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
인생에 의미있는 결정은 만남 뿐이다. 모든 것은 만남으로 시작되고 만남으로 완성된다. 만남의 완성이 중요할 뿐 그 다음은 없다.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나겠다는 것이다. 악기와 연주자가 만난다. 최고의 곡을 연주하기까지는 만나도 만난게 아니다.
만날 것을 만났다면 성공한 인생이고 만나지 못했다면 실패한 인생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부와 명성과, 권력과, 성공과, 미인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이 만남의 확률을 높여주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만나지 못했으므로 그것이 필요한 것이며 만났다면 필요가 없다.
쾌락과, 행복과, 사랑은 인간을 만남의 길로 이끄는 사회적 본능이다. 인간을 학습시켜 만남으로 이끄는 진화의 장치다. 쾌락과, 행복과, 사랑은 인간이 옆길로 새지 못하게 묶어놓을 뿐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으로 유인하여 말을 물가로 데려갈 뿐 물을 먹이지는 못한다.
평등과, 도덕과, 권력과, 합리성과, 공유는 만남의 광장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다. 거기서 만날 수 있지만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지다. 평등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만남의 가능성을 높인다. 배제하면 만날 수 없고, 전제정치로 만날 수 없고, 시장이 없으면 만날 수 없다.
최후에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자유의지다. 만날 것인가, 만나지 않을 것인가 결정한다. 만나면 자유가 제한된다. 악기가 연주자를 만나면 붙잡힌다. 제한을 받아들일 것인가? 다르마는 약속을 따른다. 나의 백 퍼센트로 상대의 백 퍼센트를 끌어내는 진정한 만남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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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나면 당신은 제한된다. 파트너를 만나도 그러하고, 동료를 만나도 그러하고, 환경을 만나도 그러하다. 만남의 결정은 자유의지로 가능하지만 만난 다음은 결정론을 따른다. 만남은 그 자체로 약속이며 그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 다르마의 길이다.
정상에서 만난다. 정상은 비좁다. 정상은 제한된다. 만나면 운명의 깔때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깔때기는 인간을 쥐어짠다. 그에 따른 보상은 없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사랑과 행복과 쾌락의 보상에 대한 믿음은 불안감을 달래려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인생에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만나는 것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고 만난 다음에는 결정론에 지배된다. 만남의 완성과 실패가 있을 뿐이다.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다면 실패다. 만날 수 있는 위치에 가서 타이밍을 기다리며 대비해야 한다.
만나서 얻는 보상은 없다. 보상은 인간을 훈련시키는 심리적 장치다. 만남에 대비하게 한다. 미래의 더 좋은 사회, 더 행복한 미래는 없다. 언젠가는 문명도 망하고 우주는 종결된다. 오늘의 만남이 완성되었느냐가 중요하다. 완성되면 다음 만남이 연결된다.
우주에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연결되면 계속 가고 단절되면 멈춘다. 인간이 그 길을 가는 것은 주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설계했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만났으므로 책임지는 방법으로 만남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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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의하여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생을 바꾸는 운명적인 만남에 의지한다. 부모를 만나든, 배우자를 만나든, 자녀를 만나든, 동료를 만나든, 직업을 만나든, 환경을 만나든 인간은 만남에 의지하여 다르마를 따라 계속 사건을 연결해 가야 한다.
성공이든, 쾌락이든, 행복이든, 사랑이든, 명성이든 위하여는 가짜다. 보여지는 것은 가짜다. 진짜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며 의지하는 것은 등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을 만나게 돕는 장치다. 종교의 본질은 사회성 호르몬의 충족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면 안심이 된다.
활은 화살을 만나고 악기는 연주자를 만난다. 화살은 활에 의지하고 악기는 연주자에 의지한다. 화살은 결국 쏘아지고 악기는 결국 연주된다. 격발되어 에너지가 관통되는 것이 만남이다. 액션을 격발하지 않는 만남은 가짜다. 길거리에서 노닥거리며 잡담하는 것은 진짜 만남이 아니다.
만나면 의지하게 되고 의지하면 행하게 된다. 가수는 노래하게 되고 댄서는 춤 추게 되고 작가는 쓰게 된다. 만나지 못하면 행하지 못한다. 만남이 액션을 격발하는 것이 우주의 작동원리다. 공존하고, 만나고, 알아보고, 의지하고, 행동해서 얻는 보상은 없지만 그렇게 인간이 완성된다.
쏘지 못하면 활이 아니고, 연주를 못하면 악기가 아니고, 쓰지 못하면 작가가 아니다. 혼자 행할 수는 없고 만나야 행한다. 행하지 않는 만남은 거짓이다. 행함은 만남의 증거일 뿐 목적이 아니다. 기쁨과 자랑은 내가 만났다는 증거일 뿐 만남의 목적은 아니다. 의지하여 격발함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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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의지하고, 의지하면 격발하고, 격발하면 복제되고, 복제하면 완성된다. 낳음의 완성에 의해 사건은 다음 단계로 연결된다. 아기를 낳아 나 자신을 완성하는게 목적이지 아기를 잘 키워서 효도받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내 안에 들어찬 것을 낳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낳는다.
만남은 발견이다. 발견하면 발명하고, 발명하면 제조하고, 제조하면 판매하고, 판매하면 소비한다. 소비에 따른 활동은 또다른 발견으로 이어진다. 최초 발견자는 최종 소비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서 500년 후에 정착되었지만 500년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받지만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서사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독자들이 직관력으로 아는 것이다. 의사결정 못하는 자는 왕이 아니다. 의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르주나는 과연 왕인가?
다르마는 자유의지를 완성한다. 자유의지는 회피기동이기 쉽다. 목적이 있으면 자유의지가 아니다. 보상이 주어지고 결과를 의식하면 자유의지가 아니다. 행할 수 있고 행하면 이득이 있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 자유의지다. 이득을 취하면 의지하는 토대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딘가에 의지하고 있다. 어떤 결과, 목적, 보상, 댓가를 추구하면 그 의지하는 바탕을 놓아야 한다. 의지하는 바를 놓지 않는 것이 다르마다. 부모와 스승과 동료와 파트너를 놓지 않아야 한다. 이득을 취하면 놓아야 하며 놓는 순간 에너지를 잃고 결정론에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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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안니면 단절이다. 연결에는 권력이 따르고 단절에는 이득이 따른다. 단절의 이득은 연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둑에 비유하면 고수는 연결하고 하수는 끊는다. 연결하면 판정이 미루어지고 단절하면 당장 손익이 판명된다. 하수는 계산이 안 되기 때문에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눈앞의 은덩이와 멀리 있는 금덩이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고수는 멀리 있는 금을 취하여 장기전을 하고 하수는 눈앞의 은을 취하여 단기전을 한다. 장기전의 승패가 계산이 안 되기 때문이다. 장기전과 단기전, 전면전과 국지전 중에서 하수는 단기전과 국지전을 선호한다.
연결하면 권력이 있고 단절하면 이득이 있다. 권력의 행사는 단절이다. 다르마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방법으로 최적의 위치와 타이밍을 기다린다. 그러나 결국 한 번은 단절해야 한다. 때가 아니고 장소가 아닌데 단절하면 권력이 소멸한다.
다르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부구조와의 연결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연결하는 대상과 단절하는 타이밍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게임을 개설하는 것이다. 너무 일찍 단절하면 권력을 빼앗기고 자유의지를 상실하여 결정론에 지배된다. 주인에서 노예로 추락한다.
권력을 얻으려면 만나야 한다. 큰 권력을 얻으려면 큰 게임을 벌여야 한다. 천하와 만나고 진리와 만나고 역사와 만나고 진보와 만나야 한다. 이득을 얻으려면 헤어져야 한다. 단절해야 한다. 좌파는 연결만 하다가 망하고 우파는 단절만 하다가 망한다.
만남과 다르마
다르마를 따라야 한다. 문제는 카스트다. 카스트는 다르마의 고착이다. 부단히 새로운 다르마를 개척해야 한다. 만남으로 가능하다. 다르마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은 만남에 의해 성립한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평등으로 만나고, 이겨서 만나고, 합리성으로 만나고, 공적으로 만나고, 도덕으로 만난다.
평등의 논리, 힘의 논리, 합리성의 논리, 공사구분의 논리, 도덕의 논리가 있다. 만나게 하는 조건들이다. 평등해야 만난다. 아군은 평등해야 한다. 적은 만나지 못한다. 평등의 논리는 동시에 차별의 논리다. 적은 당연히 차별해야 한다. 차별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이 주변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평등은 좋은 말이지만 뒤집어보면 무서운 말이다. 죽는 수가 있다. 많은 경우 이기지 못하면 만나지 못한다. 16강에 탈락하면 독일팀을 만날 수 없다. 합리적이어야 만난다. 합리적인 것은 효율적인 것이다. 많은 경우 지속가능하지 않다. 도박으로 만나면 곧 깨진다.
공적인가, 사적인가도 중요하다. 헷갈릴만 한게 공자의 가르침은 공을 중시하고 사를 억누르는 것이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이 똑같이 잘못하면 내 자식을 나무래야 한다. 그 반대도 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숨겨주고 변명해줘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면 안 된다. 이상하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둘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공이다. 부부관계도 공이다. 내가 살기 위해 부인을 고발하고 남편을 고발한다면 사를 공에 앞세우는 것이다. 공과 사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에너지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제나 전체가 먼저임을 알 수 있다.
도덕의 논리는 주로 어린이를 가르칠 때 쓰는 말이다. 사회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사회화 과정이다. 어린이에게 사회성을 가르쳐야 하므로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지 세상이 도덕과 평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도덕에 따른 평판은 여러가지 가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도덕은 사회성을 발달시킨다.
사회성이 발달하면 만날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다. 공을 중시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합리성을 중시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고, 승리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고, 평등하면 만날 사람을 만난다. 그 전에 적을 제거해야 한다. 방해자를 제거해야 만난다. 아닌 것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내가 만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