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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시 왕방로 천주교 춘천교구 포천성당이다.
1990년 옛 포천성당이 화재로 불탄다.그 옛 포천성당 입구에 새로 지은 천주교회 포천성당이다.
이 교회 십자가는 특이하다. 그 십자가 중심에 올리브가지로 둘렀다.
교회 안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홍인 레오 순교자 부자를 모셨다.
그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김대건 신부의 우수뼈를 모시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우수뼈를 모신 곳이다. 우수뼈는 오른 손 뼈라는 뜻이 아니라 남은 우수리에서 따온 우수뼈라고 풀이하고 있다.
순교자 홍교만(洪敎萬) 홍인(洪鏔) 부자(父子)
홍교만(1783-1801)은 자는 도경(道卿)으로 신유박해 순교자 홍인(레오)의 부친이요 정철상(丁哲相, 가롤로)의 장인이다.
정철상은 다산 정약용의 세째 형 정약종의 아들이다. 정약종의 부인과 두 아들 딸 등 다섯 가족이 모두 성인에 오른다.
그는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포천으로 이주해 살던 중 1777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고종사촌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뒤
아들 홍인의 권고로 입교하였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옛 포천성당은 1955년 경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이 군의 원조를 받아 지었다.
1950년대 돌이 흔한 포천에서는 석조건물이 많았다고 한다.포천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지은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다.
이 건물은 고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 건물이다. 이한림장군의 세례명 가브리엘을 딴 '가브리엘 성당'이다.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1990년 실화로 교회가 완전히 불 탔다. 그 불난 창틀의 시커먼 잔해를 그대로 남겨 건물을 복원하였다.
옛 포천성당의 종이다. 1965년 철원성당에서 옮겨온 종이다. 이 종은 철원 근처에서 모은 탄피 다섯가마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홍인(洪鏔) 레오 (1758년~1802년)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그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 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레오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이끌어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부친의 의심을 풀어드리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하여 마침내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레오는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인 레오는 부친과 의논하여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체포되면서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무렵 레오와 부친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바로 그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그들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후 부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으로, 레오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이윽고 레오는 포천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에 앞서 레오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레오도 그 뒤를 이어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문초를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교리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포천경찰서 옆 순교터이다. 이곳은 옛 포천시장터 저자거리로 홍인 레오가 참수당한 곳이다.
"그가 죽은 후에 큰 광채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특히 포졸들은 끊임없이 '참 기이한 일이로다'라고 되뇌었다."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홍인레오에 관한 기록 중에서-
신유년 음력 12월 27일에 홍(인) 레오가 포천에서 참수당하였다.
1801년 박해 때에 그의 이름은 자연히 눈에 띄게 되었고, 얼마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수도 서울로 피신하러 갔다.
그 이후 모면할 어떤 방법도 없음을 보고서 그들은 함께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도중에 그들은 포졸들을 만났고 붙잡혔으며, 그의 아버지가 수도 서울에 인도된 반면 그는 포천으로 끌려갔다.
그는 침착함과 평온함을 온전히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이별만이 그에게 고통스럽고 애절하게 보였다.
그는 3,4일 간격으로 많은 신문들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포졸들의 비난과 욕설도 받아야 했는데,
줄곧 그의 신앙 증거에 단호하였다. 마땅히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신유년 음력 12월 27일에 44세의 나이로 포천에서 참수당하였다.
그의 죽음 후에 기이한 광선이 그의 육신을 감쌌고, 그는 생기를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본 모든 자들과 포졸들조차 그것에 대해 감탄하였다.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530번지 구 군내면사무소 옆 감옥터이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 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사학징의> 중 (사형판결문)-
한국천주교회를 '자습'으로 이끌었던 광암 이벽의 생가와 묘지가 있는 곳을 지도에서 정리한 것이다.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 입구이다. 한국천주교회를 일으킨 광암 이벽의 초장지이다.
'이벽의 무덤을 찾은 것은 이벽이 간 지 195년만이었다. 발견자는 천진암 성역화 위원회를 맡은 바 있는 변기영(卞基榮) 신부였다.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에 있는 공동묘지의묘가 완전히 허물어지기 직전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묘는 이벽의 6대 후손들의 정성으로 천진암 터로 옮겨졌다.
후손들은 해마다 6월 24일 세자 요한 영명축일이면 빠짐없이 천진암에 모여 많은 참배객들과 더불어 이벽 성조 기도문을 합송한다.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지비로우신 섭리로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신묘히 베프시는 천주여..,.,.
세자 요한 광암 이벽 한국천주교 창립 성조로 하여금 불같은 열성으로 주의 진리를 탐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든 이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 불철주야로 전파하시다가, 마침내 거룩하고 장렬한 죽음으로 그 진리를 수호하며 증거하게 하셨으니 그의 기도와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도 필요한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며 우리도 그를 본받아 신앙으로 살다가 신앙을 위하여 용감히 죽을 수 있게
하소서.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아멘'-신봉승 저 <실록대하소설 정조이산>에서
광암 이벽과 그 후손들의 흔적을 찾아오던 경기도 광주 천진암 변기영 신부는 백방으로 꾸준히 노력한다.
1979년 2월 15일 마침내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번지 갓등산 낮은봉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서
195년 동안 잠들던 광암 이벽 묘지를 발견했다. 동시에 같은 곳에서 이벽 성조의 부친 이부만 옹의 묘와
동생 이석의 묘도 함께 발견됐다.
이장이 불가피하고 시급한 처지였으므로 이장 준비위원회를 꾸려 1979년 6월 21일 목요일
주교들과 많은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묘를 발굴하니
“통덕랑 경주 이벽지묘”라는 지석이 한가운데서, "공인 안동권씨지묘"와 "공인해주정씨묘"라는 두 부인들의 지석 좌우편에서
나오고 그들의 유해가 완연하게 나왔다. 당일로 이벽 성조의 유해는 혜화동 성당에 안치됐고 다음날 혜화동 성당에서
이벽 성조의 유해를 새 관에 입관하면서 머리 상투와 치아 23개, 우측 두골 등을 취해 냈으며, 그 유해들은 묘지석,
관조들과 함께 새로 건립될 기념관에 모시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이벽 성조의 유해는 주교좌 명동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즉 24일, 주일이며 동시에 이벽 성조의 영세 본명 축일을 맞아 낮 12시에 그곳 명동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공동 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됐다.
유해는 미사가 끝난 후 즉시 출발해 15일 전부터 구축된 천진암 새 묘지에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30분에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하관 예절을 마쳤다. -한국성지 홈페이지에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3-1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이 태여난 생가터이다.
갓등산을 주산으로 하는 이 생가터는 풍수지리의 명당 조건을 고르게 갖춘 길지(吉地)로 포근해보였다.
이벽이 속한 경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 포천 화현리에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과 그 후손들의 묘를 비롯해 이부만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터가 화현리 643-1 일대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 화현리 643-1 일대 1천여평이 아버지 이부만으로부터
그의 가계가 대대로 살았던 세거지였음이 학계에서 확인한 것이다.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요한 세례자, 1754∼1786)의 출생지와 순교지가 경기도 포천 화현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춘천교구 강원교회사연구소(소장 김주영 신부)가 17일 경기 포천본당 레오회관에서 '광암 이벽과 포천지역 천주교'를 주제로 연
학술 심포지엄에서 서종태(호남교회사연구소) 박사는 "포천 화현리에는 이벽 부친 이부만부터 그의 증손대까지 4대 묘가 들어선
선영이 있다"면서 "또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터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벽의 탄생지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 박사는 "이벽의 탄생지로 경기도 광주 두미와 포천 화현리가 거론되고 있는데, 광주 두미는 이벽이 학문을 닦기 위해 한때 객지살이를 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벽의 부모가 두미에서 살면서 그를 낳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 박사는 또 "지금까지 이벽의 주 활동무대로 알려진 곳은 서울, 광주 천진암, 양근 대감마을 등이었다"면서
"그러나 정학술의 소설 「이벽젼」에서 이벽의 탄생지를 생뚱맞게 포천으로 언급한 것은 실제 탄생지가 포천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박사는 이어 "자식을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이벽의 부친은 그를 고향집으로 불러들여 천주교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 분명하다"면서 "이벽이 가정의 박해를 받아 치명한 곳은 객지살이하던 광주 두미나
서울 수표교 인근 집이 아니라 포천 화현리에 있던 고향집으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2012년 3월 25일 카톨릭평화신문에서-
서울 중구 수표교 근처에 광암 이벽의 집이 있었다.그의 수표교 집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로 알려졌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문중의 심한 압박으로 시달린 아버지 이부만이 집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결국 광암 이벽은 집에서 감금생활을 하다 생을 끝내게 된다. 광암 이벽과는 사돈관계인 다산 정약용과
세째 형 정약종이 광암 이벽의 죽음을 놓고 이야기를 한다. 신봉승 저 <실록대하소설 정조이산>에서
그 대목 일부를 아래에 옮겨 본다.
정약종이 마침내 천주교에의 입교를 결심하고 도성에 나타난 것은 이듬해인 1786년(정조 10) 봄이었다.
그는 아우 정약용 집에 여장을 풀고 이벽과 교통할 기회를 엿보았다.
"광암은 문중의 반대에 부딪혀 문밖 출입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비록 척분이라고 해도 먼저 사장 어른의 허가가 없으면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의 말은 들은 정약종은 맥이 빠지고 말았다.
"광암이라면 문중의 압력을 견디질 못할 사람이 아니질 않는가?..."
"물론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사장 어른께서 자결까지 결행하셨다가 간신히 소생하셨으니....
광암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결까지...."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종문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벽을 회유하지 못했다.
이벽을 달래고 꾸짖고 종아리를 치는 것도 한두 번도 아니였다.의절을 말해도 굽히지 않는
아들의 마음을 천주로부터 돌려놓는 일은 거대한 산을 움직이는 일과 같았다.
"아비된 자가 자식 하나 바로 가르치지 못한다 말인가. 당장 그 못된 놈을 종문들 앞에 끌어내 오렷다.
그 놈의 입으로 천주를 버리겠다는 다짐을 받기 전에는 우리 경주 이씨 일문은 매일같이 문회를 열어
자네들 부자를 규탄할 터인 즉!"
문중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벽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천주의 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아버님,아버님의 미편하신 심기는 헤아리고도 남사오나 소자가 문회에 나가 천주학을 버리라 하오심은
거짓말을 하라는 뜻과 같은 것이옵니다. 거짓을 저지르는 것은 천주의 뜻도 아버님 뜻도 아닐 줄로 아옵니다."
"거짓을 말해도 좋다. 어찌 되었던 문중은 진정시켜야 한다. 어서 문회에 나가 천주학을 버리겠다고 다짐하지 못하겠느냐."
"문회에 나갈 수는 있어도 그 말을 할 수는 없사옵니다."
"이런 못된!"
이부만은 아들 이벽의 뺨을 세차게 후렸다. 회초리는 들 수 있어도 맨손으로 체형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었는데도
이부만의 진노는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숙인 이벽의 양 볼을 눈물이 적시고 있었다. 이부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밖으로 뛰처나갔다. 이벽은 미동도 하지않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노성이 그의 귓전을 다시 때렸다.
"다들 어디 있더냐. 작은사랑으로 갈 것이니라."
그날 이벽의 방에 있던 천주학에 관한 전적들이 남김없이 불태위지고 만다. 어디 전적 뿐이랴.
그처럼 아끼던 마리아상과 성물들도 이부만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루가 되도록 부서졌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저 놈을 한 발짝이라도 집 밖으로 나가게 하고서는 너희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명심하렷다!"
이벽은 썰렁하게 식어버린 작은사랑으로 옮겨지고 하인종속들의 감시를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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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만은 아들이 쓴 자명소를 받아 들고는 온몸을 거칠게 떨었다.
"이, 이 놈이....이 못된 놈이, 끝내 아비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이 아니냐! 좋다.
네 놈이 이 아비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래 죽으면 될터인 즉!"
이부만은 단칼을 빼 들었다. 말릴 겨를도 없었다. 단검은 이부만의 명치를 꽂았다. 피가 솟구쳤다.
천만다행으로 이부만의 자결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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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을 거처에 가두고 모든 몸에 못을 쳐라.그리고 대문 밖에 새끼 줄을 쳐라. 그 놈은 염병을 앓고 있음이니라!"
이벽은 감금된 자신의 처지를 다행으로 여겼다.천주를 향한 신앙심을 스스로 다짐해보는 절호의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끼니를 들이지마라!"
이벽은 단식을 선언했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세로 묵상에 잠겼다.
이벽의 탈진 몸에 흑사병이라는 무서운 병마의 징후가 나타난 것은 단식기도에 든 지 열흘 뒤 부터였다.
이벽은 혼미한 의식 속을 헤매고 있었다.
입술은 마지막 움직임을 보였다.
그 달싹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벽의 모아졌던 두 손이 가슴 밑으로 풀어져 내려졌다.
1786년(정조 10년), 이벽은 그렇게 죽었다.향년 33세로 요절이랄 수도 없었고 순교랄 수도 없는
죽음었다. 그러나 그 죽음 위에, 그 주검 위에 꽃이 피고 있었다.
꽃의 이름은 조선 천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