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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이사야 53:7-12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그는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그 고통을 다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고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미 양처럼 입 한번 열지 않고 모든 고난을 다 참았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그가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감옥으로 끌려갔으나 그를 위해서 걱정해 주는 사람이 그의 시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내 백성의 죄악이 결과적으로 그를 죽였다.)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그는 폭력을 쓴 일도 없었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세상이 그를 죄인들과 함께 처형하고 추방당한 이들이 묻힌 무덤에 함께 묻었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그러나 그가 고난을 당하고 상한 몸으로 죽게된 것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고 죽어야만 했을 때에 그가 대신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끝없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죽음으로 여호와의 선하신 뜻이 성취될 것이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그가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빛을 보고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내 종이 내 뜻을 옳게 알았다. 내 종 자신은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으로써 그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될 죄의 벌을 대신 받았기 때문이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그러므로 내가 그를 위대한 종들과 함께 상을 받게 하고 승리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어 갖도록 하겠다. 그가 생명의 피를 제물로 쏟아 붓고 스스로 범죄자들의 편에 서서 죽음으로써 뭇사람의 형벌을 대신 지고 죄인 취급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7-9) 예수님 자신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필요했던 능력은 절제였습니다. 군중들의 요구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일 수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절제해야만 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신” 분이십니다(벧전 2:23). 하물며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그저 한 죄인의 죽음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라도 주님은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속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가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여호와가 원하신 일(10-12)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은 우리의 소견대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친히 증거를 주신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원하신 이유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 주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 씨’는 이로 말마암아 구속받은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속을 위해 내어 주길 원하셨고,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심으로 만족 하셨습니다(11).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일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적 용 :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감사합시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구원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교훈은 우리의 의무가 무엇임을 가르쳐 주지만 모범은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W.베이츠) 고통 중에 침묵은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셨습니다. 실로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징계와 채찍의 고통을 감내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 설 교 >
예수님이 당한 고난들
1. 서 론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처형은 로마인들이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자기기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백성들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처형을 무섭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식민지 백성들의 반항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반항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무서운 처형법을 개발을 했고, 로마인들이 개발한 처형법 중에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방법이 바로 십자가에 처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처형은 인류의 처형방법 중 가장 무섭고 악랄한 방법이였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 얼마나 무섭고 악랄했던지 사도 바울은 (갈3:13)에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그렇게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예수님의 죄악 때문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중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생각해봐야하는 것입니다.
①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② 그래야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당한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더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사랑을 알 때 비로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은혜와 사랑이 커도 그것을 모르면 누리지를 못합니다. 비록 은혜와 사랑 한가운데 있어도 그것을 모르면 그 은혜와 사랑을 하나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고난들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 본 론
1. 감정적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감정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한 감정적인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그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마16: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셨지만 미래를 아는 것만은 허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면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죽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몸소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신 흔적이 복음서에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스킾 그레이(Skip Gray)가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청소년기였을 때 예수님이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그 반란을 진압을 하고난 후에 다시는 그런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 1,600명을 10m 간격으로 16km나 길게 십자가에 못박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려 죽는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예수님의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커겠습니까?
2)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마16:36-46)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가 가까와오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16:38)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하게 인간으로서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마 26:42 / 나의 아버지! 만일 이 잔이 내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것이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지만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그 당시의 예수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 5:7-8 /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위에 계실 때 위대한 성업을 다 이루기 전에 너무 일찍 십자가의 죽음을 맞지 않도록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께 신음과 눈물로 기도하고 탄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순종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고난을 몸소 겪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순교자들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당할 육신의 아픔보다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뒤를 이어 순교의 표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 2:17 / 여러분의 믿음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부으라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골고루 이 기쁨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디모데후서 4:6 / 전제(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3)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눅 22:44)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의사인 누가는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겟세마네(Γεθσημανεί)란 말은 기름틀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치 기름틀에서 기름을 짜는 듯한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떨어지는 땀방울이 피방울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알렐산더 머드렐(Dr. Alexander Metherell) 박사가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을 의학용어로 혈한증(血汗症 - hematidrosis)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을 때 땀샘에 있는 모세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땀샘에 소량의 피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땀을 흘리면 그 피가 땀과 함께 섞여서 나오게 됩니다. 이 혈안증이 일어나면 피부가 매우 약해지며 바늘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수반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날 예수께서 로마군인들에게 채찍으로 맞을 때는 피부가 극도로 민감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두려움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모습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비유를 했습니다. 죽으러가는 짐승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오줌을 싸며, 똥을 싸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두려움과 불쌍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시기 위하여 이런 십자가의 고통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2. 때림과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인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 체포된 예수님은 다음날 아침 유대 공회에 의하여 재판을 받았습니다. 공회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데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대의 의회요 재판기관입니다. 이들은 온갖 거짓증인을 세워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침을 뱉고,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며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쳤습니다(막 15:65).
②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라 사람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내고는 예수가 로마를 전복하려고 했다고 하며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군중들에게 밀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③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로마법에는 사람을 39대까지만 때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론 로마병사의 감정에 따라 그 이상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채찍은 악랄했습니다.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 당시 로마인들의 채찍질을 잘 기록을 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채찍에는 쇠붙이를 붙이기도 하고, 뾰족한 뼈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 채찍은 무시무시한 채찍이라, 이것에 맞으면 살이 떨어져나가며, 뼈가 부스러졌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이 채찍으로 온몸을 마구 때렸습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때렸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로마의 채찍질을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이들의 채찍질에 핏줄이 터지고, 창자가 다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④ 예수님은 저채액성 쇼크(hypovolemic)를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심한 출혈이 있으면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서 생기는 쇼크입니다. 이런 채찍질을 당하면 많은 사형수들이 이 저채액성 쇼크에 걸려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저채액성 쇼크에 걸리면 신장이 오줌을 만들어내지 않고 잃어버린 피로 인하여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심히 세약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가지 못하게 됩니다.
⑤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막 15:18-20).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막대기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이 가시 면류관에 찔려서 예수님의 얼굴에는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이 때림과 채찍질을 당한 모습이 로마의 역사가 티쉔도르프(Tischendorff)의 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한 로마병사와의 인텨뷰를 기록을 했습니다.
이 병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십자가로 인도하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병사에게 “어느 게 내 아들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해서 마리아가 자기의 아들의 모습을 몰라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몰골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때림과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다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3.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중에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때가 제3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막15:25)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그 죽음의 고통과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하여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끔찍하여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만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 뜻이 잘 전달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 십자가라는 말에서 나온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어에 excruciate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십자가로부터(out of cross)”라는 말인데, 이것의 뜻은 “고문한다”는 뜻입니다. 고문이란 말이 이 십자가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별로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을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학자와 의사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가 아니라, 성경 밖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라는 곳에서 못 박혔습니다. 이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언덕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해골과 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골고다라고 했습니다. 골고다(Γολγοθα)는 해골이란 말입니다. 이 골고다라는 말을 라틴어는 갈보리(Calvary)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년 동안 수 천 명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십자가를 지고가야 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는 자기가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도저히 그 십자가를 못 지고 가시자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을 잡아서 억지로 대신 지고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옷은 다 벗겨졌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천주교에서 만든 십자가의 상을 보면 예수님의 하체가 가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가지 관계상 그렇게 한 것이지, 원래는 완전히 옷을 벗겼습니다. 그것은 히피족이 자기들의 옷을 벗고 다니는 것과 같이 스스로 벗은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하여 벗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의 모든 수치를 다 드러내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땅바닥에 누입니다. 그리고는 나무에 못을 박았습니다. 이때 십자가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세로로 되는 나무는 늘 그곳에 박아둡니다. 그리고 옆으로만 가는 것만 이동을 합니다. 먼저 십자가의 옆으로 가는 나무에 양손에 못을 박습니다. 이 못으로 양손을 십자가에 고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사용하는 못은 대못인데 5-7인치(12-17cm)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못의 끝은 뾰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이 못이 정중신경(median nerve)을 지나갑니다. 이 신경은 몸에서 가장 큰 신경 중의 하나인데, 그 신경을 못이 뚫고 지나갈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생깁니다. 그리고는 그 죄수를 들어올려서 이미 세워진 수직 나무에 고정을 시킵니다. 이때에 발에도 못을 박는데, 손에 못을 박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줍니다.
이때 팔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최대한 늘어날 수 있는 것보다 더 늘어나게 되는데, 약 6인치(15cm)가 더 늘어납니다. 그러면 대부분 어깨가 탈골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은 대부분 질식사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을 들이쉴 수는 있지만, 내쉴 수는 없다고 합니다. 숨을 내쉬려면 갈비뼈의 근육을 오그라뜨려야 하는데, 그런데 손과 발이 못에 박혀있고,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근육을 오그라뜨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숨을 내쉬려면 몸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그러려고 하다가 보면 박힌 못이 뼈와 신경을 자극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숨을 몇 번 쉬다가 보면 너무 고통스러워 숨을 못 쉬어 질식사 하고 마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일을 하던 로마병사들은 이 일에 숙달이 되어서 사람의 죽는 시간까지도 조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못 박는 다리의 각도를 조절함으로 죽는 시간을 조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쭉 펴서 못을 박으면 몸을 들어 올릴 수 없어서 숨을 내쉬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 죽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죽으면 더 빨리 죽게 하기 위하여 곤봉으로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러면 숨을 내쉬기 위하여 몸을 위로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식사로 죽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6시간을 십자가에 달려있었습니다. 사람이 6시간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일반적으로 질식사로 죽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정상적으로 죽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숨이 막혀서 질식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심장박동이 정지되어 죽은 것으로 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숨 쉬는 것이 늦어지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심장마비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심장이 멈춰서 죽었다는 증거는 요한복음 19:32-33에 나옵니다.
병사들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다리를 들어올려서 그들의 숨을 못 쉬게 하여 빨리 질식시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한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자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때 주로 오른쪽 옆구리를 찌르는데, 거기에는 심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심장에서 물과 피가 나옵니다. 심장에는 그 심장을 싸고 있는 깨끗한 액체가 들어 있는 심낭(pericardial sac)이라고 부르는 물주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낭에 물이 많이 차면 그 심장이 죽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심장의 피와 물과 같은 애체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그의 심장이 뛰다가 운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고통을 다 느끼면 죽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이렇게 죽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렇게 죽으신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져야할 그야 말로 가벼운 십자가를 말없이 지고 가십시다. 우리가 진 십자가를 통해 몇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