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 (4 대)
★ 세종이 등극한 배경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번째 선위 파동으로이때 황희등
조정 대신들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판단했던 때문일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 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 4대왕 세종이다.
★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야사에의 실록
비록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
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굴 뜰에 새덫 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 세종의 업적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 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또한 훈민정음의 보급,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
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 을 이루어냈다.
이와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
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 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 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 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이 간의대에는 혼천의,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 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
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 simdook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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