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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의 왕국, 도교의 사회 신라
-적석목곽분과 그 시대를 중심으로 - 김 태 식 연합뉴스문화부기자
Ⅰ. 전통의 창출과 도교의 추방
Ⅱ. 적석목곽분 시대 신라 주변 제 지역의 도교문화
Ⅲ. 영원불사의 여러 표상
① 무덤: 죽은자가영원히사는집
② 연수(延壽) : 불로장생의다른이름
③ 음양오행
Ⅳ. 불사의 선약과 그 제조구
① 운모
② 주사(朱砂) : 선약중의 선약
③ “바둑알”: 환약의 대용품
④ “돌절구”: 선약제조를 위한 막자사발
Ⅴ. 등선의 운반 도구
① 말과 마구류
② 시해선의 보증수표 금동신발
③ 비늘있는 생선잉어 : 용의아들〔龍子〕
Ⅵ. 금·은·옥 : 불사향의 표징
Ⅶ. 도교의 제자리 찾기를 위하여
Ⅰ. 전통의 창출과 도교의 추방
19세기 후반에 한반도로 밀어닥친 근대 국민국가 건설 움직임과 그것을 추동한 내셔널리즘 열풍이 끼친 영향은 다대하나 그
중 하나가 한국적(조선적) 전통을 비로소 창출케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전통의 창출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 가치를 재배치하는 과정이었기에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무엇인가의 희생을 요구했다. 조선적 전통이 발명됨과 동시에 소위 전통으로 당연시되던 종래 일부 혹은 많은 요소는 그
뿌리가 외래적이라 해서 조선적 전통에서 축출되고 추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전통은 어떻게 창출되었는가. 무엇을 전통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비전통이라 할 것인가? 그래서 가장 편리한 접근
방법이 우선은 외래적임을 부인할 수 없는 요소를 발라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색출과정에서 주목된 것이 유가와 불교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누가 봐도 그 뿌리가 중국과 인도에 각각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더욱 이상한 점은 전통의 반대편에 설정된
외래사상이 실제는 유가와 불교적 요소를 색출하는 작업만으로 대부분 그쳐버렸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유가와 불교만이 외래적 요소로 규정됨으로써 반대로 유가와 불교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거의 모든 것들은
그에 맞서는 조선적 전통이라는 범주로 급격히 포섭되어 들어갔다. 불교와 유가적 요소를 걸러내고 남은 것들은 고유신앙,
전통신앙, 한국적 무속신앙 혹은 한국적 샤머니즘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새롭게 구속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가치의
재편성이 이뤄진 셈이다. 이와 같은 전통의 창출, 그 전형을 보여주는 이가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 9 3 6 )였다.
그는 조선의 사상을 낭(郞)·유(儒)·불(佛)의 3가(三家)로 추려내면서 이들이 쟁투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상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꽤 호의적이었던 단재에게 유교는 타멸 대상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교는 진취적·독립적 국풍파인
낭가사상을 억압한 보수파요 한학파이며 사대당이며 보수사상이었다.1) 여기에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단재가 과연
무엇을 외래사상이라 규정했으며 그에 맞서는 전통으로 무엇을 지목했는가 하는 점이다. 단재가 지목한 외래사상은 분명
불교와 유교 두 가지였다. 이러한 생각을 극단적으로 뒤집어 버리면, 적어도 단재에게 불교와 유교적 요소를 제외하면
그것이 곧 조선의 고유신앙으로 자동 변환되게 된다. 물론 단재가 여기에서 만족하지는 않았다. 유교와 불교에 맞서는
조선적 전통으로서 단재는 낭가사상을 지목하면서 그 직접적인 전통은 신라의 화랑에서 구하면서도 그러한 화랑의 원류
로는 다시‘선비’라고 칭했다던 상고시대 소도(蘇塗) 제단의 무사와 고구려의 조의선인(衣仙人)을 설정하기도 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단재의 전통문화론이 그 의도한 바가 무엇이건, 그가 조선적 진취사상으로 지목한 소위 낭가
사상에 불교나 유교처럼 외래적이기는 마찬가지인 다른 사상적 요소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조선만의 전통으로 급속히
포섭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장 주된 피해자가 바로 도교였다. 그가 남긴 글을 분석하건대 적어도 단재에게 도교는
조선이 조선되게끔 하는데 이바지한 공로는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더 혹평하자면 단재는 도교가 안중에도
없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현재 남아있는 각종 자료를 보건대 도교적 전통과는 도저히 뗄 수 없으며, 어쩌면 도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화랑, 그가 말하는 소위 낭가사상에 내재된 명백한 도교적 전통을 단재는 그것이 도교가 아니라고 아예
묵살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는 진흥왕이 신선(神仙)을 매우 숭상해 원화(原花, 혹은 嫄花)와 그 후신으로
화랑을 창설했다는『삼국유사』기록을“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이 나온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진흥대왕이 신선을
尙하여 源花·花郞을 奉하였다니, 원화와 화랑이道士나黃冠의종류란말이냐,『 삼국유사』작자는불교도인까닭에『삼국사기』
작자인 유교도와 같이 佛他의 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그 기록의 모호함은 한가지이다”고 혹평하고 있다.2)나아가
화랑을 국선(國仙)이라고도 했다는 문헌기록을 비판하기를“다만 國仙의 仙자로 인하여 장생불사를 구하는 지나(支那. 중국
-인용자)의 선도(仙道. 곧 도교-인용자)로 알면 大誤다”라고 하는가 하면, 최치원이 화랑도를 가리켜 신라의 현묘지도(玄妙
之道)라고 하면서 그 원천으로 유교와 불교 외에 노자에게서 유래하는 도교를 지목한 것을 두고서는“다만 국선의 교가 유·불·
노 삼교의 특장을 갖추어 가짐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無爲’와‘不言’과는 間이 아주 천만리나 떨어지는
敎이다”3 )고 단정했다. 화랑은 무위자연을 표방하는 도교와는 하등 연관이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인식이 비단 단재 한 사람에게 그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2003년 전
5권으로 완간한『역주 삼국유사』(이회문화사)의 경우 진흥왕이 신선을 숭상했다는‘권제3 탑상 제4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조에 나오는‘신선(神仙)’에 대한 각주에서“신라의 풍류도를 가리킨다. 최치원은 풍류도에 도교적인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풍류도의 연원을 기록한 仙史가 있었으며, 화랑을 국선으로 불렀던 점 등으로 보면, 화랑에 신선적인 요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선을 중국 도가의 신선과 같은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고래의 토착신앙과 관련된 신선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권3. p.206)라고 해서 화랑을 비롯한 신라사 제 방면에서 농후하게 관찰되는 도교적 요소들을 거의
강압적으로 도교에서 유리케 하는 한편 그것을‘고래의 토착신앙’으로 구축하려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다.
불교와 유교 외의 모든 것을 원시신앙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은 당장 이 글에 중점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적석목곽분에
대해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천마총 발굴조사보고서』(1974) 작성에 참여한 민속학자 임동권은
여기에 기고한「민속학적 고찰」편에서 천마총에 구현된 신라의 사상체계를 총평하기를“呪術的原始信仰”이라고 하고 있다.
신라의 신앙 체계 전반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와 유교는 이러한‘주술적 원시신앙’에 비해 고등, 혹은
우월하다는 진화론적 시각이 뿌리 깊게 각인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단재 당대에도 그랬고 이처럼 지금도 아주 많은 이가 무턱대고 한반도 문화에 포섭, 융해된 수많은 도교(적) 전통들을 도교
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떼어버린 채 한국의 고유사상에 포섭하고 있다. 여기서 말미암은 문제점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
학계가 고유신앙 혹은 전통신앙 등의 이름으로 구축해 놓은 연구 성과를 분석하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필자가 이러한 부류의 논저들을 물론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지금까지 독파한 관련 논저들이 고유사상이라 구축
해 놓은 거의 대다수가 실은 도교적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무속 관련 연구만 보건대 지금껏 학계가
한국적 무속 문화라고 구성해 놓은 거의 대부분이 실은 도교적 전통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단박에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이 필자의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데서 말미암은 섣부른 예단인가? 아니면 착시현상인가? 필자는 아니
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소위 한국 전통문화는 실은 그 대부
분이 도교적 전통이다. 둘째, 기존 소위 전통문화 연구자들의 도교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데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있다.
필자는 소위 한국 전통론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감히 평가한다. 다시 말해 도교 혹은 도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미숙 혹은 무지한 상태에서 불교나 유교만을 외래적 문화 요소라고 규정하고 걸러내고 남은 것들을
무작정 한국적 전통문화라고 예단한 데서 초래되고 있는 굴곡 현상이라 할 것이다.이러한 사태는 도교 자체를 위해서도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필자는 소위 전통문화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 함이 없음과 동의어는 결코 될 수 없다.
무엇을 전통문화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진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문화가 외부와 접촉 없이 성립된다고 결코 간주하지
않는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외래사상이 유입되기 전에 한반도에도 소위 전통 문화 요소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와 유교 외의 모든,혹은 대다수 요소가 소위 전통문화가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불교와 유교
에 비해 그 이전 한반도 사회에 정착한 문화요소들이‘상대적인’토착 문화라든가‘상대적인’전통문화가 될지언정, 그것이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만 정착·배태·발전·변화한 전통문화는아닌 것이다.
전통은 끊임없이 창출·변화·발전·소멸·전화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다시 끊임없이 외부와 교류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그것을 발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만, 소위 한국의 전통문화에 깊이 박힌 요소 중에
무엇이 도교 혹은 도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몇몇 가지는 집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도교를
앞세운 채 과감히 저 우람한 신라의 적석목곽분을 들어서고자 한다.
Ⅱ. 적석목곽분 시대 신라 주변 제 지역의 도교문화
적석목곽분 그 자체, 혹은 이러한 무덤이 축조되던 시기4 ) 신라에 도교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주로 고고학적 유물로
입증하기에 앞서 먼저 필자는 이 시대 신라를 둘러싼 주변 제 지역에 전개되고 있던 도교 문화의 양상을 간략하게나마 개괄
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적석목곽분 시대에 신라가 도교 문화에 짙게 포섭돼 있었음을 증명하는 데는 비록 간접적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를 둘러싼 제 주변, 그렇기에 신라가 교섭했을 지역에서
혹시라도 거의 예외 없이 혹여 도교문화가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면, 신라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결코 예외가 아님을
간단하게 방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먼저 수·당에 의한 통일 제국이 형성되던 무렵까지 중국 대륙에서 도교는 이미 완연한
‘교단종교’로 성립을 보아, 당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외래 종교’인 불교는 물론이요, 소위 전통 사상의 또 다른 축인 유가
와도 대항하는 3대 세력 중 하나를 당당히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대륙은 전통적인 중원 문화권인 황하지역과 유목민
들에 쫓긴 한족왕조가 연이어 명멸한 양자강 유역 강남문화권으로 대별할 수 있으니 이들 두 지역 모두 도교가 끼친 영향은
막강했다. 황화문화권에서는 북위 왕조가 도교 문화를 꽃피웠으며,전통적인 도교의 주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강남지역
문화권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석목곽분 시대 중국에서는 종교와 철학으로서의 도교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장
철학과 강남지역 문화권의 전통적 무격신앙이 발해만 문화권의 신선사상과 완연히 결합을 이룩해 불로장생을 표방하는
도교신학은 이미 동진시대 갈홍(葛洪. 2 8 3∼3 4 3 )의『포박자』(抱朴子)에서 완성을 이룩했으며 남조 양대(梁代) 도홍경
(陶弘景. 4 5 6∼5 3 6 )에 이르러5 ) 더욱 완비된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적석목곽분 시대 중국 대륙은 북방의 황하문화권은
물론이요 남방의 강남문화권 역시 도교를 빼놓고는 당시 사회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력은 막강했다.6 )
고구려에서 도교가 끼친 영향력은 다른 무엇보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무수하게 포진된 고분벽화가 증명하고 있으니,
여기에 나타난 주된 사상사적 흐름의 대세는 도교적 신선사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구려 고분벽화 어느 것 하나 도교를
빼놓고는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장수왕이 건립한 광개토왕비문( 4 1 4 )을 보아도 거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왕의 위훈은 도교신학에서 차용했음이 완연하다. (후술) 백제 또한 마찬가지였음은 적석목곽분이 축조
되던 바로 그 시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이 명징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확인된 매지권과 동경 및 환두대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장품은 도교신학의 직접적이며 파괴적인 힘을 확인케 한다.7)『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이보다 앞선 한성도읍기인
진사왕 7년(391) “봄 정월에 백제는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는 한편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다
(穿池造山以養奇禽異卉)”고 했으니, 이에 대한 추가 정보는 누락되고 있으나 다른 사례를 비교 검토할 때8) 이 때 조성된
궁원지가 도교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3신산(神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를 형상화했을 것임은 별다른
증명을 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일본열도의 경우,9) 도교 혹은 그것을 구축하는데 어쩌면 가장 결정적일 수 있는 신선사상이 신라의 적석목곽분
시대 혹은 이미 그 이전에 형성돼 있었음은 다른 무엇보다 삼각연신수경(三角緣神獸鏡)으로 대표되는 무수한 동경과 이소노
카미신궁(石上神宮) 소장 칠지도(七支刀)가 증명한다. 기나이와 규슈 일대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400∼500개 가량이 출토
됐다는 삼각연신수경은10) 지금까지 비슷한 유물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가운데 일본열도에서 자체 생산
된 것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지 격렬한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그 유래가 어디건 변치 않는 것은 이들 동경의 생산
과 유통 및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도교적 신선사상을 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동경 자체가 도교에서 검(劍)과
함께 가장 중요시하는 신물(神物) 혹은 신기(神器)임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11) 실제 이들 삼각연신수경에 나타난 서왕모
(西王母)와 동왕부(東王父)12) 신앙은 도교신학, 바로 그것이다. 혹자는 이와 같은 동경을 위신재(威身材)라 해서 그것을
소지한 자의 신분과 혈통을 나타낸다고 보는 모양이나,13) 이는 비유컨대 불상이나 탑지가 신분과 혈통을 표시하는 위신재에
불과하며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이들 동경은 당시 일본열도를 장악한 도교신학의
막강한 영향력을 증명하는 제1 유물이다. 이러한 사정은 칠지도가 방증하고 있으니 칠지도라는 칼 자체와 거기에 적혀 있는
명문 또한 완연한 도가 신학을 구현하고 있다.14) 뿐만 아니라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일본열도 고분시대를 대표하는
소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묘제 또한 도교신학에서 유래하는 천문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짙게 반영하고
있으니,15) 이와 같은 형식의 기본 모티브는 고구려 벽화무덤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으며, 한성시대 백제 적석총 무덤 떼인
서울 석촌동 고분 일부에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신라의 경우 비록 시대가 떨어지기는 하나 석굴암이 전형적인 천원지방 형식
을 취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나정 일대에서 드러나는 8각형과 4각형이 세트를 이룬 신라시대 유적 또한
전형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이다.16)이처럼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시기 신라를 둘러싼 주변 제 지역은 모두
도교 문화권에 짙게 포섭돼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만이 무엇이 특출 나건대 혼자서만 도교 문화권에서 일탈해 있었
겠는가? 이러한 정황 증거만으로도 신라 또한 도교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입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 할
것이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증명되고 있으니 이제 그러한 실체의 구체적인 증거들을 들고자 한다.
Ⅲ. 영원불사의 여러 표상
① 무덤 : 죽은 자가 영원히 사는 집
적석목곽분 연구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곧잘 망각되는 게 아닌가 한다. 첫째, 봉분 규모로 보나 부장 유물 숫자로 보나
신라 적석목곽분만한 무덤은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다. 둘째, 무덤은 철저하게 사자를
위한 장치요 주거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 신라 적석목곽분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일단 매장이라는 행위와
그것의 마지막 형식이라 할 수 있는 봉분 축조가 끝난 다음 살아남은 자,혹은 앞으로 태어날 자를 위해 무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곳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봉분의 겉모양뿐이라는 사실이다. 사자와 함께 매장된 무덤은 그 구조
가 어떠하며, 그 안에 들어간 부장품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러한 비밀을 알고있는 사람이 모두 죽고 난
뒤에는 망각으로 사라지고 없다. 이 두 가지, 다시 말해 한반도 최대 최다 규모와 부장품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무덤이
철저히 사자를 위한 시설이라는 사실이 신라 적석목곽분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저토록 규모가 크고 부장품이 많은 무덤이 철저히 사자를 위한 장치라면 신라인들은 왜 저러한 무덤을 축조해야만 했는가?
이런 의문의 일단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무덤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죽은 자가 영원히
사는 집’이다.하지만 이러한 정의가 시대와 공간을 통틀어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당장 고려시대만 해도
불교의 영향 때문인지 화장이 대단히 성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풍습을 두고 무덤이 사자가 영원히 사는 곳
이라고 보기에는 심히 어렵다.17)그렇지만 적어도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이런 무덤에 대한 정의가 고스란히 투영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 무덤을 저렇게 크게, 더욱 중요하게는 저렇게 많은 유물을, 그것도 그 대부분이 사자의 생전 생활 용품
을 형상화한 것들을 떼로 묻어야 했는지에 대한 마뜩한 설명으로는 죽은 자가 영원히 사는 집으로 무덤을 꾸미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해석 할 수 없다.이에 대해서는 이미『천마총 발굴조사보고서』(1974)에「민속학적 고찰」을 가한 민속
학자 임동권이“부장제는 고대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 생전에 사용하던 기구를 넣어줌으로써 사자에의 공양물이며
사후에도 생전과 다름없는 생의 연장(延長)을 믿었던 고대인들의 신령관(神靈觀)에서 유래한 것이다”고 지적은 이 점을
명쾌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풍부한 부장품으로 대표되는 적석목곽분의 장법적 특성에 대한 해석에서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고대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언급이다. 전후 문맥으로 미뤄 이러한 말은“고대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에 별로 주목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문제의식은“고대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기”때문에 여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는 점이 극단적으로 다르다.필자는 신라 적석목곽분 연구가 발굴 이후‘발굴보고서
수준’을 그다지 뛰어넘지 못한 채‘약보합’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왜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지 그 단적인
해답의 하나로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 부재, 즉, 고대 고분에서 흔히 보이기 때문에 주목거리가 되지 못 한다는 안이한 자세
를 지목한다. 풍부한 부장 풍습이 고대 고분에서 흔히 보인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구현케 한 사상적 뒷받침은 무엇
인가? 과연 풍부한 부장 풍습은 예외 없이 통용되는 일반 법칙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며,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로 필자는 바로 도교를 지목하는 것이다.죽어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신앙이 신라 적석목곽
분에 투영되고 있음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소위 매지권을 참조하면 좋은 비교 자료가 된다. 이 매지권(買地券)에 따르면
죽은 무령왕은 지하를 관장하는 토왕(土王) 등과 계약을 통해 무덤 자리를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18) 왜 매입을 해야만
했는가? 그곳에서 죽은 무령왕(혹은 그 영혼)이 영원히 사는 곳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 벽화라는 유물을 많이
남기고 있는 고구려 고분 또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왜 고구려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벽화를 그리고 더구나 그 많은
그림 소재 중 하나로 신선 그림을 넣어야 했는가?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는 사후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와 같은 명확한 문헌 자료가 출토되지는 않았을 지언정 무덤에 대한 기본 관념이 무령
왕릉의 그것과 동일했다는 흔적은 읽어내기에는 비교적 용이하니, 다른 무엇보다 사자와 함께 한 수많은 부장 유물이 증명
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죽은 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소위 제의용임이 분명해 보이는 것도 있는 반면, 실생활에서 사용됐음
직한 것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제의용품 중 최근에 널리 지적되고 있듯이19) 금관 혹은 금동관의 경우, 출토 상황이라든가,
그 허약한 구조로 보아 그것이 생전의 착장품이 아니라, 사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물품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바, 비단 금관이나 금동관을 빼고서도 웬만한 규모의 적석목곽분에서는 예외 없이 출토 되는 금동신발이 죽은 자를 위해
특별 제작됐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생전 실생활 용품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무덤을 위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제작되어야만 했던 까닭은 무엇
인가? 이에 대해 필자는 신라인들이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죽어
서도 무덤을 근거지로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기에 금동신발도 넣어 주고 특별 제작한 금관도 착장케 했던 것이다.
이로써 신라 적석목곽분은 그 구조라든가 엄청난 부장품, 혹은 동시대 축조된 백제 무령왕릉 등으로 보아 죽은 자가 영원히
사는 곳으로 구상화했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 도출 또한 가능하다. 신라인들은
사람이 죽어서도, 비록 그 육신은 썩어 없어질지언정 적어도 그 영혼만큼은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영생불멸인 것이다. 이러한 영생불멸 사상이 다시 무덤을 박차고 생(生)의 영역으로 확장
될 때 그것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이 되는 것이며 익수연년(益壽延年), 혹은 간략히 줄여 연수(延壽)라는 사상으로 표상화되
는 것이다.죽어서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신선(神仙)인 것이다. 이러한 신선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뒷받침한 사상이 바로 도교인 것이다.
② 연수(延壽) : 불로장생의 다른 이름
도교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다만 벽곡(穀)이라든가, 호흡법(呼吸法), 혹은 도인술(導引述), 혹은
방중줄(房中術), 혹은 선약(仙藥)이라 일컫는 다양한 약물 투여 방법 등을 통하고, 나아가 생전에 여러 가지 공덕(功德)을
쌓아 선인(仙人)혹은 신선(神仙) 혹은 진인(眞人) 혹은 지인(至人) 혹은 달인(達人)이 되어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물에 들어가도 옷이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불타지 않으며, 물위를 마음대로 걸어다니는20) 영생불멸이 되고자 하는 욕망
의 신앙 체계라는 데는 그다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더욱 줄여 도교가 추구하는 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 할 것이다. 불로장생은 그것이 더욱 극대화가 될 때는 영원불멸이 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실생활
에서는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말로 치환된다. 이러한 종교관을 표현하는 것으로 도가 문헌에서 가장 흔히 대할 수 있는
용어 중 하나가 장수(長壽)21)라는 말과 함께 익수연년(益壽延年)이다. 후자는 이미 지적했듯이 연수(延壽)2 2 ) 라고도
약칭한다.한데 불로장생 혹은 영원불멸의 다른 표현임이 명백한 延壽라는 말이 신라 적석목곽분 중 하나인 서봉총 출토
은합에서 다음과 같이 각각 확인되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23)
a. 뚜껑 내부 명문 :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杆用三斤六兩
b. 합 저부 외면 : 延壽元年太歲在辛
三月中( ? )太王敎造合杆
三斤
위 명문에서 각각 확인되는 延壽는 그 위치로 보아 연호임이 명백하다. 이 은합에 대해서는 현재 그 제작지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나,24) 그렇게 볼 만한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혹자는 이 시대에 신라가 연호를
사용할 수 없고, 신라왕이 태왕(太王)을 칭하게 되는 것은 천전리서석에서 확인되는‘성법흥태왕(聖法興太王)’이후이며,
나아가 여기에다 中이라는 이두적 처격 조사가 고구려에 유래를 두고 있다는 근거를 내세워 고구려 제작설을 주장한다.
나아가 같은 적석목곽분인 호우총에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된 청동합이
출토된 사실을 방증자료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 어느 것도 서봉총 은합이 고구려 제 작품이라는 결정적인 근거
가 될 수 없다.25) 이에 필자는 이 은합이 신라 자체 제작품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이 고구려 제작이건 신라 제작이건 상관
없이 이 은합에서 연수라는 연호가 확인된다는 사실은 적어도 서봉총에 延壽로 대표되는 도교적 신선사상이 깊숙이 투영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延壽는 도교신학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줄기인 불로장생, 익수연년(益壽延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26)
③ 음양오행
이 은합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태왕(太王)의 교(敎)에 의해 그것이 제작된 辛卯라는 간지가 하나〔卯〕는 뚜껑, 다른
하나〔辛〕는 몸체 밑바닥에 각기 따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간지를 뚜껑과 몸체로 구분했는가? 이러한 표기 방식이
음양 사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문제의 은합은 몸체와 뚜껑을 분리한 조립식이다. 이러한 조립식 그 자체가 음양
사상을 구현한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제작한 간지를 하나는 뚜껑에,다른 하나는 몸체에 새겼
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상황은 달라진다. 중국대륙에서 발견된 간지는 1 0천간과 1 2지지의 조합임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이를 음양으로 대별하면 천간(天干)은 양(陽)이요, 지지(地支)는 음(陰)에 해당된다.
다만 서봉총 은합에서 주의할 것은 구조로 보아 위에서 덮는〔覆〕뚜껑이 양이 되고, 밑에서 이를 아래서 싣는〔載〕몸체는
음이 됨이 정상인 듯하지만,27) 막상 여기에 표시된 간지는 양에 속하는 천간인 辛이 음에 해당하는 몸체에 있고 그 반대편
음이어야 할 卯는 뚜껑에 가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러한 뒤바뀜 현상이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연구를 기다린다.
음양오행 사상이란 우주만물 혹은 인간사 제반 현상을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요소, 혹은 목(木)·금(金)·수(水)·화(火)·토(土)
의 다섯 가지 물질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끼리 상생(上生) 혹은 상극(相剋)하는 현상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신라지역에 과연 이러한 사상이 언제 도입, 혹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다만 적석목곽분에서 완연히
중국적인 음양오행, 특히 음양사상의 흔적이 뚜렷하게 관찰 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또 하나, 적석목곽분
시대 이전에는 이곳에 두드러지는 음양오행의 완연한 흔적이 적어도 고고학적 증거로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환언하건대, 그 시대 이전에도 음양오행 사상이 신라사회에 침투 혹은 배태돼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석목곽분에서 그러한 흔적이 비로소 농후하게 관찰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양오행 사상이 적어도 고고학
적 유물로 볼 때는 적석목곽분 시대에 완연하게 자리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에 이 시점에서 그러한
음양오행사상이 신라 사회에 침투하게 된 통로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며, 그 과정에서 도교를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음양오행 사상이 도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사상보다 도교와 밀접함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도교에 포섭된 음양오행, 특히 음양 사상은 둔갑술(혹은 환술<幻術> )28)이나 방중술과 같은 다른 도교신학의 변종을 낳으
면서 그 외연을 무한히 확대해 나간다. 둔갑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A에서 B로 변화하는 기술이니 이것을 도교신학
에서 음양의 조화에 따른 결과로 설명하고 있음은『주역』과『노자』29)에서 명징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삼국유사』
첫대목 단군신화에 기재된 곰과 호랑이의 변신 이야기는 도교철학의 사유물임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일본서기』스이
코조(推古朝)에 보이는 것으로 백제승 관륵(觀勒)이 일본에 전했다는 둔갑술과 김유신의 서손인 김암(金巖)이 역시 일가견
이 있었다는 둔갑술30), 모두 도교신학에서 유래된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방중술이란 간단히 말해 섹스의 기술이다. 섹스란 동성애가 아닌 이상 남성과 여성의 교접(交接)이니 이것을 도교에서는
형이상학으로 전환시켜 음과 양의 결합과 그러한 과정에서 조화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점이다. 방중술 그 구체적인 실태는
생략하거니와, 방중을 통해 득도해서 신선이 된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음양사상의 외연적
확대 결과물 중 하나인 방중술은 노골적인 성애를 묘사한 신라토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여기서는 국보 1 9 5호로 지정된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2점 중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분 출토품(높이 34㎝,
아가리 지름 22 .4㎝)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토기에 구현된 토우는 모두 19점으로 그것을 세분하면 사람 4점, 새 5점, 뱀
등의 양서류 6점,물고기 1점, 토끼 1점, 거북 1점, 현악기 1점 등이다. 이 중에서도 배부른 임산부로 추정되는 여인이 거문고
로 생각되는 현악기를 타는 가운데 남녀가 성교하는 모양과 개구리 뒷다리 중 하나를 문 뱀을 형상화한 토우가 특히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합상은 음양사상 혹은 그것으로 주된 축으로 출발하고 있는 도교 신학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31) 이것들을 다른 사고방식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개구리와 뱀은 언뜻 상극인 듯하지만, 이러한 상극에서 조화와 생명과 탄생을 구현하는 철학이자 신학이 바로 음양사상인
것이다. 나아가 토우 장식 중에서도 남녀 모두 희열하는 표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남녀 교신상은 도가의 방중술, 바로
이것을 구현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또한 이 토기 장식 토우들이 구현하고 있는 동물들 중에서는 개구리와 뱀은 특히 허물을
벗거나 하는 올챙이에서 진화하는 생물들이라는 점에서 음양의 조화, 나아가 둔갑술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도교신학 그 주축은 한마디로 불로장생이라고 설명했거니와 후대에 학 등의 다른 동물들과 함께 소위 10장생을 형성하는
거북은 그 자체 영물로서 가장 신성해야 할 의식이라 할 수 있는 점치는 행위에 쓰였고 나아가 장수의 대명사라는 사실에서
그 사상적 유래는 도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 토우 장식이 구현하고 있는 악기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거문고로
판단되거니와, 거문고가 아니라 해도 그와 비슷한 현악기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신라에 거문고가 유입된 것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토우 장식이 구현한 현악기가 거문고 혹은 그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또한 도교와
밀접한 근거 중 하나로 본다. 거문고가 신선이 휴대하는 악기류로는 가장 빈번히 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32)
이러한 토우 장식 장경호에 나타난 음양사상을 응용하면 울주 천전리 서석과 반구대 암각화 및 나아가 고령 암각화에
이르기까지 소위 선사시대 암각화라는 주장이 압도적인 암각화에 대해서도 이제는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게 된다. 예컨대
천전리 서석에서 확인되는 각종 기하학 문양이나 동물, 사람 등의 문양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과는 달리 신라시대 혹은 그
이후 작품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는 추정을 능히 할 수 있다. 나아가 청동기시대 작품이라고 보는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각종 동물 문양 또한 많은 경우에 암수가 쌍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음양사상을 구현하고자 한 조각이라는 사실도
분명해 진다.간단히 언급했듯이 한반도, 특히 신라사회에서 완연한 음양사상이 구현되기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적석목곽분
시대 이후라고 봐야 한다. 그 이전에는 음양사상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한 흔적이라고 확신할 만한 고고
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고령 암각화 또한 다른 부분은 자신 없으나 여기에서 확인되는 소위 동심원 무늬는 천전리 서석의
그것이라든가 문제의 토우 장식 토우에서 확인되는 동심원과 근본적으로 같다는 점에서 그 완성 시기는 경주에서 적석목곽
분이 축조되던 무렵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33)
이제 오행 사상을 보자. 음양사상은 오행사상과 짝을 이룬다 할 정도로 밀접성을 이루고 있으니 음양사상이 적석목곽분
시대 신라에 도입이 되었다면 당연히 오행 사상도 함께 도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행사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감지할
만한 유물을 판별 해 내기는 필자로서는 능력이 모자란다. 다만, 백화수피제로 판명된 천마도 장니에서 오행사상, 그 직접
적인 증거를 지적할 수 있으니, 발굴보고서에 의하면“채화(彩畵) 표면은 능형(菱形)으로 구획이 지어져 있으나 구획부에서
의 직유(纖維), 즉, 봉사(縫絲)는 정성적(定性的)으로는 확인되지 못하고 있”으나“채색은 白, 赤, 黑, 黃, 綠色으로 構成
되어 있고 그 중 黑色, 赤色, 綠色과 變한 白色만이 뚜렷하며 黃色部는 거의 消滅되고 있다”고 하고 있음이 매우 주목된다.
34) 이들 색깔은 녹색만을 제외하고는 이미 진한시대에는 완전히 자리를 잡는 오방색(五方色)인 적·청·흑·황·백과 동일하다.
이로 미뤄 보건대 발굴보고서가 말하는 녹색은 실은 靑色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기야 녹색과 청색은 같은 계열에 속하니
이로써 천마도 장니에 오행사상의 그 변형인 오방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은 여간 예사롭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각종 회화품 등의 색깔을 주목하면 위에서 언급한 오방색에 해당하는 색깔이 두드러
짐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황남대총 북분에서 편으로 발굴된 칠기에서 확인된 동물 문양은“꼬리를 위로 치켜세우고 갈기를
날리며 달리는 모습의 말 뒤에 두 필의 보행하는 모습의 말이 그려졌는데 모두 朱色으로 外形을 그리고 黃色으로 세부를
묘사하”35)고 있는데 여기서도 오방색에 속하는 두 원색이 확인된다.이로써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동시대 중국은 물론이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여실히 만개한 음양오행사상이 완연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은 도교신학과는 뗄 수 없으니, 그것이 유입된 통로 또한 도교와 함께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게 되었다.
Ⅳ. 불사의 선약과 그 제조구
① 운모
적석목곽분에서 운모가 출토된다는 사실은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를 증명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물 중 하나이다. 이런
지적은 이미 일본 고고학도인 몬다 세이이치(門田誠一)에의해주목할만한언급이이미두차례논문을통해제기된바있다.
‘ 古墳出土の雲母片に關する基礎的考察’(『鷹陵史學』제25호. 佛敎大學鷹陵史學會1999)과 湯山古墳出土の雲母片と關連
試料の再吟味(『古代學硏究』제150호, 2000년 9월)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몬다는 한반도와 일본 열대 고대 유적, 특히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는 광물질 일종인 운모를 문헌자료, 특히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 관계 문헌에서 운모가 선약
(仙藥)으로 쓰이고 있음을 들어 그러한 사상의 침투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라고 추정했다.
이 두 논문 중 운모가 출토된 신라 유적으로는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 ▲황오리 제33호분 등 4곳의 적석목곽분
외에 전 경주 교동 출토품인 位至三公鏡이라는 동경과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고분군 중 2호분( 5세기대 축조 추정)을 거론
했다가 후편에서는 그러한 사례를 더욱 보충해 넣고 있다. 보충된 운모 출토 유적으로는 ▲황오리14호분▲황오리98 - 3번지
황오리 고분 ▲금령총 ▲황남리 82호분 ▲식리총 ▲호우총 등지를 보강하고 있다.
몬다는 나아가 나라현 사쿠라이시 珠城山고분 제1·3호분을 비롯한 일본열도 소재 고분에서도 같은 운모편이 출토되고
있음을 비교하면서 이것을 다시『포박자』를 비롯한 중국 도가 문헌에서 운모가 중요한 선약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결부
하고 있다.필자가 알기로 이러한 한반도 고분 출토 운모를 불로장생이 보증수표인 신선사상 및 도가적 사상과 연결한 것은
몬다가 처음이다. 아직까지 그의 연구성과가 국내에는 제대로 음미되지는 않는 듯한데 이런 점에서 그의 지적은 획기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필자가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운모라는 언뜻 흘려버릴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을 주목
함으로써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무렵 신라지역과 일본열도에 도가적 신선사상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필자 또한 몬다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아쉬운 것은
적석목곽분에서는 도가적 신선사상의 유포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이 운모 외에도 실로 광범위하게 출토되었
음에도 여기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의 연이은 주장에 대해 필자가 평가하는 만큼의 호응이 아직
까지 따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아직까지 정식 조사보고서가 제출되지 않은 무덤에서도 더욱
많은 운모 출토 사례가 있음을 필자는 확인했으나 논의 전개를 위해서는 이들 유적만으로 충분하다.
운모는 중국 도가사상 불후의 위치를 차지하는 동진시대 도사인 갈홍의『포박자』에서 뒤이어 다룰 주사와 함께 영원불멸,
불로장생을 가능케 하는 선약 중에서도 1등급인 상약(上藥)에속하고 있다.『 포박자』선약(仙藥) 권제1 1에는많은선약이
그 효능에따라상 약(上藥)·중약(中藥)·하약(下藥)의 3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으니 그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선약 중 으뜸은 단사(丹砂)이다. 그 다음이 황금(黃金)이며 다음은 백금(白銀), 그 다음은 제지(靈芝), 다음은 오옥(五玉),
다음은 운모(雲母), 다음은 명주(明珠), 다음은 자황(雄黃) ,다음은 태을우여량(太乙禹余糧), 다음은 석중황자(石中黃子),
다음은 석계(石桂), 다음은 석영(石英), 다음은 석뇌(石腦), 다음은 석유황(石硫黃), 다음은 …(이하 생략)이로 보아 운모가
적석목곽분에서 다량 출토된다는 사실은, 더구나 황남대총 남분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피장자 머리 쪽에서 그득히 출토
된다는 점에서 이것이 주피장자의 영원 불멸을 가능케 하는 선약으로 활용되었음은 명백하다. 운모와 관련해 또 하나 특이
한 것은 그것을 부장한 습속이 이미 동진시대 이전에‘발굴’을 통해 그러한 사례가 보고됐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갈홍이 찬한
지괴류 소설인『서경잡기』권6에 나오는 후한시대 광천왕(廣川王) 유거질(劉去疾)라는 이의 도굴 행각을 다루는 내용인데
운모의 부장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
(광천왕 유거질이 도굴한) 위(魏) 왕자 차거(且渠)의 무덤은 매우 얕고 협소했으며, 관도 없고 단지 6척 넓이에 1장 길이의
돌 침상과 돌 병풍만 있었으며, 침상 아래에는 온통 雲母였다. 침상 위에는 남녀 1명씩 두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모두 20살쯤
되어 보였고 모두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주(周) 유왕(幽王) 무덤은 굉장히 높고 웅장했다. 무덤 입구문을 열었더니
온통 白土였다. 1장 넘는 깊이까지 파냈더니 비로소 雲母가 나왔다. 다시 1척 남짓한 길이까지 팠더니 시체 백 여구가 보였
는데 종횡으로 서로서로 베개 삼아 포개져 있었고 모두 썩지 않은 상태였다.이러한 당시 도굴 행각은『포박자』와 같은 동진
시대 간보(干寶)가 찬한 지괴류인『수신기』(搜神記)에도 다음과 같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오(吳)나라 경제(景帝) 손휴(孫休) 때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광릉 땅에서 뭇 무덤을 파헤쳐 무덤의 널로써 성을 쌓는데
썼기에 파헤쳐진 무덤이 아주 많았다. 다시 한 큰 무덤을 파헤치니 무덤 안에 누각이 있었다…그 널을 쪼개니 널 속에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는 희끗희끗했으나 옷과 갓이 선명하고 얼굴과 몸이 산 사람 같았다. 널 속에 운모가 한 자 두께로 깔려 있고
다시 흰 둥근 옥 30개를 시체 아래에 깔아놓았다. (제15권)
이로써 운모는 적어도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시대에 중국본토는 물론이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걸쳐 광범위하게
선약으로 애용되었으며 그러한 선약 운모를 가능케 한 거대한 동아시아 공통의 사상적 기반이 도교였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한데 신라사에서 운모는 일정한 경향성이 감지되고 있으니, 첫째, 적석목곽분 축조시대에 무덤 부장용으로 주로 확인
되며, 둘째, 그것이 주로 확인되는 고분은 경주 중심의 소위 유력 지배계층이 묻힌 곳에 집중되고 있으며, 셋째, 그 부장
위치는 주곽일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피장자 머리 부근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을 필자는 2 0 0 3년 1 0월2 9일 한국
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 중인 울산 대곡리 고분군 현장을 방문해서도 여실히 확인했다. 약 8 0 0기 이상으로 추정되는 전체
신라 고분군 중에서 약 600기 가량이 조사된 이 고분군에서 운모는 243호 석곽묘 1곳에서만 유일하게 확인되었는데 역시나
그 출토 위치는 피장자 머리쪽이었다.
② 주사(朱砂) : 선약 중의 선약
운모와 관련해 정말로 주목해야 할 고고학적 흔적이 주사(朱砂) 혹은 단사(丹砂) 혹은 진사(辰砂)로 일컫는 붉은 안료이다.
앞서 인용한『포박자』선약편에서 보았듯이 운모는 제1급 상약임은 분명하지만 상약 중의 상약, 다시 말해 최고의 선약은
단사였다. 따라서 비단 운모뿐만 아니라 단사 또한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된다는 사실을 확인만 한다면, 또 그러한
뿌리가 중국대륙에 있는 이상 신라에서 확인되고 나아가 일본열도에서까지 확인된다면, 도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시민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 표기가 무엇이건 단사는 砂라는 공통분모가 암시하듯이 광물질이며, 또 朱혹은 丹이라는 수식어가 명확히 보여주듯이
붉은 빛깔이 난다. 주사는 화학적으로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인 황화수은( HgS )이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주사
성분이 수은( Hg )이라는 사실인데 주사에서 수은을 추출하는 기술은『포박자』의 찬자 갈홍은 물론이고36) 그에 앞서
후한시대 위백양(魏伯陽)의『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서도 보이고 있으며 그에 앞서『사기』효무본기를 보면 한 무제
때에도 이미 안기생이라는 방사가 주사를 이용해 황금을 제조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사는 그 효용성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는 안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도가에서는 이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선약 중의 최상위 선약으로 취급되었음은『포박자』등지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주사는 그것을
복용한 사람은 신선이 되어 구름과 바람을 타고 용을 부리며 천상을 자유롭게 노닐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
가도 옷이 젖지 않는 진인(眞人) 혹은 신인(神人) 혹은 신선(神仙)을 보장케하는 선약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주사가 이같은 취급을 받은 이유는 그 주된 성분이 수은이라고 했거니와 주사에서 수은이 되고 수은에서 다시 주사가 된다
는 순환적 불멸성에 기인했음은 다시금『포박자』가 잘 말해주고 있다. 많은 중국 문헌에 나타나듯이 주사는 붉은 빛깔
이지만 수은은 백색이다. 이러한 주사 혹은 거기에서 추출되는 수은이 얼마나 선약으로 광범위하게 애용되었는지는 다른
무엇보다 진시황 무덤 축조를 묘사한『사기』진시황본기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여기에 이르기를“수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여 흘러가도록 했다”라고 했다. 나아가 도교가 국교가 되다시피
했던 당대에는 역대 당 황제 중 9명이나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그렇다면 주사가 과연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되는가? 놀랍게도 천마총을 필두로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등을 비롯한 주요
고분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주사로 밝혀졌거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붉은 물감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사 추정
단칠이 확인된 무덤을 더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 황오동 제33호분37), 서봉총38), 호우총과 금령총39),황남동 82호분 동총,
황남동 109호분, 황오동 33호분 동곽이 있으며 식리총의 경우 이곳에서 출토된 목관 안쪽에서 확인되었다.40)이와 같은 붉은
물감이 얼마나 발굴단에는 의아스럽게 생각되었는지는 천마총 발굴보고서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積石을 調査하면서 注目되었던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陷沒部分의 積石을 들어내면서 나타난 丹漆냇돌이다. 丹漆냇돌이
最初로 發見된 것은 木槨의 上部腐蝕木이 나오기 以前, 頂上下9m 25cm 깊이의 木槨南壁으로부터 槨外로 1m 60cm 떨어진
곳이었고 계속해서 槨外는 물론 槨內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이들 丹漆냇돌에는 全面을 完全히 칠한 것도
있었지만 部分的으로 칠한 것들이 거의 大部分이어서 意識的으로 칠하여졌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점들이 있었다. 칠하여진
狀態는 大略세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 .全面칠이었고 두번째는 部分的으로 붓자욱이 스친 듯한 것, 세번째가 칠한 것이
아닌 떨어져서 묻은 듯한 것 들이었다. 이러한 丹漆냇돌은 慶州地方의 積石木槨墳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에
對한 解釋은 지금까지 대개 呪術的인 것으로 推測되어 왔을 뿐 明確한 解答이 나오지 못하였다. 本古墳에서 發見된 丹漆냇돌
들은 單純한 呪術的 目的에 依한 것이라고 보기 이전에 木槨部分에 이루어졌던 어떤 行爲에 대한 附隨的인 影響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推測의 근거는 후술되겠지만 木槨床面最上層바닥에 板材를 깔았는데 그 위에 丹漆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卽木材에 丹漆을 한 事實로 보아 木槨自體의 木材에도 丹漆이 되어 있었지 않았나 하는 推測이
可能하였으며 특히 木槨을 中心으로 內外周圍에서 多量의 丹漆냇돌이 나온 것은 木槨을 칠하는 過程에서 周圍에 있던 냇돌
에 우연히 발리어졌거나 또는 칠하는 途中塗料가 떨어져 묻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全面에 발려진 少量의
丹漆냇돌에 對하여는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 많은 新出資料에서 밝히어 지리라고 믿어진다.
여기서 보듯이 이들 단칠에 대해“대개 주술적인 것으로 추측되어 왔을 뿐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단칠이 주사로 밝혀진다면, 막연히 주술적으로 것으로 치부돼 왔던 그 비밀이 마침내
문을 열게 된다.따라서 문제는 단칠, 즉 붉은 색이 도는 물감이 그 원료가 황화수은, 즉 수은이 주성분인 주사 바로 그것인
가에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아쉬운 것은 이들 붉은 안료에 대한 자연과학적 성분 분석이 모두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붉은 안료는 그 주성분이 철산화물(Fe 2O3)과 황화수은(HgS)
두 종류로 크게 대별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미 1989년에‘한국 고대안료의 성분분석’에 대한 성분 분석을 감행한 미국인
보존과학자 John Winter에 의해 증명된 바 있다.41)당시 윈터는 백제에서는 진사(즉 주사)를 널리 사용했으며,
신라시대 칠기 시료에서도 황화수은( HgS )을 찾아냈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신라 칠기에서 주사가 확인
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적석목곽분과 거의 동시기에 해당되는 고령 고아동 고분벽화에 쓰인 붉은 물감 중에서도 연도
측면에서 채취한 시료에서 황화수은이 검출된 최근 연구 성과42)는 많은 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되는 소위 단칠이 실은 주사일
가능성을 한층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한데 이들 단칠 주성분이 주사라는 연구성과는 비록 그 사례가 한 곳에서 그치기는 하지만, 명백히 나와 있다. 어디인가?
천마총이다. 1973년 천마총 발굴조사를 완료한 조사단은 이곳 적석부(積石部)에서 채취한“朱色粉末”을 성분분석을 의뢰한
바 있는데 그 결과 수은( Hg )이 0.06 ppm이 검출됐다.43)따라서 비록 천마총 한 사례에 지나지 않으나 이를 토대로 하고
또 고대 한반도 안료 및 그 과정에서 시도된 신라 칠기류 붉은 물감에 대한 존 윈터의 선행 연구성과를 고려할 때 적석목곽
분에서 확인된 붉은 물감, 즉 거의 모든 보고서에서 거론하는‘단칠’은 예외 없이 그 주성분을 주사로 보아도 큰 모험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설혹 이들 단칠 일부가 주사가 아닌 산화철이라고 해도 그것이 구현하고자 한 기본 모티브는 주사와 동일
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사 혹은 산화철이 대표하는 붉은 물감의 상징성은 무엇인가?이미 지적했듯이 그것은
영원불사, 영생불멸을 상징하는 선약이라는 사실이다.44) 주사는 선약 중에서도 최고급 선약이었으니, 운모와 함께 이것이
신라 고분에서 다량으로 확인된다는 것은 신라고분을 축조하는데 투영된 신라인들의 사상체계가 바로 도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일대 증거가 된다.
③ “바둑알”: 환약의 대용품
주사가 최고의 선약이라고 했거니와 주사는 그 주성분이 독극물인 수은이니, 여기서 또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이와 같은
독극물을 도대체 그 때 사람들은 어떻게 제조해서 어떻게 복용했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제조법이야 필자가 이
분야 문외한이니 그것을 설명하기란 실로 곤란한데 다만 뒤에서 그 제조 도구임이 명백한 유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
하고자 한다.복용법 또한 같은 사정을 면치는 못하나, 다만, 신선과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도교도들이 많은 경우에 알약
형태로 제조한 다음 그것을 복용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뒤에서 자연히 밝혀지겠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신라 적석목곽분
에서 이러한 환약(즉 알약)의 대용품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드는 유물이 떼를 이루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사 등의 선약을 환(丸)으로 제조하는 방법이 중국에서는 널리 유행했음은 문헌 자료는 물론이고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도 명백히 확인되고 있다. 알약 형태로 만든 단약을 만들었음은『포박자』에서 아주 많은 사례가 확인되고 있는데
예컨대 각종 단약을 소개하고 있는 제4권 금단(金丹) 편에서는 유황으로 만든 환약을‘유황환(硫黃丸)’이라 하는가 하면,
아예 이러한 환약 자체를‘탄환(彈丸)’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한다.비단『포박자』뿐만 아니라 다른 도가류 서적에서도 도사
혹은 신선들이 환으로 된 약물을 복용했다는 흔적은 다음과 같이 농후하게 관찰된다. 아래 사례들은『수신기』와『열선
전』과『서경잡기』와『박물지』에서 추린 것이다.
내년 봄에 크게 염병이 번질 것입니다. 이 환약(丸藥)을 줄 테니 문에 바르면 내년 봄의 요사스런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말하기가 끝나자 문득 가버려 마침내 그 형체를 볼 수 없었다. 다음해 봄이 되어 무릉군에 크게 염병이 번져 대낮에도 다
귀신을 보았으나 오직 유백문의 집만은 귀신이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비장방이 알약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방상씨의 골
입니다. 『( 수신기』제15권)
어떤 사람이 초산(焦山)에 들어간지 7년만에 노군이 그에게 나무송곳을 주며 두께 다섯자 되는 하나의 반석을 뚫게 하고는
말하기를 이 돌이 뚫리면 마땅히 득도하리라 했다. 이 사람이 노력한 지 4 0년 만에 돌이 뚫렸다. 그는 드디어 먹으면
신선이 되는 단약의 비결도없었다.『 ( 수신기』제1권)
현곡(玄俗)은 하간 사람이라고 한다. 파두를 먹고 살았으며 성시에서 약을 팔면서 환약 7알에 1전을 받았는데 (그 약은) 온갖
병을 낫게 했다. …왕이 일찍이 세끼 달린 사슴을 놓아준적이있는데기린의어미였다.『 ( 열선전』)
주황(朱璜)은 광릉 사람이다. 젊을 때 괴밸병을 앓았는데 휴산의 도사 완구를 찾아갔더니 완구가 그를 불쌍히 여기며 말하
기를“그대가 뱃속의 삼시를 제거하면 진인이 되는 道業을 가르쳐 줄 수 있네”라고 했다. …완구는 주황에게 일곱 가지 약물을
주고 날마다 아홉알 환약을복용토록했다.『 ( 열선전』)
홍성자의 무늬 돌(弘成子文石) : 오록충종은 홍성자에게 배웠다. 성자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와 무늬있는 돌
(문석<文石> )을 주었는데 크기가 제비 알만 했다. 성자가 그것을 삼키고 마침내 크게 총명해져서 천하의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성자가 나중에 병이 들자그돌을토해내어충종에게주었는데충종또한석학이되었다.『 ( 서경잡기』)
강룡도사(降龍道士) 유경(劉景)은 운모구자환(雲母九子丸)이라는 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300살까지 살았는데 그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 무제도 항상 이 약을 복용했는데역시효험이있었다고한다. 『( 박물지』5 변방사<辨方士> )
위 예문 중 강룡도사(降龍道士) 유경(劉景)이 만들었다는 운모구자환(雲母九子丸)은 운모를 주성분으로 한 환약 9알을
말한다. 이로 볼 때 비단 주사뿐만 아니라 운모라든가 유황과 같은 다른 선약들도 환약 형태로 즐겨 복용했음이 밝혀진다.
이것은 1965년에 있었던 중국 남경 상산(象山) 왕씨(王氏) 가족묘에 대한 발굴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이 가족묘 중 평면
장방형 단실(單室) 벽돌무덤인 3호묘는 왕단호(王丹虎)라는 사람이 묻혔음이 이곳에서 출토된 묘지를 통해 밝혀졌는데
이곳에서는 모두 200여 립(粒)에 달하는 단약(丹葯)이 거의 분말 상태로 와해된 채 발견되었다. 이들 단약이 출토된 상황
에서 주목할 대목은 관 내 사자의 머리부위에 놓인 둥근 칠합(漆盒)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단약은 주홍색과 분홍색
및 백색을 띠고 있었다. 크기와 무게는 각각 직경 0.4∼0.6cm 안팎인 가운데 무게는 큰 것이 0.468g, 작은 것이 0.275g,
평균 0.372 g이었다. 이 무덤에서 단약이 출토되는 상황과 크기, 색깔 등등을 비상히 유념해 기억해 주기 바란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도 똑같은 모티브로 바로 이런 단약임이 명백한 유물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단약에 대해서는 1965년에 남경약학원(南京葯學院)에서 성분 분석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 유황 13%, 수은 60.9 %로
밝혀졌다. 유황이나 수은 모두 앞서 보았듯이 선약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약물 혹은 그 주성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왕단호 묘에서 출토된 이들 단약은 중국 고대 연단화학사상의 최초로 발견된 실물이라는 점에서 중국 학계에서는 의미가
대단히 깊다.45) 이를 발판으로 이제 신라 적석목곽분으로 무대를 옮겨본다. 많은 신라무덤에서 선약임이 명백한 주사와
운모가 아울러 확인됐으므로 정말로 이것들이 불로장생을 희구한 도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환약 또한 적석목곽
분에서 출토될 공산이 크다고 할 것이다. 적석목곽분은 이번에도 역시 이러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되는 환약은 무엇이며 어떤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출토 상황은 어떤가?이런 의문이 용솟음치는
곳에서 우리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남분에서 다량으로, 그것도 고배라고 하는 토기에 그득 담겨진 채 출토된 소위 바둑돌
모양 잔돌들을 주목하게 된다.먼저 천마총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발굴보고서를 통해 그대로 옮겨본다.46)
碁石形小礫3 5 0個: 表面이 自然的으로 곱게 磨硏된 대개 楕圓形의 잔자갈로서 크기는 지름 1cm되는 작은 것에서부터 지름
2.5 cm의 큰 것까지 여러 가지이다. 색깔도 純白色이나 黑色외에 黑白이 不規則하게 얼룩진 것도 있어 바둑알처럼 서로
對를 이루는 娛樂具로서는 생각되지 않는다. 副葬品收藏櫃內西便中央의 壺形漆器밑의 土器群위에서 출토 되었다.
土製小球159個: 黃褐色의 粘土를 가지고 表面이 밋밋한 지름 2cm가량의 경단처럼 만들었으며 굽지는 않았다.
金銅製三技裝飾冠帽의 帽部바로 밀에서 한 무더기로 出土되었다.다음은 황남대총 남분 상황이다.
바둑모양 잔돌 : 부곽에서 주로 고배 내에 담겨진 채 출토되었다. 모두 243개로 보통 직경이 1.0센티, 두께가 0.5센티 내외로
지금의 바둑돌 크기보다 작은 소형의 냇돌이다. 색상은 흑색, 백색, 회색 등 세 종류를 띠는데 실제로 바둑돌의 역할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인공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 채취한 것으로 보인다.47)
이를 종합하면 이들 바둑돌 모양 잔돌은 우선 모양으로 보면 환약 형태를 하고 있으며 크기는 1∼2㎝가 된다. 재료로 보면
잔돌류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흙으로 구워 만든 토제환도 섞여 있다. 수량은 수백 개에 달하며 색깔로는 흑·백·회색의 세
가지로 분류가 이루어 질 수 있다. 또 출토되는 양상을 보면 토기에 담겨져 있거나 토기류와 함께 출토가 된다. 이렇게
정리된 정보를 남경 상산 왕씨(王氏) 가족묘에서 확인되는 단약과 비교하면 비록 세부적인 차이는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으나 거의 똑같은 기본 모티브를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쉬운 것은 적석목곽분 출토 토제환에 대한 성분 분석이 시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약물 성분이 확인될 공산이 아주 크다고 하겠다.아마도 수은이나 유황류
약물 검출을 기대해 본다.적석목곽분 출토 소위 바둑돌 모양 잔돌들은 보고서가 밝히고 있듯이 자연적으로 연마 된 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약물 효과가 없는 자연석이건, 아니면 실제 약물 성분을 섞어 제조한 토제환이건
변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사자를 위한 일종의 단약으로 상징화된 철저히 사자를 위한 약물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들 바둑돌은 환단, 바로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바둑돌 모양 잔돌이 출토되는 곳은 비단 경주 지역 적석목곽묘에만 그치지 않는 듯하다. 이한상 교수 전언에
의하면 경남 합천의 옥전고분이나 다른 신라고분에서도 흙으로 만든 작은 바독돌 종류가 더러 출토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들 유물을 공기돌, 혹은 놀이도구로 보기도 하며, 彈丸(새총의 탄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첨언했다.
탄환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일 것은 앞서『포박자』에서 확인했듯이 환약을 실제로 탄환(彈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실제 신라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되는 환약들이 마치 그 모양이 탄환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은 여간 예사롭지
않다. 이 또한 바둑돌 모양 잔돌 및 토제환이 환단(丸丹) 그 자체이거나, 그 대용품이라는 강력한 방증자료가 된다.
④ “돌절구”: 선약 제조를 위한 막자사발
지금까지 고찰한 선약들과 관련해 또 하나 비상히 주목을 요하는 유물이 있다. 황남대총 남분 중에서도 주피장자를 안치한
주곽 안에서 출토된 소위 돌절구가 그것이다.이 유물에 대해 발굴보고서는“(주곽) 內槨北側壁쪽에 접하여”,“ 圓形의 돌절구
하나가 바로 놓여 있었고 절구 남쪽으로 절구공이가 떨어져 있었다. 돌절구에서 서쪽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 圓底長頸壺하나
가 石壇가운데에서 출토되었다. 이 圓底長頸壹는 입술이 동쪽을 향하고 누워 있었는데 파손된 곳 없는 完形이었다”고 출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이 돌절구와 봉대 세트는 주피장자 머리쪽 11시 방향에서 수습됐음을 알 수 있다.
이‘돌절구’를 필자는 2003년10월29일 국립경주박물관의 호의로 실견 할 수 있었던 바, 화강암을 연마해 이용한 것으로 군데
군데 붉은 색 물감으로 생각되는 물질이 뚜렷이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필자의 추정대로라면 이 붉은 물감 또한 틀림없이
주사일 것이다. 그렇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이것이 과연‘돌절구’인가를 해명해야 한다. 봉대와 세트로 출토된 이‘돌절구’는 돌절구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형이다. 눈대중으로 몸통 지름 20㎝ 안팎에 불과한 이‘돌절구’가 도대체 돌절구로 구실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설혹 이‘돌절구’로 곡물 같은 것을 빻는다고 한들 얼마나 빻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것이‘돌절구’가 아닐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돌절구’함몰부가 함유할 수 있는 용량이 용액 기준으로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일반적
인 자판기 종이 커피컵 1장 분량 물조차도 채우지 못할 정도다.하지만 실로 뜻밖에도 이러한‘돌절구’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도 사용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막자사발이라는 것이다. 국내 가장 대표적인 인터넷 백과사전인 네이버 백과사전이 제공
하는 막자사발(mortar)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고체시료를 분쇄하거나 혼합할 때 쓰는 사발. 유발(乳鉢)이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고대에도 안료나 곡식
등의 분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주로 마노(瑪瑙) ·자기(瓷器) ·유리 등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각각 같은 질의 막자
(막자사발과 함께쓰이는 방망이)와 함께 사용한다. 마노 또는 사파이어 ·알런덤 등으로 만든 것은 마멸하여 시료에 혼입될
우려가 없으므로, 암석이나 광물 등 단단한 시료를 분쇄하는 데 적합하다. 또, 도자기나 유리로 만든 것은 가루약의 조제를
비롯하여, 보통 시약의 분쇄 ·혼합에 적합하므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철 ·황동 ·구리 등으로 만든 금속제 막자사발은 운두가
상당히 깊어 짓찧어서 잘게 부수는 데 적합하며, 비교적 큰 것이 많다. 금속제 이외의 것은 대부분 지름이 5∼20 cm이다.
이와 같은 막자사발이 실제 주로 사용된 곳은 약제 제조용이라는 사실이다. 동양문화권의 경우 약제 제조용으로서의 막자
사발은 그 주된 사용처가 사악한 귀신을 쫓는 부적용 붉은 물감, 즉, 주사 제조용이다.48) 그러니 필자가 이 막자사발에서
그 흔적을 뚜렷이 확인한 잔존 물질인 붉은 물감은 주사일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셈이다. 이 잔존 붉은 물감에 대해서도
성분분석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유물이 막자사발임이 밝혀진 이상 봉대라는 유물 명칭 또한 막자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한편 황남대총 출토 이 막자사발과 거의 똑같은 유물이 역시 같은 국립경주박물관에 한 세트가 더 있으니 국은 이양선박사
기증 유물에 포함된 막자사발(공이 기준 길이 19.3㎝)이 그것이다. 이 유물에 대해 이 박물관이 2002년 5월에 펴낸 유물
안내서인『고고관』에서는 관련 사진과 함께 제시하면서‘조리구’로 분류하는 한편“열매를 까거나 빻는데 일반적으로 쓰였
으나 석기제작을 위한 망치 또는 안료를 부수어 가공하는 연모로도 쓰였을 것이다”고 하면서 기원전 6 - 4세기 청동기시대
유물로 보고 있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선약을 제조하던 적석목곽분 시대 신라 유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선약 제조용 막자사발을 황남대총은 왜 주피장자 머리맡에다가 두었을까? 죽어서 영원한 삶을 살라는
기원을 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영원불명, 영생불사의 도교신학이 이런 막자사발에서도 여실히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Ⅴ. 등선의 운반 도구
① 말과 마구류
지금까지 살핀 운모나 주사, 환약과 같은 선약이나 그러한 선약을 제조하기 위한 막자사발, 나아가 방중술이 대표하는 음양
오행사상이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제 언급하는 마구로 상징되는 말과 기린,
봉황, 비늘 있는 물고기, 신발류는 사자가 지상 혹은 육체를 떠나 천상에 올라 자유롭게 나돌아 다니기 위한 운반도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먼저 적석목곽분 출토 유물 중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구류를 살펴본다. 적석목곽분 수많은 출토
유물 중에서도 마구류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자주 지적되고 있거니와 그렇다면 여기서 드러나는 의문은 왜 이런
마구류를 신라인들은 사자와 함께 부장했는가 하는 점이다.49) 부장 풍습으로 보아 신라인들이 말에 어떤 의미를 담았음에
틀림이 없다. 말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말은 운반수단이다.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수단이 되는 동물이 바로
말이다. 이러한 말에 장착되었음이 분명한 각종 마구류가 무덤에서 출토된다 함은 단순한 부장풍습이 아니라 말로 대표되는
어떠한 상징성이 있다는 강력한 추정을 불러낸다. 마구류는 주검과 함께 묻었으니 당연히 주검을 위한 것이다. 말이 주검을
인도하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천상(天上)이다.
이런 점에서 이미 많은 이가 지목한 유물이 천마총 출토 소위 백화수피제 천마도 장니.이 천마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구현
하고자 한 동물이 말이 아니라 실은 기린이라는 주목할 만한 지적이 이재중에 의해 연이어 지적됐다.50) 필자는 이러한
지적이 충분히 타당하다고 보는 바이다. 이재중이 내세운 근거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우선 소위 천마도에서 뿔이
하나이며, 둘째, 장니로 쓰였음이 명백한 이런 천마도가 실은 쌍으로 출토됐으며, 그것은 기린이라는 동물이 원래는 봉황이
그렇듯이 암컷과 수컷을 동시에 아우른 명칭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더해 필자는 천마도가 장니에 새겨진 것임이 명백한
이상, 말 장식에 말 그림을 단다는 것도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소위 천마도는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지적에 더욱 공감한다.다만 이 자리에서는 그것이 천마인가 기린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또 기린은 말의 일종
으로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명확한 문헌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국시대에 완성된『시자』
(尸子)라는 문헌의 다음과 같은 일문에서 명확하다.
내가 백성을 얻어 다스리는 것은 말에 자연(紫燕)과 난지(蘭池)가 있고 말에 수기(秀麒)와 봉괴(逢괴)가 있고 말에 기린과
경준(徑駿)이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무엇이건 천마도가 묘사한 동물은 분명히 하늘을 나는 존재로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이 동물에
그려진 날개가 증명한다. 왜 하늘로 비상해야 하는가? 그보다는 이 동물이 하늘로 옮겨주고자 한 존재가 누구인가를 주목
해야 할 것이다. 좁게는 말을 탄 주인공이며, 넓게는 그 말탄 주인공은 천마총에 묻힌 주피장자일 것이니, 이러한 우화(羽化)
한 동물은 이 주피장자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이것은 주피장자를 등선(登仙)하는 신선으로
보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나아가 이러한 말(혹은 기린)이 등선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사상적 근원이 도교에 있음은
그 무수한 증거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찰 정도로 있다.
②시해선의 보증 수표 금동신발
같은 등선 도구라는 맥락에서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웬만한 규모의 적석목곽분이면 거의 예외 없이 출토되는 금동신발이다.
그것이 출토된 무덤으로 경주지역 적석목곽분만을 열거하면 황남대총 남·북분을 필두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식리총이
있다. 지방에서는 경산 임당6 A호분, 대구 달서5 1 - 2호분, 달서 5 5호분, 의성 탑리2곽, 양산 부부총 중 남성분 등지에서
확인됐다. 나아가 이들 적석목곽분과 동시대에 축조된 인근 문화권인 백제와 일본열도에서도 꽤 많은 사례가 확인된다.
신라의 금동신발 중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금관총, 천마총 유물은 T자 무늬를 투조하고 있고 황남대총 북분 출토 식리는
바닥에 약 30여 개 되는 금동 못을 박았다. 또 금관총 출토품은 바닥에 연꽃으로 생각되는 꽃무늬를 여러 송이 표현했으며
식리총 식리는 거북등무늬 속에 각종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 금동신발이 갖는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대부분 300㎜가 넘는 크기라든가 허약한 금동 못을 바닥에 박은 구조 등으로
보아 결코 생전 실용품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실용품이 아니라면 장례를 위해 특별 제작됐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를 통해 도대체 신라인들은 무슨 사상을 구현하고자 했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누구나 다 아는 신발의 원초적
기능을 다시금 음미해야 한다. 신발은 그 기능이 어디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거나〔步〕달리기〔走〕위한 도구이다. 또
이러한 신발을 명백히 사자(死者)를 위해 제작됐으니 무덤 속에 들어간 사자가 어디로 옮겨 다닌다는 사상을 구현하고자
했음 또한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신발의 상징성은 도대체 어떻게 구현되고 있으며 그러한 이동 도구
로서의 사자를 위한 신발 제작 전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두 말할 나위없이 그것이 등선을 위한 도구의 일종이며,
그러한 신발의 전통은 도교신학에서 유래했음은 소위 시해선(尸解仙)과 관련된 수많은 신화에서 확인된다.51)
도교와 밀접한 소위 지괴류(志怪類) 소설에는 사람이 죽어 매장을 했다가 나중에 보니 시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옷
가지라든가 신발 혹은 지팡이만 남았다는 신화가 무수히 기록돼 있는데 이렇게 육신과 유리되어 영혼이 자유롭게 된 신선을
시해선이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는 시체를 벗어난 신선이라는 뜻인데『포박자』에 의하면 신선의 여러 등급 가운데서도
시해선은 천선(天仙)·지선(地仙)에 이어 3등급으로 분류돼 있다(제2권논선<論仙> 참조) .52)
신발을 남기고 신선이 된다는 도교 신앙은 그 사례를 일일이 거론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데『열선전』을 보면 당장 노자와
함께 도교를 구축하는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황제(皇帝)가 죽어 교산(蛟山)이란 곳에 장사를 지낸 뒤에 산이 무너져 관이
드러났는데“시체는 없고 칼과 신발만 남아있었다”는 구절이 보이고 있다. 이는 신발이 등선을 위한 도구였다는 매우 분명한
증거가 된다. 시체는 없어지고 신발만 남았다 함은 신발이 등선을 위한 도구로서 구실을 끝냈음을 의미한다.
신라 적석목곽분 및 그 시대 주요 신라고분에서 많은 수가 확인되는 금동신발은 이러한 도교적인 맥락으로 접근해야만 그
의미가 비로소 풀린다. 이런 점에서 이들 신발이 첫째,재료가 금이 섞인 금동이며, 둘째, 거기에 투조 등의 방법으로 구현된
문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옥 및 은과 함께 그 자체 영원불멸하는 금속이라는 점에서 불로장생
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금속으로 인식됐으며 이러한 특성에서 그 자체 선약으로 널리 이용됐다. 따라서 이들 신발에 금이
사용된 것은 그 자체 영원불멸하다는 뜻을 아울러 내포했던 것이며 그것이 사자를 위한 장치임은 명백하다. 이러한 금의
특성은 신라 금관을 이해하는데도 결정적이다.또 이러한 금동신발이 구현한 문양으로 연꽃과 식리총에서 확인되는 거북등
무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것이 정말로 거북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거북이 신령스런 동물의 대명사임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연꽃 또한 불교 이전에 이미 동양문화권에서 도교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식물이요 선약의 재료였다. 이들
문양이 구현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사상은 영원불멸, 불로장생으로 수렴되는 것이며, 이것이 곧 도교신학의 가장 주된 주
축임은 새삼 덧붙임이 필요하지 않다.
③비늘 있는 생선 잉어 : 용의 아들〔龍子〕
이제 등선의 도구로서 상징으로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물고기 문양이다. 이 물고기가 무엇임을 밝힘으로써 그 사상적
연원까지도 접근하고자 한다.적석목곽분은 물론이고 이 시대 인근 다른 문화권에서도 물고기, 특히 비늘이 있는 물고기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어 이를 추동케 한 어떤 공통적 문화기반을 느끼게 한다.적석목곽분에만 초점을 맞춰 관련 유물을
적시하면,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허리띠와 동북분 출토 금허리띠 금관총 출토 금허리띠 서봉총 출토 금허리띠가 있다. 이
외에도 더욱 많으나 논의 전개에는 이만으로 충분하다.
이들 물고기 문양은 무엇보다 한결같이 비늘〔鱗〕을 뚜렷이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물고기가 과연 무엇인가를
추정하는데 있어 사실 이 비늘 문양은 결정적인 가늠자 구실을 한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당연히 검토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데 이들 유물에 표현된 문양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 종류는 더욱 좁힐 수 있으니 붕어 아니면 잉어류라는 사실이다. 필자가
비록 어류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문양만 보면 붕어 잉어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붕어라고 하기에는 우선 붕어
라는 물고기 자체가 너무 작을뿐더러 이 물고기가 무덤 장식품 혹은 금제 허리띠 등의 장식물로 쓰였음 직한 추정을 뒷받침
하는 근거를 민속학적이나 문헌적으로도 찾아내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하지만 이것이 잉어라고 할 때는 상황은 딴 판이 된다.
다른 무엇보다 잉어가 그 자체 신물 혹은 영물로 인식됐으며 그 때문인지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문화권만 해도 떡판과
다식판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흔적에서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5 3 )
그렇다면 적석목곽분에서 확인되는 이들 물고기가 잉어라고 할 때 그것이 지니는 상징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물로서의
잉어라고 할 때 한국인이 가장 널리 떠올리게 되는 상념은 아마도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해 잉어를 잡아다가
약으로 끓어드렸더니 무사 쾌유했다는 각종 민담일 것이다. 실제 이와 같은 잉어담은 무수하게 포진돼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잉어에 얽힌 영력은 그 출전이 어디인가?
잉어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일종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데 이러한 수중 동물 중
에서도 잉어는 거북 혹은 자라와 함께 도교신학에서는 대표적인 영물로 취급되고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잉어가 용자
(龍子), 즉 용의 아들로 생각됐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이에 더해 잉어는 그것을 잡는 이에게는 각종 영력을 넣어
주는 영물로 기능하고 있으니, 잡은 잉어 뱃속을 갈랐더니 미래를 예견하는 부적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신선설화 등에
많이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잉어는 용의 아들이기 때문에 용·학·봉황 등과 함께 등선하는 도구로 인식되는
광범위한 도교신학을 낳게 된다.54)
이 시점에서 이제 자연 봉황이나 용이 갖는 특성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이들은 신라 적석목곽분 출토 각종
유물에서 일일이 그러한 사례를 지적하기 힘들 만큼 많은 실례를 보이기 때문이다. 봉황이란 무엇인가?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새의 일종이다. 새이니 그것이 갖는 가장 주된 특징은 자유롭게 천상과 지상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봉황이 도교신학에서 다른 신수들과 함께 신선이 가장 자주 애용하는 동물로 언급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봉황이 갖는 우화이등선 도구로서의 특성은 이미 굴원의『초사』(楚辭)에서 보이며(이소<離騷>), 저 유명한『장자』
소요유 편에 보이는 붕(鵬)이란 새 또한 그것이 봉황이라는 점에서 그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 뒤로 봉황은 도가류
문헌에서는 승선물(陞仙物)로서 그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있다.이러한 봉황에 대한 관념은 사실 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흔히 물과 비를 불러 오는 주술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 용 또한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리는 존재였으며, 그렇기에
각종 신선 설화에서 용은 승선을 도와주는 동물 중 대표주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광개토왕 비문이다. 비문은 고구려 건국시조를 추모왕(鄒牟王)의 죽음을‘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즉“세위를 즐겨하지
않으시자, 하늘이 황룡을 아래로 보내시어 왕을 맞이해 갔다”고 표현하고 있는 바, 이것이 도교신학의 용 모티브를 이용
했다는 일대 증거가 된다. 이와 똑같은 모티브가 실은『열선전』에도 보이거니와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70여 신선 중
마사황(馬師皇)이 등선하는 과정을‘龍負皇而去’, 즉“용이 (마사)황을 등에 지고 갔다”고 표현하고 있다.앞서 광개토왕비에
도교신학이 짙게 투영돼 있다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등선물로서의 용이 활용된다는 사실이었다.55)
Ⅵ. 금·은·옥 : 불사향의 표징
신라 적석목곽분은 그 전대 혹은 그 후대 한반도 무덤과 비교해 여러 가지 획기를 이루거니와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금과 은과 옥과 같은 귀금속류의‘복합적이면서도 다량 부장’이라 할 것이다. 이들 귀금속류 중에서도 옥만큼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흔적이 보이기는 하나 금과 은만큼은 적석목곽분의 발명품이라고 해야 할 만큼 시대에 장례용품
으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음은 긴 설명이 요치 않는다.금과 은을 부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금과 은을 부장케 하는
새로운 매장풍습 혹은 그것을 뒷받침한 새로운 사상의 도입을 의미하며 나아가 그렇다면 그것을 초래케 한 습속은 뿌리가
어디인가를 궁구해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금은 세공술을 언제 발명하게 되었는가
라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신라인들이 언제부터 금은세공술을 가하기 시작했건 말건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금·은
세공품을 적석목곽분 단계에 와서 비로소 무덤에 다량으로 부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56)
이에 그 계기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강구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 이전 시대에 보이지 않던 금·은·옥의 부장
습속이 어느 시대에 일순간에 너무도 뚜렷하게 감지된다면 필시도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적석목곽분 시대 이러한 문화를 만개케 했는가? 금·은·옥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활개를 친다면 우리의 작업은
궁색해 지지만 적석목곽분 발굴성과를 중시할 때 이들 세 가지 귀금속은 마치 세트를 이루듯이 동시에 그 문화를 만개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금과 은과 옥은 과연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다시 우리는 도가 혹은 신선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금·은·옥은 하나같이 도교신학(특히『포박자』
금단<金丹> 편)에서 앞서 든 주사, 운모 등과 함께 선약 중에서도 상약(上藥)으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약이기
때문에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이들 금속류는 벽사성(邪性) 또한 두드러지게 관찰된다.5 7 ) 다시 말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성이 개입됐던 것이며 나아가 금·은·옥은 그 자체가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의 표상, 그 자체이기도 했다.
도교신학에서 금·은·옥은 우선 그 자체 영원불멸하는 광물질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곧 인간사로 확대되어 이러한
광물질을 복용하거나 소지하면 그 사람도 영원 불사한다는 관념을 낳는데 이르렀다. 이와 같은 신앙은 그 역사가 대단히
깊어『춘추좌씨전』소공(昭公) 12년 조에 인용된『시경』에서 탈락된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에서 확인된다.
“ 온화하신기초님/밝고덕스런음성/우리왕의법도생각함이/금과옥처럼견고하시네(式如玉式如金) /백성을 살려주기만
힘쓰시며/취하고 배부를 마음 없으시네”.
여기서 분명히 금과 옥은 견고함의 대명사적 존재로 설정이 돼 있다. 이 때문인지 금·은·옥은 앞서 잠깐 지적했듯이 주사나
운모처럼 가장 중요한 선약 재료 중 하나로 간주됐다. 『포박자』에서는 특히 금의 경우는 주사와 함께 금단(金丹)이라 해서
선약의 양대 최고봉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 금속은 요즘도 한방에서는 약재 따위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 때문인지 불사의 신선들이 산다는 신선향은 예외 없이 금·은·옥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신화를 양산하게 된다.
전국시대 문헌인『열자』를 보면 이미 금·은으로 건물을 꾸미고 몸에는 주옥(珠玉)을 걸친 마법사의 구름 속 궁전이 묘사
되고 있다(제3편 周穆王)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신선향의 양대 산맥은 동쪽의 봉래산을 필두로 한 방장 영주의 3신산
(三神山)과 그 반대편 서쪽의 곤륜산. 이들 두 신산(神山)은 금·은·옥 그 자체의 궁전이라 할 만한 곳으로 각종 문헌에 기록
되고 있다. 전국시대에 이미 발해만 연안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신선사상에서는 저 동쪽 바다 발해(渤海) 가운데에
봉래·방장·영주의 3신산이 있으며 그곳은 금·은·옥으로 덮여 있으며, 죽지 않는 신선향으로 상상되었다. 그러한 흔적은
사마천의『사기』봉선서와 진시황본기 및 효무본기에 너무나 빈번히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동쪽 삼신산 신앙에 견주어 서쪽에도 곤륜산이라 일컫는 신선향이 있다는 신화를 낳게 되었으니 전국시대에 완성
됐음이 분명한『목천자전』(穆天子傳)은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쪽 끝 곤륜산(崑崙山)으로 서왕모(西王母)라는 곤륜산
최고여신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을 마치 편년체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상제(上帝)가 지상해 머무는 곳이라는58)
이러한 곤륜산 역시 금·은·옥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라사회에서 적석목곽분 단계를 특징지우고 있는 금과 은과 옥 종류의 복합적 다량 부장 풍습 또한 이러한 도가의 신선향
신앙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왕 혹은 그에 준하는 유력 지배자들을 묻었음이 확실한 이들
적석목곽분에서 주피장자들은 머리 끈부터 발끝까지 금과 은과 옥에 치장돼 있지 않은 곳이 없다시피 하다. 이를 통해 과연
신라인들은 무엇을 구현하고자 했을까? 두말 할 나위 없이 영생불사,영원불멸의 신화를 꿈 꾼 것이며, 그러한 꿈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 의도가 바로 사자를 위해 온통 장송해서 보낸 각종 귀금속류 치장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규모 적석목곽분이면 예외 없이 꽤 많은 수량으로 검출되는 금 및 은 그릇은 이들 무덤에 투영된 신라왕국
의 신선들의 그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자료가 된다. 물론 이들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이 왕 혹은 그에 준하는 당시
신라 최고 지배 계층 일원으로 생각되는 만큼, 또, 이런 소위 고급 용기가 경주라는 특정 지역에 편중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 특권층만이 신분과 혈통의 존귀함을 나타내기 위해 전유한 위신재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면적인 설명만
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 외에 어떠한 관념이 이들 귀금속제 용기에 투영돼 있는지를 궁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에 소개하는『사기』효무본기 한 대목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속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
인지를 가늠하는데 결정적이다. 효무제, 즉 한 무제를 농락한 방사 이소군(李少君)이라는 자의 행적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이 때 이소군(李少君)도 사조(祠조), 곡도(穀道)와 불로장생하는 방술로써 천자를 알현하자,천자는 그를 매우 정중하게
대접했다.…이소군이 천자에게 이르기를“부엌신에게 제사지내면 신물(神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물을 얻으면 단사(丹砂)
를 이용해 황금을 제련할 수 있으며,황금을 제련한 다음에 그것을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면 장수할 수 있습니다.
장수하게 되면 바다에 떠 있는 봉래도(蓬萊島)의 선인을 만날 수 있으며, 선인을 만나 천지에 제사 지내면 불로장생할 수
있습니다. 황제께서도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이전에 신은 바다에서 놀다가 안기생(安期生)을 만났습니다. 그가 신에게
대추를 먹으라고 주었는데 그 대추는 크기가 참외만큼 컸습니다. 안기생은 선인이어서 봉래의 선경을 왕래할 수 있는데 만약
천자께서 그와 마음이 통하면 그가 모습을 나타낼 것이지만, 통하지 않으면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천자는 몸소 부엌신에 제사를 지내고 방사를 파견해 바다로 들어가 안기생과 같은 선인을 찾게 했으며, 동시에 단사
등 각종 약물을 사용해 황금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소군이 병사하자 천자는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이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 인용문에서도 대단히 유념할 것이 이소군이 효무제에게“황금을 제련한 다음에 그것을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 사용
하면 장수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꼬드기고 있는 장면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저 적석목곽분에서 금 혹은 은 혹은 금동
으로 제작한 그릇류가 출토되어야만 하는 까닭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라의 왕 혹은 유력 지배자들 또한 이소군이 지녔던
신념처럼 이들 영원 불멸하는 금속으로 그릇을 만들어 그곳에 음식을 담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앞서 다룬 바 있는 금동신발도 이와 거의 똑같은 맥락적 영생불사 사상이 투영돼 있을것임을 엿볼 수 있다. 금그릇이 그랬
듯이 금박을 입힌 금동신발을 신으면 그것을 신은 자는 불로장생하며, 그래서 저 불사향이라는 봉래산에 이를 수 있는 것
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Ⅶ. 도교의 제자리 찾기를 위하여
신라 적석목곽분 검토에서 증명되었듯이 도교는 중국은 물론이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제1
의 종교였다. 굳이 그 위상을 말하건대 국교(國敎)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도교는 원시신앙, 한국 고유신앙, 한국적 샤머니즘
등의 이름으로 외래사상에 물들지 않은 한국고유의 전통사상이라고 해서 어울리지 않는 호적 편제가 이뤄졌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도교가 포섭된 한국 고유신앙은 다른 한편에서는 선진 외래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에 타파되고 극복되어야 할
미신과 원시신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혹자는 설혹 이러한 한반도 전통문화의 주된 기층 토대가 도교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도교라고 다 똑같은 도교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에 따른다면 한반도 도교는 한국적 도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하나
마나한 지적일 수도있다. 그 기원이 어디에 있건 신라에 안착한 도교는 신라식 도교인 것이며 그래서 중국도교와는 다르고
또 일본열도 도교와는 또 다르다.삼국시대만 해도 같은 도교사상에 뿌리를 둔 것임에 분명한데도 그것이 구현하는 세계는
달랐다.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로 도교 사상이 짙게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신라의 경우에는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또 사제라고 할 수 있는 도사만 해도 신라에서는 원화(源花) 혹은 풍월주(風月主) 혹은 국선
(國仙)이라 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정된 지면을 통해 신라적석목곽분에서 관찰되는 도교적 전통 요소들을 짚어나가는 데만도 버거움을
느꼈다. 또 지금까지 언급한 도교의 전통은 그 하나하나가 심대한 고찰을 요하고 있으며, 특히 운모와 주사는 단행본 한두 권
으로도 논의가 모자랄 판이다. 아울러 도교적 전통임이 명백하지만 소위 옥충(玉蟲)이라고 일컫는 비단벌레59)와 선약의
재료이기도 한 백화수피(白樺樹皮. 자작나무 껍질), 그리고 도가에서 가장 중요한 신기(神器)요 신물(神物)인 검(劍)과 경
(鏡), 나아가 금관과 금동관에 대해서는 아예 고찰 자체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다뤄야 할 것보다 그러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또 필자가 미쳐 밝혀내지 못한 도교적 전통들이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더욱 득실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그 무렵 신라에는 도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그것은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저 운모와 주사, 이들 단 두 종류의 선약만
으로도 증명은 충분하다고 본다. 이 외에도 적석목곽분을 화려 찬란하게 장식하는 금과 은과 옥 또한 주사,운모와 함께
최고급 선약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신라 적석목곽분은 선약 투성이인 셈이다. 그러니 신라는 신선들의 왕국
이었고, 도교의 사회였다.
(위 글은 우리역사문화연 에서 가져와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