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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한복음 17장 1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이 말씀은 요한복음 16장에서 나오는 내용이겠죠. 특별히 25절부터 33절에 나오는 말씀을 하신 후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주님의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지난주에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때에 관한 언급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공생애 초기에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시다가 공생애 후반기에 이르면서부터 “때가 왔으니”, 혹은 “때가 가까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말씀하시는 모든 때는 결국 무엇을 가르쳤나요?
십자가를 가르쳤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언급하실 때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고, 여기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면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구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생애는 십자가로 향하고, 십자가에서 비롯되고, 그야말로 십자가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때’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구절들을 찾아서 함께 살펴봤기 때문에 그 구절들을 다시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죠.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 “영화롭게 하사”라는 말은 영광스럽게 하사라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기도하시기를 “나로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지 않으세요.
“십자가를 짐으로 영광스럽게 하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영광스럽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가리켜서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까지를 보면, 특별히 13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잖아요.
13장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 세족 예식을 시행하신 기록을 요한이 남기면서 그때부터 예수님의 디스코스, 즉 강화와 교훈의 말씀이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장, 14장, 15장, 16장, 그리고 이제 마치고 17장에서는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13장과 14장은 다락방에서 말씀하셨고, 15장과 16장은 다락방에서 일어나셔서 걸어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마도 그곳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말씀하시기를 “영화롭게 하사”라고 하십니다.
조금 있다가 읽어가면서 계속 뒷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만, 이 기도에서 주님께서 반복하시는 핵심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영광스럽게 하는 것,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간구하심으로 결국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경,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치욕스러움의 상징, 가장 깊은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개념으로 계속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신학자들이 딱 압축해서 하는 말이 뭐죠?
영어로 “No Cross, No Crown”이라고 표현하죠.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이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결국 그 말을 뒤집으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이다라고 하는 개념으로 압축될 수 있겠지요.
영생과 통치권
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으로 소이다.”
왜 이 일을 통해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면서 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다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스리는”이라는 말을 평범한 단어로 표현하면 어떻게 되나요?
“만민의 왕”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영생과 통치 개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통치권이 회복되어야 인류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결국 우리가 인류가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 얼마나 착해지느냐, 도를 닦느냐, 얼마나 성찰하느냐 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 영생의 문제는 이것이 도를 깨닫는 득도나 성찰로 이루어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주권의 문제, 통치권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2절에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한 통치권 회복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성경의 개념입니다.
성경의 이런 개념 외에 다른 어떤 종교에도 그 종교의 소위 창시자가 우주를 다스린다는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그분이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해 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좋은 상담과 접근을 제공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종교적 가르침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에 관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요한복음 17장 전체의 서론인데, 5절까지가 주님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한 다음에 3절에서 영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한 다음에 앞에서 말한 영생을 또 정의합니다.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17장 3절만 딱 떼어서 설명하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3절의 “영생은 곧”이라는 설명은 2절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기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1절, 2절과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2절에서 아까 거듭거듭 말씀드린 것처럼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가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아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1절과 2절의 맥락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또다시 “영화롭게”가 나오잖아요.
예수께서는 그분의 미션을 이제 다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5절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자, 그러니까 결국 5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나요?
1절부터 5절까지는 주님께서 드린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6절부터 바뀝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가 당신의 사명, 당신의 본분, 당신의 역할, 그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를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다음 6절부터는 기도의 대상이 바뀌는데, 본문 속에 딱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여기 “내게 주신 사람들”을 강조해서 보십시오.
6절부터는 1절부터 5절과 달리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어디까지 계속될까요?
20절을 미리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러니까 20절부터는 이제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전도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딱 보니까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가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이 눈에 보이지요?
1절부터 5절은 당신과 당신이 감당했던 미션과 사명의 의미에 관한 기도.
6절부터 19절까지는 당신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제자가 된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다음 20절부터 26절까지는 앞으로 제자들의 선교와 봉사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될 세상 사람들을 위한 기도, 다시 말하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세 부분으로 나누면,
1절부터 5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
6절부터 19절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
20절부터 26절까지는 교회를 위한 기도라고 흔히 구분하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예수님
자, 이제 6절부터 보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당신의 모든 교훈과 사역과 봉사를 한마디로 압축해서 뭐라고 표현하셨어요?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었다.”
이렇게 표현하죠.
미리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26절을 보세요.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를 끝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그분의 모든 사역, 교육하시고 가르치시고 병 고쳐 주시고 설교하시고 하셨던 모든 것을 한마디로 주님께서 압축하시기를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알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앞으로 할 일도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우리 주님이 직접 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했다”는 말의 의미가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은 이제 제자들입니다. 열한 제자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 이름은 그러므로 단지 “성경에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식으로 이름 자체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름은 제가 늘 그렇게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만, 존재와 성품과 본질의 외연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조금 쉽게 표현하면 이름은 존재와 성품과 본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분의 본질이 어떠한지, 그분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회복하고 증거하고 나타내는 일이 우리 주님의 지상 생애의 사역이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그다음 7절입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교육, 교훈, 능력, 삶, 봉사,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인정한 내용입니다.
결국 진정한 제자의 도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단순히 한 위대한 성자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삶과 사역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를 뭐라고 표현했죠?
“보내신 자.”
이렇게 표현한다고 여러분께 강조해 드렸잖아요.
요한복음은 예수를 끊임없이 “보내신 자”,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라는 말은 그분의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개념이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것을 알았나이다.”
말씀을 받은 자와 전달하는 자
그다음 8절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8절 속에 기독교의 기본이 다 압축되어 있습니다.
17장 8절 주님의 기도 속에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하지요.
칼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는 20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칼 바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로고스의 종교, 말씀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 로고스는 무엇이냐?
결국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고, 예수라는 말씀이 있고, 설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각각 표현하면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고, 예수는 성육신한 말씀이며, 설교는 선포되는 말씀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the written Word, the incarnate Word, the proclaimed Word.”
그러니까 예수의 사역은 다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그 모든 말씀들은 당신이 깊이 성찰해서 만들어 낸 인간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기원한 능력과 생명을 담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정리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9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말씀들을 주님께서 받아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러니까 이것은 전달 개념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자 목사들에게 수업 시간에 종종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We are not speakers. We are messengers.”
우리는 스피커가 아닙니다. 우리는 메신저입니다.
우리가 어디 가면 “강사님 오셨다”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스피커와 메신저는 개념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스피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메신저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메신저는 전달받은 메시지가 없으면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스피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나는 대로 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기별자입니다.
우리는 기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개념이 자꾸 우리들에게 체화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자꾸 성찰하고 돌아보면서 이것을 끊임없이 확인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성도님들이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반응할 때 “아, 내가 오늘 강연을 잘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기별을 내가 잘 전했구나. 내가 통로의 역할을 잘했구나.”
이 개념이 모든 목회자들의 기본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사람인지라 쏠립니다.
사람들이 반응해 주면 업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본 개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업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일 때 스스로 정신을 차리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의 기도에서 이 사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다음 여기 보세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는데,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것을 받고.”
주님이 주셨고, 나는 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은 이것을 받고.
이 세 단계가 다 보이지요?
그다음 여기 아주 중요한 개념이 또 하나 나옵니다.
그렇게 받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그다음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여기 “알다”와 “믿다”가 나왔지요.
여기요, 다 동사가 다른 동사예요.
알다와 믿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고, 믿어야 압니다.
알아야 믿고, 믿어야 압니다.
이 두 개념이 중요합니다.
알아서만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서 알아요.
믿음으로 알고 앎으로 믿습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그대로 반복되고, 이 기도에서 제자들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것인가
9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제자들을 위한 기도지요.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 자신도 그분의 제자들이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다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절.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또 나왔지요.
결국 예수의 사역을 통해 제자들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번에 제 인생에서 정말 11주 연속 말씀 봉사는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제는 제 수업을 들은 제자 목사들을 만났습니다.
저도 이제 조금 이런저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이렇게 딱 가서 하루 이틀 지나면 우리 참 제가 마음을 쏟은 제자들이 교우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구나 하는 느낌을 감지하지요.
가는 곳마다 제가 마음을 쏟은 제자들이 성도들을 한마음으로 섬기고, 또 신뢰와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하면서 초대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그런 시간들 하나하나가 제게도 아주 보람 있고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연약하고 부족한 선생님도 이러하거든요.
3년 반 동안 그야말로 동고동락하신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온전히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에서 오죽하셨겠습니까?
제자들을 보전하소서
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 중요한 개념이 나왔죠.
“그들을 보전하사.”
보전의 개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제자들을 잘 보존해 주기를 간구하면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교회를 위한 우리 주님의 기도는 하나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어서 하나됨, 영광, 사랑이라는 개념들이 기도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12절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러분, 여기 요한복음 17장 12절에 예수께서 드리는 기도 중에 “그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열두 제자 중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지요.
다 멸망하지 않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잘 보존하셨습니다.
그런데 멸망의 자식 한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
13절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제부터 중요한 표현이 또 나옵니다.
14절, 15절, 16절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신분, 그 크리스천의 스테이터스에 대한 아주 핵심 개념이 나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세상에 속하다”라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그런데 15절을 보세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함이니이다.”
16절까지 읽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자, 그래서 14절, 15절, 16절을 딱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요?
제자들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요.
크리스천은 절대로 세상에서 데려감을 입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15절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고 갑자기 우리가 다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데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독교는 탈세상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산에 들어가 수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세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데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표현할 때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리들,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거하여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만 그들과 같지는 않습니다.
“함께하지만 같지 아니함.”
저는 그렇게 쉬운 말로 바꾸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세상과 같지 아니함.
함께하지만 같지 아니함.
이 두 양면을 하나도 버리면 안 되겠죠.
세상에 거한다고 해서 세상과 같아져서 함께하면서 구별되지 않는 것도 안 되고, 또 같지 아니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아예 만나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는 것도 안 됩니다.
이 양쪽의 초점을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않아야 되겠지요.
어떻게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가
자 그러면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함께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함께하지만 같지 않는 그 핵심이 무엇인가?
17절에서 주님께서 딱 정리해 주시죠.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장 17절.
장절이 똑같기 때문에 외우기도 좋아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저도 교회 나오자마자 일주일도 안 돼서 혼자서 성경 공부할 때 그때 배운 성경절이 요한복음 17장 17절이에요.
평생 안 잊어버려져요.
제가 성경절을 맨 처음 외기 시작할 때 어떻게 배우는가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외우잖아요.
그래서 성경 각 책의 16절을 외웠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 출애굽기 3장 16절.
그다음에는 장절수가 같은 구절을 외우기 시작해요.
출애굽기 2장 2절, 출애굽기 3장 3절, 4장 4절.
오늘 아주 쉬워요.
요한복음 17장 17절도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젊을 때 외워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젊을 때 외워 두는 것이 좋고, 나이가 들어서 하는 것은 예방에도 좋습니다만 자꾸 사라지죠.
17절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어떻게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나요?
핵심은 또다시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선교와 거룩함
18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고.”
19절에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와, 여기서 모든 성직자들과 전도자들의 선교 비결이 한마디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 예수의 기별을 대신 전하는 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러분, 그래서 한마디로 뭐예요?
메시지와 메신저가 완전히 일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메시지를 메신저와 혼동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나 사회 영역에서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메신저와 섞어서 메시지 자체를 약화시키지 말라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메시지가 아무리 옳아도 모든 메신저가 메시지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현실이에요.
그래서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평가하되 메신저의 연약함 때문에 메시지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으로 메시지와 메신저를 섞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주의 말씀, 진리인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그만큼 전하는 자, 메신저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주님께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19절에 나오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을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기도로 마쳤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 — 하나됨
이제 20절부터 세상을 위한 기도입니다.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되고 성도가 될 세상,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으로 이어질 사도행전 이후의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20절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전도받고 제자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 교회가 시작되면 이 교회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20절부터는 바로 우리들을 위한 기도인 거죠.
예수께서 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교회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 언급이 교회가 하나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만큼 하나 되기 어려운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렇게 하나가 되었을 때,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이 교회를 보고 하나가 된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22절, 2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계속해서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또다시 영광과 하나됨을 연결시켰죠.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영광을 교회에게도 제자들을 통해 전달하십니다.
23절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 선교의 핵심 개념이 나왔죠.
선교가 뭐예요?
아버지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어떤 성인이나 깨달은 자가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알게 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런데 그 선교의 핵심 개념이 21절, 22절, 23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선교의 대전제는 제자들의 하나됨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것저것 다 무조건 좋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시편 85편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것처럼, 그것이 교회 안에서 성립되어야 하겠지요.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모든 내용은 하나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과 영광과 하나됨
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사랑, 영광, 하나됨.
핵심 개념들이 계속 나옵니다.
25절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24절에서 “아버지여”라고 하다가 25절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의 하나됨은 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와 하나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가 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죠.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26절 — 모든 기도의 결론
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라고 아까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은 이 마지막 기도에서 지금까지 드린 모든 기도를 압축하고 요약하십니다.
1절부터 5절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한 기도, 자신이 사명을 완수했다는 기도.
그다음 6절부터 19절에서는 당신과 지금 함께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제자들은 세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합니까?
말씀으로 거룩하게 합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렇게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이제 20절부터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시죠.
세상에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주를 알게 되고 주를 믿게 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핵심은 무엇이지요?
하나됨입니다.
그 하나됨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됨의 핵심 내용이 사랑입니다.
하나됨의 핵심은 의입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이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교의 핵심은 바로 사랑과 의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로 하나됨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기도해 오신 주님이 26절에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모든 기도의 내용을 압축하는 말로 나타내십니다.
26절은 예수님의 당신과 제자와 교회를 위한 기도의 모든 내용을 압축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또 알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미션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주님이 계속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미래의 사역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교회에서 이루어질 사역임과 동시에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하늘 성소에서 이어질 사역입니다.
히브리서의 전체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잖아요.
예수의 이어질 사역의 핵심 내용도 역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품성이죠.
다른 말로 품성, 성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성품이 온전히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마지막 시대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이 이마에 인친다는 말로 표현되잖아요.
그 인이 무엇입니까?
인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 요한복음 17장 26절에 이 부분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 다 함께 요한계시록에 가서 이 이름의 종말론적 의미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3절입니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절입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9세기 이후 지구상에서 등장한 거의 모든 기독교 관련 신흥 종교나 이단 종파들의 일부 운동에서 14만 4천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번 집회 동안에도 14만 4천과 관련된 질문을 저는 또 받았습니다.
“이 인이 무엇이냐?”
성경을 읽어 보면 상당히 선명합니다.
여기 14만 4천의 이마에 인을 쳤다고 했고, 이마에 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14만 4천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고 또 14장에 나오죠.
14장 1절을 보세요.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면 보이잖아요.
계시록 7장에서는 14만 4천의 이마에 인을 쳤다고 했고, 계시록 14장 1절에서는 14만 4천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계시록 7장과 14장을 연결하면 14만 4천의 이마에 찍힌 인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14만 4천의 이마에 “예수, 여호와”라고 글자가 문자적으로 쓰여지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요한복음 17장 마지막 기도에서 주님이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 주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나타내 준다는 것은 굳이 성경을 더 찾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만 이름을 이마에 새기나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 무엇이 있습니까?
짐승의 표가 이마에 있습니다.
짐승의 표입니다.
표와 인은 다릅니다.
헬라어 원어도 서로 다릅니다.
짐승의 표가 이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 이마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 곧 14만 4천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이마에 있는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고, 끝내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의 이마에 새겨질 짐승의 표는 짐승이 나타내는 성격과 특성을 가리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에 성품과 성질이 참 재미있습니다.
“성품이 좋다”라고 하고, 성격이 나쁠 때는 “성질이 더럽다”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짐승의 성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 —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결론
그러므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아버지의 성품을 제자들과 세상에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앞으로도 제자들로 말미암아 나를 믿게 될 교회 성도들에게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도의 마지막 결론에서 이름과 사랑이 언급되었지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의와 평화가 입맞춘 것이 십자가입니다.
시편에서 의와 화평이 서로 만나는 것처럼, 의와 평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신앙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과 자신과 제자들과 또 교회를 위해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핵심 요약 정리
1.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요한복음 17장 1절의 “때가 이르렀사오니”는 십자가의 때를 가리킨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영광의 길이었다.
2.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생명이다.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연결된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께 주어진 통치권과 구원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존재와 성품과 본질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자신의 삶과 사역으로 나타내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4. 참된 제자는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전도자는 자신의 말을 전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기별을 전달하는 ‘메신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5. 믿음과 앎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알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었다. 믿음으로 알고, 앎으로 믿는 것이 성경적 신앙의 중요한 모습이다.
6.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7장 14~16절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죄에 동화되지 않는 사람이다. “함께하지만 같지 않음”이다.
7. 거룩함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힘은 말씀에서 나온다.
8.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자신도 거룩해야 한다.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 17:19).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메신저의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전도자의 삶 자체가 메시지를 보여 주는 통로가 된다.
9.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가장 간절한 기도는 ‘하나됨’이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제자들과 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그 하나됨을 세상이 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10. 교회의 하나됨은 사랑과 의를 떠난 획일성이 아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모델로 한다. 그것은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됨이며, 사랑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됨이다.
11. 요한복음 17장 26절은 마지막 기도의 결론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아는 것이다.
12. 마지막 시대의 핵심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과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를 요한복음 17장과 연결해서 보면 마지막 시대의 중요한 쟁점은 단순한 외적 표식이 아니라 누구의 성품과 가치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라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신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거룩해진 제자들이 사랑과 의 안에서 하나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나타내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