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2) - 1880년대의 조선
1. 1876년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으로 조선의 근대적인 개방이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은 다른 외국의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은 강대국들의 이권경쟁이 벌어지는 전투장으로 변모하였다. 조선을 어떻게 개화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884년 급진적인 문명개화파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불과 ‘3일 천하’로 끝나게 되며 정변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본으로 도피하거나 죽음을 맞게 된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통해 양국의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만약 출병을 할 때에는 서로 통보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양국은 일시적인 휴전을 선택한 것이다.
2. 조선에 진출한 국가들은 청과 일본 뿐만은 아니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영국 등이 1880년대 조선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외세가 우리의 강토를 강탈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민씨척족 세력은 청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촉진시키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국내적 사정과 프랑스와 러시아의 결탁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청의 사주를 받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야욕이 없음을 러시아로부터 확약받고 영국이 철수했지만, 조선의 국제관계는 복잡해져갔다. 1885년 대원군과 함께 국내에 들어온 청의 원세개는 조선의 총독 역할을 하며 횡포를 부렸고, 고종과 민씨 세력은 미국이나 러시아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려 했다. 조선은 말 그대로 ‘열강의 먹이터’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이때 등장한 것 중 하나가 유길준의 <중립화론>이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 중 국내의 격변을 무시할 수 없어 국내에 잠입하지만, 갑신정변 반역세력과 동조했다는 이유로 약 7년간 구금생활을 한다. 이때 <서유견문>과 <중립화론>을 저술하는 데 ‘중립화론’은 어떤 나라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안정과 독립을 위해서는 중립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립화’는 힘을 갖췄을 때만 가능한 정책이다. 더구나 조선의 집권세력은 이러한 방안에는 관심이 없고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조선의 중립화 시도는 1904년 ‘러일전쟁’ 때 시도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늦은 선택이었다.
4. 1880년대 조선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개신교 세력의 약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선교사의 자격으로 와있던 알렌이 갑신정변에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의 치료에 성공하여 왕의 신임을 차지하게 시작하였으며, 1885년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턴과 같은 젋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이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아펜젤러가 정동제일교회를, 언더우드가 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면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찬송가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삼문출판사>가 만들어지까지 한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선에서의 역할 중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은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설립하였고 그밖에 언더우드는 ‘언더우드 학당’(후에 경신학교)을 엘레즈가 ‘정동여학당’(후에 정신학교)을 통해 젊은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5.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886년 ‘조불조약’을 통해 가톨릭 선교 활동이 자유로워지자 가톨릭 신부들도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참여하면서 두 세력 간의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도 다른 인상을 주었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치스럽고 고급스런 분위기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가톨릭 신부들은 평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겉으로는 초라한 행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치가 포교 활동에 결코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부가 조선민중들에게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옹호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공격한 것은 주로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마리아 숭배를 우상숭배로 공격하였고, 두 번째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신부들이 가졌다는 점이며, 셋째는 ‘신앙고백’을 이유로 여성들과 신부들이 일대일로 만난다는 사실이었다.
6.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것은 가톨릭 세력만은 아니었다. 청의 원세개 또한 선교사들이 제중원과 같은 병원을 통해 민중들의 관심을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888년 일명 ‘영아소동’은 갑작스럽게 침투하고 있는 서양세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움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배후에 ‘청’나라가 있다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영아사건’은 일명 ‘글돌’로 전파되었는데 돌에 글자를 새겨 여기저기 거리에 던져 유언비어를 전파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삶아서 장기들을 약 만드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여기에 지석영이 보급한 ‘종두법’ 치료가 아이들을 소처럼 만든다는 소문 또한 가세하였다. 이에 흥분한 민중들은 선교사들이나 서양인과 관계있는 학교나 병원들을 공격하였고 한성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정부의 포고문 발표와 외국 군대의 무력시위를 통해 약 보름만에 진정되었지만 이 사건은 새로운 문명과 조우하게 된 조선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7. 1880년대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외국 세력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하지만 정부는 민중들의 감정을 안정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부정부패와 착취를 통해 일상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갈 곳을 찾지 못했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으며 대안적인 무엇을 찾아야 했다. 이때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종교’였다. 특히 서양의 종교는 의료와 교육 등을 통해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에 도움을 주고 안정을 주자 많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영아 소동’ 사건 때,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선교사 하인으로 위장취업한 인물이 그들의 행동에 감동하여 목사가 된 사례도 있었다. 이런 점들을 통해 한국에서 기독교 확산의 중요한 원인을 기독교가 대중의 삶에 적극 개입한 점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들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첫댓글 - 역사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