 이제 어찌하여 온몸으로 웃는다 하는가?
【답】 부처님은 세상 가운데 가장 존귀하시고 자재를 얻으시어
능히 온갖 몸을 입 같고 눈같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능히 웃으실 수 있다
또한 모든 털구멍이 모두 열리므로 웃는다 할 수 있고, 입으로 웃으면서
기뻐하므로 온갖 틸 구멍이 모두 열리는 것이다.
【문】 부처님은 지극히 존귀하시거늘 어찌하여 웃으시는가?
【답】 대지는 아무런 일이 없거나 작은 인연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아무런 일이 없거나 작은 인연으로 웃지 않으신다.
이제는 큰 인연이 있는 까닭에 온몸으로 웃으신 것이다.
무엇이 큰 인연인가?
곧 부처님께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려 하시니,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부처의 종자를 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큰 인연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여러 생 동안 작은 벌레나 악한 사람이었는데,
차츰차츰 여러 선(善)의 근본을 쌓아서 큰 지혜를 얻고 지금은 스스로가 부처를 이루었다.
신통력이 한량이 없어 가장 높고 가장 크니,
모든 중생도 그렇게 될 수 있거늘 어찌하여 공연히
헛고생을 하여 작은 길에 빠져 있는가”라고 하셨다.이런 까닭에 웃으신 것이다.
또한 작은 인(因)으로 큰 결과를 얻고 작은 연(緣)으로 큰 갚음[報]을 얻으니,
불도를 구하는 자가 한 게송으로 찬탄하거나
나무불(南無佛)을 한 번 외우거나
향을 하나 사르거나 하면 반드시 부처를 이룬다.
그러니 하물며 모든 법이 실로 나지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들어서 알며,
인연의 업을 행한다면 또한 이루지 못할 리 없다. 이런 까닭에 웃으시는 것이다.
또한 반야바라밀의 모습은
청정하여 허공과 같아서 줄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갖가지 방편과 광명과 신통으로써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마음을 길들게 한 뒤에
반야바라밀을 믿어 받들게 하고자 하신다.
이런 까닭에 웃으시면서 광명을 놓으신 것이다.
웃음에는 갖가지 인연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기뻐서 웃고,
어떤 사람은 성나서 웃고,
어떤 사람은 남을 경멸하여 웃는다.
또한 이상한 일을 보고 웃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을 당해 웃기도 하고,
낮선 지방의 이상한 풍속을 보면 웃기도 하고,
희유하고 어려운 일을 보고 웃기도 한다.
지금은 가장 희유하고 어려운 일이니, 그 때문에 웃으신다.
모든 법의 모습은
나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
참공[眞空]이어서
자(字)도 없고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거늘
이름을 지어서 중생들을 위해
설명해 주어 해탈을 이루게 하려 하니, 이는 제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비유하건대 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불구덩이에 어떤 사람이 마른 풀을 지고
불 속을 지나되 한 잎도 태우지 않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8만이나 되는 온갖 법의 이름[名字]이라는 풀을 짊어지고
모든 법의 실상 속에 들어가서 물듦[染著]이라는 불에 타지 않고 장애 없이 곧장 지나가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어려운 일 때문에 웃으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희유하고 어려운 일 때문에 온몸으로 미소를 지으신 것이다.
【經】 발바닥의 천폭륜상43)에서 6백만 억의 광명을 놓으셨다.
【論】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먼저 몸의 광명을 놓으시는가?
【답】 앞에서 웃는 인연을 답한 가운데서 이미 설명하였거니와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몸에서 한량없는 큰 광명을 놓는 것을 보면
신심이 맑아져서 공경하게 되는 까닭이니, 그로 인해 예사 사람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지혜의 광명의 신령스런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실 때 먼저 몸의 광명을 내신다
중생들은 부처님의 몸의 광명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지혜의 광명도 곧 나타날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일체의 중생들은 항상 욕심과 쾌락에 집착되는데, 5욕(欲)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은 빛이다.
이 묘한 광명을 보면 반드시 마음이 애착되어 본래의 즐기던 바를 버리게 된다.
곧 그들의 마음에서 차츰 욕심을 여의게 한 뒤에 지혜를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문】 그 밖의 하늘 사람들도 광명을 놓는데 부처님의 광명 놓으심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비록 하늘 사람들도 광명을 놓기는 하나 한량이 있다. 해와 달이 비치는 바는 오직 사천하뿐이지만
부처님이 광명을 놓으시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고, 삼천대천세계에서 나와서는 아래세계에까지 이른다.
다른 이의 광명은 사람들만을 기쁘게 하지만 부처님이 놓으시는 광명은 능히 일체로 하여금
법을 듣고 해탈을 얻게 한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문】 한 몸에서 머리가 가장 높거늘 어찌하여 먼저 발밑으로부터 광명을 놓으시는가?
【답】 몸이 안정되게 머무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발로 인해서이다.
또한 한 몸에서 비록 머리는 귀하고
발은 천하나 부처님은 스스로가 광명을 귀히 여기지 않으셨으니,
이양(利養)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한 곳에서 광명을 놓으신 것이다.
또한 용이나 큰 뱀ㆍ귀신들은 입으로부터 빛을 뿜어
앞의 물건을 독으로 해치는데, 만약에 부처님께서도
입으로부터 광명을 놓으시면 중생들이 “이 무슨 큰 빛인가” 하고 겁을 내며,
해를 당할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발밑으로부터 광명을 놓으신 것이다.
【문】 발밑으로 놓으신 6백만 억의 광명과 나아가서는 육계(肉髻)의 광명까지
모두 세어도 삼천대천세계에도 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시방세계이겠는가?
【답】 이 몸의 광명은 모든 광명의 근본이어서 근본으로부터 가지가 흘러나와 한량없고 셀 수가 없다.
비유하건대 가라구라충(迦羅求羅虫)이 그 몸이 미세하지만 바람을 만나면 더욱 커져서 마침내는
모든 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광명도 그와 같아서 제도할 중생을 만나면 더욱더 커져서 한량이 없게 된다.
【經】 열 발가락ㆍ두 복사뼈ㆍ두 발꿈치ㆍ두 무릎ㆍ두 허벅지ㆍ허리ㆍ척추ㆍ배ㆍ등ㆍ배꼽ㆍ심장ㆍ가슴ㆍ덕자(德字)44)ㆍ
어깨ㆍ팔ㆍ열 손가락ㆍ목ㆍ입ㆍ40개의 치아ㆍ두 콧구멍ㆍ두 눈ㆍ두 귀ㆍ백호상ㆍ육계에서 각각 6백억의 광명을 놓으셨다.
【論】 【문】 발밑의 광명으로도 족히 삼천대천세계 및
시방세계를 비치거늘 어째서 몸의 각 부분마다 다시 6백만 억의 광명을 놓는가?
【답】 내가 먼저 말하기를 “발밑의 광명을 놓아 아래쪽 세계를 비친다”고 했으나
다른 쪽은 채우지 못하므로 다시 몸의 각 부분의 광명을 놓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발은 온몸이 의지하여 서는 곳이어서 가장 크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먼저 발밑으로 6백만 억의 광명을 놓으셔서 중생에게 보이신다.”
마치 32상 가운데 첫 번째인 족하안주상(足下安住相)과 같으니, 몸 전체에 모두 신통한 힘이 있다.
【문】 어떤 삼매에 의하고, 어떤 신통에 의하고, 어떤 선정에 머물러서 이 광명을 놓으시는가?
【답】 삼매왕삼매 가운데에서 이 광명을 놓으시며,
6신통 가운데에서 여의통(如意通),
네 가지 선정 가운데에서 제4선에 머물러서 이 광명을 놓으신다.
제4선 가운데 불이 우세하게 드러나는 경지[火勝處]에서의 불이 있으니,
일체가 이 가운데 들어가면 광명을 놓는다.
또한 부처님이 처음 탄생하실 때나 처음 성불하실 때나 처음 법륜을 굴리실 때에
모두 한량없는 광명을 놓아 시방을 가득하게 채운다.
그러니 어찌 마하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실 때 광명을 놓지 않으랴.
비유하건대 전륜성왕의 구슬 보배는 항상 광명을 비추어
왕의 군중의 사방을 각각 한 유순씩 비추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반연 때문에 삼매에 들지 않아도
항상 상광(常光)을 놓으신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온갖 법의 보배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經】 이 모든 광명으로부터 대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삼천대천세계로부터 다시 동방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남ㆍ서ㆍ북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도 그러하였는데,
어떤 중생이라도 이 광명을 만나는 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論】 【문】 불의 모습은 위로 타오르고,
물의 모습은 아래로 젖고,
바람은 옆으로 퍼지듯이 이 광명은
불의 기운이므로 위로 뻗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삼천대천세계와 시방세계에 두루 차는가?
【답】 광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불기운[火氣]이요
또한 하나는 물기운[水氣]이다.
일주(日珠)는 불기운이고
월주(月珠)는 물 기운인데,
비록 불의 모습은 위로 향해 불꽃이 오르나
사람의 몸속의 불은 위아래로 두루 퍼져 도달한다. 해와 불의 광명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여름날에 땅 위의 물이 모두 뜨겁다.
이것으로 미루어보건대 불이 모두 위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광명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하기 때문에 시방에 두루 미치나니,
마치 강한 활로 화살을 쏘면 어디든 향해 가는 것과 같다.
【문】 어째서 동쪽을 먼저 비추고 남ㆍ서ㆍ북방을 나중에 비추는가?
【답】 해가 돋을 때 동쪽에서 먼저 뜨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의 생각에 따라 먼저 동쪽을 비추셨다.
또한 방위마다에 다른 한 가지씩의 질문이 있으니, 만일 먼저 남쪽을 비추셨다면
“어째서 동ㆍ서ㆍ북쪽을 먼저 비추지 않았는가?”라고 묻게 되리라.
【문】 그 광명은 언제 사라지는가?
【답】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써서 더 머물게 하고자 하면 더 머물고, 신통력을 거두시면 곧 사라진다.
부처님의 광명은 등불 같으며 신통력은 기름 같으시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광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經】 광명은 동쪽으로 뻗어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지났으며,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았다.
【論】 【문】 어떤 것이 삼천대천세계인가?
【답】 부처님께서 잡아함(雜阿含)45) 가운데 분별하여 말씀하셨으니,
천 개의 해,
천 개의 달,
천 개의 염부제,
천 개의 구타니(衢陀尼),
천 개의 울달라월(鬱怛羅越),
천 개의 불바제(弗婆提),
천 개의 수미산,
천 개의 사천왕천,
천 개의 33천,
천 개의 야마천,
천 개의 도솔타천,
천 개의 화자재천,
천 개의 타화자재천,
천 개의 범세천,
천 개의 대범천(大梵天)46)을
소천세계라 하고
주리(周利)라고도 한다.
이 주리의 천(千)의 세계(世界)를 하나로 삼아
하나로부터 세어서 천에 이르면 2천(千)의 중세계(中世界)라 한다.
이 2천의 중세계(中世界)를 하나로 삼아 하나로부터 세어서 천에 이르면
삼천대천세계라 한다.
처음의 천은 소(小),
두 번째 천은 중(中),
세 번째는 대천(大千)이라 하는데,
천과 천을
거듭해서 세는 까닭에 대천이라 하고,
천과 천을
곱하기를 두 번 거쳤기 때문에 삼천(三千)이라 한다.
이것들을 모두 합해 백억의 일월 내지는 백억의 대범천이라 하며,
이를 삼천대천세계라 한다.
이는 일시에 생겼다가 일시에 사라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머무는 시간이 한 겁이요,
사라지는 시간이 한 겁이요,
다시 생기는 시간이 한 겁이니,
이것이 삼천대천세계이다”라고 한다.
대겁(大劫)은 세 가지로 무너지니,
물과 불과 바람이다.
소겁(小劫) 역시 세 가지로 무너지니,
전쟁[刀]과 질병과 기아이다.
이 삼천대천세계는
허공 속에 놓여 있는데 바람 위에 물,
물 위에 땅, 땅 위에 사람이 있다.
수미산에는 두 하늘이 있으니,
4천처(天處)47)와 삼십삼천처(三十三天處)이다.
나머지 야마천 등은 복덕의 인연이 되는 7보의 땅으로서
바람에 의해 공중에 들려져 있으며 나아가 대범천까지도
모두가 7보의 땅으로서 모두가 바람 위에 놓여 있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광명으로 두루 비추신 뒤에 나머지 광명이
흘러나와 다시 동쪽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들을 비추시니,
남ㆍ서ㆍ북과 네 간방[四維]ㆍ위아래도 그와 같았다.
【문】 이 광명이 멀리 비쳤는데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답】 광명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근본을 삼나니,
근본이 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용천(龍泉)은 용의 힘 때문에 물이 마르지 않듯이
이 모든 광명은 부처님의 심력(心力) 때문에
시방에 두루 비치되 중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문】 염부제 안에는 여러 큰 강이 있어 항하(恒河)48)를
능가하는 것이 있거늘 어찌하여 항상 항하사 같다고 말씀하시는가?
【답】 항하에는 모래가 많은데 다른 강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이 항하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고 유행하시던 곳으로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는 곳이기에 그것으로 비유를 삼으셨다.
또한 부처님은 염부제에서 나오셨는데
염부제를 흐르는 네 큰 강이 북쪽에서 흘러나와 사방의 큰 바다로 들어간다.
북쪽의 설산에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란 못이 있는데,
이 못에는 금빛 나는 7보의 연꽃이 있어 크기가 수레의 산개(傘蓋)만큼 크다.
아나바달다용왕은 7주(住) 대보살49)이다.
이 못에는 사방으로 흘러드는 물이 있는데
동쪽은 상두(象頭)요,
남쪽은 우두(牛頭)요,
서쪽은 마두(馬頭)요,
북쪽은 사자두(師子頭)이다.
동쪽의 상두에서 항하가 나오는데 바닥에는 황금 모래가 깔려 있다.
남쪽의 우두에서는 신두강[辛頭河]50)이 나오는데 바닥에는 역시 황금 모래가 깔려 있으며,
서쪽의 마두에서는 바차강[婆叉河]51)이 나오는데 바닥에는 역시 황금 모래가 깔려 있고,
북쪽의 사자두에서는 사타강[私陀河]52)이 나오는데 바닥에는 역시 황금 모래가 깔려 있다.
이 네 강은 모두 북쪽 산에서 나온다.
곧 항하는 북산(北山)에서 나와서 동해로 들어가고,
신두강은 북산에서 나와서 남해로 들어가고,
바차강은 북산에서 나와서 서해로 들어가고,
사타강은 북산에서 나와서 북해로 들어간다.
이 네 강 가운데 항하가 가장 크고,
사방 사람들의 모든 경서(經書)가 모두 항하를 복스럽고 길한 강으로 삼는다.
그 가운데 들어가 몸을 씻는 자는 모든 죄와 티끌과 삿됨이 모두 제해진다.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섬기어 모두 알고 있는 터이므로 항하사로써 비유하셨다.
또한 다른 강은 이름이 가끔 바뀌었지만 이 항하의 이름은 세세에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항하사로써 비유를 삼으시고 다른 강으로써는 비유를 삼지 않으셨다.
【문】 항하에는 얼마나 되는 모래가 있는가?
【답】 온갖 산수로도 알 수가 없다. 오직 부처님과 법신 보살만이 능히 그 수효를 아신다.
부처님과 법신 보살은 온갖 염부제 안의 미진(微塵)의 생멸과 많고 적음도 다 세어서 아시거늘 항하의 모래이겠는가.
부처님께서 기원 밖의 숲 속에서 나무 아래에 앉아 계실 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물었다.
“이 숲에는 잎이 몇 개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즉시에 ‘몇몇 개가 있다’고 대답하셨다.
바라문은 의심했다.
“누가 이를 입증하겠습니까?”
그리고 바라문은 한 나무 옆으로 가서 나무 위에 달린
몇 개의 잎을 따서 감추고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나무숲에는 정확히 몇 개의 잎이 있습니까?”
부처님은 즉시에 이제는 몇 개의 잎이 모자라는지 대답하셨다.
곧 그가 따 온 만큼의 수효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바라문은 이를 알게 되자 마음으로 크게 공경하고
믿게 되어 부처님께 출가하였으니, 뒤에 아라한도를 얻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능히 항하의 모래 수효를 헤아리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 몇 사람이 부처님의 광명을 만나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가?
만약에 광명을 만나면 곧 도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거늘
어찌하여 항상 광명을 놓아 누구나 도를 얻게 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지계ㆍ선정ㆍ지혜 등을 닦은 뒤에야 도를 얻게 하시는가?
【답】 중생들은 인연이 갖가지로 도를 얻는 단계가 같지 않다.
선정으로 해탈을 얻는 이도 있고,
지계와 설법으로 해탈을 얻는 이도 있고, 광명이 몸에 닿아 해탈을 얻는 이도 있다.
비유하건대 어떤 성에 많은 문이 있어서 들어오는 곳은 다르나 이르는 곳은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어떤 이는 광명이 몸에 닿으면 해탈을 얻지만, 광명을 보거나 몸에 닿아도 해탈을 얻지 못하는 이가 있다.
【經】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온몸의 털구멍으로 모두 미소를 지으시고,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그 빛은]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광명을 만난 중생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論】 【문】 위에서 이미 온몸으로 미소 지으셨다 했거늘 어찌하여 이제 다시 모든 털구멍으로 웃으시는가?
【답】 온몸으로 미소를 지으신 것은 거친 부분[麤分]이요,
이제 일체의 털구멍으로 모두 미소를 지으신 것은 미세한 부분[細分]이다.
또한 앞에서 온몸으로 미소를 지으심은 한계가 있으나, 이제 털구멍으로 미소를 지으실 땐 광명이 한량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온몸의 광명으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가 이제 털구명의 광명을 만나 곧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따려 할 때 익은 과일은 먼저 떨어지지만
아직 덜 익은 것은 다시 흔들어야 되는 것과 같다.
또한 고기를 잡는 데 앞에 던진 그물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나중의 그물로 잡는 것과 같다.
웃으신 인연의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