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생각나는 노래 / 백봉기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20~30대 때만 해도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올리려고 친구들을 속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왜 이리 죄스럽고 원망스러운지 모르겠다. 해 놓은 일도 없는데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나이는 결국 ‘~순’자 꼬리를 달았다. 그래서 누가 젊게 보인다는 멘트를 날리면 낯꽃이 펴지고 고맙기까지 하다. 어느 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생활의 범주가 좁아지는 것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계절이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한 때는 내 애창곡이기도 했다.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 모 대학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방송학회 사람들과 노래방에 왔는데 언젠가 백형이 불렀던 노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회식모임에서 내가 불렀던 그 노래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일부러 배웠는데, 막상 부르려고 하니까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노래가 바로 12월이면 생각나는 노래, 현진우라는 가수가 부른 ‘빈손’이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돌아갈 때는 빈손인 것, 웃으며 신나게 살다가 구름처럼 가자는 내용의 노래다. 어쩜 허무주의적인 노래 같기도 하지만 인생을 즐겁게 살자는 쾌락주의자나 낭만주의자들이 좋아할 법한 노래다.
♬검은 머리 하늘 닿는 아 잘난 사람아 이 넓은 세상 보이지 않더냐
검은 머리 땅을 닿는 아 못난 사람아 저 높은 하늘 보이지 않더냐
있다고 잘나고 없다고 못나도 돌아갈 땐 빈손인 것을
호탕하게 원 없이 웃다가 으라차차 세월을 넘기며 구름 따라 흘러들 가게나♬
마치 피안의 세계에서 인생살이를 다 내다보는 전지전능의 신이나 산속에서 내려온 도사가 주는 가르침 같은 노래이다.
얼마 전에 뇌물수수로 조사를 받으러 가던 시장이 목을 매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 전에는 두산그룹의 회장까지 지낸 분이 자살했고, 그 전에는 현대아산 회장이 빌딩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도 있었다. 정말 예쁘고 잘 나가던 대중스타들도 어떤 사연이 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자주 있었다. 전직 대통령이 투신했을 때는 온 국민이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허무한 일이다. 그래서 가수 최희준은 인생이란 잠깐 머물다 가는 ‘하숙생’이라고 했고, 남진은 ‘빈 지게’ 같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나그네요 미완성이라고 노래한 가수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빈손’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늦가을이었다. 낙엽이 둥글고 따뜻한 햇살이 그리워지는 때였다. 현진우의 매니저이자 이 노래의 작사가인 박웅 씨가 이 곡을 들고 찾아 왔었다. 음악실에서 노래를 모니터하는 순간, 이 곡은 일반 가요들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 대중가요가 사랑타령이나 이별이 어떻고 아픔이 어쨌다는 등 신세타령이 대부분인데, 이 노래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 곡의 가사는 원래 중국의 고서에 나온 것인데, 박 씨가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 뒤 초등학교 친구들 송년모임을 앞두고 어떤 노래를 부를까 고민할 때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또렷해지는 ‘~순’자를 단 친구들, 문득 ‘빈손’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시기적으로도 맞고 박자에 맞춰 노래하기도 좋고, 더 좋은 것은 신곡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2~3일 만에 노래를 배워 이 노래를 불렀다. 모두들 마음에 와 닿는 노래라며 “앵콜, 앵콜, 다시 한 번만 불러봐라!”는 등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날 친구들은 많은 술을 마셨고, 덕분에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인생 뭐있어!” “걱정 마!” “즐겁게 살면 돼!”라고 반복하면서 여러 차례 술잔을 부딪쳤다. 있다고 잘나고 없다고 못나도 돌아갈 때는 빈손인 것, 호탕하게 원 없이 웃다가 으라차차 세월을 넘기며 구름처럼 흘러들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