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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24절기중에 있는 大暑는 소서와 입추 사이에 있는 절기로서 년중 가장 무더운 날입니다.
옛 선조들께서는 대서기간을 5일씩 끊어 3候라 불렀습니다. 썩은 풀이 화(火)하여 반딧불이 되어 밤하늘을 날아 다니는 모습을
제1후라 하였고 흙이 습하고 무더위가 지속되는 시기를 제2후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요란한 뇌성번개와 함께 많은 비가 오는 것을
제3후라 부르며 모든 것을 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절기가 시작되는 하루전 야고바 트레커들은 트레킹 계획대로 상봉역에 모였습니다. 7호선이 중심역인 상봉역은 다양한 지역으로 운행하는 역의 시종점입니다. 이곳에서 경춘선이 출발하고 중앙선도 이곳으로
지나가는 중요한 환승역입니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전철 출발시간은 자주 5분 정도 범위내에서 변경되곤 하는 것이 지방으로
운행되는 전철 출발시간입니다. 7시 50분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집을 출발하여 상봉역 7호선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환승역으로 가기 위하여 에스컬레이터 앞에 차례줄을 선 순간 바로 앞 Back-pack이 무척 낮이 익었습니다. 이국희 모니카회장님이셨습니다. 왜? 일찍 나오셨습니까! 하는 말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경춘선 출발 승강장으로 올라가시도록 한 후 저는 경춘선 과 중앙선으로 갈라지는 로비에 서서 야고바형제들을 기다렸습니다. 항상 이 지점은 많은 유동인구로 붐비는 곳입니다.
오시는 형제들과 인사를 나누며 손으로 방향을 정하여 경춘선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김성곤요셉, 김연옥 골롬바 형제,자매님과
김종식 파스칼형제님, 유남수 헬레나 자매님께서는 사전 개인사정에 의하여 불참석 하신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황영진세레자요한, 장숙인안젤라 형제 자매님께서 오셔서 세례자요한 형제님과 함께 안내를 하다 경춘선 승강장으로 올라 갔습니다. 제1진은 이미 남춘천역으로 따나셨으며 차 한대를 그냥 다시보낸 후 착오로 반대방향으로 가셨다가 다시 상봉역으로 오시느냐 조금 시간이 지체된 자매님을 위해 다음차량을..... 그렇게 모두 모여 남춘천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모두 착석하셨을까? 하는 염려에서 타신 차량을 순검한 결과 !00%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젊은날 각자 한 두번 MT, CAMPING, 등산 등등으로 다녀갔던 곳이 바로 경춘선 주변에 산재해 있는 지역입니다. 대성리, 청평, 가평의 남이섬, 강촌 등등은 옛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옛 추억 회상속에 꿈같은 기억의 저편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의 젊은날의 아름다운 초상을 다시 꺼낸 후 어루만지는 순간
열차는 남춘천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오신 야고바트레커들과 조우, 반갑고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악수하고 인사한 후 저는 다음일에 대하여 골몰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역앞에서 12번, 또는 12-1번 버스로 갈아 타고 소양강선착장으로 가야 하는데.. 왕복 교통비와 서서 갈지 모르는 고단함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꾀를 내어 춘천 닭갈비 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조명애 사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가는 교통편 제공을 요구하고 대신 귀경전 저녁식사를 하는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총무님께서 50,000원을 예약금으로 지불하고 오늘 참석하신 22명은 봉고차와 승용차를 이용하여 소양강으로 향했습니다.
오고 가는 대중버스 교통비를 제외하면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경제적 논리와 이동성에 대한 편리함을
추구한 것 입니다.
갈수기도 아닌데? 소양강 수위는 만수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은 태풍의 영향이나 장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는군요
65% 정도의 담수율! 소양강 수위를 보는 순간 마음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소양강 땜으로 수로가 막혔지만 옛적 이 지역 풍광은 서정과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녔던 곳이었습니다. 거대한 댐공사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졌지만.......
일반적으로 댐공사를 말하면 철근콘크리트 공사를 말하지만 소양강댐은 돌과 흙으로 쌓아 막은 댐으로 토목공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댐입니다. 당시 댐을 공사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일본업체에 견적을 의뢰하였으나 엄청난 비용을 요구한 일본업체를 대신하여 현대건설 정주영회장께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일본업체가 제시한 금액의 50%도 안되는 금액으로 공사를 완료하겠다고 시방,견적서를 제출합니다. 이에 대통령은 건설부장관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한 후 끝까지 정회장을 신뢰하며 공사를 발주시킵니다. 경부고속도로 이어서 또 하나의 거대한 국책사업이 시행되고 착오없이 완성되어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만성적인 전력부족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해 준 댐이 바로 소양강댐입니다.
춘천은 화천, 가평, 홍천, 인제군에 둘러 쌓여 있는 봉래산을 중심으로 분지에 놓여 있는 도농이 혼재되어 있는 도시입니다.
춘천하면 문향의 도시이기도합니다. 춘천(春川)이란 도시의 명칭은 이름 그대로 봄을 뜻하고 있습니다. 봄은 물길 따라 다가 옵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던 김유정 작가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봄봄으로 뽑습니다. 강원도내에서 제일먼저 봄이 오는
고장이 춘천입니다. 댐의 고장이기도 한 춘천은 춘천, 의암, 소양댐을 품고 있어 현재는 호반의 도시로 자리를 잡게됩니다.
수면위로 뱃길이 열리면 물의 포말이 일고 이어서 파문이 강기슭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 모습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마음에 조심성에 대하여 깨닫습니다.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을 치게됩니다. 요동의 실체는 대부분 이기심과 욕심과 욕망 등등 자신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 그 중심에 사부님의 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에 평소 생각입니다. 가난, 겸손, 단순이라는 단어를 하루 4번만(아침,점심,저녁, 자기전) 되뇌여도 자신을 조심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끝에 배는 선착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선착장에서 숲그늘까지는 약 1.5km 가량은
황량한 흙 길입니다. 오늘같은 날은 황토길 위로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서둘러 황토길을 부지런히 걸어 올랐습니다.
일행들은 산문 밖에 일단 멈춰섰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의 전례지만, 불교나 가톨릭은 의식의 전례를 중요시 하는 종교입니다.
불가에서 배치한 가람을 눈여겨 보면 속과 성의 경계는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세속의 마음가짐에서 성의 마음가짐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런 연유로 일주문이 서 있는 곳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습니다. 세속의 온갖 잡념과 잡스런 일을
씻어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문밖에서 야고바트레커들은 시작기도를 드린 후 트레킹을 시작하였습니다.
산문 안에서 시작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합당한 불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른 시간인 관계로
한적한 숲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숲길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와 나뭇잎 사이로 찿아드는 자연의빛과
풀벌레 소리는 재속에서부터 담고 온 온갖상념들을 씻어내기에 족했습니다. 아홉개의 물줄기 때문에 생긴다는 물소리가 각기 다르게 들린다하여 붙여진 폭포이름은 바로 구성폭포입니다.구성폭포밑에 서서 손을 담그고 손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에 대고 목에 거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시원한 청량감은 산문에 들어 물가에 접근한 자만의 느낄 수 있는 여름 호사였습니다.
양재구역 자매님들, 이국희 모니카 회장님, 야고바트레커 총무님을 모시고 구성폭포를 등지고 기념촬영을... 양손의 V가
야고바형제회는 항상 불의를 이긴다는 심오한 표현인듯하여 즐거웠습니다.
이어서 방배2 구역장님과 평의회 회계님을 모시고 또 한번의 기념촬영을........
구성폭포 언덕을 넘으면 고려시대 유명한 정원이 나옵니다. 고려정원이라 부르기도하지만 문수정원이라 하기도 합니다.
아주 오랜된 누각이 있고 그 옆에 템플스데이드를 위한 수련원을 건축해 놓아 고려정원의 정취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연못은 계곡쪽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지(南池)라 부르기도 하는 연못과 이 전체 정원을 꾸민사람은 고려시대 이자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연못의 남북 길이는 19.5m이며 북쪽 연못 안 길이는16m인 반면 남쪽 연못 안 길이는 11.7m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앞으로 돌 하나를 박아 놓았습니다. 이자현은 왜 연못의 한 길이를 짧게하고 돌을 박아 놓았을까요? 그것은 이자현이
원근법을 염두에 두고 연못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연못 남쪽에 박아 놓은 연못 앞에 서서 연못을 관찰해 보면 연못은 분명
정방형으로 보입니다. 또한 연못 중앙에 일자로 박아 놓은 돌 세개는 삼신산을 뜻하기 위하여 박아 놓은 돌입니다.
그리고 이 연못에는 3km 후방에 있는 오봉산 문수봉이 물위에 떠 오릅니다. 지금은 각종 수목이 자라서 오봉산의 잔영을 볼 수 없지만 이자현은 그렇게 설계를 한 것입니다. 문수정원 즉 고려정원은 구성폭포부터 청평사와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해탈문까지 아우러 정원을 꾸며습니다. 자연적인 산세와 계곡과 담, 폭포, 암자,부도,누각, 연못, 숲 등등
모든 자연을 품에 안아 꾸민 곳이 바로 고려정원 즉 문수정원 인 것입니다. 그래 이곳은 고려왕족들의 별장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아름다움도 6.25동란 때 전소됩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복원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트레킹 후담으로 들려 드리는 이유는 현장에서 많은 설명은 혼란을 부추킬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후담으로 정리하여 다녀 오신 곳을 정리하시는 시간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 연지의 시작으로 절 집으로 드는 곳에 연못을 만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바로 이 연지가 절집의 연지 효시가 되는
것입니다. 연지에 사는 물고기와 심어진 물갈대와 수련을 구경한 후그 옆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숲향이 기분좋게 흐르고 그 옆으로 맑은 계곡물이 소란스럽거나 요란하지 않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울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국희 글라라 회장께서 일등으로 신을 벗고 물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바 마스코드 조용준군이 지팡이들고 가재를 잡는
다고 열을 내고 조신하게 바위밑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 계곡 또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계곡에 이자현의 정원꾸미기 일한으로
탄생된 정원의 일부입니다. 연못은 인공적 못이라면 이곳은 자연생태적 못의 역활을 하는 계곡물입니다. 여물목을 전부 거두어
물의 흐름에 소리가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숲길 따라 계곡물따라 이자현은 고려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왕족과 혼사를 맺고
높은 관직에 오르고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왕사도 배출하고 가문의 여러 여인들은 왕비로 간택되기도 한 명문가의 후손인
이자현은 스스로 관직을 버립니다. 사랑하던 아내와 사멸이 그 원인이기도하였지만 사실을 점점 세속화해 가는 불가속사정과
정권다툼의 비정한 현실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자현은 1068년경 선친 이의께서 만들어 놓으셨던 보현원이 있던 이곳을 찾아옵니다. 이곳에 근거를 만든 이자현은 베옷을 입고 산채만 먹으며 생활하면서 고려정원(문수정원)을 만들어 나갑니다. 혼신을 다해
자연과 벗이되어 구도자 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아껴던 예종은 예물을 보내고 사신을 보내어 입궐을 권하지만 매번
거절하면서 구도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불가에서 유명한 능엄경도 이자현의 마음속에서 익은 경이되어 그 유명세를 타게된 것입니다. 도적때와 이리때가 혼재되어 있던 이곳이 이자현이 거처를 자리잡고 살면서 평정되어다 하여 얻어진 이름이 바로 청평이란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산이름을 청평산이라하였고 사찰은 문수원이라 짓고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조 명종때 보우선사가 청평사로 이름을 바꿨으나 6.25 동란때 전소되는 비운을 ... 70,80,90년에 걸쳐 중창불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게된 것입니다.
이자현의 삶이 어찌보면 우리들의 사부님과 흡사한 면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속내가 있기에 7월 무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고려정원을 선택한 것입니다. 만약 이자현이 세속을 버리지 않았다면 국정 농단끝에 난을 일으켜 죽음을 당한 이자겸의 운명처럼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트레킹내내 떨치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인척사람으로서 참으로 대비되는 사람이 이자현과 이자겸입니다. 물욕과 무욕의 차이는 실로 엄천난 것입니다.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챙겨습니다.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 기도를 드린 후 함께 나누었습니다.
형제님들은 복분자. 매실주, 오미자주를 반주로 곁들이며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자매님들은 물가로 나오시고 아직 식사와 담소가 끝나지 안은 자매님들은 아직도 점심 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이 순간 물속에 난데없이 커다란 물고기가 나타났습니다. 산천어가 아닌가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 어종은 송어같습니다.
꽁지 지느러미에 상처가 난 이녀석은 상류로 오르려고 무척 애를썼습니다. 배가 무척 부풀어 오른것을 본다면 그 녀석은 산란을
하기 위하여 산란처를 찾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용준이가 제일 신바람 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매님들도 온통 관심은 물고기 향방에 쏠려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쏘다니는 물고기는 충분한 관심 대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른 장단지 만한 검은빛 물고기를 이런 산골 계곡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절 집에 가면은 바람따라 흔들리는 풍경이 추녀끝에 달려 있습니다. 고요한 산사 마루끝에 한가롭게 앉아 숲을 스치고 떠 달아나는 바람소리를 느낄 무렵 바람의 추임새로 작은 종 추에 달려 나오는 풍경소리는
신심을 정리하는 곳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풍경끝에 달린 것이 바로 물고기랍니다. 왜? 풍경에 물고기를 달아 놓았을까?
그 이유는? 물고기는 눈껍풀이 없습니다. 눈을 감을 수 있는 방법이 물고기에는 없답니다. 구도자는 항상 세속적인 모든 사항들을
경계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눈을 지니고 그 눈은 항상 뜨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불가에서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맑고 밝은 진리와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라는 교훈에서 풍경속에 물고기를 걸어 두는 것입니다.
상류로 오르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던 물고기는 하류를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용준이가 물고기의 배를 움켜 잡아봅니다. 그 단단함이 돌같다 하더군요 이 이야기는 황영진 요한세례자 형제님께서 들려 주셨습니다.
스르르 미끄럼 타듯 하류로 사라지는 물고기를 보며 배웅하는 야고바 형제와 자매님들이셨습니다.
이곳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해탈문입니다. 이곳까지가 고려정원 즉 문수정원입니다.
분홍빛 범꼬리가 만개된 풀섶에는 개망초 흰꽃도 지천으로 피어 있어 숲을 찾은 산객들에게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습니다.
장화숙 세실리아 자매님께서 물 한컵으로 숨고르기를 하시는 중이십니다. 적멸보궁 아래에서 다시 청평사로 회귀하였습니다.
계획한 일정에 맞추기 위한 회귀였습니다.
그리고 청평사 경내에 들어 절내부를 구경한 후 단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회전문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청평사는 다른 가람과 달리 일주문을 회전문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윤회사상과 관련된 듯 합니다.
함께 모여 단체 사진을 찍은 후 하산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성폭포를 다시 한번 구경하고
여름열기로 가득한 소양강 선착장으로 가는 길을 걷는 야고바트레커....
저 숲 가운데 보이는 흰점 바위 안 계곡은 부용계곡입니다. 청평사는 좌측 안부 계곡안에 있습니다.
선박 후미에 앉아 계신 야고바 트레커 모습입니다. 무더운 날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주 몰래 찍었습니다. 총무님과 글라라자매님 이십니다. 소양호수를 바라 보시는 모습에서 망중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착장에서 배에 오르기전 아침 예약을 한 식당에 전화를 걸어 차편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면서 잠시 얼음골 같은
공간에 앉아 피서를 즐겼습니다. 밀양 얼음골과 비교되는 그 시원함~~ 무더운 날 참으로 요긴했습니다.
그리고 차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후 소양강댐 정상에서 차를 기다리다. 차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여 야고바트레킹과 관련된
총무님의 회계보고와 이회장님의 포르치운쿨라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포르치운쿨라 트레킹에 도시락비용으로 야고바트레킹에서 20만원 지원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이어서 식사전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감사함을 전해 올린 후 닭갈비와 막국수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무더운 여름의 정점인 대서를 하루 앞둔
토요일 7월 트레킹은 아름다운 고려정원에서 형제적 친교를 나누며 소일하고 계곡물에 온 몸을 적시며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소통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한 하루에 대하여 미소로서 되새기며 참여하신 야고바 트레커들과 야고바 모든 형제
자매님들에게 감사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평화를 나누겠습니다. 8월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