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이 민생을 둘러보기 위해 평민복을 하고 수원 화성 수원천을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 것이었다.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숙종은 발길을 멈췄다.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 갔다.
"여보게 젊은이,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헌데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이곳에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었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자 적어 젊은이에게 주면서......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젊은이는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달려 가 서찰을 전하였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젊은이에게 당장--- 쌀 삼백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을 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젊은이는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시신을 물에 묻게 한 갈처사를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젊은이가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 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노인네 행색이었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어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물었다.
"나는 한양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젊은이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갈처사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속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졌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 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반말도 못했습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 까요. 마치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임금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했다.
갈처사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렸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으니 앞에 계신 분이 임금임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뭍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릉이 서울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라고한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다.갈처사는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

탑골공원은 서얼 지식인들이 학문과 취미를 논했던 요람이었다.
그 공원에는 국보제2호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다. 그 석탑은 백탑으로 불렸다.
그 백탑주변에 모여 시문을 읊고, 실사구시의 학문을 천착했던 이른바 ‘백탑파’의 발상지였다.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故鄕)을 보랴허고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 제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의 아침안개
영암(靈岩)을 둘러있다...."
이서구가 남긴 그 유명한 호남가의 일부다.
옛날에 선가명류(仙家名流) 갈처사(葛處士)가 있었다.
성도 이름도 남겨진 것이 없다. 칡넝쿨로 옷을 해 입고 산속의 움막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이서구(李書九)가 그 갈처사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수도한다.
이서구가 어렸을 때 갈처사의 움막을 찾아 그에게서 배우는데 처음 약속이 10년간은 가족이 찾아오지 않기로 하였다.
7년 후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성장한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처음 약속을 무시하고 갈처사를 찾아갔다.
아들은 없었고 갈처사만 만나게 되었다.
갈처사는 매우 마땅치 않은 눈치를 내비치지만 아들을 보고 싶었던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니
“곧 올 것이니 만나보시오.”한다.
한참 만에 아들이 나무지게를 지고 오는데 자세히 보니 손은 터지고 얼굴은 야위며 의복은 남루하여
도저히 공부하는 사람으로 안 보인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의 모습이 측은하여 무슨 글을 배우고 있느냐고 물으니,
“통감(通鑑) 2권을 배우는 중입니다.”한다.
어이가 없어진 아버지는 기가 막혀 그만 아들을 데려와 버렸다.
7년에 통감 2권이라면 7년 동안이나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집에 온 후에 아들에게 서고(書庫)에서 독실하게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출타하여 돌아와 보니
아들이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너 어찌 통감 2권의 학력으로 주역을 부드럽게 읽느냐?” 하였더니
아들은 “그저 보고 싶어서 보니 다 알겠나이다.” 한다.
아버지는 갈처사의 깊은 가르침에 놀랐고 아들을 데려온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리하여 갈처사에게 다시 가서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고 아들을 다시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그를 대성(大成)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고 그만해도 우리나라의 명인(名人)은 될 것이오.”
갈처사는 다시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서구와 관련한 유명한 비서(秘書)가 전한다.
하루는 이서구 대감이 글을 써서 봉하여 놓고는 후손들에게 당부했다.
“집안에 위기가 닥치면 고을 원에게 바쳐라. 그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마라.”
세월이 한참 지나서 이서구 대감의 5대 손이 살인을 하고야 말았다.
옛날에는 죄가 가볍든 무겁든 살인을 했으면 그 죄인을 죽이는 법이 있었다.
이서구 대감의 5대 손은 관가에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5대조 할아버지인 이서구 대감이 남긴 글을 고을 원에 보여주게 되었다.
고을 원님은 영의정을 지낸 이서구 대감의 친필을 붙잡고 그냥 펴보지 못하고
예의를 갖추어 동헌 밖의 마당에 채를 치고 또 상을 받쳐 정한수를 받치고 세 번 절을 하고 그것을 개봉했다.
그 때 마침 그 고을 원님이 사는 동헌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결과적으로 글을 보기 위하여 동헌 밖으로 나온 것이 고을 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고을 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글을 읽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향의 명을 구하니, 5대 손의 명을 구해주길 바란다.
네 명을 구해 줬으니 내 오대 손의 명을 구하라.’
이서구 대감이 앞일을 미리 알고 그 글을 남긴 것이다.
첫댓글 오랬만에 안부전합니다.
2020년 경자년에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