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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담당: 2020학년도 고3 송윤성
정신없이 문서 작업을 하다 어느덧 9시가 된 것을 느낀다. 요즘 들어 회사에 늦게까지 남는 일이 잦아졌다. 과거와는 달리 직장인들에 대한 대우가 꽤 좋아져 야근수당도 꼬박꼬박 잘 나온다지만, 본디 저녁이 있는 삶을 원했었기에 지금의 처사에는 꽤나 맘에 안 드는 부분들이 많다. 아직 남은 일들이 많다. 오늘 안에 다 끝내야 하는 작업이라고 과장님은 말씀하셨다. 다만 회사인들에게 하루라는 것은 오전 0시부터 오후 24시까지를 의미하는게 아닌 오늘 출근했을 때부터 다음날 다시 출근하기까지의 시간을 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면 고용부에서 눈치를 주니 집에 가져가서라도 일하라는 부장님의 눈빛으로 하는 무언의 압박을 이제는 안다. 따라서 나는 원가는 1500원도 안되는 주제에 네임밸류값만 더럽게 비싸서 가격만 천장 모르고 드높아진 모 커피 전문점 브랜드의 프라푸치노를 네잔째 빨고는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아마 나만 이런 삶을 살고있는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우리가 한때 한마음으로 드라마 ‘미생’에 열광했음을 모두는 안다. 신입사원 장그래의 성장기와 멋진 상사 이성민 배우님.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걸까. 내 주변에 있는 상사란 작자들은 자기 일은 남한테 떠맏기고 그 공만 가로채가는 것에만 도가 텄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나의 이 한탄 섞인 방백은 반정도는, 아니 사실 전부 일하기 싫어서 나오는 불평이다. 짜증난게 맞다. 빨리 집 가서 소파에 누워 드라마 보고싶고, 늦은 밤 치킨 시켜서 살찌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치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은 10시 반을 넘어가고 있고, 아직도 일은 많이 남았다.
서른둘 나이에 아직까지 꿈을 좇고 있기엔 너무 늦은 것만 같아 어찌저찌 조건만 맞춰서 들어간 첫 번째 회사는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해버렸다. 그 후 청년 고용주들의 기반은 보통 불안정하다는 것을 늦게나마 파악한 나는 나름 꽤 많은 시간의 공을 들여 몇 안 되는 자랑 중 하나인 토익 980점을 필두로 한 이력서를 준비해 명망 있는 기업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들은 신입사원을 뽑지만 경력직을 우대한다고 말했다. 경력이 있으면 신입이 아닌데, 그들의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생각했지만 현실엔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선택을 받는 사람은 내가 아닌 그들이었다.
그리고 몇 군데를 더 찔러봤다가 다 떨어지고, 마지막엔 될 대로 되라 싶어서 대기업에 넣었던 이력서를 그대로 제출했던 것이 이상하게 잘 풀려서, 4개월 간의 인턴 생활을 마치고 채용된 것이 지금의 회사고, 그때 내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현재 내 나이는 서른여섯, 직급은 대리이고 봉급은 만족스럽지 않다. 가족같은 회사라 했는데, 입사해보니깐 집(家)이 사라졌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좀 더 빨리 내 꿈을 찾아 꿈에 몰두할 수 있었더라면 현실은 달라졌을까. 하고 싶은 걸 너무 늦게 알았고, 쫓아가 보려 노력도 해봤지만 시간이 내 발목을 잡았다.
한탄만 하고 있자니 일이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맘 잡고 일해야지, 화면 조정 시간 되기 전에는 집에 가야지’하고 자판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컴퓨터가 죽어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잠시 벙쪄 있는 동안 핸드폰에선 안전안내문자 알림음이 울렸고 내용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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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구청] 아이가 부모와 산책하던 중 놓쳐버린 헬륨 풍선이 고압전선에 접촉하여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곧 복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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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안전안내문자가 늦은 밤에도 오는 거였나, 그 시간에 풍선을 대체 왜 들고 나가는 거냐, 새나라의 어린이답게 잠이나 자지. 그보다 내가 작업하던 파일은 어쩌고, 백업 못했는데...
아무렴 좋아졌기 때문에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아슬아슬하게 버스 막차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정전 덕분이라 하기엔 좀 짜증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고마워 하기로 했다. 나는 사직서를 낼 거고 핸드폰 전원은 미리 꺼놨다. 내일 아마 회사는 꽤 시끄럽겠지만, 나는 이제 그 회사 사람이 아니게 될 테니 팝콘 뜯으며 재밌게 구경만 하면 될꺼다. 애초에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지. 왜 내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맡겨서... 내 인생 진짜 왜 그럴까. 이제 뭐 하면서 살아야 하지, 다시 일을 구할 수 있을까 싶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다시 꿈을 좇아가 보고 싶다. 너무 늦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없었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너무 막연했기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꿈을 쫓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했지만, 현재의 내가 다시 생각하기엔 그렇게 늙은 나이도 아니었구나. 오히려 그때의 나는 마냥 어리기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로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절보다 조금 앞서 내 꿈을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하품인가, 피곤한 건 맞지만 눈물의 짭조름함이 다르다. 잠깐 눈 붙이면 괜찮아 질거야.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조금만 자자..
나는 모르는 사람어깨에 기대어 정신없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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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학생 종점이야 종점... 집에 가야지.”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아마 버스기사 아저씨일거다. 나는 서른여섯인데 아직까지 학생이라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지금 시간이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대체...”
“아, 괜찮아요... 일어날게요.”
나는 부모님과 따로 살고, 따라서 부모님이 내가 늦게 들어온 걸로 걱정하실 이유는 없다. 다만 한가지 위화감은 내 목소리에서 평소와는 다른 앳됨과 풋풋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 꿀잠자서 그런가.
“학생 나도 이제 퇴근해야 해.. 학생! 우리 아들같게 왜이래.”
기사 아저씨의 커진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일어나야겠다 싶었고 버스 앞창에 달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좀 있으면 스포츠 하이라이트 시작하는데, 빨리 가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키고, 무심코 돌아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뭐야, 내가 어려졌어?”
2036년 5월 27일, 자정이 지나서 28일. 내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2화] 개꿈 담당: 2020학년도 고3 장현석
버스가 날 버리고 떠났다.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얌전히 있던 정류장에 내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아침에 봤던 공간과 일치한다. 다만 낮과는 달리 가로등 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주변을 볼 수 없다는 점이 다르다. 가만 보니 다른 건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공간은 같지만 시간과 내가 다르다.
손을 살펴본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 있다. 거칠어져 버린 내 손과 달랐다. 시야를 손에서 손목으로 내려본다. 셔츠를 입고 있다. 정장을 위한 흰색 셔츠가 아닌 회색빛 셔츠. 내 고등학생 시절 교복이다.
“아, 아.”
카페인과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아닌, 좀 더 맑은 목소리가 나온다.
“하아!”
맑은 목소리엔 걸맞지 않은, 인생 다 살아 본 듯한 한숨. 솔직히 말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집으로 향했다. 만약 내가 아닌 타인이 이러는 걸 봤다면 ‘자신의 몸이 젊어졌는데 별생각 없이 집으로 간다고?’ 하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거기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겪은 상태에서 드는 생각은 간단하다. 몸이 어려졌다고 해서, 집으로 가는 일 외에 무엇이 있나. 때문에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자고 싶다.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으나, 카페인 때문인지 제대로 된 잠은 못 잔 것 같다. 정신이 몽롱하고 무겁다.
“이거…”
왠지 겪어본 적 있는 이 느낌의 정체를 확신하기 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뭐?”
갑자기 오른쪽 시야에서 하얀 백구가 튀어나왔고, 뒤를 이어 검은빛 털의 고양이가 줄을 서듯 뒤따르더니
“말이 돼?”
그저 일렬로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며 끝도 없이 줄이 이어졌다. 그저 멍하니 지켜봤다. 흰색과 검은색이 계속해 이어진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끊이질 않는다. 이쪽과 저쪽을 절단해 놓은 듯한 선이다.
“아하”
알았다. 확실히도 알았다. 손으로 볼을 꼬집어 본다. 아프다.
“어?”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렸을 땐 꿈에서 무언가를 먹지 못했다. 먹으려 해도 세상이 거부하는 것처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처럼. 그러나 나이를 먹고선 꿈에서 음식을 먹는 게 가능해졌다. 이것 또한 그렇다. 나이를 먹다 보니 꿈에서도 생생하게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내 눈앞의 흰색과 검은색의 행렬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게 그 루시드 드림, 자각몽이라는 건가 보다.
‘멍!’
‘야옹!’
갑작스레 동물들이 울기 시작했다. 두 가지 울음소리가 겹치더니 이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됐다. 한글로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소리다. 이 소리를 듣고 있기에 너무나 거북해서, 냅다 뛰었다. 눈앞의 멈추지 않는 행렬을 뛰어넘었다.
‘덜컹!’
몸이 흔들리고, 눈을 떴다. 버스 안이다. 개꿈이다. 아니, 고양이…….
“개냥꿈.”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다. 왼쪽의 옆자리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 쓰면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리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다.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환한 낮이다. 자동차, 자건 거를 탄 학생, 걷는 학생들이 스쳐 지나간다.
“맙소사!”
다시 한번 입으로 소릴 낸다. 이번엔 옆자리의 시선을 무시하지 않고 나도 고개를 돌려 직접 눈으로 받아 낸다.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눈을 피해내고 버스 안을 둘러본다. 몇몇은 아니지만, 교복이 많다. 내 옷을 살펴보니,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옷이다. 창가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말이 돼?”
창 너머로 보이는 인도에서 흰색과 검은색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3화] 과거로 온 나 담당: 2020학년도 고3 서재혁
그 길로 버스를 타고 가서 집에 도착해서 씻고 거울을 보았다. 정말 10대의 그 젊은 내가 맞다! 다시 한번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킨로션을 바르고,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일이면 돌아가 있겠지? 그냥 자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10대를 회상해보기도 하였다. ‘만약, 진짜 만약 정말로 10대의 나로 돌아온 것이라면, 내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과 함께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평소처럼 알람 소리와 함께 깬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나의 자취방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내가 살던 경남아파트, 과거의 우리집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실화냐?’
방안을 둘러보던 중, 문밖에서는 10대의 여느 때나 들렸던 엄마의 고함과 아빠의 유튜브 소리가 거실을 채우면서 내 방문을 부술 듯이 두들겼다.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못 이긴 나는 거실로 나가서 계란말이, 그리고 맑은 콩나물국과 밥 반 그릇을 허겁지겁 먹어 치운 후에 씻고 학교로 곧장 향하였다.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10대 시절에 제일 좋아하거나 후회했던 것은 뭐가 있었지?‘
라고 생각하자 내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와 그 동아리에서 내가 짝사랑하던 여자아이, 고은이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문학예술부 친구들과 동아리의 부장, 그리고 고은이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학교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우리 학교 교복과 옆 중학교 교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조심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었더라?”
그러자 그녀는 손목시계를 쓱 한번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4월 17일.”
4월 17일? 이날을 특별히 기억한다. 우리가 동아리를 가입하며 만났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어떤 동아리 들거ㅇ….”
라고 말하는 순간 버스가 학교 앞 정류장에서 멈춰 섰고,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로 교실에 들어와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야, 너는 올해도 문예부 할거지? 우리 문예부 고정멤버잖아~”
라고 연신 말해대는 내 친구들 덕분에 우리는 단체로 문예부에 지원하게 되었다. 4교시가 끝난 후,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우리는 문예부가 활동하는 동아리 2실에 들어갔다. 당연히 우리밖에 없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도중, 동아리방으로 그녀가 들어오는 것이보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놀란 듯 나를 가리키며,
“너도 문예부였어?”
라고 했다. 내가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는 찰나에 우리 담임선생님이자 문예부 선생님이신 박길환 선생님께서 들어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하면서 출석을 부르셨다.
“송윤성, 장현석, 최환석, 서재혁, 박고은..... 박고은? 너는 작년에 우리 동아리가 아니지 않았나? 올해 우리 문예부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네요. 박수~”
그러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그냥요,,,”
라는 대답만 남긴 채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어색하게 첫 동아리가 마무리되고, 나와 그녀는 학교 건너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4화] 추억의 늪 담당: 2020학년도 고3 김한재
나는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거 같이 고은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은이는 내가 계속 쳐다보는 것에 놀란 듯 얼른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왜 그 당시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나중이 돼서야 알게 된 건데 사실 고은이도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지금은 고은이와의 추억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였다.
생각해보니 이 어이없는 상황이 내가 그렇게 바라오고 바라왔던 순간 아닌가?
1분 1초가 너무나도 귀중한 시절이 나에게는 한 번 더 찾아왔으니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웃겨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나는 신체 나이로는 열아홉의 풋풋한 청춘이지만 정신은 이미 사회생활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서른여섯 살 아재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열아홉이라면...
아, 고3이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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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이연우"
"뭘 그리 생각하냐?"
"어, 어... 그게..."
"앗 버스 왔네! 나 먼저 간다. 안녕 낼 보자!"
"그래 내일 봐!"
고은이를 보내고 난 후, 버스가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와... 진짜 추억이다. 가솔린 자동차라니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주변을 삥 둘러보니 2036년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2036년도의 도시의 도로에서는 이렇게 난잡하게 늘어져 있는 차들을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이동 수단으로는 플라잉카(비행 자동차)나 하이퍼루프(초고속 진공튜브 캡슐열차)를 탔기 때문에 도로가 혼잡해지는 경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고, 운전 역시 자율주행이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2020년도 그때 그 시절의 소소한 추억에 잠시 빠지고 싶었다.
더군다나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안 끼고 다니다니... 이때가 너무나도 좋았던 시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2036년도에는 마스크 없이는 도시를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대기오염이 심하고, 맑고 깨끗한 산소를 돈 주고 사 마신다.
산소를 돈 주고 사 마실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 갑자기 고1 때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돈 주고 물을 사 마실 줄은 누가 알았겠니? 물 마시려면 마을에 있는 우물가서 물 떠오고 산에 가서 약수나 떠왔지, 설마 물을 돈 주고 사 마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 선생님 잘 계시나요.
생각해보니 고1 담임선생님은 대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찾아뵙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는데...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매정했다.
나는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지독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하루를 버티고 또 버텨왔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 생각해보니 난 지금 고등학생이니깐 고1 담임선생님도 당연히 쉽게 만날 수 있겠네!'
나는 그만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은 잊어버린 채, 추억에 흠뻑 취하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래, 이왕 젊어진 거 내가 이 시절에 하고 싶었던 것들 마음껏 해보자!'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것 또한 누가 알았을까.
내게 주어진 이 시절은 축복과 기회가 아니라 속죄의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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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설상가상(雪上加霜) 담당: 2020학년도 고3 최환석
pc방에서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면서 기사를 여러 가지 찾아봤다.
‘코로나 확산’ ‘남북 관계 악화’라는 보기 싫은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이미 겪었던 일들이지만 부정적인 생각이 싫어서 잠시 고등학생 시절 감성을 느끼고자 기분전환을 하고자 게임을 시작했다.
모니터 뒷부분의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는 본체, 걸리적거리는 유선 마우스, 주변에 새어 나오는 그때 그 감성의 말들 내가 2020년에 있다는 걸 실감 나게 해주었다.
그렇게 3~4시간이 물 흐르듯이 가버리고 ‘셧다운제’에 의해 컴퓨터가 픽하고 꺼져버렸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편의점에 가자마자 내가 점원에게 건넨 첫마디는,
“저기 말보루 레ㄷ......”
“어서 오세요...... 네..?”
점원의 커진 눈이 내 위아래를 훑는다.
".........?"
".........!"
나는 순간 당황하며 얼른 가게를 뛰쳐 나왔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사려고 했다, 역시 습관은 무서웠다.
점원의 반응이 예상되었다 어떤 미친놈이 교복을 입고 당당히 담배를 주문할까?
몸이 젊어진 지 하루가 지났음에도 30대 아재의 버릇은 아직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하......”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한참 동안 거리에서 배회하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어있었다.
현관문을 슬며시 닫고 집에 조심히 들어왔고 부모님은 먼저 주무신 듯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학교에서 조회시간에서도 퀭한 표정으로 멍때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분위기는 어제와 다르게 어수선했고,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소리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생각을 하면서도 이 느낌은 쉽사리 떨쳐지지가 않았다.
“이연우!!”
갑자기 고은이가 내 뒤통수를 한 대 치면서 말을 걸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뭐라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고은이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나 아저씨처럼 보이냐?”
“갑자기 뭔 개소리야...”
“야 그건 그렇고 6월 모고 준비했냐?”
“..........”
아침부터의 이유 없는 불안감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익숙하지 않은 책상 배치, 칠판에 적힌 시간표, 요란한 친구들
달력을 보니 6월 18일.... 어제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 있다.
아무튼 그렇게 10년 넘게 눈길도 안 주던 모의고사를 풀었고 결과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무리 이미 거쳐봤던 입시제도지만 30대 아재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웠다.
친구들은 답지를 서로 맞춰보며 저마다의 등급을 예상했고
나는 이렇게 또 새로운 충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막상 2020년으로 돌아왔지만 입시에 도움 되는 지식은 잊혀진 지 오래고 기량 또한 현 고3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막막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6화] RETURN 담당: 2020학년도 고2 강대한
모의고사가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고는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에 빠졌다.
채점은 하지 않았다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겠다.
사실 지금 이것을 꿈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던 것이니 말이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지만,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뭘 하던 사람이었지?'
분명 내가 경험해봤던 시간들인데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원래의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아 계신 어머니께 여쭤 보았다.
"지금 이게 현실 인가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섬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저 사람이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곧바로 집을 뛰쳐나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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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눈을 떴어요! 의사 선생님!"
"ㅇㅇ아! 정신이 드니?"
".........."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원이 틀림없었다.
내 앞에는 가족들이 반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물었다.
"내가 왜 병원에 있죠?"
어머니가 답했다
"기억이 안 나니? 네가 타고 있던 버스가 사고가 나 머리를 다쳤다고 하구나"
"아!"
어쩐지 이상했다,
이런 줄 알았더라면 내 학창 시절을 더 즐기다 돌아오는 건데......
그러다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는 고3때 누구보다 열심히 토익 공부를 해 만점에서 10점 빠진 980점을 받기도 했다.
그때의 끈기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끈기도 없이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
나는 어릴 적부터 나만의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라는 장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며칠을 병실에서 요양했다가 '이제 괜찮다'는 의사선생님의 허락으로 퇴원을 했다.
며칠 만에 나선 도시의 거리, 쇼윈도우, 네온사인, 여러 간판들. 현란하다.
저기 저 빌딩 가슴팍에는 커다란 엘이디 전광판도 번쩍이고 있었다.
<당신만의 사업을 지원합니다. 청년사업지원금 장려정책이 당신과 함께 합니다, -노동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7화] 다시 돌아가다 담당: 2020학년도 고2 김민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 기회만 잘 잡으면 인생 역전이다.
머리 속으로 나의 미래에 대한 망상이 빛의 속도로 떠오른다.
오늘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여기가 병원인지 시장인지 모르겠다.
같은 방의 다른 환자들은 끊임없이 손님들이 들어온다. 반면 나는 내가 깨어난 날 부모님이 오시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럴 때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는지 참......
많은 사람들을 피해 공원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병원 밖으로 나오니 기분전환도 되는 거 같고 몸이 힐링 되는 거 같다.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낭비했다. 사업지원에 관한 이메일만 기다리고 있다 빨리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된다면 돈을 많이 벌어서 치료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부도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으휴, 이런 생각 해서 뭐하냐 잠이나 자야지......
내가 잠에서 깨어나고 몇 분 뒤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 저는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오늘 몇 가지 검사만 받고 바로 퇴원할 수 있습니다."
퇴원을 하기 전에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몇 가지 더 받았다.
병원에서 푹 쉬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드디어 병원에서의 퇴원이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집으로 가기 전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좋다.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이 이제 끝이라는 것 때문에 기분이 더 좋은 거 같다.
오오,치킨이다.
정류장 앞에 치킨 가게가 있었다. 오늘은 후라이드가 먹고싶다.
가게에서 치킨을 사서 들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운전석을 보니 저번에 사고가 났을 때 운전하셨던 그 아저씨다. 아저씨는 아무 데도 다친 것 같지 않다.
나는 왜 다친 거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밀린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학생..
학생...
학생 종점이야 종점...... 집에 가야지 학생 일어나!!!
비몽사몽 상태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아마 버스 기사 아저씨일 거다.
어? 어? 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8화] Come back home 담당: 2020학년도 고2 표영대
난 분명 퇴원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 것뿐이었다.
단지 그뿐인데 왜 또다시 과거의 ‘나’로 돌아오고 만 것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찬찬히 생각을 해본다.
제대로 생각하니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제법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없이 운전을 하시는 버스기사 아저씨?만약 기적적으로 별로 안 다쳤다고 해도 큰 사고 직후에 이렇게 바로 운전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까 버스를 타고 아저씨를 알아 보았을 때 대체 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잠에 빠졌던 것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제 정신이었다면 분명히 의심하며 버스를 내리거나 아저씨에게 사실을 따져 물었을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가 내 정신을 희미하게 한 후 나를 과거로 데려오는 게 틀림없다.
신(神)인가? 정말 내가 무엇인가 과거 속에서 바꿔야 하는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후회스런 일들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섣부른 나의 행동으로 미래가 짐작할 수 없게 바뀌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과거를 바꿔 얻은 새로운 미래의 행복이 마냥 행복할 것 같지만은 않았다. 바꾸지 못한 원래 미래가 어느 차원에선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임을 알기에…….
한참을 생각에 잠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과거에 늘 그랬듯이 귀가한 나를 아빠와 엄마가 반겨 주셨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얼마 전에 봐서 그리 반갑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새롭고 가슴이 뭉클했다.
“연우야, 웬 치킨이니?”
“그냥요. 전 먹고 왔으니 두 분이 드세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둘러대며 내 방으로 향했다.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라 오늘밤엔 생각이 무척 복잡할 것 같다. 거실의 소음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다시 피로감이 몰려온다
아침이다. 아직 과거이다. 그러니 학교에 가야지. 준비를 대충 하고 학교로 향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 나를 스쳐 지난다. 어느덧 6교시를 끝내는 종이 울린다. 담임선생님께서 교실에 오셔서 종례 말씀으로 7,8교시가 동아리이니 이동하라고 하신다.
문학예술부실엔 아무도 없다. 내가 1등인가 보다. 하릴 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 보니 고은이가 들어온다. 이름처럼 고운 고은이를 보니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다.
내가 과거에서 바꾼다 해도 미래에 후회 없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일이…….
과거의 ‘나’는 아무리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해도 고은이가 집에서 나를 반겨 주고 밥까지 해준다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그건 상상이었을 뿐, 우리는 미래에 자주 마주치지도 못하는 거의 남남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온 지금 고은이와 잘 지낸다면 미래에 부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렇게 행복회로를 돌리며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그래서 고은이에게 걸어가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꺼낸 한 마디를 꺼내 놓았다.
“저기 우리 내일 데이트할래?”
“……?”
“영화나 보러 갈래?
“좋… 좋아!”
뜬금없는 내 제의에 고은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날 고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2주 동안 새롭게 잡은 약속들도 그 때마다 돌발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만나지도 못했다.
이로써 나는 미래에 관련된 큰일을 바꾸려 하면 무언가의 방해에 의해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내가 과거로 회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날 왜 과거로 돌려보내고 있단 말인가? 의아했다.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면 도대체 왜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런 의구심에 휩싸여 터덜터덜 걷던 중이었다.
“젊은이! 이리로 와 보시게. 우선 돈 좀 조금 줄 수 있겠나?”
길가에 비슴듬히 누운 노숙자 한 사람이 갑자기 구걸해 왔다.
‘에라이!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런 심정으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동전 몇 개를 동냥그릇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그릇에 부딪히는 동전 소리를 들으며 노숙자가 말했다.
“젊은이, 그때나 지금이나 힘든 현실이지만 계속 과거를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분명 원하는 것이 하나씩 미래에 이뤄지게 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지나쳐 걷다가 그 말을 들은 순간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는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추고 공터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한 대 맞은 심정으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그동안 나는 내 현실에 한탄만 하고 실패에 대해 합리화만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병원에서 새로운 진로를 향해 걷자고 결심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긍정적으로 살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이것 때문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나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서는 미래를 밝게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어릴 적의 철부지 바람’이라며 애써 묻어 버리며 외면해 왔던 것이다.
매일 고민만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라는 생각보다 ‘이게 더 나쁘지 않겠어’라는 부정적 판단으로만 내 중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은 이 순간 어린 시절의 순수란 마음을 일깨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숙자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당연한 소리라 여겼겠지만 과거를 다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내 상황을 다 알고 조언해 주는 듯한 소중한 한 마디였다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난 젊은 시절의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듯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서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린 후 그동안 지나쳐 보내곤 했던 그 버스를 다시 타고야 말았다. 나는 뒷자리에 앉자마자 이제 당연하듯 잠을 청했다.
다시 잠든다. 그리고 얼마 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젊은이, 어서 일어나, 종점이야!
역시나…….
스마트폰을 꺼내 보니 미래다. 아니 현재인가? 아무튼 중년의 삶을 살던 그 시간대로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버스기사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게 무슨 변수가 되지는 않을는지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향해 본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9화] Far from home 담당: 2020학년도 고1 지정우
집에 들어가자 나를 반기는 것은 며칠 간 밀려 있던 설거짓거리와 빨랫거리들 뿐이었다.
‘하……, 평소에 집안일 좀 하고 살 걸. 집안일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더라?’
그러고 보니 시간을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나서 현재의 집까지 와 본 적은 없었다. 시간 버스는 항상 과거로 나를 보내곤 했었다. 푹 쉬어버린 그릇 냄새와 퀘퀘한 빨랫감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렇다고 집에 오자마자 집안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뭐부터 해야 하나 뜸을 들이고 있다가보니 문득 저번에 보냈던 사업지원서가 생각났다.
‘오늘이 사업지원 결과 1차 발표일이네, 저번에 지원한 사업지원 결과는 어떻게 됐지?’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노동부 홈페이지로 재빨리 들어갔다.
인적 사항을 입력하고 결과보기를 눌렀더니……
[축하드립니다. 귀하는 2036년 사업지원에 1차 합격되었습니다. 다음 대면 면접은 1주일 뒤 노동부 제 1회의실 오전 10:00에 진행하겠습니다. 9:30까지 도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동부]
‘하……합격했어!’
진짜 합격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흥분도 되었다. 간신히 진정시킨 후 다음 대면 면접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떨리는 마음으로 지내는 동안에 1주일은 금방 지나고 말았다.
드디어 면접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청심환을 하나 먹고 집을 나섰다.
‘후, 드디어 오늘이구나. 지금까지 한 것만 잘하자!’
거리를 걸어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또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잠을 쫓은 덕분인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드디어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번호표를 받고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혹시 면접을 망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때 문득 과거로 돌아간 어느 날 거리의 노숙자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젊은이, 힘든 현실에도 계속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분명 자신이 살면서 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씩 이뤄지게 될 거야’
‘그래 잘 될 거야, 최선을 다 해보자!’
그 노숙자의 말에서 힘을 얻고 차례가 다가오자 들어갈 준비를 했다.
“24번 지원자, 입장하세요.”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면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첫 질문을 받으려는 순간,
‘어? 뭐지?’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창문이 없는 면접장은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순간 어둠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설비실의 정전 사고입니다. 실내에 계신 분들은 비상등을 따라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 왔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당황스러움을 견디며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도 복구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우리를 인솔한 면접 관계자가 미안해 하며 말했다.
“아직 면접을 못 보신 분들은 내일 10:00시까지 같은 장소로 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허무함을 느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휴대전화를 무심코 켜보니 어느 틈엔가 안전안내문자가 수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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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구청] 아이가 부모와 산책하던 중 놓쳐버린 헬륨풍선이 고압전선에 접촉하여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곧 복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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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왜 자꾸 풍선을 들고 다니는지……. 아이가 이번에는 원망스러웠다.
면접에 실패한 탓인지 아침부터 긴장했던 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또다시 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르신……, 종점입니다. 일어나세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버스를 타고 있었으니 아마 버스 기사님의 목소리겠지? 근데 왜 나한테 어르신이라고 하지?’
좌석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갑자기 허리가 아파왔다.
어?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서... 설마 이번엔 미래로 온 것은 아니겠지?
“기사님, 올해가 몇 년인가요?”
헉!
말하면서 내가 놀랐다. 내 목소리가 마치 할아버지처럼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올해는 2070년입니다. 어르신.”
기사님이 무덤덤하게 대답하셨다.
아…….
나는 미래에 있다. 미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0화] 희미해지는 지난 추억 속의 그 길을 담당: 2020학년도 고3 송윤성
2070년의 하늘은 내가 살고 있던 2036년의 하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살짝 숨쉬기가 어려워졌다는 것. 내가 늙은 탓인지 공기가 탁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이번엔 왜 미래로 오게 되었냐는 것이다.
나의 원인 모를 회귀 현상은 항상 2020년과 2036년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었다. 미련이 남는 고교생활에 대해 신이 청산할 기회를 주신 건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나는 아직 과거에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미래로 가다니. 대체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이전까지의 상황은 내가 경험해 본 과거였기 때문에 대략적인 예측이 가능했다. 언제쯤에 시험을 보고, 언제쯤에 동아리에 가입한다. 또 이때쯤이면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다. 미래의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았던 나의 현재와 달리 원하는 일을 해내는 역사를 만들었을까. 나의 행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게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다시 현 상황으로 돌아와서, 노년 나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34년 전과 똑같은 노선, 그리고 똑같은 종점.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버스 노선 하나 바뀌지 않았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지난 몇 달간 수 번의 믿을 수 없는 경험을 반복해왔는데 겨우 이런 사실에 놀란다는 것은 좀 웃긴 말인가.
일단 34년 전, 내가 살던 곳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실 갈만한 곳이 그 외에는 딱히 없었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는 꽤 노후화된 아파트일 텐데, 혹시 재건축 당하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
높은 하늘 아래 건물들이 서 있다. 도미노처럼 따닥따닥 붙어있어 밀면 차례대로 쓰러져 내릴 것 같았던 배치도 여전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긴 여전하구나. 버스 차창을 통해 본 세상엔 내가 아는 시내는 더 없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변함이 없는 나의 집.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세상이 우리 동네에 관심이 없는 걸까.
흐른 날짜의 개수만큼 건물의 세부적인 것들은 꽤 미래적인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아파트 현관은 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건지 유리문 앞에서만 30분은 헤맨 것 같다.
정신은 아직 서른여섯인데, 노인 취급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멋쩍은 웃음과 함께 최대한 인자한 표정으로 애들한테 감사 표시를 했다. 평균 수명은 늘지 않은 것인가? 70대가 아직도 노인 축에 속하다니.
이제는 장식용으로 남아있는 우편함 안에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손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편지에서는 요즘은 쉬이 맡을 수 없는 숲의 냄새가 났다. 어린 고양이와 강아지가 뛰놀고, 새들이 지저귈 것 같은 숲의 향기. 마치 첫 번째로 과거에 돌아갔을 때, 버스 안에서 꿨던 꿈처럼. 끊이지 않는 개와 고양이의 행렬.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지금.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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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씨에게.
안녕하세요 연우씨.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최근 많이 혼란스러우셨죠?
다만 그것이 저희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점만
딱 그 점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 모든 상황은 전부 연우씨가 만든 그림이니까요
연우씨를 70년으로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닌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에요.
연우씨의 고등학교 시절, 당신이 좋아했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연우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마 그분이 어디 계실지는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당신을 과거로 보냈던 이유. 얼마 후 다시 돌아가시겠지만,
그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셨기를 바라요.
당신의 추억을 떠올려보세요.
잊었던 당신의 꿈도.
그 사람들과 연우씨와 연우씨의 친구들과의 관계를.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힌트에요.
...
음, 제가 할 말은 일단 지금은 이게 다에요.
다음에는 직접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마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에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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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왠지 모르게 이 사람을 알 것만 같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 어딘지 모르게 불쌍하고 안쓰러운 사람. 잊혀져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
그리고, 일단 나는 나의 고등학교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왠지 모르게 알 것만 같았으니. 여느 때와 같이 직감적으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1화] 자각 담당: 2020학년도 고3 장현석
정신을 차리니 고등학교 앞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그러나 주변과 비교해보면 위화감이 서린 건물.
“왜…”
왜 이 학교는 변한 것이 없지?
머리가 잠깐 울렁인다. 아니, 가슴인가? 눈앞에 펼쳐진 환경에 인식이 더디다. 말하지 못할 위화감. 그러나 움직이는 다리.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교실의 문 앞.
“어라?”
하고 내뱉는 동시에, 나는 교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교실을 연 직후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이 건네오는 인사.
“안녕?”
나 또한 인사를 건넨다. 그 사람은 싱긋 웃더니, 내게 자리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와 앉으라는, 예의가 담겨 있는 손짓. 다가가니 흰 탁자가 보였다.
“괜찮으시면 드세요.”
자리에 앉아 탁자 위를 바라보니 마카롱과,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따르고 있는 차가 보였다. 어렸을 땐 가격이 비싸 사 먹지 못하던 과자. 가끔 빵집에 들러 기웃거리다, 지갑을 꼭 쥔 채 고개를 저으며 등 돌리게 만들었던 그 과자.
“지금은 먹고 싶다는 기분마저 잊어버렸다만…….”
“네?”
맞은편의 사람이 뭔가 말할 것이 있냐는 듯, 자리에 앉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야, 그보다”
마카롱을 하나 집었다.
“역시, 너였구나.”
“네, 맞습니다.”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손에 들고 홀짝이는 사람. 그 사람이 긍정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나 또한 마카롱을 입에…
“어?”
“네?”
맞은편의 사람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마카롱을 입에 넣을 수가, 입으로 가져가는 행위가 불가능하다.
“마카롱을 먹을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아.”
손에 들고 있는 마카롱을 내려두고, 내 눈앞에 있을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똑바로, 가능한 자세히.
“왜 그러세요?”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게 말이 돼?”
맞은편의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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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들어온 문은 열려 있는 채고, 가득한 책상들, 교실 뒤쪽 흰 탁자와 의자. 다시 맞은편에 있을 사람을 쳐다본다. 그인지도, 그녀인지도 모를 사람. 웃고, 말하는 것은 알겠지만, 표정과 목소리를 보고, 듣지 못한다.
마카롱을 바라본다. 어릴 땐 먹기 힘든 음식, 지금 또한 먹을 수 없는 음식. 마치 자석이 밀어내듯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는…
“이거 꿈이네.”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 생각해보면 두 번째 자각. 정신을 붙잡는다. 이 이상 희망인 척, 기회를 주는 듯한 꿈에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확실시하기 위해, 이상한 점들을 찾는다. 그 오류점을 찾아 확실히 자각하여 더 이상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침 맞은편에 얼굴도, 목소리도 없지만 대화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야.”
“네.”
그저 생각만으로 알고 있다간 또다시 꿈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소리 내어 나 자신을 자각시킨다.
“이거 꿈이지.”
대답이 없다.
“애초에 이상했지. 미래고 현실이고, 고양이와 개부터.”
탁자 위 마카롱을 흘깃 본다. 먹고 싶다. 그러나 먹을 수 없다.
“내 미래에 대한 인식도 오락가락……. 과거에선 공기가 나빠 마스크 없이는 다닐 수 없다더니, 그보다 더 심해져야 할 미래로 오니 공기는 조금 겨우 나빠진 정도라니?”
맞은편의 사람은…아니, 이젠 박고은이다. 말하는 도중 어이없게도 그녀로 변했다. 정확하게는 변한 게 아니라, 그렇게 인식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학교로 오는 과정, 교실 문 앞으로 오는 과정. 기억도 안 나.”
풍경과 동떨어진 학교, 교실 속 흰 탁자.
“어렸을 땐 정말 어린 것처럼, 어른일 땐 정말 어른처럼.”
꿈은 깨어나고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싶게 만든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이성이 간섭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일도 있었고, 황당한 일도 있었다. 꿈이 아니길 바라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꿈은 언젠가 끝난다. 꿈속에서 백 년, 천년이 지나도 언젠간 깨어난다.
때문에 눈앞의 그녀를 보며 말한다. 나이가 몇인데, 이런 애 같은 꿈이나 꾸나 싶어 괴로워하며
“우리 학교 남고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2화] 독립 사건의 연속 담당: 2020학년도 고3 서재혁
나는 우리 학교가 남고라는 사실을 토하듯이 뱉으면서 또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있었을 때는 오전 10시 10분.
부재중 전화 2통과 문자메시지 3건.
메시지의 내용을 보니 면접 미응시에 의한 자동탈락 알림과 면접관들의 전화였다.
마지막 부재중 전화는 8분 전 부장님.
부장님께 죄송하다는 말과 동시에 반차를 내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 생각에 잠겼다.
우리 학교가 남고였다고?
나는 피곤한 몸을 가누면서 졸업앨범을 꺼내서 펴보았다.
분명 앨범에는 나, 윤성이, 현석이, 환석이, 그리고 고은이까지 모두 문예부 단체 사진에 있었다.
나는 바로 윤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 학교 남녀공학 맞지?"
그러자, 윤성이가 당황하며,
"아니, 우리 학교가 남녀공학은 맞았지. 근데 법이 바뀌어서 3학년 1학기까지만 같은 학교였고, 2학기 때는 다른 학교로 쪼개졌잖아."
'헉! 뭐라고?'
윤성이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크게 안도했고 한편으로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내 기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상상인 걸까.
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졌다. 만나서 진실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내 추억의 절반이었다.
"윤성아, 오늘 저녁 시간 어때? 내가 살게."
윤성이는 알았다면서 문예부 친구들을 모으겠다고 했다.
오후 5시 27분.
나는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30대의 영락없는 나였다.
친구들과 만나 설렌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나 빼고 모든 친구가 술잔을 들고 나를 맞이하는 손짓을 하였다.
앞자리에 있던 고은이와 인사를 간단히 나누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만남을 했던 버스정류장부터, 문학작품 전시하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가게 마감 시간이 되어서 나왔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시간은 벌써 10시 34분.
집에 갈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러 가야 했는데 술에 취해있어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같은 방향 버스를 타는 고은이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고은이의 얼굴에서 점점 그 노숙자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노숙자가 나를 앉혀놓고 나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정말 네 인생을 바꾸고 싶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3화] 마지막 꿈 담당: 2020학년도 고3 김한재
"제 인생이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네 인생을 바꿀 수 있어. 보아하니 네 인생 꼴이 말이 아닌데 말이야. 난 네 눈만 봐도 다 안다. 봐라, 꿈과 희망을 잃고 고된 현실에 치이며 사는 거 이젠 지겹지 않니? 네가 동의만 한다면…."
하… 또 시작이다.
꿈일 게 분명하다.
이게 대체 몇 번짼가? 내 눈앞의 대상이 자꾸 바뀌질 않나 이젠 꿈속의 환영에 불과한 무언가가 내 인생을 보란듯이 대놓고 욕하고 있다.
"이봐 아저씨.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도 모르잖아. "
이번엔 고은이도 노숙자도 아닌 웬 꼬맹이 하나가 내게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글쎄요… 알지도 모르겠네요… 아저씨가 원하는 꿈을 좇는 삶?"
뭐야? 이놈 정체가 뭐지?
대체 내가 원하던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귀신? 내가 만들어낸 환영? 그냥 잠시 꾸는 악몽인 걸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녔다.
이제 더는 이런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과거? 짝사랑? 내 어릴 적 꿈? 그래, 다 좋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지긋지긋한 타임 루프와 이를 통해서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이 루프에 가두어놓고 농락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계속 이런 꿈을 꾸게 된다면 언젠가 정신병이 생길 게 뻔하였다.
나는 결국 꼬마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이거 또 꿈이지? 응…? 맞잖아? 말 좀 해봐. 대체…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길래 이런 개 같은 장난을 치는 거야?"
"이건 장난이 아니에요. 당신이 우리와 한 약속일 뿐이죠."
"뭐…뭐라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너 같은 꼬맹이랑 약속을 했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라니?"
"……."
꼬마는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잠시 말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랜 시간... 우리가 기다려온 약속. 이게… 마지막 꿈일 테니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마요. 다만… 당신이 먼 훗날 저지를 작은 실수에 대한 대가... 가여운 당신에게 주어진 속죄의 기회. 곧 모든 걸 알게 될 거예요. 부디 행운이 당신의 편이길 바랄게요."
꼬마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기이한 빛을 내며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어…어…? 잠시만!"
손을 뻗어 꼬마를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꼬마는 사라졌다.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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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난 곳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등교 시간에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놀이터였다.
그래... 난 2020년도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번 꿈은 정말 묘하게 웃겼다.
얄밉지만 어딘가 미소짓게 되는 꿈이랄까나?
아니 그냥 내 처지,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웃기기 그지없다.
"크크킄…하하하하하하하하핳"
아니 이리 어이없을 수가….
그래… 이제 약속을 지키러 가야겠지?
그들이 남긴 두 가지 단서…
하나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는 뭔지 대충 감이 잡혔다.
웬 아이가 풍선을 들고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그래…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렇게 지난 과거를 곰곰 반추하다 떠오른 곳.
바로 옛 우리 집, 경남아파트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뛰어갔다.
딩-동
"아니 연우야? 너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는 거야?"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는 우리 아빠.
그리고 뒤에서 분노의 발걸음으로 다가오시는 우리 엄마.
"이연우, 너 지금 어디 다녀오는 길이니? 전화도 안 받고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보는 우리 엄마 아빠 얼굴…
이땐 이렇게나 젊으셨는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명심하세요.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96시간, 즉 4일입니다. 4일이 지나면 속죄의 기회고 뭐고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존재조차도 말이죠."
하지만 곧 그들이 준 시간은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로 행동으로 돌입하였다.
"죄송해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그 전에 봐야 할 게 있어서요… 잠시만요."
쾅
나는 재빨리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야! 야! 이연우! 쟤가 지금 미쳤나?"
"냅둬요. 우리 연우 중학교 때 너무 조용하다 싶더니 사춘기가 늦게 왔나 봐."
방에 들어가자마자 찾은 것은 내 어릴 적 사진을 모아둔 앨범이었다.
"아 여깄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앨범에서 빼놓은 사진 한 장.
그 사진은 부모님과 어릴 적 내가 놀이동산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에 나는 풍선을 들고 있었다.
"그래… 이 풍선… 이게 첫 번째 단서야."
2006년 10월 19일….
이 날짜로 간다.
어떻게 가냐고?
내겐 마법의 버스가 있으니 걱정 없다.
102번 버스.
그들이 준비한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거다.
그나저나 어떡하냐?
'36살의 나'가 그곳에서 또 고생하고 있을 텐데…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그런 일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이 될 테니까.
후… 이 모든 일이 온전히 내 책임이니…
나라는 놈은 참…
대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저지르고 다닌 거니?
7살의 나… 19살의 나… 36살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인 71살의 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4화] nostalgia 담당: 2020학년도 고3 최환석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버스를 탔다.
내가 버스에 타고 목적지가 어디인지 까먹었을 때 즈음에 몸이 나른해지고 갑자기 졸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오금이 저리고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작고 힘없는 연약한 손의 감촉이 느껴진다.
내 예상대로 2006년 10월 19일 놀이동산으로 돌아온 게 맞는 것 같았다.
근데... 부모님은 어디시지?
잠깐만..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큰 놀이공원에서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공허하고 적막한 느낌 때문에 아까 다짐을 한 내 마음도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보았지만 동굴속에서 외치는 듯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이 하늘이 우중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집채만한 풍선을 들고.
잠시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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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기절했던 건가??
북적이는 인파 소리
이번에는 진짜 놀이공원인가 보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5화] 사건의 시작 담당: 2020학년도 고2 강대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기분.
어릴 적 와보고 나이가 들며 와보지 못한 놀이동산은 옛날과 다른 점이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우글거리는 사람들, 재밌어 보이는 놀이기구들.
오랫동안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온 나에게 놀이동산은 내 인생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활기차고 즐거움 넘치는 곳이었다.
추억에 잠겨있던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봤었던 풍선을 든 사람이었다.
"2006년 10월 19일이 기억나세요?"
"네?"
당연하게도 나는 30년도 넘은 일을 기억할 만큼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30년 전 당신은 이곳에서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끔찍한 일이라뇨?"
"이 풍선을 보고 아무런 생각이 안 나시나요?"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 풍선과 나는 큰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부디 끔찍한 일을 해결해주세요."
그 사람은 나에게 풍선을 주고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연우야!"
30년 전의 부모님이었다.
엄마, 아빠의 모습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주름도 없고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혼자 사라졌던 나를 혼내셨고 배고프지 않냐며 식당으로 데려갔다.
풍선이 어디서 났냐고 물은 아빠에게는 주웠다고 답했다.
밥을 먹은 나와 부모님은 옆에 있던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아마 이것이 내가 봤던 그 사진이었을 것이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 말하고 혼자 밖에 나왔다.
이 사건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시 돌아가려는 그때 발에 무언가가 걸려 넘어져 버렸다.
그런데 풍선이 뭔가에 걸리더니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져버렸다.
곧이어 뭔가가 타는 듯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6화] 좋지 않은 일의 연속 담당: 2020학년도 고2 김민철
처음에는 내가 넘어져서 풍선이 터진 줄 알았더니, 화장실 천장에 날카로운 부분에 터진 것이었다 당황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게 있던 순간, 타는 듯한 냄새가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몰려왔다.
'뭐지?'
소리와 냄새를 따라가 보니 불타는 사진관이 보였다.
'엇? 저기는........ 안 돼!"
나는 부모님을 두고 나왔던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부모님은 없고 사진관이 활활 타버리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놀이동산이 전쟁터가 된 듯 난리가 났고 사람들이 놀이공원 밖으로 대피하였다.
사진관 앞에 청소부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
"저희 부모님이 저를 찾고 있을 거예요."
“…….”
"제발요!"
"얘야, 지금 놀이공원은 위험하니 일단 밖으로 몸을 피하자.
"저기 아저씨, 저희 부모님 좀 찾아주세요. 불이 난 사진관에 계셨어요."
"응? 그래? 지금은 복잡하니 잠시만 기다리렴?"
"네...... "
그렇게 나는 모르는 아저씨에게 이끌려 놀이공원 밖으로 몸을 피했다.
밖으로 나오니 소방차가 놀이공원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경찰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제 안전한 곳에 대피했으니 부모님을 다시 찾아야 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경찰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희 부모님 좀 찾아주세요."
"잠시만 기다리렴"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부모님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래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사고를 생생하게 당하고 보니 혹시나 부모님을 영영 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걱정하고 있으려니 문득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아까 그 기다리라던 경찰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형사님! 일단 이 아이는 경찰서에 데려갈까요?”
김 형사라는 사람은 방화범이라도 찾으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집중해서 소방관들이 불 끄는 현장 주변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잠시 이쪽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야, 일단 경찰서에 가서 부모님의 연락을 기다려보자."
‘어떻게 하지?’
경찰과 같이 간다면 일단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부모님과 만나지 못했으니 현장을 떠나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의 몸으로서는 여기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경찰차에 탔다. 그리고 경찰서로 가는 길에 순찰차 안에서 나는 급격히 힘이 빠지며 다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7화] 친구 담당: 2020학년도 고2 표영대
깨어나니 경찰서에 도착해 있었다.
어서 빨리 부모님 두 분을 다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깨어난 날 보고는 김 형사가 말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곧 있음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불안했다.
오늘 이 사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나에게 약속이니 뭐니 한 사람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고 그 약속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허락받은 4일 중 좀 있으면 이제 벌써 하루가 지나는데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
그때 경찰서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근데...... 아빠는?"
아빠는 근처 병원에 화상으로 입원 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그 병원에 가보니 마침 아빠는 수술 중이셨고 나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과거 2일째.
다음날 나는 다시 병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바로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아빠 병실 앞에는 방화 사건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몰려 있었기에 사람이 너무 많아 못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나와서 병원을 둘러보는데 마침 입구 한편에 김 형사님과 경찰들이 있길래 인사를 하러 갔다.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김형사님과 경찰의 대화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불을 질러?"
"그러게 말이에요......"
그 때 알았다. 저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병실 안에 있는 사람이 방화범이라는 것을.
너무 화가 났지만 경찰들이 알아서 처벌해 줄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병실 옆 의자에 어떤 아이가 닌텐도를 하며 앉아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 게임을 구경했다.
내 또래의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가 게임을 제법 잘했다. 그러다가,
"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의 플레이에 훈수를 두었다.
"응?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여자 아이가 되물어 왔다.
"응, 거기서는 이렇게 해야 해......"
게임에 푹 빠져 얘기하다 보니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어느 틈엔가 오랜 친구가 된 듯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 이제 들어가 봐야해. 그럼 다음에 보자."
그 아이는 자신의 아빠가 아프니 돌봐야 한다고 하며 그 방화범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8화] 실수 만회 담당: 2020학년도 고1 지정우
그 아이가 방화범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충격을 받아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애의 아빠 때문에 우리 아빠가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그 애가 갑자기 미워졌다.
한동안 그렇게 있으려니 갑자기 엄마가 저 멀리 복도에서 불렀다.
“연우야! 거기서 뭐하니?’
“어……어, 갈게 엄마”
엄마와 함께 아빠가 계신 병실에 가자 아빠가 얼굴에 붕대를 한 채 웃으며 나를 반겨주셨다.
“연우 왔니? 연우 보니까 아빠가 힘이 난다.”
“아빠 괜찮아?”
“어, 아빠 괜찮아. 연우가 걱정해준 덕분에 건강한 거 같아.”
아빠와 인사를 나누고 엄마와 집에 가는 길에 침대에 누워 계속 붕대를 한 아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모습과 함께 그 방화범의 딸도 생각나며 더 그 아이가 미워졌다.
그런데 마음속 어딘가에 왠지 그 아이를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찝찝한 느낌을 지우려고 차를 타고 집에 가자마자 잠을 잤다.
다음날 다시 엄마와 함께 아빠의 병문안을 갔다. 아빠와 인사를 하고 화장실을 갔다 오려고 복도를 가던 중 나를 본 그 방화범의 아이가 닌텐도를 들고 나에게 뛰어왔다.
“안녕? 나 여기에서 막혔어. 어떻게 해야 해?
그 아이를 보자마자 내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대답을 해주기가 싫었다.
“몰라. 나 화장실 갈 거야”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니까 그 아이가 화장실 앞 의자에서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쌌어? 나 이거 좀 깨줘. 너무 어렵다.”
“싫어. 나 아빠한테 갈 거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너희 아빠 범죄자잖아!”
“…….”
나도 모르게 화를 내며 말해버렸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도 머리 속에서‘말하면 안 됐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그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닌텐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울면서 복도를 뛰어갔다.
그 아이가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하며 아파왔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내가 왜 이 과거로 왔는지……
내 기억으로는 과거에 내가 이 말을 하고 몇 달 뒤 TV뉴스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그 아이의 아빠가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봤다.
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이 나자 당장 바닥에 떨어진 닌텐도를 주워서 그 아이의 아빠가 있는 병실로 뛰어갔다.
병실에 들어가자 그 아이는 자기 아빠 옆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미안해. 내가 실수로 잘못 말했어. 진짜 내가 미안해.”
그 아이가 훌쩍이며 말했다.
“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미안해. 내가 이 게임 깨 줄게”
“알았어”
아이의 아빠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다시 친해졌다.
그리고 실수를 만회했다는 확신이 들자 다시 현실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버스 타고 집에 가자.”
“응? 왜?”
“갑자기 버스 타고 싶어졌어. 버스 타자~ 버스~”
그렇게 다시 현실로 가는 버스에 탔다. 좌석에 앉자 이제는 익숙하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제19화] Let it snow 담당: 2020학년도 고3 송윤성
버스가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 몽롱한 기분 탓에 창밖이 밤하늘인지 터널의 벽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익숙한 퇴근길이다. 꽉 막히는 네거리를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 외곽에 있는 나의 조그마한 공간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가끔 고향이 그리워질 때면 추억이 묻은 모교와 놀이동산을 떠올리고는 한다. 길어봤자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인천인데 유난 떨지 말라고 몇몇 친구들은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너무 가까워서 가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거리가 멀지 않아서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과거의 나를 마주 볼 자신이 없다.
서울은 꿈에 도전할 기회를 주는 도시였다. 대한민국 인구 천 만이 모여 사는 도시. 어딜 가서나 나름대로 인정받는 학력의 기준은 대학교 인서울이었고, 그 중심과 점점 멀어질수록 나 또한 점점 우울해져만 갔다. 누군가는 말한다. 학력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맨 밑바닥에서 노력을 통해 꿈을 이룬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보편적인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 되지 않는다. 그들의 성공담이 널리 퍼지게 된 건 아마 그들이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나도 한때 그런 이야기를 믿었던 적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노력하면 정말로 무언가 되긴 되더라. 하지만 서울과의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내 꿈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상상했던 나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버렸다.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다. 고등학교 시절 흐지부지 되어 버린 연애담과 약속의 정체. 놀이공원에서의 화재 사건. 기억들이 희뿌연 연기처럼 눈 앞을 가린다. 숨이 막혀온다. 신은 왜 나를 과거로 보냈고, 미래를 경험하게 했을까. 비단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비극으로 끝날 이야기였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기이한 여행이 시작된 이상 신과 나에겐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어야 할 책임이 있다.
마침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하얀 먼지 같은 알갱이들이 허공에 나풀거린다. 신호등의 빨간 불이 눈앞을 불태운다. 오늘따라 유독 훤하게 번지는 붉은 빛. 그 앞을 유영하는 희고 자그마한 알갱이들. 하늘 위로 떠오르는 풍선. 내 손에 들려있던, 얼마 지나지 않나 터질 것만 같았던 그 풍선. 어느새 하얗게 물들어버린 거리. 빙판길을 미끄러지듯 도망쳐 나오던 그 아이의 모습과 병원의 새하얀 벽면. 불타는 놀이공원, 떠오르는 재와 연기,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
다시 만났을 땐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까. 조금 더 친해지고 싶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예상치 못한 일로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갑자기 남고가 되어버린 우리 학교. 헤어지기 전에 미리 찍어두었던 단체 사진으로 대신한 졸업앨범 사진. 나는 고은이를 떠올린다. 병원에서 함께 게임을 하며 나눴었던 대화. 내 꿈은 포켓몬 마스터라며 당차게 말했었던 그 때. 실없는 얘기들만 해도 좋았던 시간.
학창 시절의 나는 시나리오 라이터를 꿈꿨다. 예전처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과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과거의 좋은 기억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묻어둔 채로 살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다시 들춰내고야 말았다.
나는 지하철역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후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 고은이가 있을 것 같았다.
삼십 대의 나이, 서로의 인생은 처음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을지도 모른다. 고은이는 인천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의 장난을 믿는다. 아까도 말했듯 글을 쓰는 사람은 결말을 지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니까. 막상 만나면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까.
지하철에서 내린 후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 오늘처럼 졸업식 날에도 눈이 내렸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 탓에 눈이 쌓일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새하얗다.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걸음마다 오래된 생각이 묻는다. 이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던 중 앞에서 약간 급해 보이는 걸음의 여자가 등장한다. 두 손에는 짐을 가득 든 채로 눈발을 헤치며 뛰어온다. 새하얀 거리 위에 새하얀 입김이 일렁이고 서로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간다. 좁은 인도 위 나는 최대한 피해보려 노력했지만 부딪치고 말았다. 거리 위로 그녀의 짐들이 흩날리고 물건을 주워주려 허리를 굽힌 순간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서로의 손이 차가운 바닥 위에서 맞닿고 서로가 화들짝 놀라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오래전 졸업식 날처럼 학교를 떠나오는 길이었다. 잠시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수없이 오갔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모든 여행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차례이다. 내게 더 이상의 과거는 없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억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너는 내게 물건을 주워줘서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다시 급하게 거리를 걸어 떠나간다.
나는 멀어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오래전 약속의 말을 되뇌인다. 하늘에선 여전히 눈이 내린다. 손등에 차갑게 눈 알갱이가 와 닿는다. 차가움과 뜨거움은 같은 종류의 통각이라던 뉴스 기사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 꿈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삶이 힘들어질 때면 떠올릴 것이다. 어느 겨울보다 차갑고 또 뜨거웠던 오늘의 기억을.
- 종결(終結) -
위 작품의 판권은 인천대건고등학교 문학예술부에게 있습니다.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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