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33
33.『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무수리 출신 어머니 둔 영조 출생기록 보며 감회에 젖다
▲ 연잉군 어진. 영조의 왕자시절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새벽 5시에 최숙의가 남자 아기씨를 생산하였습니다. 아기씨가 젖을 토하고 숨이 막히는 증세가 심해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부득이 우황과 대나무 태운 즙을 젖꼭지에 발라 삼키게 하니 진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모범적인 군주로 꼽히는 조선 21대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비상한 정치능력으로 정국을 안정시켰고 또한 사회, 경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함으로써 민심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의 시작은 미약했다. 영조의 어머니 최숙의(후일 최숙빈)는 궁중에서 가장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 최씨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7세 남짓한 어린 나이에 대궐로 들어왔다. 그녀는 숙종에게 승은을 입기까지 15년 동안 궐내에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영조는 왕자 시절 어머니를 찾아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중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고 최씨가 대답했다. 영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조는 어머니 말을 듣고난 후 평생 누비옷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가 노론세력의 지원으로 어렵게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모가 미천해 영조는 숙종의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가 돼야만 했다. 영빈 김씨는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의 5촌 조카였고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노론이 영조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서 왕실의 출산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원자에게 달려 있어 어느 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왕자의 탄생은 왕실과 왕실 주위 신료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조선은 왕자 중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전체 27왕 가운데 이런 원칙이 지켜진 경우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대에 불과하다.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지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은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닌데도 왕위에 오른 경우는 태조를 제외하고 19명이나 된다.
조선은 국왕의 혼인을 비롯해 세자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실록이나 일기, 등록, 의궤 등으로 제작한 '기록물의 왕국' 조선은 왕자의 탄생 과정까지 세세히 적었다.
대체로 출산예정일 두 달 전 왕비나 빈궁은 산실청, 후궁은 호산청을 각각 설치해 출산을 도왔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간 단위로 일기에 담았다. 이를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라고 한다. 현전하는 호산청일기는 숙빈 최씨의 영조를 포함한 세 아들 출산 과정을 서술한 '호산청일기', 고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가 영친왕을 낳는 과정을 쓴 '정유년 호산청소일기'가 있다.
▲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숙종의 네 번째 아들이다. 세 번째 아들도 숙빈 최씨가 낳았지만 채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영조도 처음에는 젖을 소화시키지 못해 계속 토하고 숨까지 제대로 쉬지 못해 위태로웠다. 영조마저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가슴을 졸였다. 의관 김유현을 불러 우황 등을 처방하자 천만다행으로 영조의 상태가 안정을 되찾아 젖을 잘 빨고 잠도 평안하게 잤다.
숙종은 이런 김유현을 크게 신임했다. 1701년(숙종 27) 실록에서 숙종은 "나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자는 김유현뿐"이라고 했으며 말년에 건강이 크게 나빠진 후에도 "김유현이 오기를 기다려 진찰한 후에 상의해 약을 지으라"고 말할 정도였다.
최숙의는 영조를 해산한 뒤 건강했다. 하루에 화반곽탕을 7번씩 잘 먹었다. 화반곽탕은 해물을 넣어 끓인 미역국에 밥을 만 음식을 말한다. 그리고 아픈 곳 하나 없이 몸 상태도 좋았다.
출산한 지 사흘째 되는 9월 15일 길시를 택해 산모가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 최숙의는 쑥탕에 몸을 씻었고 아기씨는 매화나무뿌리, 복숭아나무뿌리, 오얏나무뿌리, 호두를 달인 물에 돼지 쓸개를 타서 목욕시켰다.
목욕하는 날 태를 씻는 세태식도 행해졌다. 태는 길한 방향에서 물을 길어와 100번 씻은 뒤 술로 다시 세척해 백자 항아리에 밀봉했다. 항아리 전면에 '강희 33년 9월 13에 최숙의방에서 해산한 남자아기씨 태'라고 썼다. 9월 18일 영조는 눈을 떠 곁눈질을 했다고 호산청일기를 적었다.
신생아의 안녕과 복을 비는 행사인 권초제(捲草祭)는 7일째 되는 19일 진시(오전 7~9시)로 정해졌다. 산실문 밖에 큰 상을 차려 그 위에 쌀, 비단, 은을 올려놓고 권초제를 주관하는 권초관이 절을 했다. 권초관은 마지막으로 해산할 때 깔았던 거적을 걷어 붉은 보자기에 싸서 권초각에 옮겨 보관했다.
천한 궁녀의 몸에서 태어나 왕세제가 되고 이복형인 경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른 행운아 영조는 그래서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다. 영조는 70세가 되던 해 이 호산청일기를 직접 열람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탄생했던 정황이 기술된 일기를 보면서 감동했다. 영조는 "아, 칠순이 되는 9월에 우연히 일기를 얻어보게 되었다. 육상궁(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가서 배알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무척 새롭구나"라고 감회에 젖었다고 승정원일기는 전한다. 영조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일기를 찾아서 보았다.
영조의 호산청일기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왕자가 태어나면 7일 동안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가 이뤄진다. 이 기간이 산모와 신생아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다. 그다음은 비교적 안심할 수 있다. 산실청도 7일이 지나면 해체했다.
호산청에 관여했던 관리나 내관, 의관·의녀, 장인 등에게는 감사의 표시로 술을 대접하는 동시에 호피, 무명 등 각종 선물을 내렸다.
▲ 영친왕의 친모 순헌황귀비(엄귀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26대 고종의 7번째 아들 영친왕 이은은 1897년(광무 원년) 9월 25일 출생했다. 상궁 엄씨(1854~1911)가 경운궁의 숙옹재에서 영친왕을 생산했다고 '정유년 호산청소일기'는 전한다. 상궁 엄씨는 188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된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의 시중을 들다가 승은을 입어 영친왕을 임신했다.
엄씨는 8세 때 궁궐로 들어 왔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 반란군을 피해 달아나 실종된 사이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해 지밀상궁이 됐다.
1885년 32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돼 궁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고종은 같은 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 5일 만에 엄씨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영친왕이 태어난 다음날 일기는 "엄씨는 분만한 뒤 평안하여 화반곽탕을 세 번 들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씨도 젖을 잘 빨고 대변을 보았으며 숨도 잘 쉬고 있습니다"고 서술했다.
고종은 엄씨를 총애하는 데다 그녀가 아들까지 낳아주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출산 3일째 되는 날 정5품 상궁에서 무려 7단계나 품계를 높여 종1품 귀인에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한다. 귀인은 왕비와 빈 다음의 내명부 세 번째 품계이다. 그리고 일기에서 그녀를 호칭할때 성을 쓰지 않고 귀인으로만 부르도록 했다.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는 전례와 동일하게 진행됐다.
엄씨는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품계가 높아졌고 나중에는 귀비에 봉해졌다. 엄 귀비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영친왕을 가진 만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1899년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에 막대한 액수의 시주를 해 극락보전과 독성각을 중창하고 아들의 만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