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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 풍경그림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과학의 두가지 특징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 우리가 현재 빠져 있는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가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대표적 방법은 그 패러다임이 아닌 것을 보고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를 한국안에서 열심히 생각해서는 알기 어렵다.
한국이 아닌 것, 한국식으로 살지 않는 여러 나라들에가서 서로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문화적
특징을 이해하고 아 이게 한국식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많은 저자들이 과학적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게 되는 방식은 현대의 사고방식이 널리 퍼지기
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사고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사에 대한 책이므로 물론 그러하려니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같은 책들이 예외없이 과거와 현재의
비교를 자세히 행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전부가 아니라도 대부분 서양에서 발전된 것이고 한국과 같은 동양에는 사고의
비약과 단절이 있다. 그러므로 대개 그 역사적 고찰이란 서구의 종교와 사회변동에 대한 고찰이
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나의 부족한 서구의 역사와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다가 나는 역사적인 사건을 나열함으로서 어떤 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나름의 문제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과학을 알기 위해서 비과학적 시대나 지역을 아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시대 이전의 역사나 문화의 세부사항을 일일히 오늘의 과학에 연관
시키는 것도 위험한 일일 것이다. 역사가 어느정도의 엄밀성을 가지고 인과론적으로 발전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사실 그렇게 사건의 전개를 설명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혼돈이론에서 배우는
교훈중의 하나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보다 간략하게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내가 생각하는,
다시말해 내직관에 호소하며 내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과학문화의 두가지 특징들을 제시하고 그
결과들을 말해보겠다.
“기에는 형질의 기와 운화의 기가 있다. 지구 달 태양 별과 만물의 형체는 형질의 것이고 우양
풍운과 한서조습은 운화의 기이다. 형질의 기는 운화의 기로 말미암아 모여 이뤄진 것이니 큰 것은
장구하고 작은 것은 곧 흩어지는 것이 운화의 기가 스스로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다.”
(최한기, 기학)
위의 문장은 19세기 조선의 최한기가 쓴 우주론인 기학의 한 부분을 소개한 것이다. 내 의도는
기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기학이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하는게 아니다. 단지 나는 한
가지를 제의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과학자나 공학자를 머리속에 그려보고
위의 문장을 읽어보라. 이해는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느낌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 문장의 뜻 이전에 그 형식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위
문장을 읽으면 훈장님이 서탁 뒤에 앉아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눈을 지긋이 감고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는 식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과학자의 방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책이 널려져 있는 책상이 있고 그 뒤로는 보통 칠판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뭐가 있는가. 그 위에는 수식들이 씌여져 있다. 과학자는 그 위에 열심히
수식을 풀고 있다.
맞다.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수학을 쓰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주론을 이야기
하면서 정의도 불분명한 기니 도니 하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수학을 쓰는가 쓰지 않는가 하는 것은 사고의 엄밀성의 차이를 가져오며 그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 엄밀성을 제외하고도 그와 관련되어 혹은 그것 이전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부분이 있다. 나는 우선 그 부분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은 열심히
사물을 이름 붙이고 크니 작니 하고 분류 하고 있는 반면 현대 과학자나 공학자는 대개 속도는
얼마니 온도는 얼마니 하면서 측정된 값들간의 관계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현대우주론은 무거운건
내려가고 가벼운건 올라간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빅뱅이후 몇초후에는 온도가 몇도였다는 식이다.
관찰된 사실에 집중하라.
수식을 쓴다는 것은 대개 물체는 왼쪽에 있다던가 북동쪽에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 물체는 x축선
상에서 -11.3 미터의 좌표에 위치한다거나 XY좌표계에서 X축기준으로 43도의 방향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게 되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어떤 중요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현대사회와 우리의 일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의 나이를 세는 방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한국은 전세계에 보기 드문 나이를 세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
몽고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른 어떤 나라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 방법이다.
다른 나라들은 나이를 셀 때 생일기준으로 나이를 구분하는데 한국의 나이 세는 방법은 새해 첫날을
기준으로 나이를 바꾼다.
이 때문에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서로 생일이 다르므로 나이가 서로 다른 생일날에 각자 달라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이면 10살짜리 아이들이 모두 한꺼번에 11살이 된다. 따라서 자연스레
10살과 11살은 각각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생일이 단지 하루의 차이가 나는 두 사람도 이 분류에
따르면 10살과 11살 집단으로 따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 10살이니 11살이니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측정된 값으로 보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그래프상에 각자의 살아온 시간을 기준으로 각각의 사람을 점으로 찍어보았다고 하자.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위의 어느 부분엔가 선을 쭉 그어서 이 왼쪽 사람과 오른쪽 사람은 서로 다르
다고 분류하는 일이 합리적으로 보일까?
어디에 선을 그어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물론 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학교에서 1학년과 2학년을 구분해서 수업을 해야지 모든 학생들을 다 따로 진도를 나갈 수는 없을
것이며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는 몇살부터라고 했을 때 어딘가에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직 측정된 값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현실적인 이유로 분류를 하는 것이 필요
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어도 그 분류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이며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몇 개의
다른 집단이 아니라 연속하게 분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새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오직 측정한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인위적으로, 우리가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무너뜨릴 수 있다. 주관적인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측정한 것에
집중할 때 이런 불확실한 것들은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뭔가를 주장하고 싶으면 사실에
집중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실이 중요하다. 더 많은 사실적 증거를 제시하라. 이것은 바로
과학적 발전의 역사가 우리의 일상에 파고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이게 과학적 문화다. 사실 즉 관찰된 사실에 집중하라. 관측할 수 있는, 측정할 수
있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주관적으로 만들어 진 환상을 제거하라. 이것이 바로
사실에 집중하라는 말이 우리에게 뒤에서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집중하는 일을 도덕적
으로까지 옳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에 집중하라. 주관적 관념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사고하라.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또 듣는다.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책 속에서 발견하고 신문 방송 속에서 발견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발견한다. 책들의 저자는 사실들을 끝없이 나열하고 신문기자 역시 사실들을 나열하며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도 우리는 서로 잘 이해가 안되면 일단 사실묘사에만 집중하자고 한다.
우선 확실한 사실에만 근거해서 사고하자고 한다.
이런 게 문화적 특징이냐고, 이런 건 당연한 진리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적 특징이며 물론 좋은 것을 아주 많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문화적 특징이다.
위에서 말한 한국식으로 나이를 세는 기준을 생각해 보자. 사람에 따라서는 그저 몇일 늦게 태어나서
나이 어린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람들 중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관습적 현실에 잠재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관측된 사실에 집중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은 인간해방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절대적 공평성을 가진 재판관을 만난 느낌일 것이다. 애매하게 이러니 저러니 싸우지 말고 우리
사실로만 이야기하자. 우리 불확실한 주관적인 시각은 제외하도록 하자. 관측해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자. 사실이 판결을 내려줄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서구에서도 수학화된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상황이 위에 소개한 기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구과학은 그런 실험과 측정 없는 중세적 상황에 저항하면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주관적
관념들과 싸우는 무기로써 사실에 집중해서 근거 없는 관념들을 포기하게 만들라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신념과 같이, 즉 악과 싸우는 정의로운 자의 태도처럼 믿어지게 되었다.
뉴튼이 뉴튼의 법칙들을 발표하고 그 이후 수많은 관찰사실들이 그 법칙들을 확인해 주었을 때,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거의 도덕적 승리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간결한 물리법칙 앞에서
눈녹듯 사라지는 무수한 근거없고 주관적이며 미신적인 믿음들을 볼 때 사람들은 악마와 싸워이기는
천사의 군대가 승리하는 모습을 연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물론 성공한 문화 좋은 문화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름의 한계와 부작용이
있다. 이런 문화가 만들어 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첫번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의 백과사전,
걸어다니는 구글이 되고 싶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사실들을 줄줄 외우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체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키워내고 있다. 아는게
힘이니까. 누군가와 논쟁을 한다고 할 때 이런 저런 사실을 척척 늘어놓으면 논쟁에서 이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본래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사실들이 있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머릿속에 이런 저런 지식을 넣어야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테니까. 시험도 엄청나게 친다. 참고서와 교과서를 외운다. 어른이 되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 방송이며 여러가지 책을 읽어서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을 꽉꽉 채운다.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외우기 쉽게 사실들이 더 잘 정리된 책이 굉장히 가치 있어 보인다.
어찌보면 그래서 모든 것을 점점 더 빠르고 대충 보게 된다. 머릿속에 넣어야 할 것이 많기 때문
이다.
이 모든 과정을 멀리서 밖에서 봐야 한다. 그럼 이 문화가 주는 메시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답은 네 안에 있지 않고 저기 밖에 있다는 것이다. 답은 부모가 알고 있거나 학교 선생님이
알고 있거나 어떤 전문가가 쓴 책 속에 있거나 어떤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알고 있다.
답은 네 바깥에 있으니 빨리 그 답들을 너의 머릿속에 넣도록 하라. 오늘날의 전체 교육시스템은
이 같은 메시지를 날마다 확성기로 퍼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스템의 지속적 영향력 아래에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들리지 않는 메시지를 듣는다. 이 메시지는 너무 당연해서 들리지 않게
된 메세지다.
그러나 진리란 객관적으로 저기 바깥에 있다라고 정리할 수 있는 이 태도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공허하게 만든다. 답은 객관적 사실 속에 있는데 항상 세상에는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논리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이면 매우 평등한 사회가 될 것 같지만
실은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되기 쉽다. 논쟁에 강한 사람들,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판단을 독점
하기 쉽기 때문이다. 논리나 사실에 저항하는 것은 부당하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한 행위가 아닌가?
논쟁에 지면 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은 남이 내 판단을 대신해 주는, 합리적인 듯 보이
지만 지적인 독재가 일어나는 일이 생기기 쉽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지적으로 미개했던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항상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 조선
시대에는 책 자체가 드물었으며 책을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실들의 양으로 볼 때
조선시대사람과 현대인이 알고 있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즉 현대인은 조선시대인들이 모르는
것을 잔뜩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사실들을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중단시킨다. 책 한 권을 백번 읽는 사람보다 그 시간에 책 백권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
다고 할 수 없다. 답은 내 안에 있는게 아니라 책안에 있다면서 더더욱 바보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아는 것 이상으로 더 천천히 생각하고 느끼는 것의 가치를 평가해 줘야 한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과학의 발전을 살펴보면 우리는 오히려 사실을 늘어놓고 논증하는 흐름과 반대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빛은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 양자역학의 탄생이전에 빛이 입자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빛의 간섭현상 같은 실험적 사실이 있었으므로 만약 논리적으로 이런 가설은
이래서 틀리다라는 것에서 포기가 일어났으면 새로운 이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친숙한 관성의 법칙도 그렇다. 공기가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물체는 지속적으로 힘을 작용해야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갈릴레오이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뭔가가 지속적으로 그것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일상생활의 관찰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관성의 법칙이 오히려 틀려보인다. 사회가 제공하는 사실들에
집중하면 더더욱 우리는 그 패러다임에 광신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진짜 소중한 것은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보는 일일지 모른다. 과학은 종종 사실과 논리를 부정하는 듯한 영감을 중시해서 발전한
것이다. 확실하다고 믿는 사실들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 많은 것을 대충만 보는 사람들은
그 사실들에 도움을 받는 것 이상으로 그 사실들에 의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에 집중할수록 오히려 잊혀지는 것도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호수를 돈을 위한 개발로 파괴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개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뭔가를 죽이고 파괴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개발을 행하는 사람이 파괴되어지는 환경의 아름다움, 그것의 가치는 거의 느끼지
못하며 숫자로 나타날 수 있는 돈의 양에만 아주 민감하다면 그에 따라 개발을 하느냐 마느냐,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직접 키운 개 한 마리나 저기 어딘가에 있는 본적도 없는 곳에 있는 개 한 마리나 개 한 마리
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 한 마리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결정을 할 때
이 개건 저 개건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사실들만을 논하는
서류작업에서 이런 주관적인 개념은 배제되기 마련이다. 개는 그냥 개다.
볼 수 있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만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한쪽 극단으로 가면 어떤 것들에 대해
장님이 된다. 사실들만 몰두하면, 지극히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앞에다가 사실들을 잔뜩
늘어놓으면 뭐가 증명이 되고 판단이 바뀔까?
누적 되고 조립되는 지식.
과학의 두번째 특징은 그것이 누적되고 조립되는 표준화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누적은 문명에서
중요한 문제다. 과거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단순한 사실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그런 지식들이 연결되어 보다 복합적 지식이 되거나 복합적 기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문자를 가지고 인터넷을 가지고 도서관을 가지고 대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식과 기술은 크고 작게 모아졌다가 잊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진
기술들은 다시 재발견되고 또 다시 잊혀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기술과 지식들 특히 과학지식들은 그런 상실과 누적의 반복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것이다. 강에 빠졌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수영을 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듯이 상실의 과정을 견뎌낸 과학지식은 엄밀한 정의와 표준화를 특징으로 한다. 과학의 언어가
수학인 이유는 수학이야 말로 가장 엄밀한 논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시대에 증명된
피타고라스 정리를 우리가 뭔가 다른 일에 쓰기 위해 그대로 가져다가 쓸 수 있다.
표준화되어 있고 엄밀한 수학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지구반대편에서 만들어진 몇천년된
바퀴가 요즘 자동차에 달아도 그냥 돌아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은 시간에 따라 누적 될뿐만 아니라 동시대에도 다른 곳에서 만들어 진 지식들이 조립되는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표준화된 지식, 엄밀한 정의가 있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신경과학회 연례학회
에는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학회에가도 그 학회에서 발표되는 연구결과의 아주 일부분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한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만으로 지식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교양인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출판물을 읽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지식이 그야말로
폭발하듯이 늘어나는 전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상상도 하기 힘든 지구적
협업이 이뤄지는 커다란 과학프로젝트가 행해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엄청난 지식이 축적된 피라미드 같은 지적 건축물이다.
현대인이 아무것도 없이 무인도에 가서 볼펜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가.
현대인의 지능은 고대인보다 그다지 높지 않다. 단지 지식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문화의 성공은 우리에게 한가지 결론을 믿게 만드는 것같다. 그것은 누적되지 않고 표준화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때로 이 세상에는 누적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누적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것같다. 우리는 자전거를 만드는 기술은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물론 자전거타는 기술도 어느 정도 축적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의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자전거 타기 교본을 오래 본 사람도, 자전거타기의 과학적 이론을
달통한 사람도 자전거를 타자면 스스로 자전거에 올라서 스스로의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똑같은 길을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핸들조작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론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자전거타기만 그런게 아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문제도 그러하며 생각해 보면
안그런게 없을 정도다. 우리가 안정되게 쌩쌩달리는 누군가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고
해도, 상황도 똑같은 것같은데도, 우리의 '자전거'는 넘어진다. 살아가는 일 자체를 포함해서 많은
일들이 메뉴얼대로 하거나 객관적 지식을 따르거나 여러가지 지식을 조합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연애하는 법에 대한 최고의 책은 마땅히 연애는 책보고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하라는 말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 철학자나 공자나 예수나 부처의 말을 아직도 공부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 최고의
기술자나 과학자도 현대인에게 뭔가 쓸만한 것을 가르쳐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앞에 거론한
사람들이 낡아서 내가 더 많이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하나 모짜르트나 고호가 옛날
사람들이라서 내가 더 훌룡한 음악을 만들고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과학은 누적되는 지식이지만 ‘과학을 하는’ 것은 누적되는 지식이 아니다.
만약 ‘과학을 하는’것이 누적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뉴튼과 아인쉬타인을 훨씬 능가
하는 슈퍼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중세시대의 시계가 오늘날의 수준에서 보면 장난감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아인쉬타인의 과학은 누적되지만 아인쉬타인이 과학을 한 방식은 누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인쉬타인이나 모짜르트의 클론을 만들수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교육이 과학자를 길러내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과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과학교육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혹시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과학교육인 것은 아닐까?
비슷한 질문은 다른 많은 분야의 교육에서도 던져질 수 있을 것이다.누적된 것이 흔한 시대에 과연
누적되는 것이 중요한가 누적할수 없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시각이 일반화된 시대에 현대인들은 과학적 논리로 조직화되고 그 때문에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에서 많은 압력을 받는다. 이것을 위해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여기 부품이 하나
있다. 이 부품의 고장율을 1/2이라고 하자. 둘중 하나는 불량품인 부품이다. 이런 부품 두개를
연결해서 기계를 만든다면 전체 기계가 작동할 확율은 얼마나 되는가.
답은 1/2*1/2=1/4이다.
그럼 이런 부품을 열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 = 1/1024다.
백 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0 = 1/(7.88*10^31)이다.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 만큼 정상적인 기계가 만들어질 확률이 낮다. 시스템의 크기가 늘어날수록
고장율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물론 이건 부품의 불량율이 무려 50%나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량율 1%의 기계는 어떨까.
백 개 중의 하나만 불량한 부품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기계가 나올 확률은 36.6%로 약 3대 중
하나만 정상이 된다.
기계와 수학은 한 구성요소가 망가지거나 틀리면 멈춰선다. 조직이 거대화 된다는 것은 그 조직을
이루는 부품들에게 엄청난 표준화, 내구성의 압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국가를
기계로 볼 때 거기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사회도 이런저런 구성요소를
가지고 일을 분담해서 하지 않는가. 경찰은 범인을 잡고 검사는 기소하고 변호사는 변호하고
판사는 판결을 한다. 오늘은 이분야 내일은 저분야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하루도 제대로 돌아가는
날이 없기 마련이다. 국가가 진짜 기계라면 말이다.
아주 인간미 넘치는 사람도 어떤 조직의 장이 되면 금새 인정사정없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전체 시스템의 입장에 서는데 자꾸 이곳저곳이 문제가 되서 끝임없이 전체 시스템이
멈춰서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들은 시스템의 부품에 해당하는 작은 조직이나 사람들에게 냉혹해진다.
불량이라고 생각되는 부품을 내다버리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어진다.
이러한 과학의 특징들 때문에 생긴 문제점들은 단순히 비과학적이고 비객관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라고 말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과학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 사고는 우리 문명 그 차체에 깊숙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앞에서 이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말하거나 우리 대충대충 합시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는가.
더 소비하고 싶은 욕망과 경쟁이 그런 낭만적인 주장을 금새 지워버린다. 대책없는 낭만주의는
냉철한 논리를 앞세운 현실 앞에서 쉽사리 논파 당한다.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여러가지 사회
시스템은 인정사정없는 기계처럼 개인들을 압도한다. 현대교육을 비판하면서 학교를 아예 가지
않는다던지 회사를 그만둔다던지 도시를 떠나 산으로 간다던지 하기만 한다고 뭐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첫걸음은 과학을 보는 것일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과학적 사고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종사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과학을 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장비를 다루고
싶다면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한다.
과학적 사고의 해체
오늘날은 과학기술의 시대라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우리는 과학기술에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과학적 사고를 해야 할 필요성과 그렇게 된 결과 우리가 감당해야할
댓가의 크기도 모두 커졌다는 것을 말한다. 과학적 사고의 한계는 무엇이고 우리가 그것을 넘어선
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적으로 이해한 사실들로만 채워진 세계에는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물론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사고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거꾸로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살기 힘들다. 사회전체가 엄밀한 과학적 기계적 논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에서 직장에서 하는 일, 세금을 내고,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사회 시스템은 우리에게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표준적으로 사고할것을 요구한다. 사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찬 사회는 불투명성이 가득하고 부패가 넘치기 쉬우며 원칙은 실종되기
쉽다. 과학적 사고를 넘어선다는 것은 비과학적으로 비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 논리에 중독된 사람은 혈육간의 정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감정도 물건 다루듯,
어떤 감기 증상 다루듯 냉정하게 조절한다. 과학적 사고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들은 누가 이렇게
생각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조직화되면 그렇게 생각 하지 않게 되기가 오히려
어렵다. 우리는 성공을 향해 뛰는 사람들에게서 앞에서 보는 모습을 쉽게 보지 않는가? 무엇보다
스스로 얼마나 자주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감정을 경험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움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말해도 자신의
느낌으로 말하기 보다는 거기에 붙은 가격표나 유명세에 감탄하는 것 같은 사람, 스스로는 아름다움
에대해 불감증에 걸린 것 같은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거 비싼거구나 하고 감탄하고 이거 유명
브랜드구나 하고 감탄하는 거말이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기계가 된다. 저항도 대단히 힘들다. 과학은 빈틈없는 실험과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영부영 반대할 수 없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쉽게 논박당한다.
과학적 논리대로 행동하도록 강요당한다. 우리는 조직화, 합리주의화를 피할수 없기 때문에 조직화
되고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도 가치판단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게 어려운 일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고한다는 것이 뭔지를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을까? 과학적 지식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과학적 방법으로 밝힌 사실이 틀린 것일수도 있는 것일까? 우리 앞에 물 한 잔이 있다고 하자.
물은 물분자로 되어 있다. 물분자는 수소원자 두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뤄져있다. 그것으로 물잔에
들어 있는 것은 끝이다. 물론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뭔지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적인 원자론이 나올
것이고 우리는 더 작은 단위로도 더 내려갈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물 안에 물분자 말고 다른 작은
불순물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물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이뤄진 물분자들이다.
그리고 모든 수소원자와 모든 산소원자는 똑같다. 그래서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한 잔의 물에 대해
그 양이 얼마라는것, 무게가 얼마고 온도가 얼마라는 것을 말 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이 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 물을 이해했다.
그리고 물은 그 신비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도 부정될수가 있을까? 이것만은 절대적 진리가 아닐까? 이런 과학적 물질적
태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전에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으로 생각했더랬다. 즉 신령한 우물에서
퍼온 물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식이다. 그 신령은 현명하여 많은 것 내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물 한 잔을 두고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미신이라고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나무나 우물에 정령이 산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보다 과학적인 태도로 그런 존재를 부인하는 자신들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미신적인 사람들을 비웃는 현대인들도 애인이 준 목걸이라던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시던 손거울 같은 것을 볼 때 그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물 한 잔이라고 하지만 그 물 한 잔이 몸이 아프신 어머니가
입시공부하는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애써서 퍼온 한 잔의 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물이
단순히 물분자로 이뤄진 물이고 따라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져다준 물이나 내가 떠온 물과 같은
것이며 교체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의 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져온 물과 다르지 않다. 과학적 사고는
사물에 관념적 의미를 붙이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물은 그저 물분자로 이뤄진 물이다. 다만 우리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주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머니의 물은 다른 사람이 떠다준 물과 다를 게
없다.
과학적 사고도 틀릴 수 있는 것인가? 물 한 잔에는 신령이 깃들고 있는가? 어머니의 마음이 녹아
있는가? 우리가 좋은 기계로 잘 측정하면 그런 걸 측정할 수 있을까?
모든 질문은 그 질문의 전제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과학적으로 말해,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
에서 고립되어진 물질로서의 한 잔의 물은 물분자로 이뤄져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말은 이러저러
하게 실험하면 이러저러하게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왜 모든 가능한 측면보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가.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인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진실은 아닐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 현실이 곧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우리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샘물이나 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유령을 본다는 사람을 비웃는 현대인들이
많다. 그것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정령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유령이 무게가 나가는가?
그건 미신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똑같은 사람들이 무게도 나가지 않고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민주주의 같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돈을 들이고 희생을 한다. 인간의 평등이나 자유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무게가 나가는가? 민주주의는 실제로 존재
하는 것인가?
우리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에 가거나 민주화 역사의 기념이 되는 곳에 가서 옛일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런 곳에는 흔히 민주화 역사의 영령들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미국에도 워싱턴
에 가보면 그들의 역사, 즉 링컨이니 마틴 루터킹이니 한국전쟁의 참전용사들에 관한 기념물들이며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외계인들이 어느 날 지구에 온다면 그런 기념물들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며
귀신을 모시는 사당들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 하나는 매우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과학적인 현대인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역사를 쓰고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 본질을 보았을 때 물 한 잔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나 성황당 나무에
귀신이 있다는 것과 다른 것일까?
여기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산이 있다고 하자. 이 산의 나무며 돌이며 풀이며를 모두 가져다가
샅샅히 과학장비로 무게를 달고 분자구조를 분석한다고 한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이 산은 너무 아름답다, 이 산의 나무와 돌과 풀에는 모두 아름다움이 스며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그 산에서 조그만 돌조각 하나를 가져다가 추억과 그 여행의 상징으로 삼는
다고 하자. 이것은 미친 짓이거나 문명적으로 뒤쳐진 인간이 가지는 생각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물 한 잔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미신적이지도 문명적으로 퇴보한 것도
아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우리와 다른 문화, 다른 상식체계를 볼 때 거기에 간단한 이유를 붙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원래 어리석어서 또는 그들은 본래 폭력적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보는
것이다. 물론 과거 사람들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 다르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우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학에 기반하여 알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볼 때 사람들은 과거의
문화, 과거의 사람들을 너무 쉽게 폄하한다. 그저 그들은 어리석고 미신적이라 즉 아직 문명화되지
못하고 머리도 나쁜 인간이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의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 그 안에서 본질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이나 예수나 부처의 말을 공부한다.
우리는 그들을 원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주주의같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매우 실질적인 것이며 과학과 충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과거의 그들이 믿었던
것은 그저 과학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신이며 과학적 사고로 간단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진실은 정반대일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을 덜 가지고 있었던 대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유령과 정령을 사방에서 볼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에 중독된 우리는 그들이
보던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들이 산과 들과 집을 볼때 그것들은
의미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저 분자조각들만 본다.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비웃는다.
과학적 사고는 종종 내가 어떤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며 그것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든다. 사물을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게 한다. 사물을 객관화하고 그 객체에 대해
주체인 나나 우리를 영원히 격리해 버린다. 내가 직접 떠온 물이건 어머니가 떠다준 물이건 물은
그저 물이다. '우리 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제 저 물은 나와의 관계를 잃어버린다. 그것은 그저 어디에나 있는 물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의 본질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다른 방식으로 도달한 물 한 잔들은 모두 그저 똑 같은 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세상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남아 있지 않다. 과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우리 아이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내 유전자를 주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 그걸로 무슨
의미가 탄생하지 않는다.
나는 왜 아이를 사랑하는가. 냉엄한 과학적 논리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거나 유전자의 속박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포유류의 하나인 나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보내는 아이의 표정에 현혹되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봐주고픈 욕망을 느끼게
설계되어 있다. 아이를 볼 때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화학물질이 분비되고 온몸에 세로토신이 가득찬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전자가 가진 종족번식을 위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이성들은 서로에게 성적으로 이끌리고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섹스다.
내 아이나 내 연인뿐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떨어져서 영원한 타인이
된다. 거기에는 아무 연결점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알고 있다. 그들의 본질은 단백질과
지방과 칼슘덩어리이며 유전자가 만들어낸 물질이며 포유류이다. 그들은 황인종이거나 흑인종이거나
백인종이며 미국인이거나 한국인이거나 일본인이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본질이다.
이런 객체화의 과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로부터도 타인이 된다. 우리의
팔다리를 객체로 보는 순간, 우리의 팔다리는 기계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한번 자신의
손을 보라. 손이란 무엇인가. 근육이 있고 피부가 있고 뼈대가 있으며 신경조직이 어떻게 그 손을
움직이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혈관이 피를 어떻게 나르고 공기와 영양분을 어떻게 나르는지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손을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은 이제 진정한 우리의 일부가 아니다. 손은
더 이상 나와 상호작용하면서 나를 결정하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손은 그저 명령을 내리면 기계
적으로 움직이는 기관일 뿐이다. 그건 기계로 대체되어도 상관없으며 더욱 강력하고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대체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산과 들과 강이 뭔지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그것을 간단히 다른 무언가로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한다면 회복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의 얼굴을 객체로 보는 순간 우리의 얼굴도 그저 물건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더 멋진 얼굴로
바꾸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물질, 마스크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아의 한 조각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자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객체로 보는 순간, 심지어 우리의 감정조차도 남들의 것과 교환하거나 기계의
반응과 교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무언가를 객체로 만들고 그것의 본질, 그것의 작동원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본질적 가치를 잃는다. 우리는 약물이나 각종 방법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조작한다. 멋진 감정으로 우리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기쁜 감정은 이렇게 만들고 낭만적인
감정은 저렇게 만들고 실연의 감정은 저렇게 대처하면 된다. 이제 감정도 슈퍼마켓에서 사는 생선
한 마리 두부 한 모처럼 소비하고 사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한히 작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팔다리를 이해한 순간 그것은 우리의
자아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이해하는 순간 눈은 비데오 카메라와 다르지 않은 객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금새
뇌가 되고 마는데 사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피질이며 운동피질을 이해하고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변연계나 언어중추를 이해해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해
되어진, 교체가능한 기계가 되고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과학적으로 다룰수 있다고 해서 과학적인 결과, 과학적인 해석이 그것의 본질이고
그것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훌룡하거나 중요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미인이 있다고 한들
그 사람을 물질 과학적으로 본다면 거기서 의미는 사라진다.
한 명의 아내는 다른 한 명의 다른 여자와 같은 값어치를 가지고, 객관적 평가로 보았을 때 그녀가
더욱 아름답다면 젊고 예쁜 새로운 여자가 더욱 좋은 것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황당하게 사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회 시스템이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강요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라. 대중 매체에서 날마다 뭘 보여주는가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평가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비교된다. 수산 시장에서의 생선과 다르지 않다.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객관화의 힘은 어디나 가득하다.
유령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마술사라고 할 것이다. 히틀러가 사람들을 이끌어
전쟁을 일으켰을때 사람들은 그가 마술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유령을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는 그리고 전세계 여기저기에는 원숭이바위니 큰 바위얼굴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지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풍경은 처음에는 그렇게 명확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저기 해골바위가 있다고 말한 순간 우리는 거기서 해골을 본다.
일단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것을 한번 보게 되면 보지 못하게 되기가 힘들다.
히틀러나 마르크스같은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든다. 그들이 손을 들어 해골바위다
라고 외치는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 해골이 나타난다. 그 해골은 이제 너무 명확한 실체가 된다.
해골이라는 유령을 불러내어보게 하는 능력은 과연 마술이다. 그 해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문화적으로 뒤쳐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내가 말한 것이 과학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과학은 대단한 것으로 우리가 가진
문명의 중요한 일부다. 마술사 중에 가장 강력한 마술사중의 하나가 바로 과학자다.
뉴톤이나 아인쉬타인은 모두 마술사다. 그들도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만들었다.
과학이라는 마술은 너무도 강력해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강력한 과학
이라는 마술은 나쁜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수많은 사람들을 교통사고로 죽이지만 자동차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편리한 도구다. 과학기술 문명을 버려봐야 우리는 아주 불편하게 살 뿐이다.
아주 좋은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자동차를 사람 다니는 길에서 몰아서는 안된다.
물 한 잔은 분명 과학적으로 물 한 잔일 뿐이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험을 하면 그것은 다른 물
한 잔과 다를 것이 없다.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과학적 사고의 뒤에는 반복해서 들리는
가정과 습관과 말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중요하고 주관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만이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것에 어떤 정의를 붙이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천년전의 수학자가 증명한 수학공식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여기서 사실이면 어디서나 사실이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사실인 주장은 한국에서도
사실인 것 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어머니가 준 물 한 잔뿐만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람조차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말해 어머니는 그저 다른 한 명의 인간과 아무 차이가 없다.
우리는 과학이 과학일수 있는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전제가 제 아무리 단순하고
자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는 과학적 결과가 아닌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다. 어떤 것도 전제가 없는 것이 없다는 것, 절대적으로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은
어떻게 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을 지워나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나를 지배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을 소유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런 것을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확실한 것, 흔들리지 않는 상식의 기반은 정말로 확실한 것일까. 우리가 주변을 둘러볼때 그안에서
수많은 유령을 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중 어느 쪽이 정말로 현명한 것일까.
우리는 결국 생각끝에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끝에 한 두가지의 사실을 더 알게 될것이지만 결코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힘을 얻고 우리가 모르는
만큼 세상에서 의미를 본다.
과학과 논리를 잘 모르는 사람 일수록 과학과 논리를 맹신하고 그 노예가 되는 것같다. 그게 전부고
자기가 모르는게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의 주인이
된다. 그걸 조절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일상에 있는
것들이 가지는 논리적 구조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들의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논리적
구조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불필요한 억압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하게 복잡한 구조보다는 간결한 구조를 가졌을 때 우리는 불필요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피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조를 이해함으로서 우리가 언제 조직의 논리, 시스템의
논리를 넘어서야 하는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논리나 시스템은 제아무리 거창한
것이라도 수단에 불과한 것 임시방편적이고 제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격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