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모태였던 조선시대 유배지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허균은 광해군 3년(1611년) 43세의 나이에 함열(현재의 함라)로 귀양을 떠난다. 시험부정 사건에 연류된 것이다. '광해군 일기' 에는 과거시험관이었던 허균이 조카와 사위를 부당하게 합격시켜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배지 함열은 허균이 자원했다. 당시 함열 현감인 한회일(인조비 인열왕후의 오빠)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 허균은 함열에서 1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옛 글을 정리한 '성소부부고(惺所覆藁)' 64권을 저술했으나 지금은 26권만이 전해진다.'장독을 덮을 정도의 하찮은 책'이라는 겸손한 뜻을 지닌 '성소부부고' 에는 시(詩)·사(辭)·부(賦)·문(文)외에도 '도문대작(屠門大嚼)' 이 실려 있다. '도문대작' 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 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르킨 말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칼럼이 되겠다.
익산시가 국가식품클러스터로 지정된 것은 450년 전에 예견된 일이다. '도문대작' 에는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술·꿀·기름·약밥 등과 서울에서 계절에 따라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에 대한 특징을 소개하고, 먹을거리 절약에 대한 교훈과 자신이 평생 동안 먹었던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담아냄으로써 '맛의 무릉도원' 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대의 미식가였던 허균에게 함열은 최고의 유배지였다. 평야지대의 풍부한 농산물, 인접해있는 서해바다와 금강·만경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 그리고 높고 낮은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만든 음식들이 허균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인 '도문대작' 을 낳았다. 최근 익산 지역이 국가식품클러스터로 지정된 것은 450년 전에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소가 엎드린 모양의 평온한 고을
우리네 선인들은 유배 생활을 하면서 창작의욕을 불태웠던 경우가 많다. 좌절감을 맛봐야하는 유배생활이 오히려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것이다. 학문과 문화예술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일궈낸 이면에는 유배지의 주변 환경이 한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전남 강진, 반계 유형원의 유배지 전북 부안, 고산윤선도 유배지 보길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허균의 유배지 함열도 예외는 아니다. 허균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집중했던 유배지로 알려진 함열은 지금의 함열읍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의 함라면 소재지가 자리 잡고있는 함라마을, 즉 교동·안정·수동·천남·행동·감마마을이 과거의 함열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마을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세 명의 만석꾼이 이웃하며 살았다. 함라마을로 잘 알려진 수동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라 한다. 스님이 팔을 펼치고 있는 형국을 지닌 함라산과 소가 엎드린 모양의 형상을 지닌 와우산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이 지켜준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마을 살림은 풍요롭고 주민들의 근심 또한 적다고 한다. 수동마을은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 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풍수학적으로 '큰 부를 이룰 명당터' 로 알려졌는데 그래서인지 수동마을에는 소문난 부잣집들이 많다. 만석꾼으로 알려진 조해영, 김안균이 이 마을 출생이며 바로 옆에 위치한 천남마을에는 서벽정(棲碧亭)을 주인인 이배원이 살았다. 전국적으로 오직 90여명만이 만석꾼 소리를 듣던 때에 3명의만석꾼이 이웃하며 살았으니 진기록이 아닐 수 없다.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
수동마을엔 이런 부농 가옥을 중심으로 문인과 예술인들이 머물렀으며 그 외에도 많은 식객이 끊이지 않아 매일 풍악이 울리고 육물 다루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근대 최고의 명창 임방울이 '호남가(湖南歌)' 에서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인데~" 라고 읊었던 이유는 그가 자주 조해영 가옥에 머무르며 신세를 지며 춘궁기에 걸인과 식객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식객으로 있었던 집이다. 함열의 인심이 후했음은 당시 신문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1925년 3월 3일자에는 "익산 함열면 사는 양심잇는 부자, 구차한 사람에게 삼천원을 긔부, 걸인으로 성시한 함열, 밥을 구하는 수 백 여명의 동포, 집마다 괴객의 답지로 대번창" 이란 기사가 실려 있고, 1932년 6월 24일자에는 "빈한한 동포 위하야 집중되는 각층의 동정, 백 삼십 여명에 2개월 간 배식가 익산 함열리의 3씨(조해영, 김안균, 이배원)"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인심은 함열" 이라는 말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함열은 현재의 함라임을 증명하는 기사가 된다.
함라마을은 사시사철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누구라도 예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볼만큼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한옥과 돌담길이 알려져 찾아오는 관광객이 심심치 않다고는 하지만 찾는 이들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마을로 접어드는 고샅길은 여전히 고즈넉하다.
함라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함열 향교 대성전' 은 전통마을로서의 품위를 더해주고 있고 세 부잣집과 마을의 농가들이 토석담, 토담, 돌담, 전돌담 등 다양한 담장을 잇대면서 자랑하는 돌담길의 운치는 빼어나다. 함라마을에 돌담길이 늘어선 이유는 아무래도 세 부잣집의 영향이 컸다할 것이다. 이들은 넓은 대지와 많은 건물을 지녔기에 기다란 담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런 담장들이 자연스레 골목길을 형성했을 것이고, 마을 농가들에게도 돌담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마을로 접어드는 고샅길은 고즈넉하다. 함라마을 돌담들은 쌓다가 흙이 모자라면 돌을 더 넣고, 돌이 모자라면 흙을 더 넣는 방식으로 축조된 담장이다. 규격에 맞춰 다듬은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흙을 쌓으면서 무너지지 말라고 돌을 받침으로 넣었기에 모양이 반듯하지만은 않다. 덕수궁 돌담에서는 웅장하고 격리된 느낌을 받는다면 함라마을 돌담에서는 푹 묵은 된장 같은 고향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열두 대문 집' 으로 불렸던 조해영 가옥
함라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집이 조해영 가옥(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이다. 안채와 별채로 둘러싸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뒷담이 없이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어 나그네의 출입이 자유롭다. 건물배치는 남향에 가까운 남서향이며 안채와 별채는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고 안채와 별채는 각각 남쪽과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의 상량문에 '대정 7년' 이 명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별채는 일본식 건축양식을 본떠 만들었다.
집주인이 떠난 자리 나그네가 지나가네. 조해영 가옥은 한때 '열두 대문 집' 이라 불릴 만큼 많은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헐리고 본채와 사랑채 등 몇 개만 남았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쇠락을 맞은 것이다. 과거 영화는 집안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주인이 떠난 쓸쓸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정원에는 스산한기운이 감돈다. 안타까운 생각에 골목길에서 만난 동네 어른 한 분께 빈집으로 두지 말고 체험학습의 장으로 쓰면서 관리하는 것은 어떨지? 물었지만 자손들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지관리와 보전방법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백두산 소나무로 지은 김안균 가옥
조해영 가옥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김안균 가옥(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3호)이 맞붙어 있다. 김안균은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심성이 착하여 길에 쓰러진 스님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보답으로 스님이 정해준 음택에 조상묘를 쓴 후로는 가세가 번창했다고 한다.
김안균 가옥은 대지 2318평에 건평이 188평이나 될 만큼 규모가 커서 토석담과 붉은 벽돌담 길이만 무려 340m에 이른다. 조선 말기의 양반 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둘러 유리문을 달았다. 일본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을 병용한 것이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했고,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세밀하게 살을 짠 '아(亞)' 자 모양의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다가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목수가 지었다. 안채·사랑채·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백두산에서 직접 소나무를 가져다가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목수가 지었다고 전한다.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안균 가옥은 전북지역의 보존 가옥중 규모도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상태지만 한동안 빈집으로 방치되어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손을 타기도 했다. 지금은 대문이 굳게 닫혀 집 구경이 어려워 아쉽다.
원불교 교당이 된 이배원 가옥
수동마을 바로 곁 천남 마을엔 이배원 가옥이 있다. 임피가 고향인 이배원의 부친은 함열에서 누룩장사로 기반을 닦았다. 사업수완이 좋았던 그는 배를 사서 군산과 웅포를 오가면서 장사를 해서 했는데 배에 싣고 온 엽전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배원은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하여 부를 확장했다.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함라마을 세 부잣집 중 가장 먼저인 1917년에 지어진 이배원 가옥도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원형을 잃은 개조되었고 사랑채는 원불교 교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함라마을 특유의 토석담장이 유일하다.
이배원의 큰아들인 이집천은 1920년대에 함열향교 옆 함라산 자락에 경사진 산세를 이용하여 서벽정(棲碧亭) 등 3동의 별장을 지었는데 공간 배치가 뛰어나고 경치가 빼어나 전국적인 승경지로 손꼽혔다. 별장 사진을 담은 엽서가 제작되기도 하고 이리(익산의 옛 이름)에서 서벽정까지 소풍을 왔을 정도였다니 가히 그 규모가 얼마였을지 짐작되고 남음이 있다. 지금은 화려했던 별장의 흔적은 자취를 감추었고, 별장 문으로 쓰이던 돌기둥 4개와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이집천의 손자가 세웠다는 비석만 호젓이 남았다.
자율적인 마을 지킴이 '함라노소(咸羅老所)'
함라마을의 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사드락 사드락 걷다 보면 '함라노소(咸羅老所)' 를 만나게 된다. 300여 년 전인 1682년 7월, 수동마을 노인들이 만들어서 자율적 규율을 바탕으로 마을 대소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노소이다. 쉽게 말하자면 향약(鄕約)이나 동약(洞約)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하면 된다.
고샅길을 사드락 사드락 걷는다. 함라노소에는 매년 정월 15일이 되면 읍강법을 시행했다고 전해진다. 읍강법이란 노소의 승인을 얻은 군수가 상하분별 못하고, 불효하고, 게으른 자를 체포해 벌을 준 것을 말한다. 이날이 다가오면 뒤가 구린 사람들은 자신의 신상이 위급해질 것이 두려워 미리 행방을 감추기도 했다고 하니 불량배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잘 반영된 셈이다.
함라노소 앞마당에는 '함라노소 3백주년 기념비' 가 세워져 있고 왼편에는 경로당 같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진데 반해 오른편의 연못가 정원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단에는 세월이 묻어 나는 배롱나무 한그루와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모를 문·무관석이 자리잡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