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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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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양동시장 / 은미희
黃薔(노란장미) 추천 0 조회 125 07.11.30 13: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양동시장

은미희

 

 삶의 애환이 질펀하게 고여 있는 곳. 살아가는 것이 폼 잡는 다고 폼 잡아 지는 것이 아니라면, 시장은 그 진솔한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겉장이 누렇게 시들어 있는 배추 몇 포기를 들고 나와 지나는 행인을 붙잡는 노인도 있고, 트럭에서 자신의 팔뚝만한 무를 내리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청년도 있고,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수레를 밀며 새벽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짐꾼이 돼주며 사는 노인도 있다.

 

 시장 안에서는 노인도, 청년도, 여자도, 남자도, 다 똑같다. 물건을 파는 이, 물건을 사는 이. 단지 이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떨 때는 이 구분마저 모호하다. 때에 따라서는 파는 이가 사는 이가 되기도 하고, 사는 이가 파는 이가 되기도 할 것이다. 시장은 그렇게 삶이 암죽처럼 물크러져 흘러가는 곳이다.

 

 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가르쳐 주는 곳이 또 시장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이 무엇이든,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든, 시장은 본능적 삶을 따르고, 또 그만큼 가장 순수하고 순박하다. 가장 낮은 포복의 자세로 세상을 향해 그 품을 연 채 사람들의 삶을 보듬어 안는다. 헌데 그 시장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섰다는 말은, 세상이 무간지옥이나 다름없었다는 말과 같다. 

 

 양동시장 노점에서 과일을 펼쳐놓고 지나는 행인들을 붙잡던 한 아주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워매, 워매. 말도 말아. 그랑께. 도청 앞에 가봤더니 얼마나 시체가 많던지. 내 눈이 확 뒤집어지더라니까. 그러고 나서 밥 해날랐제. 어디 그뿐이어? 여기서 바로 코앞인 저 양동파출소. 저 파출소에 학생들이 잡혀 들어가면 우리가 쳐들어가서 잡아간 학생 내놓으라고 난리쳤제. 그렇게 해서 빼낸 학생들이 부지기수야.”

 

 육십을 넘긴 나이에도 아주머니의 음성에는 아직 힘이 짱짱하게 들어있었다. 그때 아주머니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고 했다. 꽃으로 치자면 만개한 꽃이었고, 그만큼 생의 에너지가 넘치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에 서리를 이고 얼굴에 난 주름 또한 균열처럼 깊기만 했다. 바람이 단단하게 여민 옷자락을 헤집고 자꾸만 체온을 뺏어갔지만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낸 이 땅의 어머니답게 아주머니는 바람에 빨갛게 언 볼을 하고서도 춥다 진저리 한번 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먹고사느라 몰랐어. 군인들이 정치를 하든, 누가 정권을 잡든, 어쩌든. 다만 잘 먹고 잘사는 일이 최고였지. 자식들 건강하고. 헌데 어느 날 눈앞에서 내 아들 같은 놈들이 퍽퍽 죽어가는 데 이건 아닌 거라.”

 

 아주머니의 말에 옆에서 튀김을 팔던 몸피 작은 아주머니도 함께 거들었다. 그 아주머니 역시 당시 밥을 하고, 물을 날라다 주었던 시장 상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아주머니들을 80년 5월로 데려가는지 목소리가 조금 전 같지 않게 카랑카랑했다.

 

 “기가 멕혀서 말도 안 나오더라고. 한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삶의 애환이 끈끈이처럼 바닥에 고여 있는 양동시장은 아직 그때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찬란하게 재생되고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듯했다. 불멸의 신화. 몸 여기저기 신산한 삶의 더께들이 묻어있는 이들이 그 신화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양동시장은 호남지역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600여개의 점포에다 하천을 복개해 만든 300여개의 복개상가 점포, 그리고 노점상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양동시장이다. 온갖 푸성귀며, 각종 해산물, 진귀한 약초와 푸짐한 먹거리들…… 이곳에 들어오면 일단 마음부터 풍요롭다. 왕의 식탁이라한들, 이곳에 있는 산물이 다 오를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려해도 사람과 물건들에 발이 걸려 나아가기가 어렵다. 보이는 것은 사람이요, 물건들이다. 이쁜 놈, 미운 놈, 큰 놈, 작은 놈…… 상인들의 가게를 장식하고 있는 물건들도 저마다 다르다.

 

 처음 양동시장이 시장으로써 모습을 갖춘 것은 1940년. 그때는 소전머리, 개전머리, 닭전머리, 옹기전, 배전, 싸전 등이 모여 호남 제일의 상권을 이루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 오면 호남의 먹거리는 물론, 호남의 인심과, 호남의 말씨와, 호남의 풍습을 대할 수 있다. 여느 장터가 그렇겠지만 이곳은 유독 전라도다운 곳이다. 삶과 해학이 얼크러져서는 신명나게 흐르며, 죽음보다 삶이 가까운 곳이 또 이곳이기도 하다.

 

 호남지역의 물가를 좌우한다는 기록처럼 이곳 양동시장은 돈도 흔하고, 인심도 후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5.18당시 아낌없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고, 물건들을 내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밥을 먹이고, 식료품을 나누어주던 이곳 상인들의 활동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5.18 당시 가장 치열하게 공방전이 벌어졌던 도청과 인접해있던 탓에 양동시장은 하루도 최루탄과 화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동시장에 판을 벌려놓고 푸성귀나 과일 등속을 팔던 상인들은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가요보다 바로 옆에서 쨍쨍하게 들려오는 학생들의 구호와 피 끓는 운동가요가 더 친숙하게 들렸고, 그런 탓에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뽕짝보다는 운동 가요였다.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 해 출세시키리라고 모진 마음먹고,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시장 한 곳에 물건 부려놓고 애틋한 품을 팔던 상인들은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이 책보다는 손에 화염병과 돌을 들고 거리로 나와서는 거칠게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며 일진일퇴를 하는 모양을 지켜보는 일은 억장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봄가을 꽃 나들이, 단풍놀이 언감생심 꿈도 못 꾼 채 한 여름 땡볕에 축 늘어진 풀이파리 모양으로, 한겨울 칼바람에 곱사등이 모습으로, 상인들은 자식들 생각에 덥다 춥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세월을 견뎌냈는데, 희망이고 꿈이어야 할 자식들이 공부보다는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해대는 것에 생가슴을 다 앓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공부에는 뜻이 없고 데모만 하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가 공부 잘 해 출세해서 세상을 바꾸면 될 텐데, 몸 상해가면서까지 저럴 게 뭐가 있느냐며 자식단속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었단다. 17일, 학생들과 군인들이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숱하게 부상을 당하자 시장 안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 상한 학생들이 안쓰러워 말렸지만, 하루하루 강도가 심해지는 시위와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자식을 둔 부모로서 몸 아끼지 않고 나서서 싸우는 학생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 한명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장에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일 되자 시내는 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상인들은 벌려놓은 판을 걷지 않았다. 설마 사태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느냐며,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와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학생들이 물 한 잔 달라며 허겁지겁 마시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었단다.

 

  당시 광주시내의 모든 상점과 관공서는 문을 닫은 상태였고, 사방군데서 함성소리와 구호소리만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꺼졌다. 광주는, 반도의 남쪽, 한가하고, 평화롭던 도시는 그렇게 찢겨져가고 있었다.

 

 광주의 젖줄. 양동시장 까지 문을 닫는다면 당장에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유독 양동시장만 장사를 계속했었다. 하지만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들은 사재기는 하지 않았다. 당장에 필요한 것만 사갈 뿐. 같이 나눠먹어야 한다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세까지 보였다.

 

 상황은 상인들의 바람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 너무 끔찍한 이야기들이라 귀가 거짓말을 하는 걸 거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18일, 계엄군이 뒤덮은 시내의 살풍경한 모습에, 병원에 줄줄이 안치된 주검들에 상인들은 눈이 확 뒤집어지더라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하자는 제의도 없이, 그 자리에서 상인들은 돈과 쌀을 갹출하기 시작했다. 천원의 돈은 당시에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내는 손길들이 분주했다. 우수리에, 덤으로, 고객들에게는 인심 후하게 얹어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위해 허리에 찬 전대를 풀 때는 단 돈 몇 십 원도 피처럼 여기던 상인들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아끼지 않고 돈을 내놓았다. 그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서 지나는 학생들과 시민군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본격적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조를 나누어 밥을 하고, 양동이에 물을 받아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함께 운동가요도 부르고, 함께 구호도 외치면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밥을 짓는데 들어간 쌀은 하루에 반 가마. 주먹밥을 싸는 데 필요한 김만 해도 하루에 열 톳이나 들어갔다고 했다. 게다가 밥만 먹으면 그 속이 오죽할까 싶어 아욱 다섯 다발을 가져다가 매일 된장을 풀어 따근따근한 국을 곁들여 냈다.

 

 그때 당시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숱한 말들이 귀를 어지럽혔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밥을 해 나르는 사람들도 나중에 계엄군들에게 다 죽임을 당한 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상인들은 그만둘 수 없었다. 계엄군들이 일단 물러가자 스스로 조를 짜서 도시를 지키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며, 시의 재산을 지키는 시민군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밥을 굶고 목이 마른 사람들을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밥 짓기를 그만두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자식이었고, 동생이었으며, 피붙이였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였고, 한 가족이었다. 학생, 노동자, 상인이 아닌, 그저 우리였고, 한 가족이었다. 그 우리라는 동류의식이 상인들의 가슴에 뜨겁게 만들었다. 그들을 지키지 않으면 광주는, 광주 사람은, 무자비한 계엄군들의 군화발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리라.

 

 처음에는 방앗간에서 밥을 쪄왔지만 그때부터 상인들은 한 상인의 점포 안에서 셔터 문 내리고, 망 봐가면서 밥을 지었다. 셔터가 내려진 문 쪽을 흘금거리며 밥을 푸는 여자들의 손에 힘 있게 들려있는 주걱이 총칼보다 더 비장해보였다. 한 번에 반 가마 씩. 김 열 톳. 당근 넣고 김으로 꽁꽁 싸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주먹밥은 시민군들에게 보내지고, 나머지 밥은 봉고에 실어 시내의 병원들로 보내졌다.

 

 밥을 해가면 전대병원에서는 목발을 짚은 한 젊은 남자가 나와 꼬박꼬박 그 밥을 가져갔다.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들은 목숨을 바치는데, 기껏 밥만 해다 나르는 우리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는디, 가슴이 꽉 멕히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그랬제. 죽지만 말라고. 지발, 죽지 말고 살아 나오라고. 정말이여.”

 

 아주머니는 그 말 끝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가픈 숨을 골랐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눈물로 맺혀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계엄군이 광주를 접수하면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때까지 상인들의 양심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날 한솥밥을 먹은, 한 가족 공동체를 이룬 양동시장 상인들은 하루도 잠잠할 날 없이 이어지던 대학생들의 시위에 지원군으로 참여했다.

 

 양동시장 건너편 양동파출소에 학생이 구금돼 있다는 정보가 날아들면 상인들은 그길로 양동파출소로 쳐들어가 갇혀있는 학생들을 빼오기도 하고,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쫓겨 달아날 때면 몸으로 경찰들을 막아 학생들이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숨 가쁘게 도망가는 학생들을 자신들의 가게로 들여 보호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일까. 지금이야 5.18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돼 다함께 그 정신을 기리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5.18만 되면 광주에는 암운이 깃들었다. 하지만 양동시장 상인들은 매년 5,18만 되면 군부의 철통같은 감시를 뚫고 묘역으로 가 그때 살아 펄펄 뛰던 사람들을 기억해내며 유가족들과 함께 애통해 하기도 했다. 몸빼 바지에 목청이 컬컬하고, 힘든 일에 손마디가 굵은 아주머니들은 목숨도 버린 사람이 있는데, 자신들이 한 일은 그저 밥 해 나른 일밖에 없다고 애써 공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광주의 참뜻이 대동 세상, 하나 되는 세상에 있다면 그 아주머니들이 보여준 사랑 또한 광주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5월 그날이면 금남로에서 김으로 둥글게 싸서 빚은 주먹밥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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