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2)/ 아브라함과 롯 : 지체하다 망한 자
2. ‘누구와 교제하는가’에서 아브람과 롯은 차이가 있었다/ 그분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교제를 위해 광야에 머물자. 우리가 위치하는 모든 곳이 광야일 수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아브람을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교제하셨다. 광야에 있다는 것은 소돔의 문화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영적인 분리가 정신적 구별을 이끌어내고 실제적 거룩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광야에 있다는 것은 구별의 정신을 가졌다는 뜻이다. 영적 안목을 가지고 소돔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광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셔서 교제하신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셨더라”(창15:5-6).
아브라함이 변화의 환경을 승리하면서 산 비결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교제에 있었다. 아브람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것은 아브람과 교제하는 하나님을 아브람이 믿었기 때문이다. 광야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다. 광야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뜻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롯과 롯의 가족들은 죄의 환경에서 끊임없이 소돔의 영향력과 접촉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롯을 차별하시어 찾아오시지 않으신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찾아오셨지만, 롯의 마음과 태도가 소돔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아브람과 롯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자녀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소돔의 문화에 접촉된다. 이런 글이 생각난다. 서울의 유명한 국립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었다. 그런데 결혼은 반드시 남녀가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수많은 성이 존재한다고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치도록 책들이 나온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런 책들을 접하도록 하는 세력이 있다. 초중등학교에 다닐 때는 손안에 핸드폰이 주어지고 그 안에 온갖 소돔이 우글거리고 있다. 대학에 보내놓으면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오염되어서 나온다. 신학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세속문화와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소돔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작고 미약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향하는(계3:7-13) 나사로 가정교회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족이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교회이다.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것이다.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접촉하는 일은 소돔의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예방책이다. 독자들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소돔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성경 말씀을 기쁘게 접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신6:6-9).
그렇게 어려서부터 영적으로 무장된다면, 소돔에서도 광야의 정신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승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루살렘의 미래의 운명을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셨던 것이다.
40년 후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눅21:20).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약 30년 이상 이후, AD 66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군인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런데 로마 군대는 갑자기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로마에 비상사태가 터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군이 포위를 풀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도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많았다.
후퇴하는 로마 군대를 공격하고 승리에 취한 유대인들은 떠나간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4년 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은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몰고 와 예루살렘성을 초토화시켰다.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때가 유월절과 겹쳤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요르단의 ‘펠라’라는 도시로 피했고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돔의 군대에 포위를 당한 형국과도 같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세상의 끝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한 사건을 가지고 두 가지 사건을 이해하도록 하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소돔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할 때이다. 소돔으로부터 도망할 때이다. 영적인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광야에 있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위치가 광야일 수 있다. 마치 성소가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백성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 애굽에서 마음을 분리하고 중심에 하나님의 성소를 모셔야 한다.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금은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롯처럼 지체하고 우유부단하면 소돔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진실 되게 취급하라. 그대의 육신적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 사이에 영원히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추상적 소망은 결국 그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소돔과 같은 이 시대에 롯처럼 살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살자. 그래서 곧 심판의 주로 소돔을 끝내시고 그분의 자녀들을 데리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 중에 맞이하자.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