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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위질은 이렇게 이인애 엄마의 엄지와 약지는 사이에서 놀고 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가닥의 힘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낮은 간판 아래 무릎을 꿇는다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하며 집을 나와 미장원 열쇠구멍이나 찾는 엄마 날이 마모된 커트용 가위가 정수리에서 밀려나온 머리카락을 씹는다 언젠가부터 밥알도 질기다던 아버지처럼 잘근잘근 이로 뭉갠 머리카락을 토한다 중심에서 멀어진 것들은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가 다니던 석재공장에서도 돌가루처럼 번져갔던 걸까 남편의 까맣고 윤기 나는 직장을 두 동강 내는 엄마의 가위질을 탓하는 점쟁이 눈 뒤집힌 말들, 미용실 바닥에 쌓인다 가위질하는 두 손가락 사이에서 졸고 있는 검지나 중지보다도 가늘어진 아버지를 자를 때가 왔다는 통보가 왔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다 오던 날 엄마는 가위가 돌아간다고 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구멍에서 빠진다고 아버지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다고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소감] “활자 앞에서만 자유로워…부끄럽지 않도록 노력 △이인애(26) △전북 임실 生 △우석대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감은 눈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근육들이 눈으로 웅크렸다. 나는 엉성하게 꿰맨 구멍처럼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얼굴에서 힘을 뺐다. 그때 시가, 살짝 벌어진 틈으로 들어왔다. 비밀처럼 조금만 벌어진 나의 간격, 눈이 감길 때까지 안으로 걸어왔다. 눈이 더 감기자 속눈썹이 허술하게 눈을 막았다. 나는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티다 부르르 떨리는 눈꺼풀로 시가 말을 걸었다. 첫 옹알이를, 이번에도 엄마를 통해 시작하게 됐다. 부모님이 잠든 후에야 옆구리에 파고들어 안겨봤다. 가족도 아니고 남도 아닌 것처럼 대해왔다. 나에게도 부끄러운 사람이라 그랬다. 활자는 나를 뻔뻔하게 만든다. 그 앞에서만 자유롭다.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더 쓰겠다.
[신년특집 신춘문예 심사평] “서민적 삶의 애환 보편적인 정서로 잘 그려내” 이영춘, 고진하 시인
본심 작품은 300여 편이 넘었다. 작품의 수준도 예년보다 높았다. 우리는 시가 얼만큼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진술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를 눈여겨봤다. 최종 논의된 작품은 김화연의 <사과 벌레가 사과를 기다리는 동안> 외 4편과 이인애의 <가위질은 이렇게> 외 5편이었다. 김화연은 오랜 습작의 연륜이 느껴졌으나 작품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채 시의 밀도가 떨어졌다. 이인애의 작품은 완성도가 높고, 체험을 바탕에 깔면서 서민적 삶의 애환을 보편적 정서로 잘 그려냈다. 젊은 감각과 번뜩이는 사유의 깊이를 내장한 20대 문청의 시를 세상에 내보내는 기쁨을 누렸다. 참신한 시로 정진하길 바란다. |
[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등대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당선 소감 격정의 80년대 초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겠다고 다시 국문과에 진학해 겨우 졸업했으나,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민주화 투쟁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꿈이던 시인은 되지 못하고 자비 출판으로 소설집을 먼저 몇 권 냈다.
내 나이 올해 60, 시인의 꿈을 찾아 응모했는데, 덜컥 당선 소식이 왔다. 섬을 지키며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모습에서 문득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을 떠올리고 쓴 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장에 등대처럼 불을 밝힌 촛불들…. 그 촛불들의 염원대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내 아들, 딸들이 희망을 갖고 노인들이 외롭지 않은 나라가 되길 간절하게 빈다.
그동안 모아둔 시가 백여 편 되니 이제 첫 시집을 내야겠다. 나이 60에 내는 첫 시집이라니! 그런데 누가 이 무명 시인의 시집을 내줄지 걱정이다. 소설집도 그러했지만 또 형제간, 친인척, 동문, 친구들에게 강매(?)라도 해야지, 하고 생각하니 늦은 나이에 문학을 버리지 못한 내 운명이 조금 가소롭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 나이에 불멸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글쓰기란 실패한 삶의 서정적 미화하기란 말에 동의한다. 못난 작품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 유하문 씨 약력 △1958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한국해양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수상 △대전 재수종합반 학원 국어 및 논술 강의 [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이광석 , 배한봉(심사위원)
올해 시 부문에는 경남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를 대변하듯 응모작품의 양이 많았다.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풍성한 응모작품의 양에 비해 작품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소슬 모란’ 외, ‘옷핀, 먼 길을 꿰어 오다’ 외, ‘태풍의 눈’ 외, ‘가새’ 외, ‘등대’ 외, 5명의 시였다. 이 시들을 다시 정독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배종영씨(경기)의 ‘가새’ 외 3편, 유하문씨(경북)의 ‘등대’ 외 8편을 최종 논의하기로 했다. 배종영씨의 ‘가새’는 ‘가위’의 지역말인 ‘가새’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말놀이와 의미의 적절한 거리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무리가 성급해 아쉬움을 남겼다. 단절과 봉합의 상상력 역시 조금 더 활달하게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유하문씨의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란다. 아울러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이광석·배한봉) |
[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디고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인디고: 청색염료. ▶ 당선 소감 . 박은영씨(40) 일흔다섯을 바라보는 아버지, 뒤꼍에서 톱질을 하고 계신다. 이 산 저 산에서 모은 고사목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같은 크기로 토막을 내는 동안 목장갑 낀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고 이내 가쁜 숨을 돌리고……돌이켜보니, 아버지의 그 넓던 어깨가 오그라들도록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불효막심하게 시만 썼구나. 내 시가 화목보일러 숯불보다 뜨겁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가슴을 덥혀 주리라 고집하며, 아궁이에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타버릴 종이를 끌어안고 말이다.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방은 춥지 않느냐는 말로 불쏘시개를 대신하던 아버지, 노송가피 같은 손등과 톱밥 묻은 눈 밑과 근심으로 얼룩진 옷소매가 이제야 보이는 것이다. 당선소식을 듣고, 나 대신 주변 사람들이 울어주었다. 좌골이 닳도록 기도로 밀어주신 엄마, 언제나 소녀 같은 언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오빠, 사랑하는 조카들, 함께 동행해준 기독교시동인님들, 나주안디옥교회 일당백의 성도님들……그리고 나의 아들아! 네가 내 속에서 나와 세상 앞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헤쳐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힘들 땐 하늘을 바라보라는 약속, 잊지 말자. 문을 두드린 지 열두 해다. 소재호 석정문학회 회장님께서 감사하게도 문을 열어주셨다. 앞으로 겨우살이 땔감을 준비하는 노부의 마음으로 시를 써야겠다. 하지만 결코, 추운 이들의 가슴에 군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테를 가졌다는 것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한 장의 시간보다 길게 불꽃을 피워 올려 언 손이라도 녹여줄 시집 한 권을 남겨보리라 다짐해본다. 재능보다 인내를 주신, 가장 낮고 작고 천한 자의 주인인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 심사평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금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는 170여명에 500여 작품이 응모되어 팽팽한 경쟁을 보였다. 신춘문예에 응모되는 작품들은 대개가 작가들의 무한한 문학적 체험과 연마를 거쳐 정제된 산물이어서 이미 시의 품격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번 응모된 작품들 중에서는 시제 ‘인디고’‘그림자는 저체온증’ ‘지렁이 다비식’ ‘필사의 밤’ ‘주홍날개꽃개미’ ‘북해의 공작시간’ 등에 시선이 매우 끌렸다. 모두 시적 체제는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약간씩의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인디고’는 수준이 매우 높아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인디고’는 쪽에서 나온 남색이라 했다. 색깔을 시 제목으로 내거는 자체부터가 이미 범상함을 벗는다. 이 시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절제된 감성으로 주조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어둔 시대를 견인하는 서사적 정경이 오버랩 된다. 블루의 색소가 인상적으로 내비치며 인상파 그림의 구도와 명암이 쉬르리얼리즘의 경역도 넘나든다.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청춘이 선호하는 낡은 청바지…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얼마나 심대한 이미지의 부딪침인가. 현대의 세대가 옛 세대를 끌고 와서 한 시공에 두어 충돌과 융합을 자아낸다. 결기 높은 시이다. 청바지는 낡아서 무릎이 나와야 한다. 이 청바지는 그대로 상징성의 총화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며 이는 또한 시공을 달리한 문화의 충돌이자 혼융이다. 이 때 하의 속 애벌레가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다. 애벌레는 장차 성충이 될 터이다.매미처럼 어둠을 털고 일어나 허물을 벗고 마침내 푸른 미래의 하늘을 날 것이다.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의 시구가 청바지에 얼마나 적확하게 부합하는가.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현대시학 등단 / 완산고등학교 교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석정문학관 관장 역임 / 시집 ‘초승달 한 꼭지’등 다수 / 목정문화상, 성호문학상, 녹색시인상 등 다수 / 현 표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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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당선소감 5년 前 쓴 詩… 이별 통보한 애인이 내 발목 잡은 기분 허기가 졌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구워 먹고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는 사이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화였다.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나보다 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선작은 5년 전에 써놓고 묵혀두었던 시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겨울은 그때였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쁜 남자’였던 그가 발목을 붙잡은 기분이다. 사는 일이 이렇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던가. 시 쓰는 거 힘드니까 그만두라는 말로 매년 위로하던 가족들, 이종섶·조수일·김형미 시인님, 이건수·한철희 목사님…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이분들의 존재 덕분이다. 특히, 나의 아들아! 창문 없는 고시원을 거쳐 이민 가방을 끌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막막했니. 비록 웅크리고 꿈을 꾸지만 볕 들 날이 너에게 오리라 믿는다. 너와 나는 약하지만 언제나 강했다.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무튼 이건 기적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또, 겨울이 가고 그 길로 다시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 나는 시편 같은 봄을 기다릴 것이다.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 심사평 風葬문화라는 구체성 통해 삶과 죽음의 동일성 깨닫게 해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심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이창원의 ‘금요일기’, 홍경나의 ‘먼우물’, 최민주의 ‘그림자 동물원’, 이영란의 ‘짚’, 박은영의 ‘발코니의 시간’ 5편이었다. 이 중에서 피상적이고 관념적이며 감상적인 작품을 먼저 배제하고 나자 ‘짚’과 ‘발코니의 시간’ 2편이 남게 됐다.
‘짚’은 ‘집’이라는 말의 유사성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시다. 짚을 감아줌으로써 감나무는 혹한의 겨울을 견딜 수 있고, 그 짚 속에 기어든 벌레들 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시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나 평이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무에 짚을 감아주는 의미가 모성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무들도 영혼이 있다면/ 저 짚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결구 또한 평이하고 안이하다고 판단돼 결국 ‘발코니의 시간’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난 듯한 기쁨일 것이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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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롤러코스트
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 시·시조 일러스트=김천정
당선소감 詩의 끈 잡고 고마운 이들에게 빚 갚아갈 것 고백하자면 시를 쓰면서 알게 된 사물의 의인성이 두려웠다. 실상과 허상이 손잡고 조곤조곤 말을 걸어올 때 나의 오래된 종교는 슬쩍 나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늘 그랬듯이 신춘으로 보낸 시들의 안부가 틈틈 궁금하긴 했지만 잊은 듯 일상에 바빴다.
그리고 낯선 부재중 번호. 믿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믿음보다 더 힘이 셀 것 같은 시는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은 굴곡진 날들의 중도하차를 결국 용납하지 않았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주 오래 전 딱 이맘 때, 유년의 친구를 만났었다 “나는 돈을 열심히 벌 터이니 너는 시를 열심히 써라.” 산골의 차가운 눈밭에서 내민 하얀 봉투엔 볼펜 사서 쓰라는 따뜻한 정이 몇 장 겹쳐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목적지에 이르려면 어지럽고 멀미나는 롤러코스트를 얼마나 더 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생 시의 끈을 잡고 즐겁게 빚을 갚아 나가리라.
일일이 호명할 수 없이 많은 정겨운 이름들과 시를 쓰면서 왜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 하냐고 묻던 나의 보물 1호 열이, 늦었단 생각 들지 않도록 축제의 장 앞자리로 당겨주신 경상일보와 김재홍, 이영주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 -강원 정선 출생 -5·18 문학상 신인상 -전태일 문학상 수상
심사평 시로 말하기 방법 체득해 보여준 작품
예심을 거친 74편의 시를 공들여 읽었다. 단단한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직 시의 어법을 찾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 그냥 떠오르는 심회를 글로 쓰는 말하기가 아니라 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느낀 소회 중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시는 절실한 표현 의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치는 긴장을 지닌 시적 제재를 찾았을 때를 기다려 글을 써야 한다. 시의 표현 의도가 중층적 암유나 의도적 모호성을 추구한 것일 때에도, 독자가 깊은 혜안으로 접근해 갔을 때 금강석처럼 견고하면서도 빛나는 광휘의 표현 의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가 좋은 시다.
그리고 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 ‘롤러코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롤러코스트’의 작자는 시로 말하기의 방법을 성실히 체득해 보여줬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당면한 위난의 상황을 ‘롤러코스트’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논리를 차용해 보여줬다. ‘롤러코스트’는 궤도열차라고 부르는 놀이 기구다. ‘청룡열차’나 ‘은하열차’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휘돌면서도,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떨어지거나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력’이나 중심으로 빨려 들어오려는 ‘구심력’ 때문이다. ‘롤러코스트’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궤도열차의 운행 방식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롤러코스트’의 시인은 놀이기구에 탑승한 채 자신의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난망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쉼 없이 노력해서 훌륭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끌었던 응모작 중 ‘얼룩말 미싱’ ‘밑돌’ 등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얼룩말 미싱’은 경쾌하고 선연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부연이 눈에 띄었으며, ‘밑돌’은 착상의 새로움이 돋보였으나 공감을 불러내는 힘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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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밀풀 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고은희
1967년 전남 무안 출생. 현 방송작가(KBS'6시 내고향' 등)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
[2018 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쥐 윤여진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당선 소감…윤여진 "시는 나를 짓는 일…도움 준 분들께 감사" 당선 전화를 받고 오래 얼떨떨했습니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같은 길을 돌다, 거리 곳곳에서 엇나간 표정과 몇 가지의 울음을 주웠습니다. 오래된 방에 앉아 하나씩 풀어놓으며 그제야 잃어버린 몸이 내게 걸어오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시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누운 자국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일, 가끔 오래된 방을 두드려보며 나의 안부를 묻는 일이라 추측해볼 뿐입니다. 분명한 건 순간의 나를 믿으며, 주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게 눈을 맞추며 잊히는 것에 이름 붙여줘야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불안의 끝에서 오는 사랑을 이제야 믿습니다. 저는 이제 꿈속에서 잠드는 집을 아주 천천히, 견고하게 쌓아 올리려 합니다. 부끄러움과 겸손함을 힘으로, 내가 나를 짓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 늘 시의 처음에 서서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더 기뻐하며 언제나 내 편인 내 동생 미진, 수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알려주신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울먹였던 습관을 잊지 않고 시를 쓰겠습니다. 내가 만든 인물이 내게 말을 걸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신 곽병창 교수님과 송준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뇌게 해주신 유강희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방학마다 시집 여러 권을 들고 도서관과 바다로, 독한 공부를 떠났던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우들, 안부와 일상을 물을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단 욕심과, 다정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륜 학우들, 집에 가는 길에 늘 온기를 쥐여주셨던 대학원 선생님들, 모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중얼거림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 1995년 충북 음성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송재학·이광호) 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예심을 통해 올라온 것은 20여 명의 작품이었다. 투고작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가감’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시적인 것에 육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시가 될 수 없는 것과의 긴장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작품들을 추려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추일범, 이린아, 윤여진의 작품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 시들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선명한 장단점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의 시적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일범의 「구름의 실족사」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그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공감각이 뛰어났다. 죽은 사람과 조문객 사이를 은유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설득력 있는 감성을 전달했다. 다만 그 차분한 감동은 강렬한 매혹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린아의 「편집증」은 호치키스라는 오브제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열두 명의 이모와 방문을 잠근 다섯 명의 언니”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시적인 언어의 절묘한 돌발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시와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편차가 있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윤여진의 시들에서는 정교한 언어들과 강렬한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인상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고작 가운데 「박쥐」와 「구름 수리공」 모두 수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섬세한 재능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고, 미지의 폭발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
[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율가(栗家) 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2018 신춘문예-시 당선 소감] 펜으로 누군가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이소회
칼을 쓴다는 사람이 한 말 앞에서 오래 숙연해졌다. 말이 말을 낳는 복잡한 상황을 헤쳐나갈 힘이 없다는, 그분의 말 앞에서 오 래 떨었다. 뾰족한 만년필 촉을 자주 들여다봤다. 날카로워서 누군가를 상하게 할 만했다. 그러나 참으로 무력하기도, 한없이 비 겁하기도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스티로폼 판을 들고 앞서 걷는 노인이 휘청휘청 바람에 밀리며 옆으로 걸었다. 나무에 남아있던 은 행잎이 햇살 부서지듯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부끄러운 이름을 우체국 창구에 내밀고 나오던 길이었다. 이제 그만해야 할까, 처 음으로 그런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시작하라는 듯 소식이 왔다. 펜으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살리는 일에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제일 좋겠다는 생 각을 한다. 그것이 더 작고 약한 것이길 바란다. 무력함으로라도 밀고 나가길, 적어도 비겁하지 않길 바란다. '변방은 창조공간'이라는 신영복선생님 말씀도 다시 새긴다. 늘 부족한 제자라 송구하기만 했는데 김재홍 교수님께 제대로 인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시 스승이면서도 시 동무를 자처해주 신 김수우 선생님, 그리고 이선형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함께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이 다. 언제나 가족들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어릴 적부터 유쾌함을, 꾸준한 노력을 몸소 가르쳐주신 부모님, 꼼지락거리며 자기 생을 펼쳐가고 있는 사랑하는 채은, 류원, 생각지 못한 것을 알게 해주는 남편, 모두와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다시 용기를 갖게 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글로 보답하도록 애쓰겠다는 말씀을 올린다. 약력: 1974년생. 본명 이소연.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
[2018 신춘문예-시 심사평] 선명한 주제의식·사물에 대한 섬세한 접근 돋봬 ▲ 강은교(왼쪽), 강영환
올해 응모작들은 사회의식을 갖추거나 삶의 현장감 있는 작품이 드물고 너무 정감적으로 흘러가서 주제의식이 미약한 것 같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초적인 작품들에서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흘러 미학적 성숙도도 많이 떨어지고 상상력의 고갈도 보여준다. 주제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산뜻한 이미지로서 독자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선뜻 눈이 가는 작품이 부족했다. 일반적인 생각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선자들의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선명함을 지닌 당찬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학적이고 투철한 저항 의식을 담는다든가 명료한 이미지를 끌어오지 못함이 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중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냄새가 구석을 살핀다' '달맞이꽃' '탄생비화' '당도' '겨울파밭' '율가' 등은 일반적 범주를 뛰어넘은 수작으로 여겨진다. 이 중에서 '율가'를 당선작으로 미는 힘은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고른 수준이어서 선택에 어렵지가 않았다. 힘든 시의 길에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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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소감]
詩가 준 위로, 나눌 수 있어 기쁘다
박은지
10년 후 내 모습 같은 걸 그려보는 일은 어려웠다. 계획은 늘 틀어졌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꾸 찾아왔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자 는 목표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자주 실패했다.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 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시의 힘을 빌렸다. 시를 읽거나 쓰면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졌고 덜 외로웠다. 시를 써야 내가 ‘나’ 같았고, 가끔은 근 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쓰고 싶었고, 좋은 시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자주 실패했다. 그냥 쓰는 수밖에. 시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쓰 는 수밖에. 그러던 오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0년 후 만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오늘도 내일도 시의 힘을 빌려야지. 이 힘 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엄마 허경숙, 엄마의 사랑으로 제가 살아 있습니다. 행복의 밀도를 높여주는 우리 가족, 특히 조카 박지성 고맙고, 사랑합 니다.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끝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박주택 교수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종회 교수님을 비롯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 프락시스연구 회와 경희문예창작단,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 승원, 은영, 규진 더 많은 밥과 술을 함께합시다. 나의 가장 큰 위로인 의룡,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며 계속 쓰겠습니다.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심사평] 수사 과잉의 피로감 속 간결미 돋보여 심사위원 이문재(왼쪽)· 나희덕(오른쪽) 시인.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명의 작품들에서 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 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규진, 남수우, 장희수, 박은지의 시들은 새로운 어법을 보여 주면서도 나름 대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 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투고자들보다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뢰감을 갖 게 했다.
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 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 지도 않는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견디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그 리드미컬한 힘으로 그는 ‘정말 먼 곳’까지 갈 것이 다. 앞으로 펼쳐질 시적 여정을 기대하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2018 한경 신춘문예] 詩 당선작
새살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 당선 통보를 받고
"휘청거려 두려워도, 늘 詩로 이야기하는 시인 될 것" 나는 너무 작고 약해 번번이 휘청거렸다.
언젠가 끝내 무너져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주 울었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많았다. 못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나를 시에 담고 싶었다. 늘 진심이었다. 이런 나의 진심을 읽고 최고의 날을 선물한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쓰는 마음가짐을 가르쳐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도 감사인사를 드린다. 포기하지 않도록 기다려주고 이끌어주신 모든 선생님께 이 기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와 보폭을 맞춰 옆에서 걸어준 시모임 문우들, 문학을 품은 명지대 학우들, 온 마음을 다해 안아준, 나의 반짝이는 장면들에 함께한 모든 이에게 벅찬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들에게 믿어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보낸다.
나는 아마도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휘청거릴 것이다. 휘청거리다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믿어보려고 한다. 그저 내 자신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기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늘 진심으로.
조윤진 씨는 △199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젊음의 비애가 눈앞에 생생 소박하지만 진실해서 감동적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2018 한경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심사에 들어갔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실감이 사라진 아득한 세계, 점차 희미해지는 너와 나의 존재감, 그것의 기묘한 알레고리화(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 등을 공통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1차 관문을 너끈히 통과한 응모자는 박현주, 박은영, 양은경, 안정호, 전수오, 김보라, 이서연, 전명환, 서주완, 조윤진이다. 뒤의 세 명을 최종 집중토론 대상으로 삼았다. 전명환의 ‘도출한 적 없는 윤리성’은 못을 박다가 벽이 전부 무너져 버린 상황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나 제목이 생경했고, 알레고리의 타점이 불명확했다. 서주완의 ‘인간적인 새들의 즐거움’은 ‘세계는 좀먹은 탁자에 불과했지만/나는 어떤 것도 올려놓지 못했다’는 좋은 구절이 짜임새 있게 변주·확장·의미화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숙고와 토론 끝에 조윤진의 ‘새살’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못다 한 최선’이 ‘잘못’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길 없는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한 상투성을 극복해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심사자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새로운 시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