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패망한 후부터 초대 교회까지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특히 요한 묵시록을 이해해야 한다.
기원전 539 년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하고 538년 바빌론에서 유배 살이 하는 모든 유다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다(2역대 36,22-23, 에즈 1,1-4).
많은 유다인들이 폐허가 된 유다로 돌아가기보다 바빌론에 남았고, 소수의 사람들이 귀향을 한다.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유다인들에게 제2의 이집트 탈출과 같았다. 첫 번째 이집트 탈출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고, 노예 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제2의 이집트 탈출인 예루살렘으로 귀환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새로운 민족으로 나게 하신 사건이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신다. 예레 31,31-34.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성전의 재건이었다. 이때 바빌론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이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에 살던 다른 종족들이 방해를 하였지만 성전은 511년 완공이 된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속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페르시아 시대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시대인 동시에 신, 구약 중간 시대에 들어서는 관문이다. 이 시대에 주로 활동했던 예언자는 느헤미야와 에즈라였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성전 재건이었다. 이때 북 왕국에 속했던 사마리아의 주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 돕겠다고 하였으나 돌아온 유다인들은 거절을 하였고, 그들이 종교적으로 혼합주의이고, 순수한 유다 신앙을 지니지 않았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사마리아인과 비협조적인 유다인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으나 성전은 재건된다. 그 후 에즈라가 페르시아 왕 아르닥사싸 1세의 서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유다인들의 지도자 역할) 종교 제도, 전례, 윤리와 관련된 개혁, 이민족과 혼인을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기원전 445년경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경제적 부흥과 전례 개혁을 추진한다.
기원전 539년부터 200년 넘게 소아시아를 지배했던 페르시아가 기울기 시작하고 그 시기에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정복에 들어간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한다. 알렉산더는 13년간의 짧은 정복 활동 동안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즉 그리스 문화를 전파한 것이다. 그리스(헬라)식 실내 체육관, 경기장, 극장, 음악당, 학교, 시장 등을 고대 근동 도시들에 건설하였다.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된 유다도 그 영향력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알렉산더 사망 후 그의 영토는 네 명의 장군들이 나눠 통치하였다. 안티고누스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등 지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카산데르는 마케도니아를, 프톨레매오 라기는 이집트와 지중해 연안의 큰 섬들을, 리시마쿠스는 트라키아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집트를 다스렸던 프톨레매오 왕조에 셀레우코스라는 군총사령관이 있었는데 그는 군총사령관에 만족하지 않고 알렉산더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안티고누스를 저지하려고 유대 위쪽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쪽으로 진군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연다. 이때부터 유대를 사이에 두고 프톨레매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유대 지역이 프톨레매오 왕조의 지배를 받았을 때는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한다. 유대 민간전승에 의하면 프톨레매오 2세 (필라델푸스)는 도서관에 유대인의 율법책을 비치해 두기를 원해 히브리어로 쓰인 모세오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72명의 학자를 뽑아 모세오경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그 후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쓴 다른 성문서들도 그리스어로 번역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어로 된 성경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70인 역이라고 한다.
기원전 198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로매오 왕조의 프톨로매오 5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유다 지역의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유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에 속하게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 초반에는 유다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왕국 전체에 그리스식 문화를 주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예로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실내 체육관을 세우고 그곳에서 유다인 청년들이 알몸으로 운동을 하게 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유대 경건주의자들(하시딤)의 눈에 좋게 보였을리 없었고, 유다의 헬라화에 정통 유다이즘을 보호하기 위하여 저항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안티오쿠스 4세는 헬라 종교와 문화를 전파하는데 유다교가 큰 장애라고 판단하여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한다. 그래서 조직적인 헬라화가 유다 전역에 걸쳐 시행된다. 온 백성이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당했다. 제우스 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였고, 1마카 1,54절에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는 말처럼 그리스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위에 세우고 그 위에서 부정한 짐승인 돼지들을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그리스 병사들이 성전 뜰에서 히브리 성경을 불태우는가 하면,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축제 거행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면 사형이었다. 모든 유다인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축제에 참여하도록 강요당했으며,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한 율법학자 엘르아잘이 모진 매를 맞아 숨지고(2마타 6장),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들과 더불어 유다교 관습과 신앙을 지키려다 사지가 잘려 나가는 극도의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2마타 7장).
이런 상황들이 유다인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그래서 발생한 것이 마카베오 항쟁이다. 이 항쟁을 통해 마카베오 다섯 형제의 마지막 인물 시몬으로부터 하스모니아 독립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64년, 기원전 753년에 도시 국가로 성장한 로마(예언자 아모스 시대)가 침략하여 63년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식민지가 되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안티고누스 마따니아를 끝으로 멸망하고, 로마 제국이 임명한 이두메니아 출신 헤로데가 기원전 37년부터 통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립적인 국가가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 이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들까지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까지 하였다. 자신의 아들들도 죽였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헤로데는 자신이 죽을 때 백성들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줄 알고 감옥에 있던 유다인 남자 수백 명을 자기 죽음과 때를 맞추어 살해하라고 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야 자기가 죽고 나서 유다 땅에 곡소리가 들릴 테니 말이다.
헤로데가 죽은 후 왕국은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큰 아들 아르켈라오에게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민족 영주의 칭호가 주어졌다. 아르켈라오는 폭정으로 인해 기원후 6년 로마에 의해 폐위되었고, 행정관에게 이 지역이 맡겨졌으며 그 행정관이 본시오 빌라도이다. 둘째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부 베레아를 맡겼다. 이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이 이복동생 헤로데 필로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부당하다고 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예수님은 헤로데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하셨다. 셋째 헤로데 필립보에게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과 이두매니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지금까지 예수님 시대까지 우리가 살펴보지 않았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는 기원후 1-2세기 특히 요한 계 문헌이 집필 되던 때의 로마 황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들이 신약의 묵시 문학을 이해하는 역사적 상황을 설명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