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제 17차 일중일체다중일,일즉일체다즉일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이어서 합니다.
앞선 시간에서도 한번 언급한 ‘컵’의 경우를 예로보자.
눈앞의 컵은 색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수라고도 말 할수 없고, ....
색수상행식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눈앞의 컵은 오온 전체가 다 들어 있다.
일중일체다.
또 눈 앞의 컵은 색수상행식 오온 전체다 일즉일체다.
어떤 사물을 예로 들어도 그것에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함께 한다.
하나의 사물에 오온이 모두 들어 있다.
일중일체다.
한가지 현상에 오온 모두가 관여한다. 일중일체다.
이렇게 실재세계에서 색수상행식의 모든 현상이 중첩되어 있다.
이를 사사무애(事事無碍)라 부른다. ‘현상과 현상간에 걸림이 없다’는 의미다.
결국 눈앞의 컵에 색수상행식 오온이 모두 들어와 있음에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일중일체의 사사무애다. 뒤죽박죽이지만 충돌하지 않고 구별되지 않는 하나다.
불전에서는 이 세상을 법계라고 부른다. 어떤 법으로?
진리를 의미 하겠지! 구성요소 이기도 하고!
법계를 4법계로 나누어 이해 해 보자,
4법계
이 우주를 현상과 본체의 두 측면에서 관찰하면 네 가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① 사법계(事法界) : 색수상행식 오온 낱낱의 차별 현상을 말한다. 사(事)는 ‘현상’을 뜻한다. 낱낱 현상은 인연으로 화합된 것이므로 서로 구별된다.
② 이법계(理法界) : 공성, 자성이 없는 이치다. 모든 현상의 본체는 동일하다. 이(理)는 ‘본체’를 뜻한다.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 색=공 수=공 상=공 행=공 식=공,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걸림 없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 마치 물이 곧 물결이고, 물결이 곧 물이어서 서로 걸림 없이 융합하는 것과 같다. 일체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일물(一物) =색수상행식(一切) 모든 현상은 걸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융합하고 있다. 이것이 곧 화엄의 무궁무진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일체의 대립을 떠난 화합과 조화의 세계이고, 걸림 없는 자재한 세계이다. 이것이 비로자나불의 세계이고, 화엄의 보살행은 이 사사무애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사사무애법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색=수=상=행=식 이라는 통찰에 이른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의 세계를 의미한다.
자,
일물이 똥막대기다.
어떤걸 들어도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똥막대기’라 말하니 우리는 부처와 부딪힌다.
왜, 부딪히나?
부처=일물이라 했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왜? 안부딪히나?
부처아닌게 있나? 없다. ‘두두물물’이라 하지 않았나!
똥막대기를 씻어서 된장을 저으면 된장막대기가 된다.
똥막대기로 뭐든지 만들 수 있다.
알고보면 다 통한다. ‘일체’다.
언어가 무너지고 생각이 무너지는 화두공안의 세계다.
화두를 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왜?
고정관념을 깨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깨져야 한다.
질서정연 것은 망상뿐이다.
실재세계는 일상적인 말의 길이 끊어지기에 언도도단이고, 분별적인 생각(망상)을 붙일수가 없기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교재의 효봉스님의 오도송의 예를 살펴보자. (교재참조)
이게 무얼 말하는 것 같은가?
우리의 분별로는 도저히 이해 안된다. 고정과념이 깨져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글에 끄달리고 있다.
이 효봉스님의 오도송의 그 집안소식은 언어가 무너지고, 역할이 무너지고, 상식이 무너지고, 생각이 무너지는 소식이다.
일중일체다중일,일즉일체다즉일의 예를 짚어가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모든 개념엔 테두리가 없다.
일즉일체다즉일, 이것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이것이다.
일과 일체가 상즉하는 즉문(卽門)이다.
일중일체다중일 이것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이것이 있다.
일(一)과 일체(一切)가 상입하는 중문(中門))이다.
의상스님의 즉문과 중문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 듯이 물질(色)을 거론하면 물질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질이다.
물질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고, 모든 것 속에 물질이 들어간다.
마음을 거론하면 마음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또 마음이다.
그 어떤 개념을 떠올려도 그 개념의 범위에 테두리를 그을 수 없다.
그럼 학술적으로 설명을 해 보자,
모든 개념(concopt)은 내포(intension)와 외연(extension)을 갖는가?
내포는 의미, 외연은 범위에 해당한다.
내포와 외연은 역비례한다. 내포가 커지면 외연은 작아지고 내포가 작아지면 외연은 커진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살펴보자,
‘개’라는 개념이 ‘짖는동물’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면,
일반적인 개는 물론이고, 늑대, 여우, 승냥이, 자칼.. 등 개과의 동물이 모두 개념에 들어 온다. 범위너 너무 넓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키우는 짖는 동물이라고 의미를 확장하여 정의하면 개의 범위가 좁아진다. 개념의 내포와 외연, 즉 의미와 범위와의 역비례 관계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다.
각 개념들의 외연에 대해 몇가지 추구해 보자.
-우주,
일중일체
우주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엄밀히 따지면 우주 아닌 곳이 없다.
모든곳에 우주가 있다. 허공이 모두 우주다. 모든 곳이 우주다.
일체즉일이다. 모든 곳에 우주가 있다. 일체중일이다.
우주는 모든 곳이다. 일즉일체다. 우주에 모든 곳이 들어 있다. 일중일체다.
우주라는 개념의 외연은 무한으로 발산한다.
-시계
또 시계는 무엇인가?
시계는 그저 시간을 가리키는 물건일 뿐이다.
세상에 시간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다.
엄밀하게 추구해 보니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시계다
일체즉일이다. 시계는 모든 것이다. 일즉일체다.
모든 것 속에 시계가 내재한다. 일체중일이다.
시계속에 삼라만상이 다 포함된다. 일중일체다.
시계라는 개념의 외연 역시 무한으로 열려 있다. 테두리가 없다.
-욕심과 이드
감성의 경우도 그 외연이 열려 있을까? 욕심을 예로 보자,
욕심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욕심이다. 추구하고 추구하면 세상에 욕심 아닌 것이 없다.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욕심이다. 일체즉일이다. 욕심이 모든 것에 개입된다. 일체중일이다.
욕심속에서 모든 것이 작용한다. 일중일체다.
욕심은 모든 것이다. 일즉일체다.
-시작과 끝
시작은 어떤 사건이 새롭게 일어남을 의미한다.
시작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시작의 사례를 하나 하난 들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것이 시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일체) 시작(一) 하고 있다. 일체즉일이다.
시작하는 것은 모든 것이다. 일즉일체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 시작하는 사건에 모든 사건과 사태가포함된다.
일체중일이고 일중일체다.
시점을 뒤집어 보자,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고 있다.
시점을 돌리니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작하는 순간에 끝나는 순간이다. 시작이 끝이다.
글로서 다 나타나 있지만 우리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진리를 보기 위해 특별한게 없다. 꾸준히 해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밖에 없다.
창조와 종말은 어디에 있는게 아니다. 지금 여기 다 있다.
그러니 시작이다. 끝이다 말로 할 수 없다.
이걸 알면 세상이 달라진다.
변해서 달라지는게 아니라 내가 이 진리를 보면 저절로 달라진다.
창조나 종말이라는 말이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무너진다. 시작이나 끝은 생각의 세계 속에만 있던 개념들이다.
결국 실재 세계에서는 언떤 언어도 달라 붙지 못한다.
그래서 언어도단이다. 불가사의하다. 생각 할 수 없다.
-살, 신경, 뇌
하나를 드니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 범위가 무한이다.
살,
모든게 살이다. 그 통찰이 가능할까?
왜? 살일까? 보는게 모두 살이다.
망막에 걸친 내 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밖을 못 본다.
내 눈동자에 맺힌 영상을 분석하고 있다.
나는 나의 망막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귀의 소리는 어떤가? 고막의 울림을 듣는 것이다. 소리도 내 살이다.
냄새, 맛, 촉감 또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다.
안이비설신의 모든 지작은 사실은 모든 신경의 활동이다.
일체즉일이다. 살은 모든 것이다 일즉일체다.
어떤걸 들어도 그 속에는 일중일체, 일체일중이다.
신경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게 신경이다. 신경 하나가 끊어져도 작동되지 않는다.
뇌도 마찬가지!
뇌에 손상을 입으면 작동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뇌다. 일체즉일이다. 뇌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일중일체다
살,신경,뇌..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 어떤걸 들어도 테두리가 없다.
우리는 뇌를 구심점(핵심)이라 생각한다. 이것도 아니다.
뭘 이야기 하나?
연기를 얘기한다. 안 중요한 게 없다.
뭔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고보면 전부다 핵심이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뇌’가 엄청 중요하다고 ?
어디에도 구심적(핵심)이 없다.
여러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나만 중요한 게 없다. 모두 다 중요하다.
모든 현상이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모든 현상은 한 찰라도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
금강경에서 뭐라 했나?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하지 않았나!
제행무상이다. 이것 밖에 없다.
내 몸도 , 마음도 그렇다.
몸이라 할 것도 ,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심신탈락’이다.
이게 내 몸이고 마음인줄 알았지만,...
내 속에 뭔가 있는 것 같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깨닫기 전에는 모른다.
끊임없이 흘러간다. 한 찰라고 머물지 않아!!!
이것 밖에 없다.
몸도 마음도 내 것이라 할 게 없다.
제행무상이다. 제법무아다, 일체개고다
-안과 밖
앞에서 ‘내 팔이다’의 통찰은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통찰이다.
밖의 풍경도, 내 안에 있다.
소리, 촉각, 맛...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일체가 내 안에 있다.
모든 것은 내가 보는 것이고 객관이 없다는 것이다.
순수 주관은 있어도 순수객관은 없다.
밖의 대상은 특수한 주관으로 있다.
무슨말이냐?
내 식대로 보고, 듣고 한 그대로 존재 할 뿐이다.
이 세상은 내 세상이다.
알고 보면 내 세상에 누구도 들어 올 수 없다.
내 세계는 ‘내’만 있다.
혼자산다? 누구랑 같이 살 수 없다.
모든 것이 밖에 있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일어난다. 모두 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것이 밖이다.
그러니 우리가 입을 뗄 이유가 있나? 없나?
입만 벌리면 분별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 하셨다.
‘너무 많은 말을 한거 아닌가?
부처님은 분별을 떠났다. 중도에서 말씀 하셨기에 말했지만 말 한바 없는 것이다. 진리 그대로 얘기 했을 뿐이다.
뭘 얘기해도 알아 듣는 사람은 알아 듣고 못 알아 듣는 사람은 못 알아 듣는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알아 듣는 만큼 발심수행하게 된다.
알아 듣는 만큼 신심이 생긴다.
수행하는 만큼 청정해진다.
이게 다른 종교와 다른 차이다.
결국은 나를 해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