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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말 뜻
불교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한 가르침을 기독교라 하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명명법이다. 여기서 부처님이라고 함은 불타 석가모니를 말한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주이다.
불교는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설법함으로써 성립된 종교이다.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법'이라고 하는데 불교를 달리 말하면 '불법' 즉 부처님이 말한 진리이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가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가.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생겨났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것을 염원하는 까닭이다. 결국 불교는 목적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다. 실천을 '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불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붓다를 '부도'라고 음사하고 한국에서는 '부처님' 일본에서는 '호도게'라고 부른다. 한자의 '불(佛)'은 붓다를 표현하기 위한 조자(造字)이다.
불교라는 한자어를 범어로 표현하면 '붓다-사사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에서 힌두교나 자이나교에 대비해서 불교를 부를 때는 '바웃다' 또는 '바웃다 다르마'라고 한다. 바웃다는 '부처님에 관한' '부처님에 속한' '부디즘'이라고 표기한다.
'불법'의 원어는 붓다 다르마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르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하나의 뜻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라고 부르기보다는 '불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불법의 권위는 왕법, 즉 세속적 국가권력보다 높다는 의미로서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불법이 왕법에 종속되었던 것이 역사상의 사실이다.
불도는 불교도들이 사용하는 '보회향문'중에서 '개공성불도'라고 하는데서 나온 말이나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의 삼요소(佛.法.僧)
불.법.승은 불교를 구성하는 세가지 기본적 요소이다.
첫째 불이란 곧 부처님으로 이것이 없으면 불교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없었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의 출현, 즉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은 것, 성도하여 부처님이 된 것을 인정함으로써 불교는 시작된다.
그러나 만약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된 후에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석가모니의 가슴속에 갇혀 있다가 그가 죽는 것으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불교'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석가모니의 설법이 가진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우리들은 그가 남긴 가르침을 통해서만 이 깨달음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가 있다. 즉 진리로써 가르쳐진 '법'은 불교를 성립하게 하는 두 번째의 기본적 요소이다.
그러나 또한 '불법'은 가르침을 듣는 자와 '불도'를 실천하는 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가 되기 위한 도를 실천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승가라고 부르며 '승(僧)'이라고 약칭한다. 승가는 교주 석가모니의 제자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본래 뜻이지만 넓게는 각 지역, 각 시대의 교단을 말한다. 이 집단이 없이는 제자에서 제자에게로 불교가 상속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었다면 불교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의 존재는 불교의 생명을 영원하게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의 하나이다. 이것이 세 번째의 요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세 가지 요소, 다시 말해 첫 번째 불(붓다), 두 번째 법(다르마), 세 번째 승(상가)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는 의미에서 '삼보(三寶)'라고도 한다.
불.법.승의 세가지 요소는 오늘날 종교학에서 말하는 종교를 성립시키는 불가결한 요건인 교주(佛).교리(法).교단(僧)에 해당한다. 자연종교나 민족종교에서 교주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종교가 결정되므로 특별히 교단에의 가입(入信) 의식도 없다. 또한 교단도 간단해서 조직화 된 것이 없다.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성황당 신앙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종교(불교.기독교.이슬람교)는 이와 다르다. 교주와 교리와 교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의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삼보에의 귀의
삼보는 불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모든 불자는 삼보를 마음의 귀의처(歸依處:위험할 경우 안전하게 숨을 곳을 말함)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삼보에 대한 귀의의 표명은 통상 다음과 같은 구절의 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나무불타(南無佛陀)
나무달마(南無達磨)
나무승가(南無僧伽)"
그러면 왜 삼보는 귀의할 가치가 있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불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양족중(兩足中) 가장 훌륭하기(兩足尊) 때문입니다. 법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떠난 청정함 가운데 가장 훌륭하기(離欲尊) 때문입니다. 승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중에서 가장 훌륭하기(和合尊)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족존이라 함은 두 발로 서 있는, 다시 말해 인류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 불타, 즉 석가모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또 승을 화합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교단이 인간이 운영하는 집단, 공동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승은 곧 평등과 화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법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하는 것은 교주의 가르침이 욕망을 떠난 이상상태(이를 열반이라고 한다)로 인도하는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매개로 하여 교주와 제자들이 화합하여 이상적인 공동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불교교단의 당초 목표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귀의의 대상이 본질적으로 어느 특별한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니고 인간이 만든 모범적인 대상이었다. 즉 인간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방불교권에서는 일상적으로 팔리어의 '삼귀의문(三歸依文)'을 세 번 한다.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붓담 사라남 가차미(나는 불타를 귀의처로 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차미(나는 진리를 귀의처로 합니다.)
상감 사라남 가차미(나는 승가를 귀의처로 합니다.)
삼귀의는 불교에 입문할 때 수계(受戒)와 함께 한다. 의정(義淨:635~713)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 의하면 수계할 때는 먼저 삼귀의를 하도록 되어있다. 즉 '나무불법승(南無佛法僧)'을 세 번 외운 뒤 '귀의불양족중존 귀의불이욕중존 귀의승화합중존'을 세 번 외우는 것이다. '나무(南無)'란 산스크리트어로 예경?경의를 표명하는 말이다. 원어로는 나마스로 '나무'는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인도 인들이 통상 인사할 때 하는 말 나마스트(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에서 온 말이다.
다음에는 '귀의불경 귀의법경 귀의승경'을 삼창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경(竟)'이란 '이미 끝났다'는 완료의 뜻으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교단에 귀의했습니다.'라는 말이다.
《화엄경(華嚴經)》정행품에는 다음과 같은 삼귀의례문이 있다.
"자귀의불 당원중생 체해대도 발무상의
自歸依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意.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같이 대도를 체해(體解)하고 무상의(無上意)를 발하게 하옵소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심입장경 지혜여해
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藏經 知慧如海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깊은 장경(藏經)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옵소서.)
자귀의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
自歸依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스스로 교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대중을 통리하고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삼보에 귀의함과 동시에 중생제도를 서원하는 대승 불교의 이타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다.
법의 절대성
삼보는 이와 같이 처음에는 교주 석가모니와 그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교주의 입멸과 동시에 그 의미가 변화됐다. '불'은 이미 현전의 교주가 아니고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 점차 신비화되어 갔다. 그리고 '부처님은 누구인가'의 구명이 후계자들의 과제가 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제불의 관념이 생겨났다. 아울러 부처님은 신앙의 구극적 대상으로써 신과 대등한 절대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제자들에 의해서 정리되어 '경전'으로 전해져 왔으나 진리탐구의 열의는 대승불교에서 보는바와 같이 새로운 경전의 편찬과 발전된 교리 해석을 낳게 했다.
현재 불교도는 본존으로서는 불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서 경문을 외우는 형식으로 불과 법에 동시에 귀의를 한다. '승'은 출가수행자, 전문 교역자를 승이라 하고 있으나 귀의의 대상으로는 인간의 이상상으로서 보살과 나한 역대 조사등을 모시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아미타불'은 귀의불, '나무묘법연화경'은 귀의법, '나무관세음보살'은 귀의승을 표명하는 것이다.
삼보는 이와 같이 동등한 귀의와 예배의 대상으로 되어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불?법?승은 구극적으로는 하나의 가치로 귀착한다는 것이 교리적 해석이다. 이 구극적 가치에는 '법'이외는 없다. 불이라 함은 '진리를 깨달은 자'인 이상 '깨달은 진리(所證의 法)'는 절대적이며 이것은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는 것과 관계없이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진리(所證의 法)'의 근원, 즉 법계 또는 진여이다. 한편 승은 '진리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의 집단이므로 삼자는 법을 매개로 하여 일체가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삼보라 한다.
원시불교의 인간중심주의는 비인격적인 법의 절대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었고 대승불교도 기본은 같다. 다만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진리와 일체가 된 자' 즉 여래라는 의미로서 불이 즉 법이라는 형식으로써 절대자를 구한다. 여기서 '불(佛)은 법신(法身)'이라는 이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을 표면에 내세워서 종교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불교의 특질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진리와 하나가 된 절대와의 합일을 목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같은 신교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다. 절대자와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사상은 널리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와 회교의 일부에도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브라흐만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가르침에서 볼수 있는 것과 같이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한다. 불교는 오히려 이같은 인도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과 소승
불교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 기본적 요소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다룰 여러 가지 문제에서 제시 될 것이나 그에 앞서 약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가 흔히 '불교'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한국 불교가 있고 스리랑카 불교가 잇는 것과 같이 현실적으로 존속하는 교단은 그 내용이 각각 틀리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입장에서 해석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불교, 즉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불교는 오늘날 장로 불교(또는 상좌부 불교)라고 불리우고 있다. 우리는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좌부쪽보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대답하는 것이 이해도 용이하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대승불교라는 것은 근대불교학이 밝혀낸 성과에서 보면 부처님이 입멸한 지 5백년이 지난 때에 생겨난 일종의 개혁 운동이다. 그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아함'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왔다. 대승불교에서는 아함을 무시한 것은 아니나 스스로 교리의 근거로써 이른바 '대승경전'을 소유했고 그것만이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담은 것이라고 주쟁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그들의 경전이 당연히 '부처님이 말씀(佛法)'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설'이 아니다. 즉 대승은 '비불설'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학문적 상식으로는 '대승비불설'은 당연하나 같은 방법의 연구에 의하면 실은 아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불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아함이면서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과 스리랑카 등 남방의 여러 불교권에서 사용되는 팔리어와는 약간의 상위가 있음을 근대불교학을 밝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역 중에서도 각기 다른 부파에 의해 전해진 경전이 혼재하고 가르침의 내용도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같은 현상은 불교가 부처님의 입멸이후 약 1백년 경부터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마침내는 20여 개가 넘는 부파를 형성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 부파는 아함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점차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어 어느 사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내용과는 상당한 간격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이와 같은 부파교단의 학설이 부처님의 참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입장에서의 복원을 목표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대승불교가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시 말해 '부파의 교설'을 지칭한다. 소승이라고 불리우는 의미 속에는 출가자가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재가불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비난이 포함되어 있다. 대승은 소승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깨달음에의 길로 나가는 길이다. 그것은 대승불교운동 실천자(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이타적 실천, 즉 자기의 깨달음에 앞서 다른 사람을 먼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부파의 교학은 아비달마라고 한다. 그 의미는 '다르마'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 바꿔 말하면 '법의 연구'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대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각 부파는 불설인 아함을 연구하면서 자기들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석을 독자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 보면 '불교학의 발전'이기도 했으나 부처님의 참뜻을 적지 않게 왜곡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비달마학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역으로 전해진 것으로는 설일체유부의 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리랑카 장로 불교에 전해진 팔리어 불전이다. 그 중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영향을 받은 것은 유부의 교학이다.
유부의 교학을 알기 위한 대표적인 강요서는 바스반두(世親)가 쓴 ≪구사론(俱舍論)≫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때 현장이 번역한 것이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불교 강요서 또는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유식론(唯識論)≫도 많이 읽힌다.
세친은 대략 5세기경 사람으로 형은 아상가라는 사람이다. 세친은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하다가(구사론은 소승교서다) 나중에 형을 따라 대승으로 전향해 ≪유식론≫을 썼다. 그러므로 ≪유식론≫고 ≪구사론≫은 대소승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비슷한 점도 있다. 그러니까 유식의 학설은 '대승의 아비다르마'인 셈이다.
사실 대승교학의 뿌리가 소승교학에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히 ≪구사론≫의 입장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불교를 알려고 할 때 학문적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를 알고 싶은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최근의 불교학은 부파적 해석이 가미된 여러 가지 불교경전에서 공통항목과 공통된 교리를 모아서 재편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부처님이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본뜻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러한 의도 아래 불교학자들은 부처님 시대의 불교 또는 부파로 갈려지기 이전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하며 다시 그 위에 가장 오래된 것을 '최초기의 불교' 또는 '근본불교'라고 부른다. 뒤에 발달된 불교를 '소승불교(또는 부파불교)'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소급하여 불교의 원초형태를 찾아내는 것만이 불교의 내용 전체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인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숱한 변모를 거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조직과 제도를 가진 것을 통틀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역사적 엄밀성도 고려해야 하지만 불교가 불교로서의 체계를 확립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그
위에서 후대에 발전된 교리체계를 언급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리하다.
불교의 성전
불교의 성전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 제자들이 스승이 살아 있을 때 말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과 교단에 관한 여려가지 규칙을 정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 결집이라 한다. 이 때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법', 교단의 규칙을 '율'로 지칭하였으며 그 두가지가 성전의 전부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법이라 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 대응한 것이어서 표현상의 차이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모순을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른바 '8만 4천 법문'으로 불리우는 부처님의 설법은 해석을 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생긴 것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는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 철학에 비견될 만하다. 아비달마의 성립에 따라 '법'은 가르침의 기본이라는 의미에서 '경'이라고 불려지게 됐다. 이에 대해 아비달마는 주석해설서라는 의미에서 '논'이라고 불리운다. 삼장은 경․율․논을 총칭하는 말로 장은 '모아서 정리한 그릇'이라는 뜻이다. 또 율에 대한 주석도 나타났다. 이를 '아비비나야'라고 하는데 이것은 율장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독립된 장을 이루지는 않았다.
법 또는 경은 원래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말씀되어진 것이라 하여 '금구설법'으로 불리우며 아함이라고도 한다. 아가마란 '전해진 것'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성스럽게 전승된 경전을 말한다. 물론 모든 아함을 금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하여튼 그같이 전승되어 왔다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아함경≫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장(長)․중(中)․잡(雜)․증일(增一)등 네가지로 분류된다. 이같이 구분하는 것은 인도에서 부파교단이 전승해온 경전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경장속에는 아함경 외의 것도 포함돼 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불교도가 일상으로 읽고 있는 대승경전들이 그것이다. 대승경은 《법화경》《화엄경》《아미타경》을 비롯해《유마경》《반야》그리고 《대일경》《금강정경》에 이르기까지 그 숫자도 많고 내용도 다양하다. 이것들은 모두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써 역사적으로는 부처님의 설법과는 관계가 없는 후세의 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대승비불설'은 틀림없지만 대승불교 쪽에서는 오히려 《아함경》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참뜻을 전하는 심원하고 구극적인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불설'이라고 표명하는 것은 단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대승불교가들의 신념의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사실 대승경전은 여러 가지 발전된 교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깊고 높게 했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승경전도 아함경과 같은 '경'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는 '여시아문'이라는 말로 첫머리를 시작한다. 경을 말할 때와 장소․청중 등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확대되고 공상을 하고 싶은대로 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중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해서 들은 사람이 '개대환희 신수봉행'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형식을 지킨 것은 모두 '경'으로 인정되고 경장속에 포함된다.
인도에서는 불멸 훨씬 뒤에까지 새로운 경전으로 계속 만들어졌으며 중앙아시아(西域)와 중국에서도 몇 가지의 경전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그같은 중국제 경전을 판명하기 위해 '위경'이라는 말을 썼으나 근대학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위경으로 지칭될 만한 것들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대승 경전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위경이라 해도 내용적으로 불교교리가 일관되게 말해지는 뛰어난 것이 있고 그것을 경으로 존중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중국에서는 경․율․논 삼장을 총칭해 '경'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경은 '성전'과 같은 뜻으로써 '대장경' 또는 '일체경'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래 이후 삼장에 속한 여러 가지 성전이 점차 번역돼 왔으나 역대의 왕조는 그 관리에 주력하여 '입장'을 시키고 또 '경록'을 만들었다. 대장경은 그같이 하여 입장된 역경류의 집대성이다. 그중 경장은 소승경(아함경)과 대승경, 논장도 대승론, 소승론으로 갈라져 있으나 율장의 경우는 계뿐이며 율은 아니다. 한역 율장 속에서는 《사분율》《오분율》《십송률》《마하승지율》《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를 5대부로 칭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원래 부파의 율장이었다. 율장은 교단의 규칙이었으며 부파별로는 독자적인 것이 있었다.
대장경 중 논장에는 중국인이 만든 주석서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만든 교의서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집성한 대정신수대장경 속에는 한국고승의 것과 일본고승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대장경에는 한역 외에도 남방불교가 사용하는 팔리어 성전(경․율․논 삼장을 완비, 후대의 논전은 장에서 제외한다고 한다)과 티베트어역 성전 등이 있다. 또 산스크리트어와 기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진 경․율․논 원전과 단편들이 현존하고 지금도 발견되어 출판되고 있다. 또한 티베트어역 대장경은 다시 몽고어․만주어로도 번역되어 현존하고 있다.
불경은 원래 암송되어 왔으며 또 부처님의 유시에 따라 인도 각지의 사투리로 설해져 왔다. 그것은 점점 교단이 소재하는 지방어에 의해 기록 정리되어 왔다. 팔리어는 원래 인도방언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팔리란 성전어의 뜻) 그 필사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 본토에서는 그후 지방어를 산스크리트어로 고치는 작업이 있었다. 굽타왕조 이후의 저작은 대체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다. 티베트어역은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번역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역도 옛날 것은 북인도 지방의 방언과 서역(중앙아시아)의 언어로 쓰여진 것의 번역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부처님의 지혜, 자비, 행원, 원력을 통해
나의 마음 또한 부처님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고
'지극히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남과 더불어
그러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로운 마음이란 밝게 깨달아 어디에도
흔들림없는 편안한 마음을 말한다.
불교를 통해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아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
스스로 주인공인 삶을 사는 것...본래 내가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
고통과 번민에서 자유로와지는 것...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부처님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섭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과연 부처님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으신 것은 무엇이며, 감히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불교를 아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마 불교에 입문하기에 앞서 누구나 이런 의문들을 한번쯤은 품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불교에 첫발을 내디뎠으리라. 물론 앞으로도 이런 의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또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데 소중한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진리의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무엇을 추구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그 선택에 불교는 하나의 커다란 나침반이 될 것이다. 불교는 어떤 종교이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지혜로운 삶은 어떤 것인지 공부해보자.
1. 종교란 무엇인가
지구상에는 다양한 민족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왔다. 그래서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의 일반적 정의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란 한자 뜻 그대로 풀면 최고의 가르침, 인생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문제삼으며 그것을 몸소 해결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교리. 교도가 있어야 성립 된다.
올바른 종교를 찾아서 믿고 몸소 행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어쩌면 삶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종교에 의지하여 그 질곡에서 빠져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전능한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믿어 예배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처럼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자의 품 안에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결과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바로 신을 따르는 종교와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 신을 믿는 것은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이다. 서양 종교에서 신은 절대적 존재이므로 인간은 그 신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 등 과학 문학이 발달하면서 동양 등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자, 서양에서는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걸림이 없는 자유와 지극한 행복이 신만이 아니라 내 자신 속에도 있고 삼라만상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은 생각의 편협성을 깨닫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들 스스로 편협하다고 인정한 서양의 종교관과 가치관에 갇혀 있는 형편이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을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 역사에서 더욱 빛이 나고, 부처님은 인류의 대스승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불교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믿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란 무엇인가
1) 진리에 대한 깨달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다. 그러나 부처님 스스로 한 번도 당신이 세상이 세상의 절대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세상의 진리를 먼저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불교’의 ‘불(佛)’이란 고대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붓다(Buddha)’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 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라도 진리를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진리를 깨치면 신조차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절 입구에서 있는 사천왕들은 본디 하늘에 사는 신이었는데, 부처님의 그르침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토록 부처님 법을 보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스스로 발심하여 부처님 도량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경지조차 뛰어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삶을 당당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삶의 결과도 자못 다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 돼” 하면서소극적인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만큼 더 목표와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행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삶을 직시하여 그 해답을 제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병로병사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은 쉽지만 태어나는 일만 생각해 봐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받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 사느니 힘겨워한다. 그리고 큰 병에 시달리거나 평생을 서로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고통과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듯 돌아보면 삶의 많은 시간이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환희의 시간보다 슬픔과 후회의 시간이 더 길고 많다.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왜 이 길을 가야 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삶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다. 이렇듯 길을 모르면서 그저 어둠 속을 헤매듯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은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가책 없이 그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급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의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하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없다며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으로 얻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마음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날 때 우리는 코끼리와 독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깨닫는 순간 코끼리도, 우물도, 두 말리의 쥐도, 독사와 뱀도 말끔히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3) 주인공은 나 자신
때때로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라고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자신도 그곳을 복잡하게 만드는 장본인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일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어떤 일에서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 일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수저로 제 입에 밥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를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먹여주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지옥 사람들과 달리 모두 맛있게 먹으며 행복하게 산다.
이는 지옥과 천상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교훈이다.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삶은 대조적이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을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바꿀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뀔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나 자신이다. 즉 세계를 바꾸는 것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공인 자신의 지혜와 그 지혜로 말미암는 걸림 없는 행위이다.
4)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는 믿음과 더불어 스스로 노력하는 수행을 강조하며, 그런 수행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믿고, 나아가 나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사실과 진리를 믿어 자신을 비추어보며, 이웃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고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불교이다. 절대자에게 무조건 빌어 용서를 받고 그에게 귀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깨워 내자신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곧 믿음과 수행을 겸비하는 불교의 참모습이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根機 :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본 바탕)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사상체계를 이루면서, 다시 수많은 조사스님들과 수행들이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처럼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특징은 절대자로부터의 구원만을 중시하고 유일신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불교도 부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통한 구제의 길도 열어 놓지만, 결국에는 내면의 힘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길을 향한다. 나를 철저히 버리고 그것이 부처님 마음으로 변하는 내면의 변화는 믿음과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점을 강조한 것이 불교이다.
5) 지혜의 길
부처님 가르침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깨달음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지혜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 그러면 지혜는 지능지수가 높은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지혜는 지능이나 지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생각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즉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과 전체를 통찰할 때 지혜가 열린다. 부처님은 지혜의 길을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너희들 비구여, 만일 지혜가 있으면 곧 탐착(貪着)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자세히 살피어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라. 이것을 우리 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미 도인도 아니요 또 속인도 아니라,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이 없느니라. 실지혜(實智慧 : 진리를 달관하는 참 지혜)는 곧 늙음과 죽음과 병듦의 바다를 건너는 굳건한 배요, 또한 무명의 어둠 속의 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요, 번뇌의 나무를 치는 날카로운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로서 자기를 더욱 길러야 한다. 만일 사람이 지혜의 빛을 가졌다면, 그것은 비록 육안이지만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 하느니라."
그렇다면 지혜의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가?
첫째, 무명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비록 원수 사이일지라도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거나 원망과 욕심을 버리면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우가 생긴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상대가 자기가 바라는 만큼 해주지 않았거나 지기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또한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무명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밝은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다면, 그 다음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뒤에 오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잘못된 행동 때문에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에 연연한 행동과 욕망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며, 그 길을 함께 가고자하는 가르침이다.
6) 참나를 찾아서
잠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우암품>
우리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시덩굴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뛰어들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격이다.
이를 두고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중생이 불타는 집에서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다.
참나, 본래의 청정한 나를 찾으려면 먼저 탐욕을 버려야 한다. 참 나는 곧 진리요 깨달음이다. 그래서 참 나를 찾아가는 길은 곧 깨달음을 향한 길이다. 참 나를 찾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게 생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숲 속 나무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젊은이들이 숲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다가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근처에 사는 지체 높은 집안 자제들인데, 50명이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러왔다. 그 중 총각 한 사람이 기생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생이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의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사정을 듣고 난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잊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과 욕망의 세계로 계속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탐욕의 끝은 파멸이요 절망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십이장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 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니 옥 따위의 보배를 깨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아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셨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을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난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고려시대 야운스님은 자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俗塵)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초발심자경문>
3. 진리를 향한 정진
1) 삼귀의 - 올바른 믿음의 출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삼보란 세 가지 보배라는 말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를 말한다. 이 삼보에 신명을 바쳐 믿는 것을 '삼귀의'라고 한다.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고 참다운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여 살아간다는 뜻이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쳐 우리에게 보여주신 따사롭고 인격적인 부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진리를 온몸으로 구현한 온화하고 대자대비한 부처님을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섬으로 여기고 귀의하여 흔들림없는 마음의 확신과 안정을 얻는 것이다. 그 다음 진리 그 자체인 법에 귀의하는 것이 법귀의이다.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에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좋은 벗과 복 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삼귀의는 부처님 당시부터 수계식 등 여러 의식에서 실행되었고, 지금도 모든 불교 의식 때 빠짐없이 행하는 의례가 되었다. 초기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나 삼귀의 삼창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리키심과 같이, 어둠 속에 등불을 들고 와서 눈 있는 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원컨대 오늘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께 귀의하는 불자로서 저를 받아주시옵소서."<숫타니파타>
이토록 넘치는 환희로 부처님께 귀의한 불자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깊은 믿음을 잃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를 공경해야 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사람없는 광야를 갈 때에는 여러 가지 공포를 느낄 것이며, 마음은 놀라고 머리카락은 곤두서리라.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如來)를 염하라. 부처님은 응공(應供), 등정각(等正覺), 불(佛). 세존(世尊)이시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마땅히 법(法)을 염하라.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은 현재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승(僧)을 염하라. 부처님 제자들은 잘 수행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세간의 복전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장아함경>
삼보에 귀의하면 이렇듯 평화와 안온함을 느끼게 된다. 불교를 믿기로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 발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바르게 신행해야 한다. 이것이 발심(發心), 즉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참다운 모습이다.
2) 자신을 낮춤 - 하심(下心)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어느 누가 나를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그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찾아내어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절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인데도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 하며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겸손함을 잃고 아상만 높은 경우가 있다.
최고라고 우쭐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특히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자신을 낮추어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교만심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 당시, 스님들이 탁발을 한 것도 다른 이에게 복을 짓게 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향해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라야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탁발을 금하고 있다.)
3) 계를 지키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 지계(持戒)와 참회(懺悔)
"누구나 어두운 곳보다 밝고 환한 곳에 머물고 싶을 것이다. 빛은 생명을 품고, 어둠은 죽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과 밝은 곳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걸음일 것이다. 만일 등불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방향을 가기 쉽고, 발걸음이 잘못된 곳으로 우리를 이끌며 부딪이거나 넘어져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여기서 등불은 바로 진리의 가르침과 밝은 빛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계율이다. 진리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계율은 우리의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그리하여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지 않게 하고, 넘지말야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도와준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잘 지키면 저절로 밝은 지혜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열심히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공부를 할지라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헛수고에 그칠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가 죄나 복을 짓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항상 몸과 말과 생각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전혀 잘못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매순간 욕망이 싹트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를 돌이켜보며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일에 끄달리기도 하며, 갖가지 병고에 시달리는 등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고, 아주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으면 뉘우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다면 바로 참회하고,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부끄워하며 곧바로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죄업은 날로 줄어들고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계실 때였다. 아니룻다(아나율)가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고, 법회가 끝난 뒤 부처님께서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아니룻다가 대답했다.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는 어찌하여 설법을 하는 자리에서 졸고 있느냐?”
아니룻다는 자신의 허물을 크게 뉘우치며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를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이 생기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가 생긴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께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앞을 못보게 되었다. 그러나 힘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렸다. <증일아함경>
이처럼 참회는 자기 반성에서 출발하여 정진의 강한 동기가 된다.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삶을 돌이켜보고, 올바르게 깨달음을 향해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허물을 발견하면 스스로 부처님 앞에 고백하고 3배, 108배, 1080배, 3000배 등으로 참회해야 한다.
4) 끊임없이 정진하라
처음 먹은 마음을 '초발심(初發心)'이라고 한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이란 말이 있다. ‘처음 마음을 발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 고 풀이하는데, 이는 ‘처음 먹은 마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님의 경지’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원을 세우지만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걸, 차라리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처음 마음을 접고 싶을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지가 바로 정진이다. 변함없이 정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길이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근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끊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렸다.
“소오나야, 너는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 때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골라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해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아마 많은 수행자들이 소오나 비구처럼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정진하는 과정에서 조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멈춤 없이 굳게 행하면 발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비록 처음의 발심이 약했다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정진해 나갈 때, 낙숫물이 돌을 뚫는 것처럼 마침내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
한량 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장아함경>
5)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로 그 뜻을 표시한다. 불자들은 스님이나 법우를 만나면 합장을 예를 표한다.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모으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합장은 자기 마음의 표현이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서 서로 만났음을 뜻한다.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한다.
절을 하고 합장하는 마음에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매일 108배를 하면,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하게 되어 매사에 성내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공양 전후에 항상 합장하며 “ 이 음식에 깃든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 다른 이에게 해로운 일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공을 할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 불공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고 있기에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푸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실천이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머리를 숙여 합장하고,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을 부처님 공경하듯이 받드는 자세가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불자들이 이런 자세를 취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불씨하나로 수미산처럼 쌓여있는 마른 풀을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불이 세상을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