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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이 가타리나 | 과부 | 1839.9.? |
성녀 이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교리에 별로 밝지 못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열네 살 때 외교인 조씨에게 시집가야 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교리를 더 배울 기회도 없었고, 더욱이 계명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속에는 항상 하느님을 향하는 열심이 남아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남편을 권면하여 죽을 때에는 그에게 대세를 주어 선종하게 하였다. 그리고 삼남매를 모두 천주님을 사랑하게 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시댁 식구들은 천주교 믿는 것을 매우 반대하고, 끝내는 엄금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이들 자녀들 중에서 맏딸인 조 막달레나(Magdalena)가 제일 열심하였다. 막달레나는 어머니 곁에서 부지런히 경문을 배우고 교리서를 읽으며 교리 설명을 들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신공을 바쳤다. 그렇게 하기를 하루도 빠진 적이 없을 만큼 대단히 열심하였다고 한다.
이 카타리나는 딸이 장성하자 어떤 교우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딸은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킬 원의가 있음을 말하였다. 이 카타리나는 딸을 이해할 만큼 열심하였으나 외교인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기고 의심할 것이 두려워 딸로 하여금 서울의 어느 교우 집 하인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
막달레나는 30세가 넘어 집에 돌아왔으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딸과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남의 집에서 살고 있을 때 다시 큰 박해가 일어나 두 모녀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3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녀는 오로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쓰리라 다짐하다가, 모진 고문과 주리를 당하고 또 모진 옥중 고통으로 열병에 걸려 1839년 9월 하순에 옥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47 |
조 막달레나 |
동정 |
1839.9.? |
성녀 조 막달레나(Magdalena)는 같이 순교한 이 카타리나(Catharina)의 맏딸이다.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엄금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막달레나는 외가로 돌아와 살기로 하였다. 그녀의 외조모는 매우 열심하였기에 그들은 편안히 본분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고분고분하게 듣고 열심히 배웠으며 천주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빠르게 진보하였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신심의 일을 다 한 다음에야 집안일을 했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가사를 돌보았다.
그녀의 나이 18세에 이르자 어머니가 딸을 교우에게 출가시키려 하였고, 막달레나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킬 결심을 말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집안 친척들과 또 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외교인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어떤 교우 집의 하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쉴 새 없는 노동과 음식이 넉넉지 못하여 병에 걸리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에서 완쾌되자 그녀는 좀 덜 고된 교우 집으로 옮겨가 여러 해를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 극히 필요한 것 외에는 절약하여 시골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도왔다.
서른 살이 된 그녀는 이제 혼담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효성과 열심함으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교리를 모르는 이에게는 가르쳐주고, 병자를 간호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또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쉬운 일은 남에게 시키고 힘든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였다. 자신의 고생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박해로 인하여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1839년에 이르자 외교인들이 교우들을 못 견디게 굴기도 하고 또 박해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여 위험이 더 급박하여졌으므로 막달레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살기로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막달레나 모녀가 서울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회장에게 분부하여 교우 집에 살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모녀는 회장이 주선한 조 바르바라(Barbara)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 집에는 조 바르바라와 그녀의 두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세는 조 막달레나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모면하려던 박해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서울에서 더 심하였다. 그래서 함께 살던 교우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박해를 받으면 잘 참자고 권면하며 지냈다.
이윽고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포졸들이 주교 계신 곳을 알아내려고 사방으로 찾아다닌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만일 주교님이 잡히시면 우리도 자수하도록 합시다.” 하고 한 사람이 제의하자, 막달레나는 힘찬 목소리로 “예, 자수하는 것이 관계없다면 우리 예수님과 우리 주교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수할 필요도 없이 한 달도 채 못 되어 기해년 7월 상순 어느 날 수많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장이 그들을 불러 문초하고 각각 주리 한 번을 틀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감방도 좁은데다가 교우들로 가득 차 있었고 또 때는 아주 무더운 한 여름이어서 열병이 발생하였다. 두 모녀는 마침내 열병에 걸려 1839년 9월 하순 며칠 사이를 두고 차례로 천주님을 찬미하면서 옥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48 |
유대철 베드로 |
소년 |
1839.10.31 |
성 유대철 베드로(Petrus)는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장남이다. 그런데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반면, 모녀는 믿기는커녕 이를 반대하여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어머니께 대하여는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일어났다.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자수하였다. 재판관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고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리고 옥사장이 혹형을 대철에게 가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포졸이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집어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대철이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다. 대철은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그를 데려와서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한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유 베드로는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지만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관헌들은 어린 그를 공공연히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서 1839년 10월 31일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상처뿐인 이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49 |
유 체칠리아 |
과부 |
1839.11.23 |
성녀 유 체칠리아(Caecilia)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유명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남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남편이 옥에 갇혔을 때 그녀 역시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다.
그러나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체칠리아는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여 무수한 고생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큰 딸과 순교한 전실 아들인 정 카롤루스(Carolus)의 아내와 아들이 죽고 다만 자신이 낳은 아들 정하상 바오로(Paulus)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만이 남았다.
어느 날 밤 체칠리아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나는 천국에 방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치고 셋만 남았소. 그러니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과연 가족 여덟 식구 중에서 이미 다섯이 순교하였으니 이 꿈은 나중에 꼭 들어맞았다. 그 꿈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박아주어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는 신심이 깊은 생활을 하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영입하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 체칠리아에게는 이것이 큰 시련이었고,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기도로써 참아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니 어떤 때는 그녀가 먹을 것도 먹지 않고 내어주었다고 한다. 또 나이가 너무 많아서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일 때 그녀의 조카 한 사람이 시골에 집까지 장만하여 주며 피신하기를 권했으나,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데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 또한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큰 죄나 지은 국사범과 같이 오라로 꽁꽁 묶여 끌려갔다. 그것은 그녀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요, 그녀의 아들이 외국인과 자주 만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옥에 갇혀 있던 체칠리아는 포장 앞에 나가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백 30대나 맞았다. 기운이 쇠약한 체칠리아였으나 끝까지 참아내며 자세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 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기 때문에 재판관들은 때려서 죽이기로 하고 두 번이나 그녀를 불러내어 문초를 거듭하고 위협하며 형벌을 가하였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39년 11월 23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79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50 |
최창흡 베드로 |
회장 |
1839.12.29 |
성 최창흡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서 1801년에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의 아우이며, 자신과 같은 해에 순교한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그의 부인이고, 1840년에 순교한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는 그의 딸이다. 열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또 형의 순교 후 집안의 파산되었으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몇 해 동안을 신자들과 떨어져 어느 정도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끝난 1815년경에 다시 신자들과 가까워져 기도문과 교리를 배워 익혔다. 그리고 지난날의 자기 생활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하여 순교만이 자신의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30세경에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안인 서울 출신의 손소벽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 열한 명을 낳았으나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최창흡은 부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나가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살아가던 최 베드로와 그의 가족은 6월에 함께 잡혀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혹독한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신문 중에 포장이 최 베드로에게 “네가 사도를 행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천주교를 믿습니다.” 하며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배반하라.” “못합니다.” “언제부터 천주학을 했느냐?” “어려서부터 믿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포졸들은 모두 “이 놈은 그 교의 늙은 괴수로구나” 하고 소리 지르며 욕하였다. 최 베드로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150도의 태형을 당하였으나 배교도 아니 하고 신자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형조로 옮겨 가서도 같은 형벌과 또 매우 혹독한 장형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한결같은 용기로 참아 받자, 바로 그날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최 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옥졸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수레를 타고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최 베드로는 옥에 갇힌 지 7개월 후인 12월 29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