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이야기 1
어느 봄밤에
김재희
하필이면 그 무주 골짜기라니. 평교사에서 교감으로 승진한 첫 발령이라서 시골 자그마한 학교다. 제발 그곳만 피했으면 하고 간절히 원했건만 결국 남편은 그곳으로 발령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출․퇴근하기엔 무리인 거리다.
이것저것 자취 도구를 싣고 무주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히 숙식할 수 있는 자그마한 사택이 있어서 남편이 자취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부턴 내가 전주와 무주를 오가며 두 집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
여행으로 가는 길이라면 그저 흥겨운 산골길일 텐데 왠지 이번만큼은 자꾸 심란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굽이굽이 골짜기 사이로 응달진 곳은 아직 얼음이 언 채로 있어서 연속으로 핸들을 꺾어야 하는 긴장감이 따른다. 겨울엔 꼼짝없이 갇혀 살겠다 싶어서인지 답답함이 밀려왔다. 뿌연 안개가 답답함을 더 가중시켰으리라.
그래도 새로운 시작에 임하는 설렘이 가득한 남편의 표정이 밝아서 가는 동안 나도 점점 마음이 환해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떤 걸림돌도 비켜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나 보다. 조금도 개의치 않는 그의 표정 옆에서 내 어설픈 표정이 서서히 스러지고 만 것이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산등성이로 올라오는 햇살이 무척 상큼하다. 빗살 같은 무늬를 띄우며 떠오르는 아침 햇살은 뭔가 모를 힘을 퍼뜨리고 있어 온몸이 팽팽하게 힘주어지는 느낌이다. 차 속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가벼운 운동복차림으로 뛰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했다. 이른 아침, 환해 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달리는 산길. 그 길 위로 봄기운이 가득하다.
작은 방 두 칸에 재래식 부엌. 쓸고 닦고 치우고 나니 훈훈함이 돈다. 어디든 내 몸 담고 있으면 금세 보금자리가 되는 법인가 보다. 챙겨 온다고 챙겨 왔는데도 빠진 것이 많아서 불편한 게 많지만 그럭저럭 기거할 만하다.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 새로이 시작된 것이다.
수업이 끝나 애들이 돌아간 교정이 조용하다. 선생님들도 회식이 있다고 무주 읍내로 다들 나가고 너무 적적한 마음에 살그머니 나와서 교정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운동장도 정감이 가고 덩치가 꽤 큰 등나무 그늘 밑에 놓인 의자도 보기 좋다. 창문 앞에 바짝 서 있는 벚나무도 꽃망울이 통통하게 불거져 있고 사택 뒤로 개나리 울타리가 아주 울창하게 늘어져 있어 꽃 필 무렵이 기대된다.
앞산은 꼭 코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카메라 렌즈를 앞으로 확 당겨놓은 상태라고 할까. 조금은 고개를 올리고 보아야 하는 산의 풍경에 잠시 눈길이 멈추었다. 군데군데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있나 보다. 물줄기가 그대로 허연 얼음이 되어 작은 빙벽을 이루어서 밀려나는 동장군이 거기 집결된 것 같다. 저 얼음은 언제쯤 녹으려나. 어느 날, 쨍하니 얼음 갈라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후닥닥 뛰어나와 마지막 가는 겨울을 배웅하련다. 심연 깊숙이 와 박힐 것 같은 여음을 기대하면서…….
공터도 있다. 이제 보슬보슬해진 흙에서도 생기가 돈다. 단단했던 표면을 뚫고 올라오는 잡초들의 생명력이 쏟아 내놓은 열기 때문인지 굳이 호미를 들이대지 않아도 흙들은 이미 뒤엎어질 틈새를 보이고 있다. 그 틈새로 기어들어 간 바람이 흙 내음을 실어 낸다. 향긋한 흙 내음. 이게 바로 봄 내음이리라. 저곳엔 푸성귀를 심어야겠다.
저녁이 깊어지자 열사흘 달빛이 교정에 은은하게 깔려 있다. 시골의 달빛은 유난히 밝다. 화단 가 외등 하나만 아니라면 오로지 산골의 달빛 속일 텐데 하는 마음에 문득 돌멩이 하나 집어 들어 저 등을 깨버릴까 하는 충동이 인다.
달밤엔 하얀빛이 더 돋보인다. 교정 한쪽에 흐드러진 벚꽃의 은은함이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끌었다. 내 힘이 아닌 다른 뭔가에 끌려가듯 끌려가서 벚나무 밑에 자릴 잡고 앉아 꽃들 사이로 얼씬거리는 달을 다시 쳐다본다.
이곳 무주에는 색다른 벚나무가 있다. 수양버들처럼 척척 늘어진 벚나무이다. 수양벚나무라고 하는데 아주 잔잔한 꽃잎들이 촘촘히 엮여서 버들처럼 바람에 한들거린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가지들의 자태가 무희들의 유연한 허리춤 같다. 그 허리춤에 혼이 빠져 버린 걸까? 온갖 것 다 잊어버리고 멍하니 위만 바라보았다. 달도 허리춤에 반해서 벚나무에만 시선을 멈춘 것 같다. 가지 사이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달과 내가 숨바꼭질 같은 눈 맞춤을 한다.
달이 수줍은 건지 내가 수줍은 건지 자꾸 빗나가는 눈 맞춤으로 인해 가슴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더러는 웃음을 자아내는 추억으로 더러는 가슴 저리는 추억으로 그렇게 먼 세월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소슬한 바람에 떨어지는 꽃눈이 치마폭에 제법 쌓여갔다.
까만 치마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하얀 꽃잎, 앙증맞은 모양이 얄밉도록 예쁘다. 잠깐의 인연으로나마 내 치마폭에 자리를 잡았거늘 어찌 무정히 쏟아낼 수가 있으랴. 일어나려다 차마 털어 버리지 못하고 마냥 그대로 앉아 꽃잎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 밤 내내 달빛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2000년 무주 괴목초등학교 사택에서
* 박일천 선생님의 무주 이야기를 읽고 나니 새삼 나의 무주생활이 떠오르네요. 그래서 저도 그때쯤에 썼던 글 올려봅니다.
첫댓글 버드나무 처럼 늘어진 벚꽃이네요 그러고 보면 벚꽃
종류도 다양한것 같아요 나의 홈그라운드였던 뒷산에 피는 산벚꽃은 송이가 성글어요 그래도 질때쯤, 바람이라도 불면 성긴 눈발처럼 날려서 또다른 운치가 있더라고요 선생님들은 참 좋겠어요 근무지가 다양한것같아서요 외딴 산골에서 보는 달빛은 더밝고
교교할것같아요 별도 유난히 크고 반짝일것 같고요
서정적 감성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는 풍경이 그려지네요
예, 맞아요.
외딴 산골에서 보는 달빛은 정말 밝고 교교하지요.
그때의 그 풍경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지만 이제 그런 기회가 없네요.
그래도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