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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梔子) 예찬
촉촉하게 가을비 내린다. 입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겨울비가 맞겠다. 아파트 뜨락에 심어진 개량 마가목, 단풍나무 잎들은 밤새 심한 바람에 떨어져 빗물에 젖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언제 보아도 쓸쓸하다. 자연의 이치이자 섭리임에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느낌은 여러 가지다. 올가을도 여름처럼 따뜻한 가을이었다.
국화를 좋아하는 이웃이 아직도 제대로 된 국화는 나오지 않았단다. 지금 화원에서 팔고 있는 국화는 전부 온실에서 겨울잠을 재운 국화라 하며 언제 제대로 된 겨울이 올지 모른다며 만날 때마다 혀를 껄껄 찬다.
11월 기온 치고는 역대급으로 따뜻하다고 하니 이번 비가 끝나고 나면 제대로 된 겨울 날씨로 변할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한 잔의 치자(梔子) 차가 그립다.
1985년에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香水)라는 소설을 며칠째 읽고 있다.
20년도 전에 사다가 읽지 않고 서가에 던져두었던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조금 단순하다. 어느 평론가가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 중 하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을이 주는 고립과 쓸쓸함을 다스리기 일환이다.
당연히 여행이나 책 읽기를 통해서 저 혼자 왔다 급하게 멀어져 가는 가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방법이 책 속에 있을까 하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향수(香水)는 냄새에 관한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향기로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 쥐스킨트는 일상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냄새와 18세기 향수의 향기를 교묘하고도 아름답게 작품 속에서 결합시켜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고 그 환상이 종국적으로 어떤 멸망 과정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소설 향수(香水)는 기이하고 섬뜩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 동경하던 향수 재료를 백과 사전식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치열한 자료수집 정신을 보는 것 같아 배울 점이 많다.
치자(梔子) 열매 이야기를 하면서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장황하게 끌고 온 이유는 치자(梔子) 꽃향기 때문이다.
향수(香水) 소설 속에는 4월에 피는 금작화나 오렌지 꽃향기는 물론 장미나 백합 등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향기 식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7월의 꽃, 치자는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에 치자(梔子) 꽃이 피는지 알 수도 없으려니와 당연히 없으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소설 속에서 치자 꽃향기를 찾은 이유는, 세상 그 어느 꽃 보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가지고 있는 것이 치자 꽃이라 한 번쯤 언급되기를 바라서다.
한여름 치자(梔子) 꽃향기는 순결하면서도 농염하다. 한참을 맡고 있으면 관능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꽃말이 순결과 한없는 즐거움이라 하는데 무더운 여름밤의 몽환적 그리움이라 할 만하다.
습한 여름에 피는 순백색 치자(梔子) 꽃은 시들 때쯤이면 누렇게 변색이 되다가 이내 사라진다. 하얀 것들이 세상을 하직할 때 누렇게 색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비애다. 장미도 백합도 시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꽃이 시들고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알곡만이다.
어릴 적 고향 집 장독간 옆 꽃밭에는 제법 큰 치자나무가 있었다. 치자(梔子) 꽃이 피면 향기에 끌린 벌이나 나비는 물론 진딧물 같은 곤충이 진을 치고 살았다.
누렇게 변한 꽃이 떨어지고 푸른 종 모양으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시커멓게 몰려드는 진딧물에 할머니는 애달파 하셨다.
잦은 여름비와 건조한 가을을 힘겹게 이겨낸 치자는 첫서리가 내리면 진분홍으로 변한 열매를 가지가 꺾이지 않게 조심히 대바구니에 따서 모았다.
치자가 꾸덕꾸덕 어느 정도 마르면 굵은 무명실에 스무 개 정도를 한 타래로 꿰어 겨우내 골바람이 오가는 처마 밑 작은방 모퉁이에 걸어 두었다.
치자(梔子)는 쓰임새가 많았다. 삼베나 모시를 노랗게 물들일 때나 명절 및 제사 전을 부칠 때도 미리 담가 만든 노란 치자 물 전을 부쳤다.
특히 노란 치자 물에 밀가루를 풀어 겉을 입힌 가자미 전은 색깔도 예쁘지만 향긋하고 고소하여 생선 비린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치자 몇 개를 맑은 물에 담가두면 마치 마법처럼 순한 노란색 물이 천천히 뿜어져 나온다. 차갑게도 청결하게도 느껴지는 오묘한 색깔이다.
요즘 들어 치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그 효능도 새롭게 알려지고 있다. 치자는 플라노보이드 성분이 풍부하여 기관지 보호와 소염작용으로 염증 및 질환을 개선하고 열매를 끓여 마시면 감기 예방은 물론 소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간 기능을 도와 해독작용과 함께 노란 색소에 함유된 크록신과 크로세틴 성분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피를 맑게 한다고 하며 천연 수면제라고 할 만큼 불면증에 도움이 된단다.
특히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사람이 따뜻하게 차를 끓여 마시면 쉽게 진정이 된다고 하니 배우자의 술병, 잔소리 병으로 마음 멍든 어르신들은 치자 끓인 물을 장기 음용해 볼 일이다. 치자 우려낸 물로 지은 밥도 소화에 좋다고 한다.
치자는 유난히 벌레 침범도 심하고 수확하다 보면 꽃이 떨어져 나간 부위가 썩은 것들이 많다. 시장에 가서 치자를 사더라도 잘못 사면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 조심할 일이다. 게다가 건재상이나 한약재를 파는 곳에서 사면 십중팔구 중국산일 가능성이 크다.
한겨울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면서 어슬어슬 몸에 한기가 들거나 오늘같이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말린 치자 열매 두어 개를 오랫동안 끓여 달인 노란색 차에 잣 몇 알을 띄워 마시는 호사를 누리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우울함을 달래는 데도 썩 좋은 일이다.
한여름의 치자 꽃향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칙칙한 초겨울 비 내리는 날의 우울함이 싹 가신다. 실에 꿰어 말려둔 치자를 목걸이라도 되는 양 걸고 다니다 혼난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어린다.
치자는 꽃도 열매도 그 추억조차 달콤하고 향긋하다. 세상 최고의 향수(香水)가 치자가 아닐까. 붉은 듯 노란 치자 차가 그리운 아침이다.
첫댓글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